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들에게 도덕적인 책임과 부담은 엄청나게 지워놓고
현실에서의 처우와 대우는 열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에 학교 교육은 유명무실해졌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이게 어떤 시대의 모습을 말하는 것인지 아시겠나요? 사실 이거... 조선시대 교육의
실상에 대한 모습입니다. 조선시대라고 하면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제자와, 눈물을 머금고 자신에게 배우는 제자의 미래를 위해 회초리를
드는 훈장의 모습. 이게 그 시대가 요구한 이상론이라 실상은 많은 훈장들이 당장 내일 먹고 살기도 힘든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조에 명목과
실상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직종은 교직이었다는군요, 그것도 관학. 요즘으로 말하면 공교육이 되곘습니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은
문치주의 사회 조선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단어이자 의미였습니다. 조선은 초기부터 유학적 이상사회 건설을 위해 교육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유능한 교사를 확보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각 향교에 파견된 교수관은 종 6품의 문관직으로 요즘으로 쳐도 5급 사무관 이상의
계급에 지방에서는 고위 관료를 보기 힘든만큼 대단히 높은 직위라고 할 수 있었죠.
문제는 현실과 이상의
차이였습니다.
교관직은 일단 그 자리에 앉으면 다른 곳으로 진급하거나 전출하기 어려웠습니다. 즉, 조선 사회에서 입신 양명을 위해
관직에 올라야 할 길이 막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지요. 성균관 학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평생 연구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라면야 누가 이런
자리에 앉으려고 하겠어요? 이러다보니 이 자리는 실력이 없거나 권력에서 밀려난 자가 가는 한직으로 변질되었고, 그나마 좀 큰 각 주(州)와
부(府) 정도는 과거 합격자 중 대기발령자 신분인 권지로서 교수를 파견하고, 나머지 군현에서는 지방 출신자 중에 학문적 소양이 있는 사람을
선발해 충당했는데 문제는 이들 학장에게는 봉급도 안나갔고 신분조차 불안했습니다.
지방에는 더해서 별 그지같은 놈팽이들이 군역을
면제받거나 과거 시험의 문과 응시에 필요한 원점을 면제 받기 위해 이름만 올리는 수준이었습니다. 당연히 이들이 교직에 뜻을 둘리 만무했고, 이런
자들에게 받는 교육이 교육일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교관이 부임할 때 각 역에서 유숙하는 것 조차 어려울 정도로 천대받았다고 하는군요.
신원록이라는 사람의 문집 <회당집>에는 집이 가난해 부모 봉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교관에 임명된 뒤, 그 처지를 비관하며 통곡하는
내용이 적혀 있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관들은 노비와 광대에게 조차 수모를 당했는데 19세기 초에 대구지역 훈장이 관에 올린 호소문을
보면, 그가 밀린 일 년치의 교육비를 받으러 제자의 아비 되는 사람에게 갔는데 (이 사람들이 여 첨지와 김 첨지라고 되어 있다네요, 즉 학비도
안낸 사람들이 둘이나 되는 겁니다) 훈장을 만날 때 부터 관도 삐딱하게 쓰고는 "이 양반이 물정을 몰라도 한 참 모르오, 시장 값이 저러한데
예조란 무슨 소리며, 의자란 다 무어요. 천 리 행상으로도 빈 채찍만으로 돌아오고 일 년 머슴 살고도 빈손으로 가는 터에 생원 문자가 그 값이
얼마길래 갑오년의 모립(무인들이 쓰던 모자) 값이요." 라고 적반하장으로 나옵니다.
보통 서당의 훈장에게는 한해에 신입생은 벼 반섬 정도, 그 이후에는 벼 한섬씩을
강미로 내었는데, 집이 어렵거나 하면 뗄감을 마련하거나, 옷감을 지어 내거나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만, 사실 이 돈도 저 사례처럼 떼먹히고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러니 실력을 갖춘 유학자들이 미쳤다고 교관일을 하곘나요? 교관에 대한 천시풍조는 가면 갈수록 더해서
중종대 정광필은 "향교의 훈도, 교수자는 이미 양반이 맡지 아니하고, 수군 등의
상민 출신들이 대부분으로서 한 현 내에 훈도를 칭하는 자는 100여인에 이르되 모두 무식자다." 라고
혹평합니다.
조정에서는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교육자를 양성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 "돈을 들이면 좋은게 나오고,
줄이면 개판된다"는 현실적인 문제들만 인식하게 될 뿐이었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관학 이야기였습니다, 사학은 또 달랐지요.
(옛날부터 입시에는 학교보다는 학원이었던 겝니다)
당시 사학은 관직에서 물러났거나 은퇴한 명망있는 학자가 후진 양성을 위해 설립한
기관이라 일단 교육의 질 자체가 달랐습니다. 일단 학장이나 교수나 실력면에서 알아주다보니 각 양반집 자제들이 너도나도 그 제자가 되겠다고
몰려들어 당장 내일 먹을 쌀도 구하기 힘든 관학 교사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습니다. 세종19년 기록에 보면 유사덕이라는 훈장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무려 30년간 훈장을 하면서 생원,진사,문과 무과에 합격한 자가 70여명에 달할 정도라, 나라에서 치하하고 지역 교육의 장이 되도록
하자고 임금에게 올릴 정도였습니다. 이런 사학들은 교육의 질도 질이고, 또 현직에 있던 사람들이 많다 보니 시험에 대해 쪽집게로 교육이
가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지방에서 교육자란 생활방도가 없는 몰락 양반이나 실력있는 중인 신분들이 직업적인 고용훈장으로 많이
활동했는데 이들은 사족에 뒤지지 않는 능력과 지식을 가지고도, 사회적 천시와 불평등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고용훈장이란 지역민들이 실력을 듣고
평가하여 훈장을 고용한 다음 학교와 학비를 지급하고 그 지역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하는 방식이었죠. 덕분에 이들은 이리저리 유랑하듯 살기도
했습니다.
뿌리도 못 내리고, 월료는 떼먹히기 쉽상에 양반 신분임에도 노비집에 기식해야 할 때도 많고, 돈 이야기 하다가 두들겨
맞기도 하고... 이러니 이들이 삐뚫어 지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하지 않겠어요? 결국 이들은 하층민들을 규합해 정부에 대한 저항세력으로
성장하거나, 글자 그대로 역모에 관련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들 중에서도 교육을 직업적으로 성공시켜, 요즘으로 치면 강남 쪽집게 선생으로 큰
돈을 벌어들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번에 사오십명씩 가르치고도 인원이 넘쳐나서 조를 나눠 가르치기도 했다는군요. 예나 지금이나 스타
강사는 돈을 많이 벌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