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암 나철 중광가(거듭빛냄가) 십장 도연원
十.도연원(道淵源)
찾아보라 가닭가닭 한배빛
선가(仙家)에 천선종조(天仙宗祖) 석가(釋迦)에 제석존숭(帝釋尊崇)
유씨(儒氏)의 상제림여(上帝臨汝) 야소(耶蘇)의 야화화(耶和華)와
회회(回回)의 천주신봉(天主信奉) 실상은 한「한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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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가 “모든 종교의 옷듬이오 시작”이고 ‘유교․불교․선교도 종(倧)에 섭취되고 파분’된 것 / 춘파 정관, 대종교보 제180호, 대종교총본사, 1953(개천4410), 5쪽. 종(倧)은 “상고 신인 … 우주만유를 주재․창조․화육하신 세검한몸이신 상제[三神一體上帝]”이다.
춘파 정관 도형 (2대, 4대, 8대, 10대 14년간 총전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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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는 임오교변으로 주요 인적․물적 기반을 상실한다. 그렇지만 ‘히로시마 원폭 투하’ 이틀 뒤인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소중립조약(日ソ中立条約, 1941.4.13)> 을 깨고 참전하면서 만주 상황은 빠르게 변한다. 대종교 간부들도 목단강감옥에서 출옥해 다시 총본사 간판을 걸고 교단 재건을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대종교 측 자료에 따르면, 1945년 7월 5일(양력8.12) 대일항전을 위해 적위군(赤衛軍, 소련 육군)이 소만(蘇滿)국경을 넘으면서 대종교인들이 출옥한다. 그리고 영안현 해남촌 최창진의 집에서 휴양하다가 7월 7일에 직원을 선임해 총본사를 부활시킨다. 이어, 18일에 영안현 신안촌의 양현체를 심방해 신일시교당을 부활시키고, 8월 12일(양력9.17)에 동경성으로 돌아가 가동구(街東區) 제15패(牌) 33호에 총본사 간판을 내건다.
적위군(赤衛軍)은 1918-46년까지의 소련 육군으로, 노동적군(勞農赤軍)이 정식 명칭이다.
총본사 간판을 내건 후에는 한글강습회 개최, 개천절 행사 개최, 대종학원 운영 등의 활동을 벌인다. 한글강습회는 8월 26일(양력10.1) ‘민족정신의 환기와 국학의 장려’를 목적으로 대종학원 내에 설치되어 100여 명의 회원으로 운영된다. 개천절 행사(음10.3, 양11.7)는 ‘해방 기념 개천절 경하예식’과 한글강수회가 주최한 계몽선전 신파극 등으로 진행된다. 대종학원은 10월 5일(양력11.9)에 설치되어, 12월 2일(양력1946.1.4.) 중등반 제1회 수업식이 거행된다.
당시의 교단 재건 활동은 소련군 진군 이후 만주의 공산주의자들과 자위 민병대원들은 소련군과 함께 온 동북항일연군 88여단에 흡수되거나 이들을 지지하며 반종교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반종교운동은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국민정부를 물리치고 1949년 10월 1일화인민공화국 정부[북경]를 수립할 때까지 지속된다. 이 당시 기사들은 연길교구 신부․수사․수녀들에 대한 체포․감금, 배교(背敎) 강요와 재산 몰수, 팔로군(八路軍) 점령지구에 있는 성당과 교회 건물의 징발, 불교도 박해, 사찰 파괴 등 소련군 참전 후 만주의 반종교운동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반종교 운동은 대종교에 영향을 미친다. 대종교는 총본사 건물을 뺏겨 임오교변 이전의 구(舊) 교옥(敎屋)으로 이전하게 된다. 강습회원 학원생에게는 적화선전과 입당, 간부 직원에게는 공산주의동맹의 가입이 강요된다. 그리고 이에 불응하자, 대종교는 ‘공산정책에 비협조적 단체이며 교주와 간부들이 반동분자이니 처단해야 한다’는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대종교는 반종교운동에 직면해 환국을 결정한다. 이와 관련하여, 단애 윤세복 종사는 1945년 개천절(양력11.7) 경하식을 마치고, 조선의 실정과 교계 현황을 조사하고 총본사 환국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이현익(李顯翼, 1896-1970)을 경성에 보내지만, 교통 두절로 연락이 중단된다. 이에, 단애 종사는 1946년 1월 14일(양력2.15) ‘제6회 총본사직원회의’에서 남도본사 복설(復設)과 현임 직원을 인준․추인한 후, 17일(양력2.18) 수행원 5인과 만주를 떠나 1개월 만에 경성에 도착한다. 임오교변으로 투오된 뒤 출옥 후 5개월 동안 동경성의 교단 재건 활동은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