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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
발발:1894.10월 ~종료:1906년 7월 12일
1.개요:
19세기 말 프랑스가 유대계 프랑스군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년~1935년)가 1894년 독일 제국에 군사 기밀을 넘겼다는 조작된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이 사건은 프랑스 국내외에서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논란이 발생한 사건이다.
피해자 드레퓌스는 뜻있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10여년 다행히 몇 년 만에 석방되었지만, 그 후에도 이 사건은 오랫동안 프랑스 사회의 치열한 논쟁과 대립으로 남아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는 근대 이래 인권을 표방하던 프랑스에서의 반유대주의가 극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 사건이었으며, 동시에 인권 운동과 시오니즘이 태동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배경:
1894년 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년)의 충격에서 24년째 완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프랑스의 패배로 끝나자 프랑스 여론은 들끓어 올랐다. 즉 패배의 원인을 누군가에게 덮어 씌우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프랑스 패배의 원인이 암묵적인 반역 행위가 있었다는 마녀사냥은 결론과 함께 정부는 강력한 군사력 증강과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정책에 몰두하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는 여러 차례의 혁명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개인의 인권을 중요시했고, 가장 먼저 유대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할 만큼 민족이나 인종을 넘어서는 포용력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3공화정 치하인 1890년대의 프랑스 사회 내부에서는 아직도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뚜렷했다. 특히《라 리브르 파롤》(La Libre Parole)과 같은 반유대주의 신문의 창간은 프랑스 국민사회의 민주주의에 반하는 인종차별적인 정서를 고조시키고 있었으며, 1892년 프랑스 정국을 발칵 뒤집은 파나마 스캔들에 유대계 자본이 관여했음이 밝혀지면서 대중들 사이에서도 반유대주의가 고조되었다.
프랑스인들은 강력한 군대와 국가를 열망했고, 이러한 국가주의적인 정서는 반유대주의 사상 등과 더불어 점점 더 배타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처럼 ①패전으로 인한 혼란, ②국가 제일주의, 그리고 ③반유대주의 정서가 맞물리면서 결국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키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제3공화국과 독일 제국은 치열한 첩보전을 바탕으로 유럽 대륙에서의 실권을 장악하려고 애썼다.
또 하나는 드레퓌스가 알자스-로렌 지방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알자스-로렌은 게르만 문화의 영향을 꽤 받았던 지역이었기에 프랑스 내에서는 알자스-로렌 출신에 대해 약간 편견이 있었다. 드레퓌스가 유대계라는 점 뿐만 아니라 알자스-로렌 출신이라는 것이 이 사건의 불을 지피는데 있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3. 전개:
-1894년 9월:
1894년 9월,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 정보국은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관의 우편함에서 한 장의 편지를 입수했다. 수취인은 독일 대사관의 무관이었던 막시밀리안 폰 슈바르츠코펜 육군 대령이었다.(그는 죽기전 “자신은 드레퓌스를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프랑스 정보국은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지목하였는데 이유는, ① 간첩은 포병 출신의 수습 참모일 것이다. ② 간첩의 성씨는 D로 시작한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수습참모 인사 파일철을 뒤적거리다가 D로 시작되는 유일한 수습참모였던 드레퓌스가 지목된 것이었는다. 그의 파일에 유대인이라고 적힌 것을 확인하자마자 이를 찾아낸 파브르 대령과 그의 부관인 다보빌 대령은 쾌재를 불렀다.
1894년 12월 19일 파리 근교의 한 궁전 건물에서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이 시작된 지 4일 만에 심리가 종결되었다....중략...프랑스 군부는 자기네가 생각해도 하도 관련 정황이 개판이니까 드레퓌스에게 자백을 한다면 가족과 함께 유형을 빙자해 요양할 수 있는 경치 좋은 곳에 보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드레퓌스는 오로지 공정한 재판만을 바란다고 거절했다.....중략....
반유대주의에 물든 프랑스군 상층부는 졸속 증거와 재판으로 유대인인 드레퓌스 대위를 범인으로 단정하여 종신형에 처했다.
프랑스군은 물론 가톨릭 교회와 우익 언론들은 일제히 드레퓌스를 비난하고 반유대주의를 선동했으며, 당시 프랑스 사회는 드레퓌스를 탈탈 털어 뼈도 안 남길 정도의 험악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처벌당하는 장교는 군의 명예를 생각해 조용히 끝내는 게 보통인데 드레퓌스 대위는 전 포병연대원들이 연병장에 도열한 가운데 다른 장교가 드레퓌스의 예복에서 계급장과 훈장, 단추[20] 등을 억지로 떼어내고 예도를 분지르는 굴욕적인 강등식을 공개적으로 행했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유대인을 죽여라!" 라는 구호를 외치는 군중을 본 드레퓌스는 평소 무척 점잖은 성격이었음에도 참지 못하고 "프랑스 만세! 나는 죄가 없다!"라고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항변했다.
드레퓌스는 종신형에 처해져 ‘악마’섬‘으로 유배되었다. 드레퓌스가 라로셸에 내리자 흥분한 폭도들이 몰려와서 드레퓌스를 마구 구타했는데 호송하는 헌병들이 폭도들을 막으려고 하자 드레퓌스는 경비병들을 저지하면서 자신의 셔츠를 뜯어 가슴을 풀어헤치고 "나를 모욕하지 마시오. 당신들이 꿰뚫어보지 못하는 이 가슴 속의 심장은 깨끗하며 아무런 오점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내가 죄가 있다고 믿는다면 자, 내 몸뚱이를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내 몸을 아무런 후회 없이 당신들에게 바치겠소."라며 그들을 마주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감화하여 조용해졌다고 한다.
드레퓌스는 악마 섬에서 혹독한 복역을 치러야 했는데 24시간 내내 감시를 받았고 밤에는 두 발에 겹으로 찬 쇠사슬을 차야 했고 적도의 무더위에도 짐승만도 못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 그나마 아내 뤼시가 편지에 써 보내 준 믿음과 사랑 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드레퓌스는 머지않아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그렇게 형무소에서 병들어 죽는 것으로 드레퓌스의 운명이 정해진 것으로 절망한 순간 한 줄기 진실이 찾아들었다.
-1896년:
2년뒤 1896년, 참모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우연히 당시의 문건을 열람하였다. 이 배경도 기가 막혔는데 원래 국방장관 오귀스트 메르시에(Auguste Mercier, 1833년~1921년)는 형법을 기만하고 드레퓌스를 누명씌운 걸 은폐하고자 관련 증거를 모두 없애라고 정보국에 지시했다. 그런데 정보국에서는 메르시에가 각종 위법행위를 자신들에게 꼬리 자르기를 하려 시도한다고 여겨서 증거를 은폐하지 않고 비밀 서류철로 잘 정리해서 숨겨놓았다. 그 뒤 피카르 중령이 새로 부임하자 전임자인 장 상데르(Jean Sandherr, 1846년~1897년) 중령이 그에게 관련 자료를 넘겨준 것이다.
한편 굉장히 촉망받던 드레퓌스가 어쩌다가 반역자가 됐는지 그 동기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를 일리 있다고 판단한 피카르 중령이 자체 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그는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지목할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는데 정보국에서 방첩대 실무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던 에스테라지 육군 소령의 문체가 명세표와 똑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말인가하면, 간첩 잡기가 임무인 장교가 제가 저질러놓고 드레퓌스에게 뒤집어 씌었다는 얘기다.
피카르 중령은 이 조사 결과를 상관인 공스 장군에 보고하고 재심을 요구하지만 참모본부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자기들 목이 날아갈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드레퓌스 사건을 그대로 묻어 버리려고 했고 피카르 중령은 오히려 욕을 먹어야 했다.
공스: "도대체 자네는 무엇 때문에 그 유대인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나?"
피카르: " 그 사람은 죄가 없으니까요"
공스: " 이봐! 국방장관과 참모총장[25]이 이미 끝난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래 자네는 다시 재판을 열자는 말인가?"
피카르: "장군님, 그 사람은 무죄입니다."
공스: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이 진실이라고 하면 내게는 그게 진실이야. 자네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피카르: "장군님 말씀을 듣자니까 구역질이 납니다. 아직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이 비밀을 죽을 때까지 감추지는 않을 겁니다."
결국 피카르 중령은 동부의 정보당국 시찰을 명목으로 파리에서 쫓겨났고 이후 프랑스령 알제리와 튀니지 파견을 강제로 떠나면서 사실상 좌천되었다. 대신 드레퓌스를 음해하는 데 적극 앞장선 앙리 소령이 정보국장 대리로서 정보국을 장악했다. 스스로 쓰고 남에게 간첩이라고 뒤집어 씌운 에스테라지는 여론에 못 이겨 체포되었지만 몇 달 뒤 은밀히 영국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드레퓌스 사건이 워낙 큰 이슈였던 탓에 소문이 안 날 리가 없었다. 일단 좌천 직전에 피카르 중령이 잘 알고 지내던 변호사를 통해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유포시킨 것도 한몫했다.
와중에 동생의 무죄를 위해 포기하지 않았던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는 어느 신문사를 통해 속임수 기사를 실었는데 그 내용은 "반역자 드레퓌스의 죄를 증명할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그런데도 그것을 밝히지 않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다. 아직도 드레퓌스가 죄를 짓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그 증거를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였다.
이렇게 해서 드레퓌스란 이름이 다시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르 마텡’이라는 보수주의 계열의 신문이 '그놈의 범죄를 입증해 보이겠다'는 식으로 명세서의 사본을 공개하면서 오히려 기름통에 불을 붙였다. 사본의 서체가 ‘누구의 것이네, 아니네’에서 불붙은 논쟁이 재심 반대파와 재심 요구파로 갈리면서 마치 내전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논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재심 반대파(즉 반 드레퓌스파)는 대부분 공화주의 우익 세력들, 자유보수주의-기독교 민주주의 계열 온건 우파 세력 대부분과 소수의 왕당파 세력, 군부세력과 과격한 가톨릭주의자들, 보수 우익 정치인들 및 이와 연계된 신문들로 이들은 '국가안보 위해(危害) 세력에 대한 경고와 군의 위신을 존중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 반대편의 재심 요구파에는 양심적인 지식인과 법률가들, 공화주의자와 일부 진보적인 정치인들, 소수의 신문들이 있었으며 이 사건을 초기에는 유산 계급 내부의 투쟁으로 생각했던 사회주의자와 노동 계급이 뒤늦게 가담했다.
기득권을 형성했던 대다수의 신문들이 드레퓌스를 정죄하는 편파 보도를 하는 동안 ‘피가로 신문’이 처음으로 에스테라지를 진범으로 주목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하지만 이런 소수 신문들의 의견은 대다수 보수 신문들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프랑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 가톨릭과 보수 세력은 군의 위신을 국가의 생명으로 그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하게 보는 군국주의 사고방식에 찌들어서 "군은 절대 무오류의 조직이며 군의 위신이 곧 국가의 위신이다. 따라서 군부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곧 국가의 멸망이다" 같은 어처구니없는 주장들을 공공연히 하고 있었는데 이는 문민 통제를 무시하고 군을 중심으로 언젠가 공화국을 엎어야 한다는 보수주의자들의 시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사실 여기서 더 나간 쪽들에는 군부도 알 바 아니었는데 일부 언론은 드레퓌스를 사형에 처하지 않은 군부도 반역자라고 폭파시켜야 한다고 난리도 아니었다. 심지어 외무부가 독일에 거액의 뇌물을 받고 간첩 드레퓌스를 살려주기로 합의를 봤다는 구체적인 보도들이 아무 증거도 없는 가짜 뉴스가 돌아다니고, 드레퓌스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독일 귀족들과 회동했느니 어쩌니 다른 외국까지 끌어들이는 갖은 헛소문들이 판을 쳤다.
결국 간첩죄를 뒤집어 씌운 에스테라지는 (존재하지도 않는) '유대인 국제 비밀조직에 대항한 영웅'으로 무죄를 선고받았고, 모사했던 앙리 소령은 중령으로 진급했다.
진실을 밝히고자 시도했던 피카르 중령은 한직으로 좌천당한 것도 모자라 군사기밀 누설죄로 체포되었다.
또 드레퓌스가 체포된 지 3년 만에 우연히 명세서의 필적과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적이 동일함을 알아차린 드레퓌스의 형 마티외가 에스테라지를 고발했지만 당국은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 어쩔 수 없다'(일사부재리 원칙)는 이유를 들어 들어주지 않았다.
1898년 1월 에밀졸라 서한
“대통령 각하. 바로 이렇게 해서 사법적 오판이 저질러졌습니다. 게다가 드레퓌스의 도덕성, 부유한 환경, 범죄 동기의 부재, 끝없는 무죄의 외침은 그가 뒤 파티 드 클람 소령의 기발한 상상력, 그를 둘러싼 종교적 환경, 우리 시대의 불명예인 ‘더러운 유대인’ 사냥 등의 희생자였음을 더욱 확신하게 합니다.
[중략] 저는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인류, 바야흐로 행복 추구의 권리를 지닌 인류의 이름으로 오직 하나의 열정, 즉 진실의 빛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불타는 항의는 저의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저를 중죄 재판소로 소환하여 푸른 하늘 아래에서 조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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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조작자인 에스테라지가 유대인 국제비밀조직에 대항한 영웅으로 추앙되고, 군국주의와 국가주의가 프랑스 사회에 만연하자 이에 큰 충격을 받은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가 마침내 행동에 나섰다. 에밀 졸라는 1898년 1월 13일 문학 신문 《로로르》(L'Aurore, '여명')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냈다.
졸라는 이 글에서 아무런 근거 없이 드레퓌스를 유죄로 몰아간 첫 번째 군사 법정과, 증거가 명확한 간첩 조작자인 에스테라지를 무죄 석방한 두 번째 군사 법정을 고발하는 동시에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을 강하게 요구했다.
당시 에밀 졸라는 공개 편지를 들고 주요 대형 신문을 찾아다녔으나 모두 거절당했고 군소 신문인 《로로르》에서 간신히 승낙을 받았다. 모든 언론이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군부와 보수 세력에 완전 쫄아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던 《로로르》는 에밀 졸라의 편지가 실린 날 평소보다 10배가량 많은 30만 부라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렸다. 《로로르》의 편집장 조르주 클레망소 본인이 파장을 예상하고 이 정도로 부수를 늘렸음에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고 한다.본디 에밀 졸라가 쓴 공개편지의 제목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아주 온건한 것이었는데, 《로로르》의 편집장인 조르주 클레망소가 이 글이 불러올 어마어마한 파장을 각오하고 좀 더 호소력을 더하기 위해 〈나는 고발한다〉라는 매우 강렬하고 도발적인 제목으로 바꾸었다.로로르의 창간자이자 편집장인 조르주 클레망소는 "프랑스를 치명적 위기에서 구한 것은 사상의 자유 및 표현의 자유였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은 "나는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끝없는 찬사를 보낸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하며 에밀 졸라를 옹호했고, 홍당무로 알려진 작가 쥘 르나르도 졸라를 옹호하며 드레퓌스 사건을 조작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재심 반대파는 졸라의 기사를 길거리에서 불태우는가 하면 초상을 목매달았으며 "졸라를 죽여라!", "유대인을 죽여라!", "국군 만세!" 따위의 구호를 외치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유대인 상점을 약탈하거나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하는 등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일상을 팽개친 프랑스인들은 드레퓌스 사건에 관한 말다툼과 주먹다짐으로 시간을 보냈고[29] 각계각층의 지도자들도 인간의 권리와 국가의 이익이라는 대전제 사이에서 극렬한 논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군부는 에밀 졸라에게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 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했고 졸라는 런던으로 망명했다. 나중에 프랑스로 되돌아오긴 했지만 1902년 연탄가스 중독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의문의 이 사고는, 실제로 굴뚝 청소부가 '누군가'의 지령으로 굴뚝을 막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시 에밀 졸라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상원과 하원, 문민 권력, 군부 권력, 거대 신문, 거대 신문이 중독시킨 여론 등 모든 것이 저에게 적대적입니다. 제 편으로는 오직 하나의 관념, 즉 진실과 정의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제 마음은 너무나 평온합니다. 저는 승리할 것입니다. 저는 정녕 우리나라가 거짓과 불의 속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늘 여기서 저는 유죄 선고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프랑스가 자신의 명예를 구해준 데 대해 제게 감사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1898년 여름:
이 사건은 이미 세계적인 이슈가 되어 진보적 지식인들의 항의와 비난이 이어지고 졸라를 옹호하는 각국의 여론이 줄을 이었다. 프랑스 국내에서도 드레퓌스에 관한 일은 가장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되었으며, 이 사안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에 따라 진영이 첨예하게 갈렸다.
그러던 중 1898년 8월 30일. 드레퓌스 사건의 모의자 중 하나인 앙리 중령이 피카르 중령을 모함하기 위해 에스테라지와 함께 조작한 증거가 거짓으로 밝혀질 위기에 처하자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앙리 중령의 죽음은 사건의 새로운 분수령이 되었고, 재심파에 유리한 국면을 열어주었다. 군의 명예와 국가주의를 부르짖던 재심 반대파들은 진실을 알고자 하는 재심파의 거센 재심 요구에 다시 부딪히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간첩 조작꾼인 에스테라지는 영국으로 도망쳤다.
-1899년 9월: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고등법원의 재심은 1899년 6월 3일에 열렸다. 법원은 명세서가 드레퓌스가 아닌 에스테라지에 의해 쓰였음을 근거로 드레퓌스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던 1894년 12월의 재판이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또한 드레퓌스는 브르타뉴 지방의 소도시 렌에서 다시 군사재판을 받았다. 이때 드레퓌스는 5년 동안 외부와의 연락이 끊긴 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증인으로 출석한 참모 본부의 상관들은 여전히 증거 날조와 위증으로 일관했다. 법원은 그동안의 과정에 따른 정상을 참작하여 드레퓌스에게 10년형을 언도했다. 재판관 7명 중 단 2명만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인정했다.
"드디어 진실이 승리하는구나!" 하고 기대했던 여론이 또다시 들끓었다. 이 충격은 프랑스 내 지식인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까지 미쳐서 각국 프랑스 대사관에 시위대들이 진을 치고 항의하는가 하면 프랑스 국기 공개 화형식에, 프랑스의 모든 것에 대한 보이콧 결의안까지 나왔다.
에밀 졸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혐의가 풀려 영국에서 귀국했던 졸라였지만 다시 펜을 들어 재심판결의 부당함을 폭로하면서 여론을 주도해 나갔다.
결국 국내/외 여론에 밀린 프랑스 군부는, 드레퓌스에게 유죄 판결을 인정하는 대신, 즉각적인 사면을 제안함으로써 사건을 일단락하려고 했다. 많은 재심파의 인사들은 유죄 인정에 대해 반대했다.
그러나 정작 드레퓌스 본인은 5년간의 수감생활 동안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라서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당시 드레퓌스는 말라리아에 걸려 투병하고 있었으며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어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였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 버렸다.
참혹하게 병약해진 드레퓌스는 이 절충안을 수용하였다. 드레퓌스의 항복으로 인하여 드레퓌스파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군경력을 걸고 그의 복권을 위해 노력한 피카르 중령은 한동안 드레퓌스에게 절연을 선언했다. 조르주 클레망소 역시 드레퓌스에게 "우리가 지난 10년간 싸운 건 단순히 당신 하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로운 조국의 건설을 위해서였다. 당신은 당신의 편안함만 생각하느냐?"고 항의했으며 샤를 페기(Charles Pierre Péguy, 1873년~1914년)는 "우리는 드레퓌스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데, 드레퓌스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한편 프랑스 유대계는 드레퓌스 사건의 장기화가, ‘반유대주의를 강화’할 것이라고 여겨 드레퓌스의 사면 수용을 지지했다.
드레퓌스 본인도 극도로 지친 나머지 자신을 비난하는 재심파들에게 "제발 잠자코 있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자백해 버리겠소.", "당신들도 알겠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소?"라고 심경을 표출했다.
-1899-1904년:
사건을 종료되지 않았다. 1899년 드레퓌스파가 정부를 구성하였고 계속된 지식인들의 격려에 힘입어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만인 1904년 3월 드레퓌스는 형 마티외의 도움으로 새로운 증거들을 첨부하여 최고재판소에 재심을 청구했다.
-1906년:
1906년 7월 12일 최고재판소는 렌 군법회의의 유죄 판결을 오판으로 파기해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드레퓌스와 드레퓌스의 무죄 재판을 제소한 조르주 피카르를 중령을 복권시켰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에게 소령 특진과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훈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지난날의 과오에 대해 사죄했다. 드레퓌스는 무죄 선고를 받은 뒤 열흘 만에 군대로 돌아왔고 사관학교 연병장에서 열린 행사에서 육군 소령 계급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드레퓌스는 복권되어 잠시 군에 복무하였지만 유형기간 내내 쇠약해진 몸 때문에 다음 해 전역해야 했다. 부당한 판결로 10년간 군문을 떠나 있었던 것에 대한 보상도 받지 못했으며 단지 명예전역을 하는 선에서 만족해야만 했다. 이후 드레퓌스는 민간인으로 조용히 지내다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소집되어 갈리에니 장군 휘하의 파리 방위군 포병참모가 되었고 중령으로 진급하여 포병병과 후방지원임무에 종사했으며 베르됭 전투 등 프랑스군의 굵직한 전투 다수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그 전공을 인정받아 이번에는 레지옹 도뇌르 오피시에 훈장을 받았고, 종전 후 퇴역하여 파리에서 살다가 1935년 7월 12일에 사망했다.
한편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대령을 건너뛰고 단숨에 준장으로 진급하여 이후 국방장관까지 지냈다. 그냥 넘어가도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을 드레퓌스 사건을 그가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문제제기를 했던 숭고한 양심과 빛나는 업적에 대한 보상일 것으로 보인다.
4. 여파
프랑스인의 두 진영
흔히 19세기 반유대주의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 받지만 드레퓌스 자신은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 서유럽에서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구분이 매우 어려웠는데 많은 유대인들이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문화적, 혈연적으로 서유럽에 거의 동화되어 버려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유대인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동유럽 및 러시아인들을 비웃거나 인종차별에 분노하는 게 당시 서유럽의 풍토였다. 그랬기 때문에 드레퓌스 본인도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조차 갖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정작 유대인이 간첩이라는 소문이 돌자마자 전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의 광풍이 일었다.
1900년대 초 사건이 일단락이 되었지만 정계에서는 일부 보수 인사들이 아직도 드레퓌스가 유죄임을 주장했고 심지어 '나는 그가 아직도 유죄임을 믿는다'는 투의 논문과 서적도 수차례 발간되었다.
국가와 군을 모든 것의 우위에 두는 군국주의 세력, 극우파의 선동에 휩싸인 대중의 광기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건으로 말 그대로 프랑스가 반으로 쪼개졌다. 실제로 재심 판결 전에 드레퓌스를 지지하던 대학 교수들은 대학에서 쫓겨나고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모조리 낙선하는 등 한때 진보파가 거의 궤멸당하기 직전까지 몰렸다.
시온 사상 발발
한편 프랑스 혁명 이후 인권과 평등을 외치면서 전 유럽에서 가장 유대인에게 관대했던 프랑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박살내고 유대인 전체를 잠재적인 반국가집단으로 낙인찍는 행태를 보인 것은 엄청난 후폭풍을 야기하였다. 전 유럽의 유대인은 엄청난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중세 시대부터 유럽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유대인 거주 구역인 게토에 모여 살았는데 교육, 육아, 결혼, 취미생활 등 모든 것을 랍비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 공동체 안에서만 해결하는 폐쇄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700년대 후반과 1800년대 초반에 이르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심으로 많은 유대계 인사들이 "우리는 (우월한) 유대인. 우리는 우리끼리만 산다"면서 주류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스스로 고립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회에서 차별받는 이유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거나 아예 종교에 연연하지 않는 삶을 통해서 유대인의 정체성을 잊고 스스로를 독일인 혹은 오스트리아인으로 규정지으면서 사회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들이 기독교 중심의 주류 사회에 융화되기 위해 노력하더라도 유대인이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다는 통찰에 이르렀다. 특히, ‘당시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국가인 프랑스에서 대놓고 유대인을 탄압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럴 바에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살려서 우리들끼리 모여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침 이 사건을 취재하던 유대인 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은 대오각성하며 독자적인 유대인 국가 건설을 주장하기 시작했으며 전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이 여기에 동감하면서 결집하기 시작했다. 바로 시오니즘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 국민들의 애국심이 그렇게 강한 것도 이때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여하튼 이 사건은 현재는 인권탄압 등의 사례로 주로 인용되며 국가가 일단 결정한 사안을 일개 개인이 뒤집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되기도 한다. 다수의 악이 소수의 진실을 억압하고 덮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근대식 마녀사냥의 전형적인 틀을 이루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