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독교와 '팔꿈치 사회'…[서평] 강수돌 <팔꿈치 사회>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경쟁 강박이다. 이를테면 오디션 프로그램이 텔레비전의 예능 프로그램을 점유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음악 영역이다. 일단 아마추어는 '슈퍼스타K'나 'K-pop스타', '위대한 탄생' 등을 통해 가수로 들어서고자 고투한다(이 흐름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 했던 MBC 대학 가요제는 결국 36회(2012년)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물론 프로 가수들 또한 경쟁을 통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 임재범이 최고 수혜자라 할 수 있는 '나는 가수다'를 생각해 보라.
허나 정말 징후적인 것은 슈(퍼)스(타)케(이)를 통해 등용된 허각이 다시 '불후의 명곡'에서 다른 전문 가수들과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경쟁을 진행 방식으로 삼은 것은 하나 둘이 아니다. 개그('코미디 빅 리그'), 연애('짝'), 성형('렛미인'), 취업('스카우트'), 댄스('댄싱9'), 요리('마스터 셰프 코리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앞 다투어 경쟁 방식으로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도대체 왜 경쟁을 소재로 하는 프로그램이 범람하는가?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경쟁 범람 현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때마침 이에 맞춤한 책이 한 권 출간되었다. 고려대학교 세종 캠퍼스 경영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강수돌 교수가 집필한 <팔꿈치 사회>(갈라파고스, 2013)이다. 이 제목은 옆에 있는 경쟁자를 팔꿈치로 치며 제압하는 극도의 경쟁 사회를 가리킨다. 지극히 '새누리당스러운' 표지 색상을 자랑하는 이 책은 일찍이 출간된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생각의나무, 2008)의 확대 개정판이다. 원래의 제목을 여기에서는 부제로 돌렸는데, 이는 설명(경쟁의 내면화라고 하는 기제)보다 묘사(팔꿈치로 찍기라고 하는 그림)의 방식을 통해 좀 더 강하게 경쟁 사회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원했기 때문일 게다. 사실 독일적 맥락에서 연원한 이 제목(Ellenbogengesellschaft)이 바로 우리에게 와 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메시지 자체는 분명하다.
경쟁의 내면화
강수돌 교수는 이 개정판을 '경쟁' 특히 '자본주의 경쟁' 문제에 관한 한 일종의 국민 교과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펴냈다(10쪽). 즉 '팔꿈치 사회'를 한국 사회에서의 경쟁 문제에 대한 시민의 비판적 인식 형성을 위한 교본으로 제공하려는 것이 저자의 의도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아는 시장 경쟁이란 기득권이 되기 위한 경쟁이며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의 적대적 경쟁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이를 당연시하고 이것 외에는 삶의 대안이 없다며 그런 논리를 굳게 내면화한다는 점이다(6쪽)." 그렇다. 내면화가 문제인 것이다. 초판에서부터 일관되게 저자는 '경쟁의 내면화' 문제를 부각해 왔다(9쪽).
그렇다면 이렇게 현대인이 경쟁을 내면화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하면, 두려움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생존의 두려움 앞에서 경쟁을 내면화하고 만다(19쪽)." 사실 이러한 진단은 매우 적확한 것이다. 두려움이 마치 직소 퍼즐의 비어 있는 한 칸처럼 현대인의 삶을 움직이게 만드는 근간이 되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것은 신약성서에 비추어 봐도 정당하다. 알다시피 요한 기자(記者)는 자신의 첫 번째 서한을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근간을 형성하는 기본 감정을 두 가지로 제시한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
사랑이냐 두려움이냐
물론 세상에 속한 이들은 세상을 두려워하는 동시에 세상을 사랑한다. 허나 이 사랑은 성서가 말하는 자기 비움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자기 확대로서의 욕망에 해당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유지를 지향한다(이것이 바로 아도르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말하는, -'자기 보존'이라고 하는- 이성의 근본 원리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결국 이들은 사랑하기보다 집착하며, 존재를 지향하기보다 소유에 집착한다. 그 본질에는 두려움이 있다. 하나님 안에 뿌리 내리지 않고, 홀로 서 있기 때문에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니 당연히 이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된다.
지금은 그 두려움의 강도가 유달리 극심하다. 현대인은 전에 없는 정도로 강력하게 이 세상의 노예가 되었다. 이 세상의 신(神) 혹은 지배 집단(권력과 기업으로 대표되는 자본, 53쪽)은 우리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경쟁의 복음을 설파하고 있다. "경쟁이란 자본의 지배를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경쟁과 지배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55쪽)." 경쟁이라고 하는 잔혹한 경제적 범주의 질서를 윤리적 범주의 질서로 왜곡하고 있다. 경쟁의 문화를 제2의 자연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물론 경쟁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가령 승패와 무관하게 모두 즐거움을 추구하는, 초등학생들의 놀이 경쟁은 어떤가? 그건 좋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경쟁은 승자가 패자의 몫까지 가져가는 생존 경쟁이다. 다시 말해 내가 살기 위해 네가 죽어야 하는 적대적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영혼까지 노동하는 지경(<노동하는 영혼>)에 이르게 되었고, 이제 사회 전반을 극렬한 피로(<피로 사회>)와 불안(<불안 증폭 사회>)이 지배하게 되었다. 피로가 영혼에 스며들고,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경쟁의 선봉, 승자 독식 교회
강수돌 교수는 교육과 기업 등의 사회 전반에 걸친 경쟁 강박의 현실을 차분하게 풀어 가고 있다. 내가 판단하기에 이러한 상황은 교회 안에서도 재현되고 있다. 교회 자체를 지배하고 있는 양극화 현상에 대해서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갈수록 중형 교회는 줄어들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극소수의 대형 교회와 절대 다수의 소형 교회이다. 물론 대형 교회는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승자 독식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게 교회인가? 애초에 사회가 그러하니(<승자 독식 사회>) 교회 또한 그리된 것인데, 이게 말이 되는가? 원래는 교회가 사회를 변혁해야 옳은 것인데, 지금은 거꾸로 되었다. 아니, 교회가 타락한 세상의 아방가르드가 된 것이 현실인 것이다. 하여 사회가 나아가고 있는 잘못된 방향으로 더욱 열렬하게 이끌어 가는 견인차 노릇을 하고 있다. 시청 앞으로 달려가서 외신 기자들을 의식하며 영어로 기도하는 것은 그중에 가장 눈에 잘 드러나는 현상일 따름이다.
물론 애초에 한국의 교회는 미국의 영향을 받아 경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미국 종교 시장에서의 승자와 패자>). 경쟁은 욕망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한다. 그렇기에 교회 주보 전면에 실린 그림이 실제 예배당과 달리 거대 사이즈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오늘은 초라한 개척교회의 담임이라 할지라도, 내일인 화려한 메가처치의 CEO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오롯이 담아 놓는다. 지금에 와서는 그 욕망의 정도가 심해졌다. 위에서 말했듯이 교회가 사회 현실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교회의 양극화다. 양극화 현상에 견제를 해야 마땅할 교회가 외려 적극적으로 견인(牽引)을 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경쟁에서 사랑으로
저자 강수돌 교수는 경쟁 대신에 사랑을 내세운다. 경쟁을 지배하는 불안 대신에 협동을 지향하는 사랑을 그는 설파한다. 이 진보적인 학자의 소박한 충고가 한국교회에도 절실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예언자가 타락하면 나귀가 책망하며, 제사장이 침묵하면 돌들이 외치게 마련이다. 지금 교회가 길을 잃으니 세속의 진보학자가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비참하다. 어쩌다 우리 교회가 이 지경까지 굴러 떨어졌을까?
강수돌 교수의 지향점은 내가 <거대한 사기극>의 에필로그에서 제시한 '공조(共助) 사회'의 그림과 일치한다. 자기만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서로 도우며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경쟁을 탈내면화해야 한다. 따라서 기득권의 포기와 자아의 부인을 나로부터 시작하되, 교회와 마을과 학교에서부터 시작하는 작은 모임을 통해 더불어 나아가야 한다. 세속 학자는 말한다. "진정으로 아이들이 꿈을 꾸며 자랄 수 있는 행복한 세상"(254쪽)을 만들어 가자고. 특히 교회는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선택과 실천에 대해 대답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25장에 등장하는 종말의 심판(양과 염소의 비유)에 비추어 한국의 개독교를 생각해 본다면, 절망적이다.
팔꿈치 사회와 팔꿈치 교회
작금의 한국교회를 향해서는 행위로 증시(證示)되지 않는 믿음은 구원과 동떨어져 있다는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맞을 것이다. 온전한 믿음이라면, 당연히 행위로 자연스레 드러나지 않겠는가. 올바른 행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니다. 나아가 "믿기에 그렇게 해야 한다"라는 당위적(율법적) 접근 또한 아니다. 그보다는 "믿으면 그렇게 하게 된다"라는 존재론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도대체 한국교회 현실 안에서 행위 구원론을 비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모르겠다. 나는 가끔씩 행위 구원론을 비판하는 이들의 내면에 어떠한 두려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온전한 믿음을 위해서는 대가(십자가로 형상화되는 자기 부인)를 치러야 한다. 바로 이렇게 자신의 에고를 비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행위를 말하는 것에 대해 거부가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나, 최소한 개독교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그들, 한국교회 전체를 욕보이고 있는 그들에게는 아마도 그런 두려움이 있을 게다. 자신을 버릴 생각도 없고,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부와 권력의 소유에 집착하는 그들로서는 말이다. 자신들의 소행이 하나님의 빛 가운데 드러날 때에 받을 판결이 두렵기 때문에라도 오직 믿음만을 말하고 싶을 게다.
그들은 주님을 정말 믿는 것일까. 그들의 조직은 하나님나라를 중시하는 사랑의 공동체이기보다는 세상의 정신을 체현하는 팔꿈치 사회에 가깝다. 이들은 승자 독식 교회일 뿐만 아니라 팔꿈치 교회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 발견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경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사회 안에서의 공존을 추구하고 있는가? 사랑의 교회를 생각해 보라. 이들이 세상의 빛으로 구실하고 있는 것은 신축하고 있는 건물의 외벽 유리를 통해 검찰청을 향해 햇빛을 반사하고 있는 것이 전부일 게다. 또한 그들이 지역 교회들과의 협동을 추구하고 있는가? 혹은 교회 안에서는 어떠한가? 삼일교회에서 전병욱 목사를 옹호하기 위해 피해자를 신천지 교인으로 몰아세우던 이들을 생각해 보라. 이게 바로 팔꿈치로 찍는 모습이 아닌가? 이게 도대체 하나님나라의 질서 구현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가? 이게 바로 세상을 바꾸기는커녕 세상의 첨병이 되고만 개독교의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