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나와 핀치
루나란 뇬은 내 방을 자기 사랑방으로 생각한다.
켄넬에서 풀어주면 잽싸게 내 방에 와서 변한 게 없나 점검한다. 그리곤 그릇의 물을 마시고 나에게 사랑을 구걸한다. 쓰다듬어 주면 그것을 사랑으로 알고 열심히 흡입한다. 쓰다듬길 그치고 손을 책상 위에 올리면, 주둥이를 내밀어 내 손을 들어 올린다. 마저 더 사랑을 해 달라는 얘기다.
내가 책상에서 일을 하면 할 수 없다는 듯이 책상 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물론 이것은 뇬에겐 여간 심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책상 밑에 있는 나무로 만든 잡지 대를 물어 뜯기 시작한다. 가슴이 아프지만 모른 체한다. 작년엔 이 뇬이 책상을 뜯어서 너무 보기 흉해 새로 구한 중고 나무 책상이다. 책상보다는 차라리 저 잡지 대를 뜯게 놔두는 것이 좋다. 그래도 뇬이 가증스러워 발로 툭툭 건드리면 잠시 멈추었다가는 다시 뜯는다. 이것이 나의 관심을 끄는 행동이란 것을 알아챈 영악한 행동이다. 잡지나 신문을 위한 이 나무 틀은 얼마나 갈까? 무생물인 나무가 불쌍하다.
어제 '핀치'란 영화를 보았다. 이제는 참 많이 늙은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였다. 아니 또 다른 주연이 있다. 그가 만든 로봇인데 조연이면서 영화 후반에 가면 주연이 되는 희한한 영화다.
때는 지구 종말의 시기이다. 지구 온난화와 태양의 이상으로 지독한 자외선이 지구를 황폐화했다. 직접 자외선을 쏘이면 바로 살이 타 버리는 그런 극한의 상황이다. 살아남은 이가 거의 없는 황폐한 지구이지만 밤에는 괜찮다. 하지만 이 밤에도 자주 태풍이 불어온다. 핀치가 로봇에게 설명하길 이것은 하늘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그런 것인데 마치 스위스 치즈와 비슷한 것이라 설명한다.
동부에 살던 주인공은 이 무서운 태풍을 피해 서부로 이동을 한다. 늙은 주인공과 로봇, 개 그리고 중간에 부서지는 다른 작은 로버트 넷이 말이다. 여행 중에 일어나는 생존하기 위한 일들이 영화의 줄거리다. 어쩌다 인간을 만나면 도망해야 한다. 약탈당하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 인공 지능을 갖은 로봇은 아이처럼 핀치에게 많은 질문을 한다. 이것이 이 영화를 보는 재미인데 감독이 그것을 잘 풀어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작가가 잘 쓰지를 못하였는지 좀 실망스러웠다. 이 부분을 잘 살렸으면 더 좋은 영화가 되었을텐데... .
긴 고난의 시간이 지나고 주인공 '핀치'는 마침내 서부에 도달한다. 놀랍게도 거기는 자외선의 영향을 받지 않는 땅이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땅에서 그는 파라솔을 치고 와인을 마시다 죽는다.
그런 그를 이젠 아들 같은 로봇이 화장한다. 여기서 부터 로봇이 주인공이다. 로봇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점점 희노애락을 깨달아 가는 것 같이 보인다. 자신을 이끌던 주인이 죽고 자신이 주인이 남긴 개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 장면에 도달하면 누구나 휴머니즘의 근원은 무엇인가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인간에게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생물, 무생물을 막론하고 사고하는 모든 것에 있는 것에 휴머니즘이 있는 것일까?
핀치가 죽자 로봇은 고민을 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로봇이 고민을 한다. 그리고 결정의 순간은 인간보다 훨씬 빨라 보였다. 로봇은 핀치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로 한다. 내가 핀치라면 이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곤 '아, 개에게 밥을 주여야 한다, 그리고 공놀이를 한다.'
이제 개는 핀치에게 하였던 것 처럼 로봇을 따라 다닌다.
핀치는 왜 이 로봇을 만들었을까? 그는 자신이 얼마 못 산다는 것을 알았고 사후에 자신의 개를 사후에 돌봐 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로봇을 만들었고, 그는 이 로봇에게 개를 돌봐줄 것을 주문하였다.
그의 바램대로 그의 사후에 로봇은 이 역할을 잘 해낸다. 이것이 휴머니즘이다.
누군가 옆에 있어 준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따스한 일인가? 지금의 루나가 그렇다. 이 뇬은 내가 가는 곳 어디든지 따르려 하고 부르면 군말없이 쏜살같이 달려온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난 핀치가 왜 로봇을 만들었는지 절절하게 이해하고 공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