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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미폰은 미국에서 태어났고,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스위스에서 보냈다. 클랙식카 및 풍족한 생활에 대한 애정은 결국 그의 한쪽 눈의 시력을 앗아간 교통사고를 초래했다.
푸미폰은 1946년 자신의 형 아난다 마히돈(Ananda Mahidol, 라마 8세: 1925~1946) 국왕이 총상으로 사망한 이후 즉위했다. 그의 형 아난다 국왕은 자살 아니면 총기사고로 사망했는데, 이 사건에는 푸미폰이 연루돼 있었다. 어느쪽이든 푸미폰은 당시 상황을 완벽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밀을 유지했고, 그 때문에 왕궁 시종 3명이 무고하게 처형당했고, 쁘리디 파놈용(Pridi Panomyong 혹은 Pridi Banomyong: 1900~1983) 당시 총리가 이 사건으로 인해 정적들로부터 그릇되게 욕을 먹고 [사임하게] 만들었다. 국왕으로서 푸미폰의 경력은 이렇게 기만적이고 줏대없는 방식으로 남은 인생 전반으로 이어졌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부패하고 전제적인 통치자 살릿 타나랏(Sarit Tanarat 혹은 Sarit Thanarat: 1908~1963, [집권] 1958~1963) 원수는 군부와 왕당파 사이의 강력한 동맹을 형성하기 위해 푸미폰을 이용했다. 1930년대~1940년대 사이, 절대왕정을 전복시킨 1932년의 성공적인 혁명(시암혁명) 전후로 태국 국민들 사이에서 국왕의 평판은 나빠졌고 인기도 없었다. 이 시기에는 심지어 군부의 핵심 지도자들조차 공화주의자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살릿과 왕당주의자들은 '냉전시대'를 보수파 엘리트들의 특권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푸미폰 국왕은 "반공주의" 동맹의 상징적 존재로서 체계적으로 선전됐고, 푸미폰이 바로 살릿의 핵심자산이 됐다. 심지어는 미국 정부조차 대공 전술의 일환으로 농촌지역 주민들에게 국왕의 초상화를 배포하는 사업을 지원할 정도였다. 국왕의 초상화가 없는 집은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살릿이 죽자, 그의 수하였던 타넘 낏띠카쫀(Thanom Kittikachorn: 1911~2004, [집권] 1963~1973)과 쁘라팟 짜루사티얀(Praphas Charusathien: 1912~1997)이 부패 군부의 그 다음 집권자가 됐고, 푸미폰은 그들과 공조했다.
(사진) 살릿 원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푸미폰 국왕.
푸미폰은 민주주의나 사회정의에 관해 단 한번도 발언한 적이 없었다. 또한 부정부패를 비판한 적도 없다. 군부는 국왕 및 그가 발의한 "왕실사업"(Royal Projects: [역주] '새마을사업'의 원조)을 선전해댔다. 하지만 여러 해 동안 왕실사업은 태국인 다수의 삶의 표준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73년 10월 대규모 대중 봉기가 발생하여 군사정권이 붕괴했고, [기득권] 엘리트 계층은 푸미폰이 개입하여 현상유지를 해줄 것을 종용했다. 그는 TV에 등장해 새로운 문민정부를 발표함으로써 이러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하여 푸미폰은 가까스로 "민주적 국왕"인 척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급투쟁의 먹구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베트남 전쟁'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고, 태국의 학생운동가들과 사회운동가들이 참다운 사회적 변화를 추구했던 시대였다. 그들은 공산당의 이념에 매료됐다. 푸미폰은 군부 및 보수 엘리트들과 함께 했고, 학생들과 좌파들을 공격할 '빌리지 스카우트'(Village Scouts: 의용방위군[VDC]) 같은 극우 민병대 단체들의 설립과 활동을 고무했다. 그 결과는 1976년 10월 6일에 발생한 유혈 시위진압인 '탐마삿 대학의 학살 사건'(Thammasat University massacre)이었다. 군부는 곧바로 쿠데타를 일으켰고, 새로운 독재정권 하에서 보편적인 탄압과 검열이 행해졌다. 이 해 12월, 푸미폰은 태국이 "너무 많은 민주주의를 갖고 있었다"고 발언하여 일련의 사태를 정당화했다. 좌파 진영의 태국인들은 그를 증오했다. 탐마삿 대학 학살사건 이후 태국은 정부군과 공산반군 사이의 내전 시기로 들어갔다.
(사진) '빌리지 스카우트' 대원들을 접견하는 푸미폰 국왕.
1980년대 중반이 되자 태국에는 민주적 공간의 문이 열렸고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이어서 1991년 새로운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여 문민정부가 전복됐고, 푸미폰은 다시 한번 군사정권을 지지했다. 하지만 1992년 방콕에서 대규모 대중 봉기가 발생하여 가두투쟁이 전개됐고, 독재정권은 종식됐다. 군부가 패배할 것이 확실해지자, 푸미폰은 자신의 민주적 신용을 확보하기 위해 다시 한번 공개석상에 등장했다([역주] 군부 지도자 수찐다 장군과 시위 지도자 짬렁을 왕궁으로 불러들인 사건. 방콕시장 출신 예비역 소장 짬렁은 2000년대에 극우 왕당파 시위대 '옐로셔츠'의 리더로서 탁신 축출운동의 선봉이 된다). 하지만 수십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다. 민주적 선거가 열렸고, 정치 엘리트들은 앞다퉈 푸미폰의 "초인적 재능"을 찬양하거나 재홍보하면서 "대왕"에게 굽신거리며 칭송을 해댔다. 그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적법성을 확장시켰다. 푸미폰은 이 모든 것을 꿀꺽 삼켜버렸고, 아마도 그 스스로도 자신의 "신성"을 믿게 됐을 것이다.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도 푸미폰의 이미지를 선양하는 데 조력한 엘리트 정치인 중 한명이었다. 그렇지만 탁신의 정당은 빈곤층 친화적 정책을 통해 2000년대의 선거들에서 반복적으로 승리했다. 절대 다수의 태국인 유권자들은 탁신의 정책으로부터 참다웁고 직접적인 경제 사회적 이익을 누렸다. 그것은 국왕이 수십 년 동안 행했다고 하는 선행의 결과와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푸미폰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이 흐름에 편승했고, 탁신이 실시한 잔학한 정책인 "마약과의 전쟁"을 칭송했다. 이 정책으로 3천명의 사람들이 사법외 처형을 당했다.
유권자 과반수에서 탁신이 지닌 영향력은 결국 군부, 관료, 보수 정치인과 경제인 등 보수층 엘리트로 구성된 경쟁자들을 분노케 만들었다. 그 결과는 2006년 9월의 쿠데타와 2014년 5월의 쿠데타였고, 그에 이어진 민주주의 파괴였다. 푸미폰은 이들 쿠데타들에 기꺼이 도구가 돼주길 응했고, 그러한 쿠데타의 명분을 축적해주기 위한 군부와 왕당파 폭도들의 활동에 자신의 이름이 사용되는 일도 허용했다. 푸미폰은 정치위기가 확대되는 일을 막기 위해 용기를 발휘하거나 통합적 노력을 한 일이 단 한번도 없었다. 실제로 푸미폰이 태국 시민들을 위해 안정을 구축하려하거나 "국가 단합 유지"를 이룩한 일은 결코 없었다. 그는 헐벗은 계급의 억압에 있어서 하나의 상징이었다.
2010년 4~5월의 대규모 시위 당시 군대가 수백 명의 민간인을 총격으로 쓰러뜨릴 때, 푸미폰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늙었지만 아직 말할 힘은 있었고, 간혹 새로 임명된 판사들 앞에서 연설도 종종 하던 때였다. 이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국왕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일이 기껏해야 공적 자금의 완벽한 낭비에 지나지 않음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수백만 명의 태국인들의 마음 속에서 푸미폰이든 아니면 다른 누구든 소위 "국왕을 둠으로써 얻게 되는 이로움"에 관한 심각한 회의가 발생한 것은 바로 이 사건 및 최근 2차례의 쿠데타였다. 이제 태국에는 강력한 공화주의 정서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정서는 현실적인 탄압에 직면해 있기도 하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푸미폰이 강력한 지도자이며 2006년 쿠데타 및 심지어는 2010년 학살사건에 명령을 내렸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2014년 쿠데타 무렵, 푸미폰은 노령으로 인해 심신이 정상적이지 않았고, 아마도 그는 발생중인 상황에 대해 제한적인 인지능력만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장군이 쿠데타에 국왕의 이름을 이용하는 일을 막지 못했다.
팩트는 푸미폰이 결코 정치적 권력을 가진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엘리트들과 그들의 행동, 특히 군부의 행동에 강력한 이념적 적법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푸미폰은 정치적 지도자가 될 만큼 결코 용감하지도 못했고, 결단력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꼭대기에 걸려 있는 눈부신 요정이었다. 그의 이념적 역할은 단순히 군부나 비민주적 엘리트들의 옹호한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가 제안한 반동적인 "충족경제" 이념은 부의 재분배에 관한 어떠한 시도도 반대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고, 빈곤 완화를 위한 국가의 개입을 반대함으로써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것이기도 했다. 태국의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 엘리트 계층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푸미폰을 이용하려 했다. 그러한 이들에는 탁신을 포함한 재벌 경제인들, 그리고 (공무원과 사법부, 의료분야 등의) 민간부문 및 군부의 관료들도 포함된다.
푸미폰은 거짓을 바탕으로 호사스런 삶을 살았다. 그는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는 국가의 아버지"라고 투사됐다. 하지만 그의 아들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는 얼빠진 자이고 많은 이들의 미움을 받는 불한당이다. 그는 자신의 여성들 사진을 인터넷에 공개하여 모든 여성을 억압했다.
푸미폰은 "천재"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그가 "소박한 삶"을 이끌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국왕이나 왕실 엘리트들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왕실모독 처벌법>으로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 이제부터 외국 언론인들이 작성할 푸미폰에 관한 추도문들은 항상 해오던 거짓말을 반복하게 될 것이며, 이 가련하고 혐오스러운 남성에 관한 무의미한 칭송들로 나열될 것이다.
푸미폰은 수줍음이 많고 소외된 개인이었고, 자신의 인간 동료들보다는 애완견 무리와 함께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여겼던 인물이다. 수백만 명의 태국인들은 그의 죽음이 태국 사회에 진보적인 변화의 문을 열어주길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야만 할 것이며, 여전히 군부 및 반동적인 푸미폰의 후계자에 대처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참다운 민주적 공화정을 위한 때가 됐다. 태국 왕실의 막대한 부와 궁전들은 복지국가 건설을 위해 국민들에게 돌려줘야만 한다. 푸미폰을 위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말라. 그 대신 그의 이름 하에 군대가 죽였던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며, 오랜 기간 질질 끌려가면서 값비싼 장례식 때문에 고통받게 될 모든 사람들을 생각하라.
게으른 언론인들은 오랜 기간의 정치위기가 모두 왕위계승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십여년 간의 정치위기는 국왕의 건강 악화나 왕위계승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문제로서, 탁신 친나왓이 태국 사회를 현대화시키려는 시도에서부터 출발한다.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는 태국 사회가 안고 있던 기존의 단층선들을 폭로하는 기제로 작용했고, 정치적 주요 인물들의 행위는 모두 이 문제에 대한 대응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보수파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격으로 이어졌다. (☞ 참조용 글)
끔찍한 차기 국왕 와치랄롱꼰에 관해서는 여기를 참조하라.
왕이 죽었다! 공화정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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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용 게시물
- [논문]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Andrew MacGregor Marshall 2013-10-31)
* 상위화면 : "[기사목록] 2016년 태국 뉴스"
첫댓글 몇년 전부터 영국에 망명한 짜이 응파꼰 교수의 글입니다..
그는 태국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인데요..
글이 정말 세네요..
푸미폰 국왕 사망 당일 공개한 글입니다.
새로운 정보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
태국 국왕에 대해서 이리도 심도있게 비판하는 글은 정말 처음 보네요.
정말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습니다.
태국의 일반 서민들이 이글을 보게된다면 정말 살인나겠지요???
방콕의 중상류층과 남부지방 서민들에겐 대역죄인처럼 보일 거이고요..
방콕의 서민층과 북부/북동부지방 사람들에겐 영웅처럼 보일 겁니다..
레드셔츠 계열의 물밑에선
이미 이런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레드셔츠 일각에선 왕세자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는데요..
그래서 태국 기득권층이 왕세자를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죠..
왕세자마저 내쳤다가는
왕정 자체가 더 이상 지속이 안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레드셔츠가 지금은 정치인 지도자(탁신)를 지지한 업보를 받고 있습니다만..
레드셔츠 성향 유권자가 대략 인구의 60%에 육박하기 때문에,
태국은 어느날 한 순간에 혁명이 날 수도 있는 국가죠..
하지만 외국인들이나 외신들이
방콕만 들여다보면서 태국 언론들 카피나 해서 그런 사정이 정확히 안 보이는 것 뿐이죠..
레드셔츠 내에도 탁신이라는 직업적 정치인을 비판하는
완전한 민주세력도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이 탁신 콤플렉스만 뚫고 나온다면,
태국 사회의 변화는 어느날 한 순간일 거라고 봅니다.
태국의 서민들은 누가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을 펴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탁신을 지지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선 어떻게 보면
태국의 노동자 농민들이 한국의 빈곤층 유권자들보다 민도가 더 높을지도 모르지요..
2010년에 트위터로 연락하고 결집하던 사람들이
바로 태국 농민들입니다. 만만챦죠
@울트라-노마드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일반적인 태국인들 중에서 왕세자에 대해서 안좋게 얘기하거나 아예 얘기 꺼내는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다수 만나 보았답니다.
다만 전 푸미폰 국왕에 대해서는 신적인 권위를 표하는 경우가 거의 99%였답니다. 물론 태국내에서 자라서 성장한 태국인들이지요.
이싼지방에 있는 순수 로컬 쓰아댕(레드셔츠) 집단들이 과연 응파꼰 교수와 같은 생각을 할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이네요.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태국내 전역에 펼쳐져있는 세뇌교육이 너무나 강력하답니다. 어쩔 때 보면 공산국가 보다 더 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제이J 짜이 응파꼰 교수는
탁신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비판적이고
왕세자에 대해서도 대단히 비관적인 사람입니다..
그 점에서 이 사람이 특이하다는 것은 분명하죠
어쨌든 짜이 응파꼰은 금수저로 태어나서
이 정도 양심을 지키며 산다는 점에서
그의 진실됨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아버지가 방콕은행장을 역임하면서
오늘날 태국 경제의 윤곽을 잡은 사람 중 하나고요..
어머니가 영국인으로서,
짜이 응파꼰은 혼혈인입니다.
@울트라-노마드 탁씬이 집권시절에 부정축재를 한것은 사실입니다만, 제가 등업기에 쓴 것처럼 자기 돈도 챙겼지만 국가 발전을 위해서 이룬 업적은 무시 못한답니다.
집권시절 개혁한 의료보험제도, 사회간접자본 투자, 통신시설 투자 등은 태국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개인적으로는 평가하고 있답니다.
탁씬이 태국을 떠난지 이제 10년.... 태국내에 발전되거나 개선된 것이 거의 없어요....ㅎㅎㅎㅎ 눈에 안보인다고 봐야죠.
이 교수님 살아남지 못하겠는데요?
짜이 응파꼰은
내국인 중에서는 군사정권이 수배한 일급 범죄자죠..
아마 외국인으로는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과 폴 핸들리가 일급 수배자겠지요..
하지만 해외에서, 더구나 영국에서 태국/영국 이중 국적을 가진 사람을
함부로 암살 같은 것을 시도하긴 쉽지 않겠지요..
저도 태국에 있는데.... 여기 왕실에 부정적인 댓글 달다가 잡혀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네요...ㅎㅎㅎ
@제이J 한국 정부(특히 국정원 등 정보당국)가 의도적으로 신상정보를 넘겨주지 않는 한
태국 정부가 저 말고 일반 회원님들까지 특정해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겠지요.. ^^
아마도 태국 정부가 제 신상은 이미 파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저는 이 카페를 만들고 3개월만에 위험성을 감지했고요..
그래서 정회원 제도를 도입했죠..
지금은 태국 가는 일은 아예 포기하고 삽니다..
처음엔 좀 아쉽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편안해집니다.. ^^
@울트라-노마드 자백이란 영화 보면 국정원이 정보를 넘겨줄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어차피국민들 안위따윈 생각도 안하는 집단이니
@Who am I 사실 가장 중요한 점은... 태국 물관리사업 따내는 것 하고.. 탈북자들을 태국을 거쳐 데려오는 루트가 있다는 점이죠.. 그 댓가로 어떤 개인의 신상정보 정도는 한두명 넘겨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정권교체하고 나면 반드시 다 파헤쳐봐야지요.. 또한 한국 해병대가 태국의 국제 군사훈련에 참가하고 있고, 영관급 장교들이 태국 국방대학에 교환 유학도 하고 그럴 겁니다.
빌리지 스카우트를 만나고 있는 국왕 ㅎㅎ 사진 보니 더 기가막히네요 짜이 응파껀 영어 이름은 Giles 자일스 라고 부르더라고요 ^^
아.. 감사합니다.. ^^
"빌리지 스카우트"가 태국판 서북청년단인 셈이죠..
저도 가끔 댓글 험악하게 달았는데 ,,, 그래도 가끔 여행가는 제 마음의 안식처 태국에 못가면 안되니 푸미폰 국왕 만세 외쳐야겠습니다...그리고 다음 왕인 팔람 씹쎄 아니 씹세 만세 ~!
ㅎㅎㅎ
@울트라-노마드 금석학을 전공하신 울 노님의 경우 크메르어에 정통하시니 잘 아시겠습니다만, 태국어로 10은 씹 입니다. 한국어와 비슷하잖아요. 그래서 씹세 씹세 하는거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틀린 말은 아니죠?? (한국말로 십도 보면 어원이 다 통하는 것 같아요)
@보아즈 아.. 저 금석학 전공자 아녀요~~
금석학 세미나에 참가해서 배운 적은 있지만요.. ㅎㅎㅎ
이글을 방콕에 있는 지인 교수한테 보여주니, 응파곤 교수를 도덕성과 양심이 매우 의심스러운 사람이라고 하네요. 방콕 출신의 엘리트들은 어쩔수 없는가 봅니다. 그러면서 미국과 공모하여 태국의 자원을 해외로 팔아먹으려고 한 탁신 정권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또 그와 잉락 총리를 지지한 대다수 서민들을 stupid한 사람들로 치부해 버리더군요. 저와 라인으로 논쟁이 좀 있었는데, 논리에서 밀리니 오래전 제작된 국왕 홍보 영상과 국왕 만세 합창 영상을 보내주었답니다.ㅋ
어늘날 국왕이 갑자기 몰래 집에 방문하여 술자리를 함께 했다는 내용인데 요지는 이런 성왕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수 있겠냐는 강변입니다.
"푸미폰 아둔야뎃 교"는 일종의 종교적 광신이라 할 수 있는데요..
사이비종교 신자들과는 토론이 안 됩니다..
가능하면 방콕의 중산층이나 지식인들과는 직접 논쟁하지 마시길 권유해 드리고 싶습니다..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실제로 위해를 가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들이 한국 사회나 국제사회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고 할 때만
논리적으로 논파하시고...
사적으로는 토론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나저나
한국의 대통령이 실은 무대 뒤에 숨어있던 무당이라 하니..
남의 나라 이야기 하기 전에..
우리나라가 망해버렸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