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천수경』의 원류를 찾아서
1. 들어가는 말
『천수경』은 한국사찰에서 가장 많이 읽는 경전이다. 현재 한국의 사찰에서 행해지는 불교의식 및 재가 신자들의 신행 생활이 『천수경』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출가 수행자들의 수행을 돕는 방편으로서도 중요한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대부분의 스님들이 출가 후 처음 접하는 경전이 『천수경』이며, 이를 매일 지송하면서 『천수경』 속 ‘발원’과 ‘귀의’, ‘참회’ 그리고 다라니 기도를 통해 세속적 욕망과 이기심을 벗어나 ‘상구보리 하화중생’ 이라는 대승불교의 기본정신을 훈습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천수경』은 언제, 어떻게 우리나라에 전해졌으며, 독송용으로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현행 『천수경』과 달리,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국내 전래 당시의 『천수경』 안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천수경』의 원음을 찾아 역사 속 흐름을 거슬러 보고자 한다.
2. 『천수경』의 성립 및 전래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신앙과 관련된 ‘천수다라니’ 및 그 신앙의궤를 전하고 있는 경전의 총칭으로서의 소위 천수경류 경전은 기원전 인도에서 형성된 관세음보살 신앙[1]에 바탕을 둔 채 A.D 2~3세기경 만들어진 밀교부 경전이다.
중국에 전래된 것은 기원 후 7세기이며 중국 최초의 역본은 지통 역의『천안천비관세음보살다라니신주경이』며, 658년경 가범달마에 의해 『천수천안관세음보살치병합약경』 및 『천수천안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이, 그리고 이후로 보리유지, 금강지, 불공 및 또다른 역경사들에 의해 수많은 『천수경』류 경전들이 번역되었고[2] 해당 경전만 총 18종에 달한다.
중국에서 번역된 위 경전들 중 우리나라에 최초 전래된 것은 가범달마 역본의 『천수천안광대원만무에대비심대다라니경』이며 기록상으로는 671년 의상스님이 중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후 지은『백화도량발원문』에 ‘십원육향’이 등장하며[3] 이 외에 『삼국유사』에서도 관련된 기록[4]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천수경』은 삼국시대 때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1)현행 『천수경』의 유통사
현재 우리가 독송하고 있는 현행 『천수경』은 밀교의례의 전승발전과 더불어 원본 경전의 일부에 다른 경전의 일부를 함께 편집하여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천수경류 경전의 유통과 함께 신라 중기부터 행해진 천태종의 『관음참법』 시행과 아울러 고려 중기에는 중국 송나라 때의 승僧 지례(960~1028)에 의해 찬술된 『천수경』의 독송규범서 『천수천안대비심주행』법에 의해 초기 『천수경』의 독송 양식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 간행된 밀교 관련 경전들은 거의 대부분 원본에서 발췌하거나 다시 이를 편집해서 간행되었으나 조선 중기에 불교계에서 진언집과 의식집의 편집이 활발해지고 천수다라니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독립된 경전으로 『천수경』이 다뤄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881년 간행된 『고왕관세음천수다라니경』부터 시작하여 조선 말기 조동훈이 필사한 『천슈경ㆍ불셜고왕관세음경』과 1935년 『석문의범』, 1969년 통도사에서 간행된 『행자수지行子受持』까지 이어지게 된다.[5]
2) 현행 『천수경』의 변천요인
주목할만한 점은 일반적인 경전의 경우, 본本에 따라 문장 구성의 차이, 단어의 변화, 문장의 생략과 첨삭 등의 차이가 있는 반면[6], 현행 『천수경』은 원본과 비교해볼 때 그 구성과 내용뿐만이 아니라 성격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이렇게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일까. 이에 조선중기 이후 진언집 및 의식집 등의 편찬이 활발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원본천수경』이 현행 『천수경』으로 변화하는데 당시의 시대 상황이 작용하지 않았을지 추측해 본다. 이는 조선시대가 건국 초기부터 배불정책을 폈으며 조선시대의 불교가 선 사상의 전통을 계승하였음에도 밀교부 경전이 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선사인 서산대사 또한 불교의례서인 『운수단가사』를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더욱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중기, 당시의 조선은 이상기후로 인해 자연재해가 빈발하였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까지 겹쳐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했다. 따라서 16~17세기에는 망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수륙재 의식이 빈번히 실행되었는데 자연재해와 전쟁으로 고통에 빠져 있던 서민들을 종교적으로 위로한 것이 불교의 대중화, 민중화를 이룬 역사적 배경이었고 동시에 진언다라니가 유행하는 계기였다고 본다.[7]
이러한 배경에 따라 기존의 지배계층 혹은 지식인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민중을 위한 불교로 그 성격이 변화하면서 일반인들의 불교의식과 수행참여를 위한 의식집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천수경』이 경전에서 의식집으로 변화하며 현행 『천수경』으로 변천된 것으로 보여진다.
3. 가범달마 역본의 『원본천수경』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상 대사에 의해 최초로 전래된 『천수경』은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며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갗추게 되었다. 이제 현행 『천수경』의 모태인 가범달마 역본의 『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을 살펴봄으로써 천수경의 진의에 한 발 다가서 보자[8]
1) 『원본천수경』의 주요내용
『원본천수경』은 보타낙가산 관세음보살의 궁전에 계시던 부처님께서 총지다라니를 설하시려 하자 관세음보살이 부처님께 허락을 받고 대신 설법을 하는 내용이다. 다른 경전과 마찬가지로 ‘여시아문’으로 시작하여 육성취9]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화자를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전반부에는 관세음보살이 직접 대비심다라니와 천수천안을 갖게 된 연유, 다라니 독송법, 다라니 지송의 공덕 등을 설법한다. 후반부에서는 아난의 물음에 부처님께서 답하는 형식으로 다라니의 명칭과 관세음보살의 기원, 마지막으로 관세음보살 42수주에 대한 설법이 담겨있다.
무량억겁 전 관세음보살이 보살초지{환희지}였을 때, 당시 출세하신 천광왕정주여래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을 위하여 대비심다라니를 설하셨고 관세음보살은 이를 듣고 바로 팔지{부동지}의 경지에 올라 언제나 다라니를 수지하게 되었다고 하며, 관세음보살은 다라니를 수지코자 하는 중생을 위하여 다라니 독송법을 설한다. 우선 모든 중생에게 자비심을 일으킨 후 ‘십원육향문’ 으로 발원하고, 관세음보살과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며 오롯이 생각하고, 시방의 스승들에게 참회 후 다라니를 외우되 하룻밤에 5편을 독송할 것[10]을 전한다. 이 밖에도 『원본천수경』 속에는 다라니 독송 및 수지자의 공덕과 위신력, 그리고 과거 성불한 부처였으나 일체 중생을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보살로 형상을 나투셨다는 관세음보살의 기원 등이 담겨 있다.
2) 『원본천수경』의 정수, 구심(九心)
대범천왕이 다라니의 형상을 말해주기를 청하자, 관세음보살이 답하는 소위 ‘구심九心’의 대목이야말로 『원본천수경』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며 『천수경』을 독송할 때 뿐만이 아니라 수행자로서 마음의 어느 부분에 점을 찍고 걸어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경전 속 관세음보살의 원음을 그대로 옮겨본다.
‘구심九心’ 곧 “크나큰 자비의 마음 [大慈悲心]이며, 치우침 없이 평등한 마음 [平等心]이며, 함이 없는 마음이며 [無爲心]이며, 물듬 없는 청정한 마음 [無染着心]이며, 존재를 공으로 생각하는 마음 [空觀心]이며, 늘 공경하는 마음 [恭敬心], 늘 낮추는 마음 [卑下心]이며, 어지러움이 없는 평화로운 마음 [無雜亂心]이며, 집착에 취하지 않는 마음 [無見取心]이며, 위없는 깨달음의 마음 [無上菩提心]이니, 이와 같은 마음이 곧 다라니의 모양이니 그대들은 마땅히 이를 의지해서 수행할 것이로다.
4. 나가는 글
『천수경』은 한국불교의 예불과 의식의 근간을 이루고, 수행의 방편 역할을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경전이다. 또한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해진 이래로 우리 민족에게 깊게 퍼진 관음신앙과 함께 한국불교의 역사와 함께 한 『천수경』은 종단의 구분을 떠나 각 사찰 및 재가신자들의 ‘소의경전’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천수경』에 대한 물음을 실마리로 인도에서의 『천수경』의 성립과 전래, 그리고 시대에 따른 유통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서 『원본천수경』의 내용도 살펴보았다.
팔만대장경을 한자로 줄이면 심心이 된다고 스승들은 말씀하셨다. 『원본천수경』을 살펴보면서 현행 『천수경』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았던 ‘관세음보살의 마음’을 일견一見할 수 있었다.
다만, 이번의 작업이 현행 『천수경』을 거슬러 올라가 『원본천수경』을 반영하는 과정이었다면, 다시 그 흐름을 돌려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원본천수경』이 현행 『천수경』의 구조를 갖추게 되었는지, 그 기저에 시대별 불교 위상의 변천과 당시 불교 사상의 변화속에서 『천수경』은 어떠한 영향아래 놓여졌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느낀다.
☞위의 글은 운문사 학인스님 정연스님의 {운문지, 학인논단}에 기재된 글에서 발췌한것입니다.
[1] 기원 전후에 성립된 경전으로 알려진 『법화삼부경』,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등의 경전들 및 『능엄경』의 단편들 가운데서 관세음보살 신앙의 초기형태를 찾을 수 있다.
[2] 정각, 『천수경 연구』, 도서출판운주사 1997, p.66
[3] 의상, 『백화도량발원문百花道場發願文』, “我亦頂載觀音大聖 十願六向 千手天眼 大慈大悲 悉皆同等 捨身受身 此界他方 隨所 住處 如影隨形 恒問說法 助陽眞化”
[4] 『삼국유사』, 제2권 문무왕 법민 조條, 문무왕의 아우 김인문이 당에서 옥에 갇혔을 때 신라에서는 인곡사를 짓고 관음도량을 개설 했다.
[5] 정각위 책, 김방울, 『조선시대 관음신앙 관련 불서 간행 연구』, 한국중앙연구원, 2015; 김호성, 『천수경이야기』, 민족사, 1996년
[6] 최종남, 『梵, 藏ㆍ돈황본 『금강경』 대조 연구, 『인도철학』 no. 27, 인도철학회, 2009년
[7] 남희숙, 『16~18세기 불교의식집의 간행과 불교대중화』 ,규장각 한국연구소, 2004, P. 143
[8] 편의를 위해 가범달마 역본의 『천수경』은 『원본천수경』이라 약칭하겠다.
[9] 경전의 첫 문장의 내용이 갖추어야 할 형식. 즉 신성취信成就 ㆍ문성취聞成就ㆍ 시성취時成就 ㆍ주성취主成就 ㆍ처성취處成就 ㆍ중성취衆成就를 말한다. 예를 들어 금강경 첫 문장인 [1여시 2아문 3일시 4불 5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6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 인구]에서 1 여시如是(이와 같이)는 신성취, 2 아문我聞(내가들었다)은 문성취 3 일시一時(한때)는 시성취 4 불佛(부처님)은 주성 취 5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在舍衛國祗樹給孤獨園은 처성취 6 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구與大比丘中千二百五十人俱는 중성취 이다.
[10] 지금은 일반적으로 전체 다라니를 3편 외우거나 혹은 마지막 구절을 3번 외움로써 ‘3편’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있으나, 조선 영 ㆍ정조 때의 승려 팔관이 지은 『삼문직지』에 따르면 “3편을 외우는 것은, 첫째 물든 인연을 멸하고자 하는 것이요,둘째 식심識心애 장애 되는 바를 떨쳐버리기 위함이고, 셋째 법계를 넓혀 청정하게 하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라. 그리하여 정토의 뜻을 가지는 것이 다”라고 하였다.. 정각 『천수경연구』,도서출판 운주사, 1997,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