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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산 팔영산에서 푸른 바다를 품다
1. 일자 :
2. 장소 : 팔영산 (609m)
3. 행로 및 시간
[능가사(
4. 동행 : 홀로
< 팔영산 산행을 준비하며 >
일주일째 나라 전체가 서해상에서 침몰한 군 초계함의 승조원 수색과 사고원인을 둘러싼 추측들로 뒤숭숭하다. 해양 구조장비의 눈부신 발달로 바다 밑을 육지처럼 관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 예상은, 베테랑 UDT 대원의 구난활동 중 사망을 확인하고는 여실히 무너졌다. TV나 영화에서 자주 보던 심해의 맑은 모습과 여유로운 구난활동들은, 초계함이 침몰된 우리 서해에서는 재현되지 못하고 있다. 내 추측과는 달리 수심 40미터 정도의 바다는 심해이고, 바다 속은 눈 바로 앞이 안보일 정도로 혼탁했으며, 우리 군이 보유한 구난 장비들은 부실하였다. 무엇보다도 높은 파도와 비바람에는 아무리 뛰어난 구조요원도 힘을 쓸 수가 없나 보다. 자연의 범접할 수 없는 힘에 다시금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어서 빨리 승조원의 생사가 확인되고 사고 원인도 시원하게 밝혀 지기를 바란다.
뒤숭숭한 마음으로 한 주를 보내고 다시 주말을 맞는다. 수요일과 목요일 또 비가 내렸다. 올 겨울과 봄은 내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기상 이변의 연속이다. 계속되는 혹한과 한 주도 거르지 않은 눈/비와 부정확한 예보는, 역시 자연의 변화는 인간이 아직은 정확한 예측하기 힘겨운 것임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산행지를 물색하다가, 참K2에서
팔영산을 간다기에 일찌감치 신청을 한다. 팔영산은 멀리 전라도 고흥 땅에 위치한 산이다. 하루에 오가기에는 참 먼 곳이다. 버스만 왕복 10시간은 탈 것이다. 지난 봄 두륜산과 월출산 산행 경험이 있어
당시보다는 심리적 거리는 가까워졌으나 그래도 먼 곳이다. 능가사가 있는 성기리나 강산폭포를 지나게 되는
강산리 어느 쪽에서 올라도, 중간에
팔영산은 중국 위나라의 왕의 세수대야에 그 모습이 비춰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전설이 서린 산이다. 중국 왕을 끌어 들인 것 까지는 모르겠으나 왜 하필이면 세수대야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당초는 산 이름이 팔전산 등으로 불리었으나, 그 왕이 직접 이곳을 찾아 보고 비로소 ‘그림자 영’자를 붙여 주었다고 자랑스럽게 해설까지 하고 있다(등산로 입구 ‘팔영산 봉우리의 명칭 유래’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지독한 사대정신에 기인한 기분 나쁜 이야기다. 바위와 산이 어우러진 멋진 풍광이 있는 산인데 분명 이런 허접산 전설보다 멋진 ‘사실’을 내가 직접 확인해 보아야겠다.
< 희망사항 >
산을 오르며, 옛 ‘장꼴라’ 왕의 말 같지 않은 전설이 아닌 8개의 멋진 암릉이 바다에 그림자를 드리운 팔영산의 진전한 모습을 보고 싶다. 바다에 비친 산의 모습, 상상만으로도 멋지다. 근 일 년 만에 다시 찾는 남도 땅의 산이다. 지난 봄 두륜산의 꽃 소식을 기대하고 올랐으나 눈이 덜 녹은 암릉에서 무척 고생한 경험이 생생하다. 그 뒤 월출산에서 잊지 못할 멋진 암릉의 경관으로 충분히 보상 받았으나, 아직도 이른 봄 남녘의 꽃 소식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픈 마음은 여전하다. 팔영산이 바위 산이라 꽃 구경을 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내심 기대는 적지 않다.
등산로 들날머리의 역할을 해 줄 능가사는 화엄사, 송광사, 대흥사와 함께 호남 4대 사찰로 꼽히던 유서 깊은 절이다. 봄 날의 산사 부근에서 새 생명의 움터오름을 목격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내 산행 경험에 ‘팔(八)’ 자 형상의 산은 여러 번 올랐지만(동강 백운산, 소백산 어의곡리-천동리 코스 등 모두 힘들었다), 팔(八) 자 이름의 산은 처음이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다른 팔자산 ‘팔봉산(홍천, 서산)’도 찾아 보고 싶다.
오가는 길이 먼 만큼, 부디 동행하는 산꾼들이 시간을 잘 지켜주어 귀가가 너무 늦지 말았으면 좋겠다. 혹 불가피하게 늦어지더라도 스스로 짜증을 부리어 좋은 기분을 망가뜨리지 말자고 미리 다짐해 본다.
사설이 길었다. 자! 그림자의 산으로 긴 여행을 떠나보자.
< 팔영산 가는 버스 안에서 >
새벽, 양재로 향하는 길에 몸에 와 닿는 공기가 서늘하다. 해가 길어져서 인지 6시가 조금 넘었는데도 주위가 훤하다. 하늘은 더 없이 맑다. 오늘 등산은 날씨가 제 몫을 해 줄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든다.
양재에 도착하니 참K2의 타고 갈 버스는 안 왔고, 근처에서 다모아의 박대장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눈이 마주치면 계면쩍을 까봐 못 본체 한다. 그들은 오늘 변산엘 갈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다모아가 가장 마음에 맞는 산악회이지만 최근에는 행선지가 서로 맞지 않는다. 10여분 기다린 끝에 참K2 버스에 올랐다. 처음 찾는 산악회라 낯설다. 버스 안은 빈자리가 없다. 등반대장이 여자다. 왕초는 제주에 갔단다. 분위기가 괜찮다.
김밥 한 줄 먹고, 눈을 감는다. 정안에서 한 번, 장성 부근에서 한 번 2번을 쉬고도 광주, 순천, 벌교를 지나 1시간 30분 정도를 더 가서야 고흥 땅에 도착했다. 참 멀다. 광주를 지나고부터는 눈을 감아도 잠이 안 온다. 차창으로 바라보는 남녘의 산하는 서울 근교와는 많이 다르다. 간간이 산도 보이나, 대부분의 지형은 평야다. 따스한 봄기운이 만연하다. 들녘은 밭 작물로 푸릇푸릇하고, 야산에는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피고 있다. 길가 벗나무는 아직 며칠은 더 있어야 개화될 듯하다. 순천, 벌교 땅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차장으로 뵈는 낯선 풍경에 눈을 떼지 못한다. 고흥 읍내를 거쳐 몇 굽이를 더 돌아 능가사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12:29). 양재 출발 기준 5시간 15분이 소요되었다. 등산 마치고 오늘 중에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
능가사에서
버스에서 하차 직전 대장이
타임 스케줄을 하달한다.
단체 사진을 찍고, 능가사로 향한다. 길가에 새빨간 꽃이 만개한 동백나무 한 그루가 우리를 반긴다. 횡재한 기분이다. 길가를 따라 식재한지 얼마 되지 않은 벗나무에 꽃들도 앙증맞게 피어 있다. 이제 막 어린 티를 벗고 있는 우리 딸내미 같다. 몇 년 후 저 벗나무가 굵게 자라 큰 꽃방울을 피울 때쯤이며, 우리 민정이도 보다 성숙한 젊은이가 되어 가고 있을 것이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관심 가는 무언가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은 행복이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 가며 더 실감나는 감정이다.
호남 4대 사찰 중 하나인 능가사는 주차장 바로 위로 있다. 사천왕이 있는
천왕문을 지나 석가모니 불을 모신 대웅전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자세한 절집 구경은 하산 후에
하자(항상 이렇게 다짐하고는 하산 시에는 시간과 심신의 피로를 핑게로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 상례였다. 오늘은 왠지 다를 느낌이다)하고 지나친다. 잠시 걸으니 팔영산의 조망이 한 눈에 들어온다. 1봉인
< 들/날머리에서 본 팔영산 >
팔영소망탑 좌측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사진 찍고 스틱 챙기느라 조금 지체했더니 금새 일행과 거리가 꽤 벌어졌다. 만회하느라 속도를 내니 몸에 무리가 간다. 5시간 이상을 앉아 있다가 곧바로 걸을라니 힘겹다. 초입 오르막이 예사롭지 않다. 가뜩이나 몸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 뒤처졌고 오르막 길이니 죽을 지경이다. 홀로 걷는 산행 길은 내가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데 후미 대장이 바짝 달라 붙으니 어쩔 수 없다. 초반부터 땀을 뻘뻘 흘리고 30여분을 걸으니 작은 정자가 보이고 그 옆으로 흔들바위가 서 있다(13:05).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다. 전열을 다시 점검한다.
< 처음 열리는 순천만 바다 전경 >
흔들바위는 초반 이정의 역할은
충실히 해 주고 있으나, 사실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볼품없는 그냥 길가 바위이다. 10여분 완만한 오르막을 오르니 흔들바위 0.5km,
비스듬한 바위 난간 사이의 작은 평지에 식당을 차린다. 지상 최고의 전망을
조망할 수 있는 특급 라운지다. 어제 먹다 남은 김치와 생선이 낡은 락앤락에 담겨 있다. 한 입 먹고 차 한 잔 마시니 신선이 따로 없다. 뱃속에 음식이
들어가니 주위가 달라 보인다. 훨씬 풍요롭다. 남해의 굴곡
많은 해안 너머 점점이 섬들이 아스라하다. 바로 위 유영봉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시끄럽다. 그들도 식사를 하나 보다. 지나는 사람들이 나를 의아하게 바라본다. 마치 홀로 처량하게 뭐하고 있나 하는 표정이다. 게이치 않는다. 산에서만큼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절대 남 눈치보지 않는 것이 내 철칙이다. 후미에서 같이 오르던 노란 옷의 넉살 좋은 ‘미녀 산꾼’이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산악회 일행 모두가
< 1봉에서 2봉을 바라보며 / 2봉에서 돌아 본 1봉 >
식사를 마치고 작은 바위를 올라 서니
< 유영봉에서 깃대봉 >
암릉에 오르니 조망도 좋고
바람도 서늘하다.
성주봉에 올라선다(14:14). 고생하며 오른 것 치고는
< 2봉 성주봉에서 / 3봉 생황봉에서 >
생황봉에 도착(14:14)해 주위를 살피니 멀리 팔영산자연휴양림의 모습이 아스라하다. 하늘과 바다가 명징하다. 사람들은 삶은 지치면 바다를 그리워하고, 그 그리움은 섬에 가고픈 마음으로 발전하곤 한다. 망망대해 그 절대고독의 끝에 위치한 섬에서 외로움의 한계를 경험해 보고픈 마음일 것이다. 척박한 삶은 아래로 아래로 내동댕이 처 봐야 다시 위로 올라 올 스스로의 의지와 힘을 만든다.‘회복탄력성’이라는 말이 있다. 다이빙대에서 밑으로 굴렀다 다시 올라야 높이 도약할 수 있다. 문뜩 우리 벤처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도전과 잡초 같은 회복탄력성이 아닌가 싶다.
< 사자봉에서 / 6봉 가는 길 >
생황봉에서 사자봉(14:22) 오르는 길도 역시 험하다. 군데군데 바위 틈으로 얼음이 남아있다. 사자봉에서 오로봉(14:25)은 지척이다. 들머리에서도 붙어 있는 듯 보이더니 실제 거리도 무척 가깝다. 오로봉의 유래는 다섯 신선들이란다. 지형을 보아서는 너무 같다 붙인 것 같다. 1봉에서 5봉에 오르는데 체 30분이 걸리지 않았다. 오르내림이 심해 체력 소모는 크나,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3주 연속 암릉 산행이다. 도락산, 관악산 그리고 오늘 팔영산. 도락산과 관악산도 좋았지만 산과 바다를 경험할 수 있는 팔영산 암릉 길이 역시 최고다.
5봉에서 6봉 가는 길은 긴 암릉길을 내려 서야 한다. 오를 때는 몰랐는데 내려서서 반대편을 바라보니 쇠 난간이 길게 이어진 모습이 자못 험해 보인다. ‘저 길을 내가 지났단 말이지’.
< 오로봉 부근 전경 / 두류봉에서 >
6봉(14:36) 부근에서 산악회 일행들과 만났다. 쾌활한 노란 옷의 미녀 산꾼은 주위를 즐겁게 해 주는 마력이 있나 보다. 그녀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쾌활하니 인기가 만점이다. 그 분위기에 잠시 동참했다가 이내 다시 홀로된다. 나만의 산을 즐기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6봉에서 7봉 가는 길은 상대적으로 멀게 느껴졌다. 가파른 길을 내려서니 이정표가 서 있다. 휴양림 0.8km, 능가사 2.6km. 8봉으로 가지 않고도 능가사로 하산하는 길이 있음을 알리는 이정표다. 다시 길을 나선다. 훌륭한 경치도 자주 대하니 이제 웬만해서는 눈길이 가지 않는다. 7봉 전에 작은 석문이 보인다(14:45). 두 돌기둥 사이에 다른 돌기둥이 올라 서 있는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팔영산의 경치가 워낙 좋다 보니 석문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아 보인다. 마치 비싸고 맛난 음식들 사이에 자주 먹던 음식을 대할 때의 느낌이다.
석문에서 칠봉(14:47)은 지척이다. 사진을 찍고 가는 일행들이 말한다. “ 이 좋은 경치도 이제 하나 남았네. 아쉽다”. 나도 그렇다. 힘겹게 오르내리느라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팔영산의 산과 바다가 어우러진 모습은 내가 다녀 본 산중에 최고 수준이다.
칠봉에서 가야 할 팔봉을 조망하니 거리가 꽤 멀어 보인다. 중간에 철 계단도 보이고, 내처 길을 따라 눈을 돌리니 정상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길이 험해도 이제 마지막이라는 희망과 아쉬움이 발길을 재촉한다. 오늘은 오르는 내내 매양 바다가 훤한 좌측 방향만을 보아왔다. 이제 우측으로 눈 길을 주자, 저수지도 보이고 그 너머로 이름 모를 산들이 꿈틀거린다. 그 모습이 힘차다. 그 너머로는 다시 바다가 보인다.
< 칠성봉에서 / 팔봉가는 길의 풍경 >
칠봉에서 안부에 내려서자 너른 반석지대가 나오고 부근에 산소 한 구가 있다. 부근에 헬리포트도 보인다. 바다의 은빛 여울이 참 곱다. 잠시 평탄한 지역을 내려서자 곧이어 팔영산 특유의 하얀 쇠줄이 길게 이어진 험로가 나온다. 오늘 등산 길 마지막 로프길이라 생각하고 편한 마음으로 다시‘유격전’을 펼친다. 드디어 8봉 적취봉에 도착했다. 사방의 전경이 파노라마처럼 흘러 가고 있다. 그 가운데 내가 서 있었다. 온통 푸른빛 일색이다. 하늘도 바다도 내 마음도 푸르다.
8봉을 뒤로 하고 내려 오는 길가에 이정표가 보인다. 탑재 1.2km, 능가사 3.2km, 깃대봉 0.3km. 깃대봉은 평지 길로 지척인 거리에 있었다. 예까지 왔는데, 정상을 밟아 보고 가지 않으면 후회가 될 듯하여 이내 깃대봉으로 향한다. 가는 길가에 신갈나무가 무리 지어 서 있다. 특유의 흰 색 줄기가 햇살에 반사되어 밝은 기운이 넘친다. 지난 주 관악산 산행에서 참나무의 수종별 감별법을 익힌 후 바로 실전에서 확인할 수 있어 기뻤다. 이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을 것이다. 작은 언덕을 넘자 또 헬리포트가 나 온다. 주변으로 커다란 까마귀들이 떼지어 날아 다닌다. 부근에 까마귀 서식지가 있나 보다. 가까이서 보니 까마귀가 이리 큰 줄은 미처 몰랐었다.
< 팔봉에서의 풍광 >
잠시 후 여러 번의 어지러운
이정표를 지나 팔영산 정상에 섰다(15:19). 깃대는 없고 표지석만 덜렁 서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웬 연구소 같은 건물이 보인다. 가 보지 않아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한산하다. 사람들이
없는 휑한 주변이 볼품이 없다. 한참을 서성여도 나타나는 사람들이 없는 것으로 보아. 뒤따르던 일행들은 바로 능가사로 하산했나 보다. 나만이 정도를 지킨
산꾼인냥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 팔영산 깃대봉에서의 전경 >
< 깃대봉에서 능가사 >
시간이 3시 20분을 넘어 가고 있다. 일방적이긴 하지만 약속된 4시 30분에 능가사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걸어야겠다. 스틱을 배낭에서 내린다. 보행법을 익히느라 집고 걸으니 다리에 무리가 크게 덜하다. 이래서 스틱이 필요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미친다. 한적하고 완만한 너덜 길을 천천히 내려가니, 곧 전망데크가 보인다. 주변 경관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오히려 근처에 대나무 숲의 푸른 기운이 더 인상적이다(15:32). 겨우내 푸르름에 목말라 있다가, 대숲을 보니 싱그럽기가 그지없다.
고도가 낮아지니 길가에 간간이 꽃들이 보인다. 웬 나무가 노란 꽃을 피우고 있길래 살피니, 줄기가 밴질밴질한 것으로 보아 생강나무다. 예전에는 산에 피는 노란 꽃은 개나리나 산수유로 알았는데, 우리 야산에 피는 노란꽃은 대부분 생강나무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산수유도 노랗지만 산수유는 줄기가 거칠어 생강나무와 구분되며 대부분 무리 지어 민가 부근에 심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다시 이어지는 길은 전나무 숲이 울창한 지역을 지나 탑재가 나온다(
< 능가사 부도밭 / 능가사에서 본 팔영산 / 목련 아래에서 >
계곡의 지류가 산길을 따라 흘려 길이 진창이 되었다. 개의치 않고 내려 서니 이내 능가사다. 오늘은 들머리에서의 약속을 지켜, 절 안으로 들어갔다. 요사체 옆으로 작은 절집이 있고, 너른 마당을 지나 커다란 대웅전이 웅장하게 서 있다. 주변으로는 동백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부근에 벗나무와 목련도 한창이다. 바야흐로 봄을 실감한다. 대웅전 절집 처마 옆으로 팔영산의 모습이 근사하다. 내가 지나온 바로 그 곳이다.
< 에필로그 >
산행을 준비하며 희망했던 많은 것들이 이루어진 하루다. 바다에 드리운 팔영산의 멋진 풍광을 감상할 수 있었고, 날씨가 좋아 오랜만에 참 멀리를 볼 수 있었다. 완연한 봄에 푸른 하늘과 푸르른 산, 더 푸른 바다를 원 없이 감상했다. 3주째 이어지는 암릉 산행에 무릎에 무리는 가지만, 이 계절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다 구경하고 간다. 동백, 개나리, 목련, 벗꽃, 오래되어 더욱 값져 보이는 이끼가 낀 부도밭 그리고 봄의 싱그러움 말이다.
그림자 산 팔영산에서, 암름 산행의 진수를 맛본다. 그림자의 전설이 아닌 바위 능선 그 자체가 팔영산의 차별적 경쟁력이 될 수 있음을 자랑해도 되겠다. 바다와 섬의 그 명징한 대비도 팔영산이 가진 소중한 자산임을 이 땅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산악회에서 준비한 하산 음식을 먹고 5시 20분경 귀경길에 오른다. 갈 길이 멀어 걱정이다. 오늘 중에 집에 들어갈 수 있었으면 하고 다시 바래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