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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석의(釋義) 22장~28장:
소기천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는 오늘날 신약 연구의 효용을 설명하기를 인터넷에서 ‘신약학’을 검색하면 제약회사와 관련한 사항들이 상당수 검색되는데, 새로운 약품을 개발해 병들고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신약’(新藥)과 ‘신약’(新約)이 이러한 의미에서 일면 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유대주의와의 대립에서 야기된 마태복음의 특징1)
1. 모세유형론
유대교의 공격을 변증하기 위해 사용한 첫 번째 방책으로 모세를 예수님과 비교하여 예수님을 상대적 우위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유대교는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졌으므로 모세의 권위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요1:17). 그러므로 유대 회당이 의존하고 있는 모세보다 더 위대한 분으로 예수님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예수님이 모세와 유사한 체험을 하신 또 다른 모세임을 주지하였다.
유아학살(마2:16과 출1:22), 애굽으로의 피신(마2;13)과 미디안 광야로의 피신(출1:11~25), 왕의 사후에 자기고향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마2;19~21과 출4:18~20), 30년간 알려지지 않은 상태의 갈릴리 생활과 40년간 미디안광야에서의 생활, 요단강에서의 세례와 홍해바다를 건넘, 40주야를 광야에서 금식, 산에 올라 새 율법을 가르침과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음, 열 가지 기적(마8~9장)과 열 가지 재앙 기적(출7~11장), 엿새 후 구름 가운데 변화하심(마17:1~17)과 모세가 아론, 나답, 아비후를 데리고 시내 산에 올랐을 때 엿새 동안 구름이 산을 가린 중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남(출34;29).
직접 모세와 예수님을 대조시켜 모세보다 더 나은 새로운 모세임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특별히 산상설교에서 나타난다. 서기관의 義를 비판하면서 모세의 율법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을 대조하여, “옛사람에게 말한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1~22, 27~28, 33~34, 38~39, 43~44)라는 대조를 통하여 예수님을 모세의 율법을 바르게 해석하는 분으로 제시함으로 유대인에게 율법을 준 모세의 권위를 능가하는 새로운 모세로 나타내 보였다.
2. 마태오경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5권의 율법 즉 모세오경을 주었듯이 예수님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에게 5권으로 된 주님의 말씀(설교)을 주었다는 것이다(벤자민 베이컨 주장). 각 설교가 같은 ‘종결후렴‘문구인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7:28,11:1,13:53,19:1,26:1)가 5편 설교의 말미에 위치함으로서 각 설교를 매듭짓는데 착안하여 ’마태 오경‘이라고 불렀다. 5~7장(산상설교), 10장(파송설교), 13장(비유 혹은 천국설교), 18장(교회설교), 24~25장(종말론설교)등이다.
유대교라는 외부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성격뿐 아니라 내부의 문제로서 사도바울의 ’율법 없는 복음’의 영향이나 과거생활로부터 탈피하지 못한 이방인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도록 ‘음행한 연고 없이’ 란 항목을 추가한 ‘이혼’에 관한 말씀(마5;32,19:9,막10;1)2이나 의를 강조하여 불의에 대한 억제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마7:23,24;12).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율법은 필요치 않다고 말하는 '율법무용론'(antinomianism)의 주장에 대해서, 새 시대에도 여전히 율법이 유효함을 모세오경과 유사한 구조로 오직 그 복음서에만 기록했다(마5;17,18~20).
3. 구약성경의 성취
회당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마태복음에는 나사렛 예수를 통해 ‘성취와 완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구약을 41회나 인용하였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주된 독자들로 추정된다. 마태복음을 해석하는 데 있어 구약을 사용하는 원리와 내용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중요하다. 특히 구약사용에 대한 특징적 형태로 복음서 전체의 10회나 나타나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성취하려 하심이라“는 “성취 형식 인용구들”이다(1:22~23, 2:5,6,15, 17~18, 23, 4;14~16, 8:17, 12:17~21, 13:35, 21:4~5, 27:9~10).
4. 율법에 대한 해석
마태오경은 율법과 관련하여 유대주의와 충돌하고 있는 곳은 산상설교 중 5장,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기록인 23장이다. 회당 유대교의 그릇된 율법해석은 율법의 내면적 진의보다도 외형적 준수만을 중시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이다. 율법은 칼로 찌르지 않으면 살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반면, 예수님은 마음속의 시기와 미움과 살의와 형제 미워함을 살인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5. 그리스도
마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제하였다. 1:16~18에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으로 표현. 그리스도의 탄생을 유대인들이 절대적 권위서로 보는 구약 예언(사7:14)의 성취로 기록(1;18~25)했다. 예수의 탄생을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입증하고 예수의 공생애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제시했다. 11:2예수의 하신 일은 그리스도로서 하신 일로 분명하게 했다. 그리하여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사29:18~19, 35:5~6)대로 이루어진 것을 암시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가 예수에 대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16:16)함을 제시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당할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실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16:21)께서 라고 예고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 자체가 예수와 유대인 지도자들의 충돌원인이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 맥락에서도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나 곧 그리스도니라“(23:10). 대제사장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했을 때 예수께서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잘라 답변하셨다.
마태복음 22장
마태복음에 나오는 13개의 천국비유 중 22장의 10번째의 천국비유가 21장에 이어서 진행되고 있음을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로 보아 알 수 있다. 천국에 초청하는 문제를 비유로 설명하셨다. ‘비유’라는 말은 ‘파라발로’에서 온 말로 “....옆에 두다. ...곁에 놓다”는 뜻인데 한 가지 목적을 가진 사람이 그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그 목적 곁에 가져다 놓아 설명하는 이야기를 비유하고 있다. 2) 예수님께서 “....천국은 ....과 같으니“라고 말씀하신 비유처럼, 혼인잔치의 비유도 ‘천국’(The kingdom of heaven)을 설명하려는 의도였다.
‘하나님 나라’는 마태복음에 4번, 마가복음에 16번, 누가복음에 32번 사용되고 있으며‘3), ’말쿧 샤마임(malkuth shamaim)‘을 문자적으로 표현한 '하늘나라'는 마태복음에 30번 이상 사용되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다. 4)
마태가 ‘하나님 나라‘보다 ‘하늘나라’를 사용한 이유는 가장 유대적인 인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사용하기를 피하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는 단독적으로 사용되는 나라는 당시의 통치권을 가진 로마제국을 의미한다.5)
구조분석
가. 22:1-14 혼인잔치의 비유(눅 14:15-24)
나. 22:15-22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막 12:13-17, 눅 20:20-26)
다. 22:23-33 사두개인들과의 부활 논쟁(막 12:18-27,눅 20:27-40)
라. 22:34-40 가장 큰 계명(막 12:28-34; 눅 10:25-28)
마. 22:41-46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막 12:35-37, 눅 20:41-44)
1. 22:1-14 혼인잔치의 비유(눅 14:15-24)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 비긴(엡 5:23~32, 계 21:2,9)본문은 ①선민의 특권을 지녔음에도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자들을 핍박하다가 결국 패망에 이르는 유대인들의 실상, ②결국 복음이 온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었으되, 오직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참 신앙을 가진 자 외에는 역시 멸망 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이스라엘은 메시아의 백성이므로 하나님이 축복과 약속을 주셨고 율법을 주셨으나 율법을 떠나자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먼저 포도원에 들여보낸 자들(20:2), 일하러 가겠다고 대답하고도 일하러 가지 않은 맏아들(21;28), 집주인이 포도원을 맡기고 떠났던 농부들(21:33), 임금의 혼인잔치에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22:10)로 묘사되었다.6)
가. 22:1~10
마태복음25장에 있는 “열 처녀”의 비유처럼 예수님의 초림 때에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 초청에 반응하는 사람들은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모두 천국에 가담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축복이 이스라엘이란 민족적 한계를 벗어나고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확산될 것을 비유로 미리 알려주신 것이다.
6~7절, 예수님을 거부한 당시의 유대인들의 모습이 나옴
7절, 살인자들을 죽인다는 것은 A.D.70년의 예루살렘 파괴에 직접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다(마21:41). 영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사람들을 어린양의 혼인식(시 45, 계19:4~10)에 오라고 초청하실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의 반응으로 적용시킬 수 있다. 이 비유로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예수님의 義라는 세마포를 입으라고 설교할 수도 있다. 새로운 하늘나라의 백성을 규정할 용어가 없고 닥치는 대로 끌어왔다. 민족적 경계선이나 정치적 울타리도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2절, "예식, 결혼식"이라는 뜻으로 혼인 예식과 축복을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2006년 월드컵대회를 개최하는 독일이, 세계사에서 원래는 스페인의 식민지 국가로서 20여개 국가로 쪼개졌지만 16세기의 종교개혁시 마틴 루터가 사제만 쓰는 라틴어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서 평민들까지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게 되었기에 유럽의 중심국가로 정치, 문화, 법률의 중심이 되었다. 말씀 속에서 깨끗함과 거룩함이 있을 때 부유함은 덤으로 주신다. 세상은 염색통과 같아서 세속의 검은 색이나 붉은 색에 들어가면 검어지거나 붉어진다. 300년이 지난 지금에는 의학, 법학에서 독일어를 모르면 학문을 연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세계 음악가와 과학자의 2/3가 독일에서 배출되었다. 후손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하나님 말씀뿐이다. 7)
4절, “처음 초청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처음 선택한 유대인을 가르킨다. 천국 잔치를 위해서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맞이하고 계심을 말한다.
5절, 현재 예수님과 토론을 벌이는 유대인의 종교지도자들과 상징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도외시하고 무시했다는 표현이다.
9절, "길, 진로, 도로"를 가리키는 말, 지방에서 도시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길에 맞드린 곳으로 이방인들이 모이는 장소를 말한다(마10:17, 막8:3, 눅24:32, 행27:28, 롬3:16).
나. 22:11~14
여기에는 옷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저주받아 바깥 흑암에 던져진다. 구원받아 혼인식에 참석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의 일부가 옷이 없다는 이유로 손과 발이 묶여 바깥 흑암에 던져지는 것이다. 예복은 혼인잔치에 들어오기 위한 “통행증”과 같다. “초대받은 손님“은 손님일 뿐 절대로 신부나 친구(요 3:29)가 될수 없음은 ”손님“들은 아무와도 정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잔치는 마 26:29과 눅 22:30에서처럼 혼인식 이후에 있을 잔치인데 눅 12:35~38에서는 종들이 혼인식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기다린다. 요한계시록 3:20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자고 하셨다. 이사야55:1~2과 잠언9:1~2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잔치를 베풀고 계신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와서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8)
11절, 예의 없이 결례를 행하며 구원의 초대에 응하지 않음. 실제로 예복입지않은 oujk(우-) 사용.
12절, “친구여“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수요일 새벽 겟세마네에서 가룟유다에게 했던 말과 같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26:50). 시편55:13에서는 다윗이 노년에 아들 압살롬과 그의 측근 아히도벨에게 배반당하여 쫓기는 치욕스런 고통 중에 쓴 비탄시로서 이 배반자를 ”동류, 동무, 친우“라고 말한다
12절, 헬라어 두 개의 부정사에서 사실(事實)의 부정에 사용되는 oujk (우-), 사상(思想)의 부정에 사용하는 mh;(메-)이다. 여기서는 mh;(메-)를 사용해서 이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고 온 것은 단순히 실수가 아닌 그의 정신적인 생각에서 의도적인 것을 의미한다.
12절, ‘재갈물리다‘라는 뜻으로 당황해 말문이 막히는 상태를 말함. 이는 최후에 심판대 앞에서 변명할 여지가 없음을 보여준다(막4:39, 벧전2:15)
14절,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을 말한다.
2. 22:15-22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막 12:13-17; 눅 20:20-26)9)
마21:23에서 권세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계속되는 비유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을 지라도 그에 따른 반론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갑자기 세금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를 곤경에 빠뜨리고자 했다. 만일 예수께서 세금을 가이사에게 내야 한다고 말하면 반유대주의자로 몰고, 안 내야 한다고 말하면 반로마주의자로 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21절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답하심으로 이들은 더 이상 예수께 빌미를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납세 문제에 대한 대적들의 질문에 예수는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구분으로 원칙론적 답변을 하심으로써 탁월한 신적 지혜를 보이셨다. ’가이사의 것’이란 ‘부조리한 세상에서 그나마 질서 유지를 맡은 책임의 대가‘라는 정도의 다소 빈정거림이 깃든 말이라 하겠다. 성도는 두개의 시민권을 가진 자 이상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16절, 헤롯당은 헤롯 왕을 지지하며, 친로마 정책으로 일관한 당시의 정치집단
19절, 셋돈은 데나리온(은전의 명칭)이라고 불리며 납세를 위해 만든 은화로 한쪽면에는 황제의 열굴과 이름, 또 다른면에는 신화적 인물, 동물, 건물 등이 새겨져 있다.
21절, ‘국가에 대한 의무도 행하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도 잊지 말라‘는 뜻. 유대인들이 로마의 화폐를 사용하는 한, 로마의 명령대로 따라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창 1:27)은 ‘하나님의 것’이다. 가이사에게는 그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만 주면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인격 전체이다(막 12:30). 우리는 우리의 경제 활동을 통해 국가에 대한 조세의 의무도 감당해야 하며 동시에 우리 자신 안의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헌신해야 한다.
21절, "넘겨주다, 도로주다, 회복하다"의 뜻, 원래 하나님의 것이었기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려드리다”의 뜻이다.
3. 22:23-33 사두개인들과의 부활 논쟁(막 12:18-27; 눅 20:27-40)
내세에서는 가족관계, 혈연관계가 종식된다(22:30). 우리는 흔히 내세에서도 지상에서처럼 부부관계, 부자관계가 지속되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이 땅에서만 있는 일이다. 부활한 성도들이 살게 될 내세에서는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 이상은 없다.
23절, 성전에서 있었던 토론을 벌였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물러가고 이번에는 같은 장소는 아닌 것으로 보이나 같은 날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교묘하게 질문하고 나섰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
31절, ‘일어나다‘라는 뜻, 이미 죽은 자가 다시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롬 6:6, 고전 15:42~54). 구약에서 부활 사건 사상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구절은 적지만 모세(신 32:39) 등은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이 있었으며 사르밧 과부의 아들(왕상 17:17~19), 수넴여인의 아들(왕하 4:32~34)등이 다시 살아난 것이 비록 종말에 있을 모든 사람의 썩지 않을 영체 부활(고전 15:12~58)과는 다르다 할지라도 히브리인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에 대해 확신을 갖도록 하였음에 틀림없다(사 25:8, 겔 37:1~10, 단12:2).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 수난과 함께 구속사의 최고 절정의 사건이 되는 사건이었다(고전 15:12~20, 히2:17). 그리스도의 부활은 4복음서를 위시한 거의 전 신약성경에 기술되어 있다. 인간의 부활은 모든 사람에 해당되어(고전 5:12~22) 악인에게는 심판의 부활(요3:17)로, 성도에게는 썩지 않을 영광의 부활(고전 15:42~54) 즉 승리와 영생을 누릴 구원의 부활로 다가온다(요 5:29, 계 20:5,6, 11~15). 이러한 부활은 삼위 하나님의 사역(요5:21, 6:40, 8:11)으로 종말에 이루어질 사건이다(살전 4:13~18,딤후 3:1).10)
4. 22:34-40 가장 큰 계명(막 12:28-34; 눅 10:25-28)
당시 유대교에는 약 600여 세부 계명들이 있었다 한다. 따라서 여기 율법사가 시험에 방편으로 삼은 질문은 신학적 난제에 속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사랑(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든 율법의 완성(롬 13:8~10)으로 제시하기를 주저치 않으셨다(막 12:28~34).
34절,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있어서만큼은 자신들을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을 말씀하심으로 이들은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36절, 당시의 율법사들은 계명을 신체적인 것 248개와 일년의 일수 365개로 나눈 도합 613개의 계명 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이냐고 묻는 것이다. 이들은 율법하나 하나가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질문에 더 이상 예수도 대답을 하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이제 그 빌미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21:23부터 계속된 예수께 대한 집요한 공격은 결국 당시의 이스라엘의 모든 지식계층(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사두개인, 바리새인, 헤롯당)이 총 동원된 질문 공세였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비유를 사용하시며 모든 질문에 답하심으로 이들은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5. 22:41-46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막 12:35-37; 눅 20:41-44)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다윗의 주님‘(22:43)이며, 안식일의 주인(12:8)이시고, 성전보다 더 큰 분(12:6)이셨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청결사건’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분개하는 직접적 동기가 된다(21:15). 예수님은 수천년 동안 거룩한 성으로 존재하던 예루살렘에 대해서도 심판의 말씀을 남겼다(23:37).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까지는 아무도 그를 볼 수 없다(23:39). 오신 메시아를 거절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한 것이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비극이었다. 이스라엘의 산헤드린 공회가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인정했다는 데 있다(26:64~65).
마태복음 23장
21~23장의 모든 비유가 이스라엘의 실패와 교회의 출현이라는 공동주제를 가진다. 21:28의 맏아들은 ‘일하러 가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가지 않은’ 이스라엘의 비유이고, 둘째아들은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나 후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간’ 교회의 비유이다. 당시 공인된 죄인들(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인 이스라엘 지도자들)보다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마태 22장에서의 논쟁 후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하신다. 예수님의 지상생애동안 가장 신랄하게 주님을 비판한 자이며 그들에게 해서 ‘위선자’(마6장)라고 말해진 뒤부터 계속적인 경고가 따르고 있다. 마7장에서는 '거짓 선지자'로 불려지고 12장에서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되고, 위선적인 마음으로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 등장한다.
구조분석
가. 23:1-36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책망(막 12:38-40; 눅 11:37-52; 20:45-47)
나. 23:37-39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눅 13:34-35)
1. 23:1-36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책망(막 12:38-40; 눅 11:37-52; 20:45-47)
가. 외식주의 비판 23:1~12
점점 기세를 더해갔던 유대교 지도자들의 비방과 모함에 직면하여 예수는 본장에서 그들의 거짓되고 위선적인 실상들에 대해 비난과 더불어 심판을 선포하신다. 그중 서론격인 본문은 율법의 책임자요 준수자로 자부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강압적인 율법주의와 위선을 질책하는 내용이다.
나. “일곱가지 화”(禍) 23:13~36
본장의 본론부로서 외식주의자들에게 임할 심판의 불가피성을 강렬히 선포하고 있다.
첫째 및 둘째 화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막아 버리는 죄악에 대한 경고이며,
셋째 및 넷째 화는 율법의 껍데기만 지키기에 안달인 자들을,
다섯째 및 여섯째 화는 가증스러운 위선을 각각 경고한 것이다.
일곱째 화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했던 잔혹한 전철을 되밟고 있는 자들에게 내린 경고라 하겠다.
이 장에서 마태는 여러 기회에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모아 놓은 것이 분명하다. 주의할 것은 모든 바리새인들이 다 정죄 아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부류의 집단이나 마찬가지이겠지만 바리새인들 중에는 예수를 핍박하는 사람이 많아 보이는 것은 확실하나 모든 바리새인들은 아니다. 이 본문은 무리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신 마지막 공개강화가 되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율법 전문가인 서기관들의 올바른 주장은 인정하신다. 그들의 행실이 모두 바르지는 않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율법만은 존중받으리라고 하신다(2, 3절). 그러나 율법의 세목들에 대한 까다로운 준행을 고집하거나, 어떤 특수한 교훈이 효력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불합리하게 그 범위를 확대하거나, 사람들에 의한 율법자체들을 쓸데없이 만들어가는 것은 안내자가 아니라 압제자가 된다고 하셨다(4절). 이미 이들은 이러한 문제에 빠져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절, 모세의 자리는 유대인들이 율법교육과 예배를 위해 사용하던 건물 회당 앞자리에 마련된 높은 의자에 붙은 이름. 랍비가 이 자리에 앉아서 율법을 읽고 설명하곤 했다. 그들의 주임무는 기록된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치고 설명하는 것인데 모세의 이름으로 낭독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누구나 지켜야 한다고 하신 것.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모세의 자리에서 가르침이 정당할 경우 예수님은 오히려 그것을 듣고 지켜라고 권하기도 하셨다. 11)
5절, 경문은 "성구함, 수호함", ‘보호하는 부적들’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차고 다니던 경문(성구함)은 길고 가느다란 양피지에 율법의 구절들을 써넣고 가죽 상자들에 담아서 봉한 것들로 이 조그만 성구함들은 가죽끈으로 왼편 손목과 미간에 매어 졌다(신6:4~9, 11:13-21).
5절, 옷 가장자리에 단 술로, 옷술을 크게 하여 율법의 주된 교훈을 상징하였다. 예수님도 이 술이 달린 옷을 입으셨다(마9:20). 주께서 정죄하신 것은 옷술을 크게 하여 나타내보이려고만 하는 처사였다.
13절, 원래 "배우"라는 말에서 나옴,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를 가리킨다.
14절 (없음), 어떤 사본에, 14절에 막12:40과 눅20:47과 유사한 구절이 있다
13,15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말씀을 빙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은 말씀을 왜곡해서 해석했기 때문이거나 외식을 중시한 나머지 말씀에서 생명을 추구하는 진지한 자세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세를 믿었다면 예수도 믿었을 것이다“(요5:46) 이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훼방꾼만 될 뿐이다(13절).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이미 이 땅에 임재하기 시작했다. 이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회개와 믿음뿐이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계속 사람들에게 율법의 굴레를 씌우려 했던 것이다 .
13절, 슬픔의 탄성을 뜻하는 감탄사, 마태복음에서만 모두 7번 발견된다(13, 15, 16, 23, 25, 27, 29절). 여기의 "화"들은 저주라기보다는 슬픔에 더 가까운 표현들이 많은데 예수께서 단순히 저주를 즐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슬픔에 안타까워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화 있을진저’ 보다는 ‘슬프도다 너희여’가 더 나은 번역이라고 본다. (눅6:24, 25, 10:13, 11:42, 43, 44, 46, 47, 52, 유1:11)
15절, 문자적으로 ‘게헨나의 자식’을 뜻하는데 이것은 유대인의 한 표현으로 ‘내생에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식’을 말한다. 바래새인들의 개종자들은 원래 바리새인들보다 더 바리새적인 열심을 내게 되는 경우가 있다.
27절, 손을 대면 부정해 진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여 무덤을 희게 칠한 것(행23:3). 그것을 주의하기 위한 색칠이 아니라 화려하게 보이기 위한 장식으로 꾸민 무덤을 말한다.
35절,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역대하서가 맨 마지막 부분에 있기 때문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를 가리키는 것이다(대하24:20~22).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는 최초의 순교자의 피와 최후의 순교자의 피까지 이 의로운 피가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말하신 것이다. 사가랴의 두가지 가능성으로, 첫째는 스가랴서의 기자인 스가랴로 성경상의 기록은 없지만, 성전재건을 고무시키고 바로 그 성전에서 타살 당했을지 모른다. 둘째는 요아스 왕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책망하다 성전에서 돌에 맞아 죽은 스가랴(대하 24:20~22)로 그의 부친은 여호야다였다.
2. 23:37-39 예루살렘을 향해 탄식(눅 13:34-35)
결론부로서, 넘치는 죄악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황폐케 될 것을 예언한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크신 애도와 낙심을 절감케 한다. 이 예언은 A.D.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에 의해 성취되었다.
37절,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처들어갔던 왜장 가등청정(德川家康)이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잘 보이려고 백두산 호랑이를 일본에 선물로 보내면서 사흘 뱃길에 굶어죽지 않도록 풍산개 세 마리를 함께 상자 안에 넣어서 보냈다. 그러나 일본에 도착한 상자 안에는 호랑이는 없고 풍산개 세 마리가 “이런 맛 처음이네“하면서 포동포동하게 살이 쩌서 남아 있었다.
생존하기위해 열심히 단합했던 풍산개 세 마리의 힘을 본받아 우리도 험한 세상에서 함께 모여 기도하고 죽음을 불사하고 험한 세파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자.
우리는 “독수리냐? 참새냐?“ 우리는 독수리 같은 새들의 왕으로서 태풍을 거슬러서 높은 하늘을 비상하는 믿음이 필요하다.12) ‘히에루살렘’은 ‘평화의 터, 평화의 소유’를 말함.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마2:3), 유대인들(행21:31), 천국을 상징적으로 새 예루살렘(계3:12)으로 말한다.
마태복음 24장
24장은 앞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다가올 성전파괴에 대한 예견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는 마지막에 ‘인자의 오심’이라는 주제가 이루어진다. 본문에 묘사된 말세의 징조들로서는 거짓 선지자들의 출현, 전쟁과 기근과 지진, 성도들에 대한 핍박 들이다.
말세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에 이르는 전 기간을 지칭한다 할 수 있으므로 현재 성도들은 늘 말세의 징조를 경험하고 있는 셈이며 따라서 늘 종말론적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하겠다(살전 5:6).
구조분석
가. 24:1-2 성전이 무너뜨려질 것을 예언하시다(막 13:1-2; 눅 21:5-6)
나. 24:3-14 재난의 징조(막 13:3-13; 눅 21:7-19)
다. 24:15-28 가장 큰 환난(막 13:14-23; 눅 21:20-24)
라. 24:29-31 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막 13:24-27; 눅 21:25-28)
마. 24:32-51 무화과나무에서 배울 교훈(막 13:28-37; 눅 21:29-33; 17:26-30, 34-36; 12:35-48)
1. 24:1-2 성전이 무너뜨려질 것을 예언하시다(막 13:1-2; 눅 21:5-6)
세월이 지나면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의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수님의 재림이 지체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지체되어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거스틴은 종말론에 대한 희망을 현실화하여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이라고 가르쳤다. 그런 중에 현대에 들어 실현된 ‘종말론 사상’이 대두되었다. 마태복음 12장 28절 말씀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이라 부른다.
3절, 제자들은 종말의 시기를 상당히 궁금해 하며 관심이 많았으나 예수님의 입장은 종말의 시기와 날짜에 관한 부분이 아니라 그들의 구원에 문제에 관심이 있으셨다.
4절, 부탁하신다(막13:5, 계20:3).
6절, "...하지 않도록,...하면 안되므로"의 뜻, 놀라지 말고 겁먹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미혹 받지 말고 놀라지 말 것을 당부하신다.
성경은 세상 끝 날에 나타날 큰 징조들을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계시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징조들이다. 바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마24;14),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구원에 이르게 되는 징조이다(롬11:25~27). 또 하나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징조들'로서 ① 환난과 ② 배도 행위와 ③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다(마24:5, 9-13, 21-28). 마지막 세 번째 징조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징조들'이다. 그것은 하늘에 나타나는 징조, 곧 일월성신의 징조(마24;30, 눅21:25)들이고, 또한 땅의 징조들(마24:6~8, 눅21:25)이라고 하였다.
2. 24:3-14 재난의 징조(막 13:3-13; 눅 21:7-19)
14절,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은 모세가 40년간 다녔던 그 고난대학에서 이겨야 한다. 훈련병은 6주 후에 일반인에서 사병으로 변화되고, 초급장교가 되려면 육군사관학교에서 4년간 정규교육(1억5천만원의 예산이 소요)을 받아야 한다. 고난당하면 죄수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고, 목동 다윗이 왕이 되는 것처럼 영적 장교로서 성공할 수 있다. 13)
24:15-28 가장 큰 환난(막 13:14-23; 눅 21:20-24)
7절, 춤 비전에 따라 사명을 다해야 한다. 모차르트는 바하의 실력을 탐내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 사자와 독수리는 서로 비교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바울에게 주신 “내가 네게 주신 은혜가 족하도다“라는 주님의 뜻을 따라서 각자 맡은바 사명에 전심을 다하면 어떤 재난도 두렵잖다.14)
24:29-31 인자가 오는 것을 보리라(막 13:24-27; 눅 21:25-28)
30절, "그의 몸을 치면서 슬퍼한다"란 뜻(눅23:27, 행8:2, 계1:7) 만일 이 구절이 ‘재림’에 대한 언급이라면 곧 ‘세계의 모든 족속’을 말하고, ‘예루살렘’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유대 땅의 모든 족속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슥12:12).
24:32-51 무화과나무에서 배울 교훈(막 13:28-37; 눅 21:29-33; 17:26-30, 34-36; 12:35-48)
34절, 이 말씀으로만 보면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으로 국한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본 장 전체적으로 보면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그 시간적인 차이를 거의 무시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를 동시에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종말이란 예수님의 초림 기간인 가까운 미래(예루살렘 멸망)도 종말이고 먼 미래 재림 때도 종말이다. 34절의 선언은 가까운 미래 예루살렘의 멸망이다. 전체적인 종말에 대해서는 마24:14에 언급하셨다.
예루살렘의 실제적인 포위 공격은 A.D. 70년 초에 시작되었고 로마의 티투스(Titus)15) 장군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9월 12일 경이었다. 110만명이 희생되었다.
36절, 이 말씀들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재림이 기대되는 종말 일을 스스로 정하는 데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모두가 헛된 거짓 날짜임에 틀림이 없다.
42절, 가까운 미래인지, 먼 미래인지, 평상시인지, 전쟁 중인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어느 날
44절, "준비된" 하라고 하신다(마25:10, 눅12:40, 행23:15).
45절, 사자가 얼룩말 떼를 공격할 때는 떨어져 있는 놈을 집중공격해서 잡아먹는다. 혼자 놀면 위험하다. 예배 속에서는 하나님의 보호막이 있어서 성령의 부흥이 생겨난다.16)
46절, 예수를 향한 믿음의 계산기로 1년 52주를 제외한 세상의 경쟁에서도 이길 수 있었다. 게임의 확률에서 ‘올인’하는 믿음은 완전한 계산에 의한 주님으로 말미암은 확신이다. 아름다운 나라인 천국의 소유를 위해서 최고의 배당을 얻을 수 있는 영혼 ‘펀드‘에 가입해 최고의 진주를 얻어야 하겠다. 지옥에서 이를 갈며 슬퍼하지 말라. 17)
51절, "두 갈래로 자르다"의 파생으로 "채찍으로 때려 상처를 입히다"로 "매우 지독하게 때린다"라는 뜻이다. “충성된 종은 주를 두려워하며”(골3:22), “작은 일에도 충성하고”(마25:21), “시원하게 한다”(잠25:13).
마태복음 25장
24~25장은 다섯 강화 단락들 중 다섯째 단락에 해당하는데 주제는 “심판”이다.
전반부(24:1~35)는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심판, 후반부(24:36~25:46)는 마지막 때 있을 심판을 다룬다. 23장의 주제도 ‘심판’이므로 24~25장과 연결되지만, 23장은 공개적인 가르침이지만, 24~25장은 제자들에 대한 사적인 가르침이므로 구분된 단락이다.
25장은 종말론적인 세 가지 비유가 나온다. 이것은 24장부터 연결된 종말에 대한 설명으로 보면 된다. 열 처녀의 비유는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그 때가 올 것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성도를 가리키며 또한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개개인의 준비된 상태에 따라 신랑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므로 어떤 공동체가 저절로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두 번째, 달란트 비유는 그 재능이 불공평하게 나누어주신 것이 아니라 각자의 모두에게 재능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 재능을 하나님 앞에서 최대한 활용하기를 권하신다. 재림 때가 되었다고 갑자기 어떤 특별한 것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고 평상시에 가진 달란트를 활용하시기를 권하신다.
세 번째, 양과 염소의 비유는 재림과 최후 심판의 관계를 설명한다. 예수님의 재림 즉시 심판이 시작된다. 한 무리에 섞여있으면서 비슷하지만 예수께서는 거짓 양을 구분해 내신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척하거나 주님을 사랑하는 척해서도 안되며 주여 주여(마7:21)부르짖는 것만으로도 안되며 그분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사했다고 해도 안 된다(마7:22). 오직 진정으로 그분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마7:22).
구조분석
25:1-13 열 처녀 비유
25:14-30 달란트 비유, 마지막 때를 위한 준비(눅 19:11-27)
25:31-46 양과 염소에 관한 비유(심판의 기준)
1. 25:1-13 열 처녀 비유
열 처녀의 비유는 마태복음에서만 나오지만 누가복음 12:35:37절을 참고하면 유익하다. 이 비유에서는 유대인의 혼인예식을 사용함으로 24장에서 설명한 부분을 좀더 제자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약간은 어려움이 있음은 당시의 유대인의 혼인예식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혼인 관습에는 세 단계가 있었다. 첫째로, 정혼한 단계가 있는데 신부와 신랑의 아버지 사이에 공식적인 합의가 이루어질 때 성립된다. 둘째로, 약혼의 단계가 있는데 이것은 신부측 부모의 집에서 갖는 예식으로서 이 때 약혼 당사자들은 증인들과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상호 서약을 하고 신랑이 신부에게 예물을 주었다(the betrothal). 약혼하고 남편이 죽으면 과부로 간주되었으며 파혼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파혼을 하게 되면 결혼한 사람과 같이 이혼의 절차가 진행되어야 했다. 세 번째로, 대략 일년 정도가 지나면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이 때 신랑은 그의 친구들과 동행하여 신부를 데리러 신부집으로 갔다가 신부를 데리고 행렬을 이루어 혼인 잔치가 열리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1절, 등은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이니 공중 혼인 잔치에 대한 예언이다(벧후1:19). 마태복음, 마가복음에서는 엿새 후이고 누가 복음에서는 “팔일쯤 되어”라고 했다. 마7:14에도 일주일에 대한 기록이 이곳과 똑같이 나온다. 반대방향에서 오는 자와 마주치는 것을 의미한다.
2절, 열 명밖에 안 되는 자들 중에서도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로 구별된다.
5절, 개국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라고 하셨고(단12:1), 창세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셨다(마24:21). 환난으로 인한 고통이 크면 클수록 신랑이 더 조급하게 기다려지게 된다.
6절, ‘밤’은 어두움의 권세를 말한다(눅22:53).
7절, 기름을 가진 처녀들의 등불과 미련한 처녀들의 등불이 구별된다. 이미 신랑이 올 때는 늦었다
2. 25:14-30 달란트 비유(눅 19:11-27)
15절, 당시의 화폐로 사용하던 금,은으로 1金의 달란트는 약 15,000$, 1銀의 달란트는 약 1,000$
예수께서 어떤(금, 은) 달란트를 말씀하심보다 어떤 가치 있는 것을 맡기셨다는 것이다. 주인이 종들의 능력에 따라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주고 갑절의 이윤을 남겨 주인 앞에 내놓지만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그 돈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속에 묻어 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꺼내 놓자 주인은 큰 책망했다.
첫째, 달란트의 분배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을 맡기실 때 각각 재능대로 맡기신다.
둘째, 달란트의 관리이다. 이윤을 남기라는 것이다.
셋째, 달란트는 상급이다. 다섯을 더 남긴 종과 둘을 더 남긴 종에게 주신 칭찬과 상급이 동일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21절, 23절, 둘이나 다섯을 남긴 계수상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둘 다 똑같은 칭찬과 상급을 받은 이유는 간단하다. 각각 재능대로 달란트를 분배해 주셨고 두배를 남긴 것이다.
3. 25:31-46 양과 염소에 관한 비유
본 비유는 가장 엄숙하고 또 명백하게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다. 비유의 형식을 빌린 직설적인 설화로서 자기 자신이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재림하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을 베푸시되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여 영벌과 영생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신다. 이 비유도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이 현재 상상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계시하신다. 그들의 천국관은 자기 민족을 짓누르고 있는 여러 가지 불행에서 구원을 받는 현세적이며 지상주의 천국관,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적인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유대 민족을 뛰어넘어 세계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 앞에 모아 선악간에 심판하여 의인들만으로 구성되는 나라임을 보이고 있다. 이때에 이런 계시는 유대인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의 분리의 기준이 무엇인가? 표면상으로 볼 때는 선행의 보상으로 받는 것처럼 되어 있으나 이점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34절, 선행의 보상으로 영생에 들어간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 말씀은 그들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신 은총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들의 공로로 인하여 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받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마태복음 26장
마태 26장~27장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이 마무리되는 장이다. 구약의 진정한 계승자인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 참된 이스라엘이 되는 길임을 역설한다. 26장에서는 최후의 만찬을 행하신 후 잡히시고, 27장에서 주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신다.
25장까지는 왕국복음이 중심내용이었으나 26장부터는 은혜의 복음이 중요하게 나타난다. 고전15:1~4에 따르면 은혜의 복음에 포함되는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히심과 부활이다.
구조분석
26:1-5 유대인의 공회의 음모(막 14:1-2; 눅 22:1-2; 요 11:45-53)
26:6-13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막 14:3-9; 요 12:1-8)
26:14-16 유다가 배반하다(막 14:10-11; 눅 22:3-6)
26:30-35 감람산
26:36-46 겟세마네 동산
26:47-56 수난의 시작(막 14:43-50; 눅 22:47-53; 요 18:3-12)
26:57-68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 당함(막 14:53-65; 눅 22:54-55, 63-71; 요 18:13-14, 19-24)
26:69-75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막 14:66-72; 눅 22:56-62; 요 18:15-18, 25-27)
1. 26:1-5 유대인의 공회의 음모(막 14:1-2; 눅 22:1-2; 요 11:45-53)
마태는 예수께서 이틀 후에 있을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처형되고(예수님의 예언,2절) 있다. 3차례의 수난과 부활을 예언(16:21,17:22~23,20:18~19)
3~5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서 음모내용은, 유월절 기간 중에는 민란방지를 위해서 예수를 죽이지 말자고 결의(5절)했지만, 예수님은 2절에서 유월절 기간 중에 처형될 것을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의 예언과 그들의 결의사이에는 모순을 발견한다.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는‘성전 청결사건’과 깊이 관련(21:23)된다. 2장의 예수님 탄생 시에도 종교지도자들이 단합하여 죽이려했다. 예수님의 탄생기사와 수난기사에는 세 그룹이 등장한다. 헤롯 왕,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서기관들(2:4), 총독 빌라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26:3,47). 이런 대비를 통해서 예수님의 수난의 예언이 막 실현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18)
3절, 대제사장의 궁에서 이미 산헤드린 공회의가 열려 예수를 공개적으로 잡아올 경우 갈릴리 사람을 중심으로 혹시 민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어 필요할 경우 명절이 지나고 체포할 수 있다는 결론까지 내려놓고 있었다. 이것은 이제 그들이 예수의 특별한 잘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이미 합의된 무조건적인 체포에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2. 26:6-13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막 14:3-9; 요 12:1-8)
이 여자는 요한에 의해서 마르다와 나사로의 누나로 밝혀졌다(요12:2). 이 여자의 낭비에 대해서 제자들은 모두 분을 내었다고 말하고 있다(마태는 직접적으로, 마가는 간접적으로).
7절, 마가는 여인이 가져온 향유의 종류와 금전적 가치를 적고(마가14:3~5), 마태는 헌신과 아름다운 일만을 설명(10~11절)했다. 이 여인은 지금 향유의 값을 생각할 상태가 아니었다. 잠시 후면 잡혀가시게 될 예수께 모든 것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왕에게 기름을 붙듯이 이 여인은 이 일을 행했다. 이 여자의 일을 예수께서는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6절, 향유는 당시 왕의 선물로 사용되기도 했다.
3. 26:14-16 유다가 배반하다(막 14:10-11; 눅 22:3-6)
복음서에서 유다가 무모한 결정을 했는지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초대 교회에서는 이 문제가 상당한 난제였다. 요한은 그의 성품과 탐욕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데(요12:6),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말함으로 예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이 결정적으로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음을 말한다.
"곧 은 삼십을 달아서 내 고가를 삼은지라“(스가랴11:12). 예수께서 은 30에 팔릴 것을 예언한 부분이다. 성경에서 요셉을 은 이십 개에(창37:28), 들릴라가 삼손을 판 것(삿16:18)을 볼 수 있다.
4. 26:17-29 최후의 성만찬(막 14:12-26; 눅 22:7-23; 요 13:21-30; 고전 11:23-25)
세 공관복음서 모두가 다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 식사로 간주하고 있다. 18절 성안 아무에게 가라는 명령은 헬라어 (톤 데이나)는 문제의 그 인물이 비록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모르는 인물이 아님을 시사한다. 예수께서 전하도록 명령한 메시지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메시지는 주께서 느끼고 계신 당시의 긴박감을 강조하고 있다.
8절, 예언적인 현재 시제로서 ‘내가 지키기로 되어 있다’는 의미를 가진다.
26절, 떡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몸이 되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몸을 의미하고 있다"는 뜻이다.
28절, "분류케 한다"는 뜻, 죄를 죄인에게서 분류한다는 의미이다(마9:2). 성만찬 예식에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세 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 말을 덧붙임으로 예레미야 31:34의 예언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강조하고 있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누가복음에서는 "너희를 위하여")라는 말은 이사야 53:11의 "나의 의로운 종이 ... 많은 사람을 의롭게"하리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둘째로, 27절의 “마시라“는 초청에 응하기 위해서 26절 ”받아“ 다음에 먹으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셋째로, 29절 “너희와 함께“라는 말의 추가는 마19:28에서 제자들에게 이미 말하셨던 더 복된 교제를 즐기게 되리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성만찬에 관한 기사는 마태가 좀더 자세히 전달해 주고 있는 것 같다.
5. 26:30-35 감람산
제자들과 만찬이 열렸던 다락방을 떠나 한적한 곳 감람산으로 가시는 동안(누가는 주께서 이곳에 가시는 습관이 있었다고 전한다) 자신에게뿐 아니라 제자들에게 곧 닥쳐올 일을 대비하도록 하셨다.
예수께서는 첫 몸부림 기도 후에 그의 세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시고(갈릴리 바다에서 수 없는 밤을 새며 고기를 잡던 단련된 신체를 가진 그들이) 다시 한번 깨어 기도할 것을 당부하셨다.
36절, 겟세마네는 ‘감람원’을 뜻하며, 잠근 동산 또는 제한된 정원(hortus inclusus) 비슷한 뜻으로 보인다(요18:1). 문자적으로는 "감람유를 짜는 통"이다. 겟세마네 동산에는 감람나무가 많으며 예루살렘 성에서 동쪽으로 15km정도 뻗쳐있었다.
46절, ‘나가오는 원수를 만나러 앞으로 나아가다’이다.
6. 26:36-46 겟세마네의 기도(막 14:32-42; 눅 22:39-46)
36절, 초대교회의 열심으로 회귀하려는 순수한 열정을 담아서 눈물로 부르는 “성령이여 임하소서! 초대교회 역사 같은 권능으로 모든 교회 일으켜 주소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승리의 기 높이 들고 전진하라! 주님 오실 길 예비하라!“는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39절, 백백이라도 아쉬운 우리임에도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고 칭송받는 다윗 왕은 “이기는 법을 아는 자(삼하5:1~10)“ 였기에, 임마누엘이신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는 말씀대로 살았다. 19)
7. 26:47-56 수난의 시작(막 14:43-50; 눅 22:47-53; 요 18:3-12)
56절, 스위스나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한 학생들의 말을 들어보면 밤 철에 많이 떨어진 알밤들이 있는데 보기에는 탐스러우나 독이 들어있어서 먹으면 배탈이 나거나 아프다고 한다. 한국의 알밤은 건강해지는 반면에 서유럽에서의 알밤은 독이 있다는 차이가 있다.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시련’이라는 시험과 ‘유혹’이라는 시험이다. 위기와 시련이 있을 때 “밤에 따는 향수“라는 글에 보면 극한 시련의 한밤중에 자란 나무가 향기를 강하게 발한다고 했다.
세계에서 감격스럽게 예배드리는 곳은 중국이다. 예배하기 두시간전에 모여서 열광적으로 찬송하는 곳이 중국이다. 정말 뜨거운 감동의 현장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20)
8. 26:57-68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당함 (막14:53-65; 눅22:54-55, 63-71; 요18:13-14, 19-24)
예수께서 잡히시는 기간에 이미 산헤드린 공회의가 열리고 있었던 사실이다.
59절, 공회의가 이제 처음으로 증거를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있는 증거들을 면밀히 분석하는 작업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가야바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특정 진술에 대한 정확성 여부보다는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최소한의 두 증인(유대의 증거인에 관한 율법)을 찾는 것이었으며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을 찾는 것이었다.
60절, 암시하고 있는 대로 수많은 거짓증거들이 자원하여 나섰으나 일관된 증거를 제시하는 자들이 없었다. 여러 증인과 증거들 중에 한참을 지내며 본질이 왜곡된 상태에서 거짓 증인들에 의해서
61절, 예수께서 ‘너희들은 이 성전을 헐라’(요2:19)고 했으나 "내가" 헌다고 하지 않았고, ‘지을 수 있다’(깨우다, 일어나다"의 뜻으로 그의 부활을 의미)고 함도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고 하셨다. 죄목을 어떻게 찾으려고 노력하던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죄목은 없었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있어서 성전을 헌다는 것과 그것을 사흘 만에 지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거짓 증거임에 확실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이 생각하기는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독일 수가 있었다. 이것은 제일 무거운 고발 내용 중의 하나였다(행6:13~14).
64절, 대제사장은 극도의 흥분을 나타내며 자기 옷을 찢고 더 이상 증인이 필요 없음을 말하고 이 말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했다. 예수께서 성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문제를 거리낌 없이 대답했기에 가야바로 하여금 더 이상 죄목을 찾는 수고를 덜하게 했다. “저는 사형에 해당하리라“고 보았지만 산헤드린 공회의는 단독적으로 사형집행 권한이 없었다. 로마 행정관에게 사형집행 명령을 내리도록 하려면 빌라도로 하여금 행동을 취하도록 예수에 대한 공소사실을 제기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들은 일단 정회하고 새벽녘에 다시모여 속개하여 이 일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마27:1).
67절, 산헤드린 공회의원이나 대제사장의 하수인들에 의해서 치고 "주먹으로 치고" 구타를 당하신다.
9. 26:69-75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막 14:66-72; 눅 22:56-62; 요 18:15-18, 25-27)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는 동안 베드로는 멀찌기 떨어져 지켜보고 있었다. 주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고 심지어는 함께 죽겠다고 까지 장담한 그는 이 재판장에 들어와 있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예수께 가까이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마태만 기록하고 있는 58절 이 일이 어떻게 되어가나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가 산헤드린 뜰에 앉아있을 때 여종하나가 예수를 따르는 자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 여자는 예수를 체포하러 갔을 때 귀에 상처를 입은 대제사장의 종들 가운데 하나(58절)였다. 베드로는 이 여인의 질문에 반색하며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고 옆에 있던 자가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두 번 물었을 때도 역시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갈릴리 사람은 특유의 발음이 있어서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는 닭울음소리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
마태복음 27장
마태27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생애 중 가장 마지막 때를 기록한다. 26장에서 제자들에게 새언약을 말씀하신 후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고통의 기도를 드리시고 제자의 배반으로 제사장들에게 잡혀가셨다. 베드로에게 자장 길었던 그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자(수요일 아침) 유대인들은 주님을 빌라도에게 데려간다. 26장의 후반부에서는 베드로에 대해서 많은 구절을 할애하는데 27장에서는 몇 구절을 가룟 유다에 대해 할애한다.
구조분석
27:1-2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
27:3-10 유다가 자결함(행 1:18-19)
27:11-26 빌라도의 심문과 사형 선고(막 15:2-15; 눅 23:3-5, 13-25; 요 18:33-19:16)
27:27-31 군병들의 희롱과 수욕을 당하심(막 15:16-20; 요 19:2-3)
27:32-44 십자가에 못 박히심(막 15:21-32; 눅 23:26-43; 요 19:17-27)
27:45-56 영혼이 떠나시다(막 15:33-41; 눅 23:44-49; 요 19:28-30)
27:57-66 무덤에 장사되심(막 15:42-47; 눅 23:50-56; 요 19:38-42)
1. 27:1-2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막 15:1; 눅 23:1-2; 요 18:28-32)
1절, "서로 결의하다, 심의하여 통과시키다"는 것은 예수에 대한 사형 선고가 합법화된 것을 말한다. 빌라도에게 넘겨진 예수의 죄목은 "성전 모독죄"였다.
2. 27:3-10 유다가 자결함(행 1:18-19)
유다는 산헤드린 공회의에 예수를 넘겨주고 받은 돈을 되돌려주려고 했으나 너무 때가 늦었다. 이들은 그 돈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유다는 예수가 아무런 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유다는 그 돈을 성전 마루바닥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사람들은 이 돈으로 본래 토기장이의 밭으로 알려졌으나 후에 피밭으로 알려진 밭을 사서 예루살렘에서 죽게 되는 이방인들의 묘지를 삼았다(렘32:7~9, 슥11:12~13, 행1:18~19)
3. 27:11-26 빌라도의 심문과 사형 선고(막 15:2-15; 눅 23:3-5, 13-25; 요 18:33-19:16)
"본디오"(헬라어 Pontivou(폰티우스)로 '다섯 번째'라는 뜻)는 다섯 번째 유대인 지역의 총독 빌라도라는 뜻이다. 그는 주후 26세에 총독이 되어서 36년에 결국 그도 자살하고 만다. 종교적으로 헌금한 돈을 유용한 일로 유대인들이 데모를 하고 그는 자기 군대로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그 원성이 로마황제에까지 들려서 그는 남 프랑스로 유배를 떠난다. 그곳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주후 36년에 자살했다.
본문은 예수님을 심판하는 빌라도의 장면이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대하면서 이사야53장에서 예수님은 아무런 강포를 행하시지 않은 분이시지만 도살장에 끌려간 양과 같다고 한 것을 기억나게 한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한다(마27:14).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고 그는 마음에 놀랐다. 죄인으로 정죄 받아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서 있지만, 실은 예수님의 그 신적인 위엄 앞에 빌라도가 내심 두려워하면서 떨었다. 그는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셨다.
그는 이미 예수께서 아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도 예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상관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물었다.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명절이 되면 죄수 가운데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한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놓으려고 애를 많이 쓴 것 같지만 결국은 24절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는 말로 자신은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회피했다.
25절, lao;"(라오스)는 "유대민족"인데 이 저주로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때에 110만 명이 죽었다.
4. 27:27-31 군병들의 희롱과 수욕을 당하심(막 15:16-20; 요 19:2-3)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기 위한 예비적인 형벌로서 당하시는 고난과 모욕이다.
27절, 관정(브라이도리움)은 헤롯 대제가 지은 궁전으로, 유월절 같은 특별한 기회에 로마 총독이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에 올라와 머물 동안 그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5. 27:32-44 십자가에 못 박히심(막 15:21-32; 눅 23:26-43; 요 19:17-27)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넘어지고 엎으러 져서(이미 많은 채찍으로 육체적인 힘에 한계가 있으셨다)
골고다 언덕까지 가시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힘이 센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지게하고 빨리 골고다까지 간 것이다.
32절, 아프리카 북쪽 연안 그리스 도시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간 시몬의 고향이다 (마27:32, 행2:10).
37절, 이들은 예수를 조롱하는 조로 이 패를 붙인 것이다.
42절, 사단이 그를 광야에서 시험할 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마4:6)고 한 것과 같은 의미로 전달된다. 십자가상의 마지막까지 사단은 군중들을 통해서 그에게 시험하고 계신 것이다.
6. 27:45-56 영혼이 떠나시다(막 15:33-41; 눅 23:44-49; 요 19:28-30)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뉘우고 양손바닥과 양발을 한곳에 모우고 그 위에 녹슨 대못을 박았다. 내가 알고, 보는 가운데 박히는 무섭고 두려운 못이었다. 십자가의 길은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히는 고통의 길이었다. 예수님은 제3시(아침9시)에 십자가에 못박혔다(막15:25). 그리고는 제6시(낮12시)가 되어서, 온 땅에 어둠이 임하기 시작했다(마27:45). 한 낮에 갑자기 빛이 사라지고 땅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제9시(오후3시)가 되어서는 예수님은 돌아가심으로 십자가 위에서 6시간 동안 고통을 당하셨다.
51절, 지성소와 성소사이에 있던 휘장 뒤에는 지성소가 있어서 대 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백성들의 죄를 대신 사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리러 들어가는 곳이었다. 지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버렸다. 이것은 사람들에 의해서 찢어진 것이면 아래로부터 찢어져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찢으신 것이기에 위로부터 찢어졌다. 이 휘장은 양의 가죽과 같은 두꺼운 것으로서 얇은 천이 아니다.
55절, 다른 제자들도 거의 갈릴리 출신이었지만 예수의 십자가형 앞에 제자들(남자)은 없었다. 한 사람이 남아있었지만 세 복음서 기자들은 그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마태 자신이 제자들을 의도적으로 혹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7. 27:57-66 무덤에 장사되심(막 15:42-47; 눅 23:50-56; 요 19:38-42)
예수를 좇던 사람들이 모두 흩어진 상태에서 감히 참형으로 죽은 예수의 시체에 관심이 있을리 없었다. 그러나 유대의 높은 지위에 있던 아리마대 요셉이 당당하게 빌라도 앞에 나아가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것은 요셉의 마음이 결정되었고 확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하여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57절, 안식일이 그 날 초저녁부터 시작했기에 안식일을 범하지 않고 장사 지내기 위해서는 요셉이 어둘 때가 아니라 해지기 전에 왔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밤이 되기 전에 무덤에 안치되어야 했다. 예수의 사망과 안식일 사이에는 3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요한은 요셉 말고도 니고데모의 이름도 기록하고 있는데 요셉이 주동이 되고 니고데모는 돕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9절, 세 복음서 기자들은 장례사건을 아주 간결하게 적고 있다. 곧 향유 문제는 요한만이 언급하고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요셉이 깨끗한 세마포를 구입했다는 말만 기록했다. 그는 자신의 무덤을 예수께 제공했다.
마태복음 28장
삼일 밤과 삼일 낮을 땅의 심장 속에서 보내신 예수님은 안식 후 첫 날 드디어 부활하신다. 이 때를 가리켜 “안식일이 끝날 무렵, 그 주의 첫날 새벽이 시작될 때”(마28:1)라고 말한 때는 토요일 오후 여섯시쯤이 된다. 이방인에게는 아직 토요일 저녁이지만 유대인에게는 이미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이다.
27장에서 지상생애를 모두 끝마치신 예수는, 28장에서 부활 후 마지막 사역을 행하시며 제자들에게 마지막 위임사항을 전달하신 후 하늘로 오르신다. 장엄했던 왕의 행적과 왕국의 복음이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유대인의 왕을 다룬 마태복음서는 막을 내린다.
구조분석
28:1-10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막 16:1-8; 눅 24:1-12; 요 20:1-10)
28:11-15 경비병의 보고
28:16-20 마지막 명령(막 16:14-18; 눅 24:36-49; 요 20:19-23; 행 1:6-8)
1. 28:1-10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막 16:1-8; 눅 24:1-12; 요 20:1-10)
다른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이, 두 마리아는 다시 한번 주님의 무덤을 찾았다. 아마도 이들은 전날에도 예수님의 장사를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무덤을 또 찾았다는 것은 지난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로 밤을 지새운 것이 분명하다.
1절, 유대인의 하루는 오후 6시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오후 6시에 마치는 것이다. 안식 후 첫날 미명은 일요일 이른 아침, 밝아지기 시작할 때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시간은 금요일 오후 3시경이다(27:46~50). 예수님의 매장은 안식일이 막 시작되는 저녁에 있었다(27:57). 유대인 군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는 일은 안식일이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여 다음날 토요일이 되었을 때이다(27:62). 안식일 저녁, 곧 안식일이 끝나는 토요일 저녁이 지나고 다음날 해가 뜰 무렵은 주일(일요일) 새벽녘이다. 그렇다면 이날은 27장 64절에 언급된 제3일째 되는 날이다.
2절, 예수께서 나오시기 위함이 아니라 여인들이 들어갈 수 있게 돌을 굴려낸 것이다. 마가는 이들이 온 목적은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미리 사두었다가 그것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에 왔다고 진술한다. 마태는 그들이 온 목적은 무덤을 다시 한번 보기 위함이었고 이미 장사지낸 굴은 봉인되었고 파수꾼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몸에 향유를 바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3절, "하얀, 빛나는" (밝게 빛나는) 것을 뜻한다.
9절, "만나다, 마주치다", 여자들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예수의 부활의 몸을 만지게 되었다.
2. 28:11-15 경비병의 보고
천사의 말과 차이점은 “그의 제자들“대신 ”내 형제들”이라고 해서 예수를 버린 제자들을 수용하는 마음을 보였다. 두 여인이 예수 부활과 그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보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주려고 갈 때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던 자들 중에 일부가 도성으로 들어가서 일어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했다(11절). 보고받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회의소집하고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에게 돈을 주고 예수의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도적질해 갔다고 유포하게 했다.
3. 28:16-20 마지막 명령(막 16:14-18; 눅 24:36-49; 요 20:19-23; 행 1:6-8)
열한 제자들은 갈릴리에 있는 산으로 가서 그에게 경배했다. 부활하신 권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이기에 제자들은 온 세상에 나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 삼아야 한다.
18~20절, 태국(치앙마이) 땅에 우상 건물들이 들어서는데 한국성도들이 돈벌어서 태국 땅을 더 많이 사서 교회를 건축하기를 기도한다. 금년에 태국선교센터(480평, 3층)가 완공된다.
19절, "모든, 온, 만민"의 뜻으로 복음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족속은 "이교도, 이방인"이란 말로 유대민족 외에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뜻이다.
19절, "이름, 권위, 대의"의 뜻으로 세 이름에 대한 별도로가 아니라 모두 단수로 묶어서 3자가 모두 동일함을 의미하는 삼위일체를 증명하는 하나의 개념으로 말씀하신다. 제자들에게는 이 세 이름을 사용하라는 것은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의 모든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20절, 최고의 약속을 주신 현시대의 종말까지를 뜻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를 말한다.
수난의 계절에도 이기게 해 달라고 매주일마다 가슴으로 힘껏 부르는 “민족의 가슴마다 피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모든 사람의 마음과 교회와 가정에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해 주소서!....한손엔 복음 들고 한손엔 사랑을 들고 온 땅 구석구석 누비는 나라 되게 하소서!....“라는 복음송처럼 온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