선교사열전 ⑪
호남지방 복음의 아버지 레이놀즈(William D. Reynolds 1867~1951)
미남장로교 개척 선교사, 호남지방 복음의 아버지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William Davis Reynolds, 이눌서, 李訥瑞)는 미국 남장로교회에서 파송된 선교사·성서 번역가·교육자·신학자다. 한국 이름은 이눌서(李訥瑞)다. 미국 남장로교회(PCUS;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소속의 선교사로 1894년 조선에 들어온 이후, 호남지역의 교회와 학교를 통해 선교활동을 하였고, 1910년에 출판된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의 번역작업을 주도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1917년부터 1937년까지 어학교사 및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기독교신학연구지인 '신학지남(神學指南)'의 편집인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1937년 은퇴하여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부산경남 복음화에 호주장로교 선교부, 대구경북 복음화에 미 북장로교 선교부가 있었다면 호남지방 복음화에는 미 남장로교 선교부가 준비됐다.
윌리암 레이놀즈 선교사는 남장로교 개척 선교사 7인 중 한 사람으로 방한 호남지역 복음화의 아버지로 불리며, 특별히 성경번역에 헌신하여 사역했다.
하나님의 부르심, 언더우드와 윤치호의 도전
레이놀즈는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 노포크의 기독교인 집안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7년 6월 햄든시드니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레이놀즈는 언어에 대한 재능을 살려 고전 언어 분야의 교수가 되기 위해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대학 라틴-그리스-산스크리트어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러나 부친의 사업 부진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남장로교의 신학교인 유니언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게 됐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따로 있었다. 1892년 5월 같은 선교 비전을 가진 볼링과 결혼하고 한국에 왔다. 그가 한국 선교에 나선 동기는 1891년 10월 열린 해외선교를 위한 신학교 동맹 The Inter-Seninary Alliance for Missions에서 선교사 언더우드와 한국인 강사 윤치호를 만난 것. 이날 ‘한국에 선교사가 절실하다’는 말에 한국을 품고 선교를 지원했다.
그러나 미 남장로교에서는 배정된 재정이 없다는 이유로 선교사의 한국행을 거절하다가 언더우드 일가의 재정지원으로 한국 파송이 결정됐다.
이렇게 하여 1892년 11월 레이놀즈 부부를 포함한 전킨과 부인 레이번, 테이트 선교사와 그의 여동생 메티, 데이비스 등 7인 선교사가 한국에 왔다. 이 때 도착한 선교사들을 ‘남장로교 개척자 7인’으로 불린다.
1894년 4월 18일 레이놀즈 선교사가 목포에 도착했다.
한국에 도착한 미국 남장로교회 소속 선교사 7인
호남 최초 교회를 세우다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에서 호남지방을 남장로교가 담당토록 결정하면서 레이놀즈는 1894년 3월부터 의료선교사 드류와 함께 호남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먼저 군산항에 도착하여 전도를 하였고, 이어서 전주, 김제, 영광, 함평, 무안, 남해, 순천 등 전라도 남부지방을 순회했다.
고흥에도 복음을 전하여 첫 신자 신우구(한의사)에게 세례를 주었고 1906년 교회가 설립됐다. 훗날 신우구 아들 신상휴와 서서평 선교사의 수양 딸 곽애례가 혼인하여 기독교 가정이 탄생했다.
레이놀즈는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열정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한국에 적응하고 선교기지 개척을 위하여 모든 한국 고유명사를 한글로 기록 했을 뿐 아니라, 국영문 혼용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글을 많이 사용하여 기록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서울에서 성경번역 사업에 헌신하다 전주에 발령을 받고, 1897년 6월 전주로 이사하여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전주서문교회는 호남지역 최초 교회로 1893년 6월 레이놀즈의 조사 정해원이 남장로교 선교회의 요청으로 예배 장소를 마련하면서 교회가 시작됐다.
호남 최초로 설립된 전주서문교회
동학혁명으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1894년부터 테이트가 전주에 거주하면서 사역을 전개하고 이후 레이놀즈가 부임하여 교회를 성장시켰다.
그는 장터와 거리 전도를 통해 복음을 전했다. 이때 남자 2명과 여자 3명에게 각각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들이 전주 서문교회 첫 세례자들이다.
레이놀즈는 교회 내 사경반을 만들어 성경을 가르치고 성도들이 자체적으로 전도하도록 했다. 또한 1900년 전주 신흥학교를 설립했다.
한글 성경 번역 공헌
1901년 안식년을 다녀온 후 목포를 선교지로 배정받아 목포지역 사역하면서 성경 번역일도 감당했다. 그러나 1902년 아펜젤러의 갑작스런 순교로 인해 구약성경 번역을 전담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왔다.
이후 서울에서 승동교회에서 4년간 사역하고 이어서 연동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했다. 교단을 뛰어넘어 헌신한 것이다. 그 후 한글 성서번역이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서울을 떠나 다시 호남지방의 복음화를 위해 활동했다.
군산에서 1908년 1월 군산 영명학교 설립했다. 그러나 전주를 담당하던 동료 선교사 전킨이 소천하여 그해 2월 전주에 와서 기존에 사역했던 전주 서문교회 4대 목사로 인근 지방교회를 섬겼다. 이때 전주 서북쪽 외곽 지역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였고 지역 교회가 크게 성장하도록 도왔다.
레이놀즈는 1895년 10월 조선상임성서실행위원회 산하 공인번역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에 들어온지 3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레이놀즈에게 중책을 맡기는 것을 반대하는 아펜젤러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번역위원으로 활동하였스며, 오히려 아펜젤러의 마태복음 번역의 오류를 수정하는 제안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뛰어난 언어적 능력으로 한글 성서번역 사업에 많은 공헌했다. 특히 그는 게일과 함께 한글 성경 번역을 끝까지 마무리했다.
레이놀즈는 1910년 4월 2일 오후 5시, 구약의 마지막 구절 번역을 마치고 서울에 있는 영국성서공회 소속 휴 밀러(Hugh Miller)에게 전보를 통해 '번역다됐소'라는 전보를 보냈다. 이는 최초의 구약전체를 한글로 번역한 것으로 게일과 언더우드가 참여한 예레미야서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을 레이놀즈가 번역한 것으로 사실상 개인 번역과 다름없다는 평이 있다.
1906년 한글 신약성경 공인역을 완성하였고, 그 후 구약성경 번역도 진행하여 1910년 4월 완성했다. 레이놀즈가 번역한 <구약전서>는 1911년 3월에 요코하마에서 3만부 인쇄되어 반포되었다.
1911년 ‘한글 성경전서’가 인쇄됨으로 10년 이상 소요하며 한글 신구약 성경전서를 완성한 그의 공로는 대단한 것이다. 또한 그는 한영사전도 편찬했다.
레이놀즈가의 대를 이은 사랑
1937년 레이놀즈는 45년을 헌신한 한국을 떠나 70세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51년 미국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현재 한국 양화진에는 유아시절 사망한 첫 아들과 한국을 사랑한 둘째 아들 존 볼링 레이놀즈가 양화진에 안장되어 있다.
존 레이놀즈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미국에 가서 공부한 후 1920년 남장로교 교육 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왔다. 순천, 광주, 전주 신흥학교 에서 교사로 활동하다 1930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레이놀즈 선교사의 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