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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45) 행주산성 ③] 산 권력에 저항한 추강이 낚싯대 드리운 곳
(CNB저널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조선 시대 최고의 별장촌(別莊村) 행주 지역 서쪽을 겸재 그림과 함께 살펴보며 지나왔다. 이제는 동쪽 덕양산(德陽山, 幸州山城)을 돌아보고자 한다. 출발은 귀래정(歸來亭)이 있었을 곳에서 남쪽 강변(곧 杏湖)부터다. 이곳에는 행주산성역사공원이 잘 꾸며져 있다. 번잡하지도 않고 강변도 넓은 데다가 행호(杏湖) 너머로는 겸재가 현령으로 지내면서 행복하게 그림을 그렸을 궁산(宮山)이 보이고 그 곁으로는 개화산이 행주산성과 마주하고 있다. 예전에는 나룻배로 건너다니던 강 건너 마을이었다.
사진 1 답사 코스부터 살펴보련다. 번호 1은 출발 지점 역사공원이다. 이곳에서 화살표 방향으로 메타세콰이어 길을 따라 가다가 비교적 큰 길을 만나면 우회전, 잠시 후에 행주산성 입구에 닿는다. 대문에는 ‘대첩문’이라고 쓰여 있다. 대첩문 안이 행주산성 구역이다. 관람료는 무료다. 우측 번호 2 지점에 권율(權慄) 장군 동상이 방문객을 기다리고 계신다.
길 따라 오르면 우측에 홍살문을 만나고 안쪽에 권율 장군의 시호(諡號)를 따 이름붙인 사당 충장사(忠壯祠)가 자리 잡고 있다(번호 3). 돌아 나와 언덕길을 오르면 덕양정, 가파른 강가 아래쪽에 고려(高麗)적 절 소화사(小華寺)가 있었다고 한다(번호 4). 여기에서 정상 방향으로 오르면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가 세워져 있다(번호 5). 이곳에서 영상 자료관인 충의정을 지나 북쪽 길을 돌면 산책로로 여겨지는 옛 토성(土城)을 지나가게 된다(번호 6). 토성이 끝나는 곳 골짜기에는 행주기씨(幸州 奇氏) 유허(遺墟)가 있다(번호 7).
이제 행주산성을 돌아 나와 차도를 따라 내려오면 음식점과 카페촌을 지나게 된다(번호 8). 한 때는 매운탕과 장어의 메카였던 곳이다. 요즈음은 젊은 세대가 많아지니 다양한 음식점과 카페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골목길로 접어들어 언덕길로 오르면 오랜 시간 속에 머물러 있던 행주성당을 만난다(번호 9). 성당에서 길 따라 내려오면 행주대교가 시작되는 나루터 버스 정류장이다(번호 10).
산 권력이 시퍼렇게 쳐다보고 있는데…
이제 위의 진행로대로 출발이다. 행주역사공원에는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선생과 석주 권필, 이신의 선생의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졸고 동문조도(東門祖道)에서 이미 언급한 석주나 그다지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 이신의 선생은 지나가고 추강만 조금 살펴보고 가려한다. 왜 이곳에 추강(秋江)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가. 혹시 이곳이 이 양반 별장 터였던가?
아시는 바와 같이 추강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었으니 꼿꼿하기가 이를 데 없는 스타일이었던 것 같다. 이 양반은 1454(단종 2)∼1492(성종 23)년 사이에 산 선비인데 사림파의 거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했다 한다. 인물됨이 영욕은 살피지 않았고 목표가 고상하여 세상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한다. 스승 점필재도 이름을 부르지 않을 정도였다 하니.
성종 때 자연 재난이 있어 신하들의 대책을 물었는데 그때 25세의 추강이 장문의 소를 올렸다 한다. 긴 내용은 줄이고, 8개의 건의안 중에 세조가 훼손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을 강력 주장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다. 이때는 세조를 도와 단종을 폐위케 했던 훈구대신들이 시퍼렇게 눈을 부라리고 있던 때였으니 완전 찍혔다.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자연 벼슬길이고 뭐고 내려놓았는데 양반집 자제로서 어머니의 명에 따라 마지못해 생원시에 합격한 후 그 뒤에는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한다.
‘사육신’이란 말의 탄생 배경
본래 양화진 지역에서 태어났다는데 오랫동안 고양(高揚)에 자리 잡고 살면서 낚시도 담그고 글 읽고 글 쓰고 비판 세력으로 처사(處士)처럼 살았다 한다. 그는 문집 추강집에서 당시의 금기였던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단종을 위해 죽음으로 저항한 신하들 기록을 ‘육신전(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써서 세상에 펴냈다. 이 추강의 기록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사육신(死六臣)’이다. 이 기록이 21세기 우리 시대에도 영향을 미처 김OO 정보부장은 ‘모모 선생은 빼고 내 조상 김문기(金文起) 선생을 사육신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며칠 전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다녀온 지인(知人)의 말을 들으니 김문기 선생도 여기에 포함되어 이제는 사칠신(死七臣)이 되어 있다고 한다. 추강 선생님! 글 쓰실 때 칠신전(七臣傳)으로 쓰시지 그러셨습니까?
추강은 그렇게 살다가 돌아갔는데 1498(연산군 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어 1511(중종 6)년 금지되었던 성현(成俔), 유효인(兪孝仁), 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글이 간행 허가를 받았고 1513년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시비에는 추강의 시 두 편이 쓰여져 있다. 한 편만 읽고 간다.
宿江浦遽廬
紈袴飽肉者 安知西山蕨
飛走不同穴 我獨恥干謁
畎畝尋要術 漁舟費日月
人生適意耳 何用終歲矹
강나루 주막에 묵으며
비단 옷 두르고 고기 반찬 배부른 자들이여
수양산 고사리 맛 그 어찌 알겠는가.
날짐승과 길짐승은 보금자리 달리하듯
나만은 벼슬을 부끄럽게 여기노라.
시골에 묻혀 밭고랑을 일구며
뱃전의 낚시질로 세월을 보낸다네.
한 세상 삶이야 뜻 대로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한평생 아등바등 지낼 것인가. (시비/詩碑에 따름)
그의 호(號) 추강(秋江)에서 느껴지듯이 아마도 행호(杏湖)에 낚시 담그고 텃밭도 살피면서 세상을 향해 비판의 시선을 멈추지 않았던 모습이 엿보인다.
한글 세대를 위한 배려 곳곳에
시비를 거쳐 메타세콰이어 길을 넘으면 행주산성 정문인 대첩문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넓은 주차장도 있어 차를 이용할 수도 있다. 전에는 입장료가 있었으나 요즘에는 없다. 대첩문을 들어가면 우측 단에 권율 장군 동상이 우리를 맞는다. 권율 장군은 오성 이항복 대감의 장인으로 이미 겸재의 그림 필운대(弼雲臺)를 살필 때 만났던 분이다.
길을 오르면 우측으로 벗어나는 샛길에 홍살문이 서 있다. 그 안쪽으로는 새로 정비한 장군의 사당 충장사(忠壯祠)가 자리잡고 있다. 장군이 돌아가시자 나라에서는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시호를 딴 사당일 것이다. 편액도 한글로 ‘충장사’라고 썼다. 한글 세대를 위한 배려이리라.
사당 안에는 장군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형형한 눈빛으로 상대를 응시하는 범상치 않은 모습이다. 요즈음처럼 아베(安倍晋三)가 마음에 안 드는 때는 장군을 찾아뵙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충장사를 돌아나오는 앞길 옆에는 행주대첩비를 번역한 한글판 대첩비가 서 있다. 이것도 한글 세대를 위한 배려다. 돌아 나와 대첩기념관을 들른 후 언덕길을 올라 사방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정자 덕양정에서 잠시 휴식이다.
동국여지승람은 이곳에 소화사(小華寺)란 절을 기록하고 있다. ‘소화사는 군 남쪽 15리 호숫가에 있다(在郡南十五里湖上).’ 그러면서 고려 때 학사(學士) 인분(印份)이라는 이의 시가 소개되었다.
蕉鳴箔外知山雨
帆出峰頭見海風
발(簾) 밖에 파초 우니 산에 비 내리는 줄 알고
봉우리 위 돛 보이니 바닷바람이 보이네
소화사 곁에는 인분(印份)의 초당이 있었다 한다. 파초 잎에 비 내리는 소리를 발을 격(隔)해 듣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다가 문득 밖을 바라보니 바닷바람 타고 한강으로 올라오는 돛배가 보인다. 조계종단이 발행한 ‘한국의 사지’에는 소화사 터가 덕양정에서 강가로 100m 정도 아래에 있다고 했다. 필자가 내려가 보니 절이 자리 잡기에는 좀 협소하고 경사도가 심한 것 같다. 일단 소화사 터는 숙제로 남기고, 고려적 인분의 구당(舊堂) 터에는 조선 시대에 와서 휴휴정(休休亭)이 자리잡았다.
당신이 쉬어야 하는 세 이유 아시는가?
휴휴정이란 당나라 때 시인 사공도(司空圖)가 만년에 벼슬을 내려놓고 은거하면서 지은 정자인데 그가 지은 휴휴정기(休休亭記)에는 휴휴란 의미가 실려 있다. “재주를 헤아려 보니 첫째 마땅히 쉬어야 하고, 분수를 헤아리매 둘째 마땅히 쉬어야 하고, 늙고 또 귀 어두우니 셋째 마땅히 쉬어야 할 일이다(蓋量其才 一宜休 揣其分 二宜休 耄且聵 三宜休)”라고 하였다. 휴휴정이 갖는 의미다. 조선의 문인 모재 김안국의 모재선생집(慕齋先生集)에는 인분의 옛터에 세운 휴휴정을 읊은 시가 실려 있다. 사공도의 그런 뜻을 빌려 휴휴정이라 한 것이리라.
휴휴정에 대한 설명으로는 ’휴휴정은 서호(西湖: 행호를 흔히 서호의 범위에 넣었음) 옛 행주성 남쪽에 있다. 고려 학사 인분의 옛 집터다(亭在西湖廢幸州城南 卽高麗印學士份舊堂基)’라고 했다. 그러면서 ’휴휴정 바로 옆 하류 쪽에 은휴정(恩休亭)이 있다(恩休亭在休休下流甚近)’고 했으니 물러나야 할 때를 알고 휴휴(休休)하려는 이들이 자리 잡은 공간이 또한 이곳이었다.
그러나 행주산성은 그렇게 휴휴(休休)와 은휴(恩休)만 할 수 있는 땅이 아니었다. 그 지형이 동남(東, 南)은 급경사면으로 사람이 오르기 어려우면서 물과 면(面)해 있고 서북(西, 北)만이 비교적 완만하니 이곳만 막으면 적군의 공격을 물리칠 수 있는 천혜의 요새(要塞)였다. 그래서 멀리는 한강과 임진강 유역을 점령한 신라는 이곳 서북면(西北面)에 성(城)을 쌓아 고구려, 백제의 침략에 대비하였고, 임진란에는 권율 도원수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퇴각하는 왜군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일전(一戰)을 벌였다. 이른바 행주대첩(幸州大捷)이다.
근래 한국전쟁에서도 해병대가 이곳으로 도강하여 교두보를 확보했으니 국토방위에 핵심이 되는 지역인 모양이다.
행주대첩의 기술적 측면
때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 초, 전해에 조선을 침공하여 국토 대부분을 유린했던 왜군은 명군(明軍)이 참전하자 밀리기 시작하였다.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한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승리감에 도취했는지 이여송의 군대는 방심한 나머지 벽제관 부근 숫돌고개(礪峴)에서 왜의 복병에 걸려 참패한 후 북으로 후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선 군은 한양에 집결하는 왜군을 공격할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도원수 권율이 조방장 조경(趙儆), 승장 처영(處英)과 함께 2300명의 군대로 행주산성에 진을 구축하였다.
처음에는 아현고개를 염두에 두었으나 지세가 유리한 행주로 바꾼 것이다. 행주산성이라 부르는 덕양산(德陽山) 중턱에 이중으로 목책을 쌓았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드디어 도요토미의 가신 우키다 히데이에(宇熹多秀家)가 3만의 군사를 7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에 들이닥쳤다. 제1대는 고니시(小西行長) 부대로 조총을 쏘면서 공격해 왔고, 2대는 이시다(石田三成) 군대, 제3대는 구로다(黑田長政)가 이끄는 부대로 누대(壘臺)로 성책을 공격하는 작전으로 공격해 왔다. 제4대는 22세의 젊은 총사 우카다(宇熹多秀家) 부대, 제 5대는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 부대, 제6대는 모리 모토야스(毛利元康), 제7대는 60대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이끄는 부대였다. 이들은 새벽 6시 경부터 7개 부대가 차례로 시간차 공격을 감행해 왔다.
2300명의 군대가 저녁 어둠이 내릴 때까지 계속돼 오는 시간차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목책이 뚫리기도 몇 번, 그때마다 화포와 온몸으로 육박전을 벌였다. 왜장들도 여럿 화포에 맞아 부상하는 치열한 전투였다. 어둠이 내리면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던 왜군은 퇴각했다. 관군(官軍), 의병(義兵), 승군(僧軍)은 물론 아녀자까지 힘을 모은 전투의 승리였다. 민간에서 전해지기로는 이 행주전투에서 돌을 실어 나른 앞치마라서 ‘행주치마’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전투를 행주대첩이라 하고 1603년 행주대첩비를 세웠다. 이 대첩비는 글자의 마모가 심하여 1845(헌종 11)년에 글자를 그대로 옮겨 새 비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이 비는 지금 행주서원에 세워져 있다. 새 비가 만들어지자 글씨가 마모된 옛 비는 잊히다시피 했는데 이제는 다시 살려 비각을 짓고 그 안에 보전하고 있다(경기도 유형문화재 74호).
고봉과 덕양이 합쳐서 고양
또 하나 행주대첩비라고 이름 붙여진 기념탑이 덕양산 정상에 서 있다. 일종의 승전탑인 셈이다. 1970년에 세운 것이라 한다.
덕양산은 비록 높이가 124m밖에 되지 않지만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산이다. 한양(漢陽)은 사신(四神) 사상의 네 산이 둘러싼다. 동(東) 청룡(靑龍)인 낙산(駱山), 서 백호(西 白虎)인 인왕산(仁王山), 남 주작(南 朱雀)인 목멱산(木覓山, 南山), 북 현무(北 玄武)인 백악산(白岳山 또는 北岳山). 풍수사상으로 보면 북악산이 주산(主山)이 되고 남산은 안산(案山)이 된다. 이렇게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네 산이 내사산(內四山)인데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 내사산 밖으로 저 멀리 외호(外護)하는 네 산이 있는데 이른바 외사산(外四山)이다.
동으로 아차산(峨嵯山), 서로 덕양산(德陽山, 행주산성), 남으로 관악산(冠岳山), 북으로 북한산(北漢山)이다. 이 중 덕양산은 북쪽의 고봉산과 더불어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산이기에 예부터 중요하게 대접받았다. 이 지역의 지명 고양(高陽)은 바로 고봉(高峰)과 덕양(德陽)에서 온 말이다. 그러다 보니 새해 해맞이 명소로도 유명하다. 필자도 이곳에서 새해에 떠오르는 해를 맞으러 간 적이 있는데 저 멀리 서울을 배경으로 한강 너머로부터 떠오르는 첫 해는 가히 볼 만 하였다. 이곳에서 보내는 해넘이도 볼 만하다.
정상 대첩탑 뒤쪽으로 가면 ‘충의정’ 현판이 붙어 있는 건물이 있다. 건물 이름이 무슨 의식을 행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사실은 영상 교육관이다. 이곳에는 대첩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화포 등의 무기도 재현해 놓았다. 이 전투의 가장 큰 승리 원인은 목숨을 아끼지 않은 정열을 바탕으로 화차와 신기전으로 준비된 전투력의 승리였다. 조총으로 다가오는 적을 화포와 신기전으로 날려버리고 목책이 뚫리면 목숨을 걸고 총력전을 폈으니 적은 부상병만 양산하고 퇴각한 것이다.
충의정에서 북서쪽 하산 길을 따라 내려간다. 평탄한 흙길이다. 이 흙길은 평범해 보이지만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쌓은 토성(土城)이다. 절벽과 물길이 자연 방위선을 형성한 동남쪽 구간과는 달리 서북(西北)은 나지막한 방어선 취약 구간이다. 따라서 신라도 여기에 성을 쌓았고, 임진란 때도 이곳에 이중의 목책을 세운 것이다.
토성이 끝나는 곳 아래쪽으로는 이 지역 유명한 씨족 행주 기씨(幸州 奇氏)의 유허비가 서 있다. 그 앞으로 흘러나오는 약수도 기감천(奇甘川)이다. 이 지역 토착 씨족 행주 기씨들이 살아 온 흔적이다.
‘행주일도’를 제외한 이유
이제 행주산성 구내를 나와 행주성당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현대식 성당과 함께 1910년에 세웠다는 조그맣고 오래된 목조건물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성당 역사를 정리한 자료를 보니 1866년 병인양요라는 천주교 박해로 양화진 절두산에서 참변을 당한 후 여러 신도들이 강 하류 행주로 숨어들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앙을 지키려는 일념으로 숨어들어 믿음을 지켰고, 1899년 교우촌이 이루어지면서 약현성당 관할 공소(公所)가 되었다 한다. 1905년에는 명동성당, 약현성당에 이어 서울 경기 일원에 3번째 성당이 되었다는 것이다.
신자는 아니지만 필자는 행주에 가면 이곳 성당에 들르곤 한다. 100년이 넘은 작은 목조건물 성당이 주는 평화로움에 마음을 빼앗기고 오는 일이 많다.
이제 겸재로 찾아간 행주산성 길을 마무리하려 한다. 그런데 궁금한 겸재 그림 한 점이 있다. 행주일도(涬州一棹)라고 이름 붙여진 그림이다. 경교명승첩 속 한 장으로 간송에 소장되어 있다 한다. 그림에 쓰여 있는 화제(畵題)에는 행주일도라는 글씨는 없다. 무슨 이유로 이 그림 제목이 행주일도인지 자못 궁금하고 행주(涬州)는 어디인지도 궁금하다. 화제를 보면 행주산성과는 관련이 없다. 그림에 쓰여 있는 글씨는 ‘宿雲散墨點蘭O 洞庭巴陵湘水流’로 보이는데 ‘파릉현(巴陵縣; 악양루가 있는 현 악양시 지역) 동정호에 상수(湘水)가 흐른다’는 내용으로 보아 상상의 세계를 그린 사의(寫意) 산수화로 소상팔경(瀟湘八景) 중 하나를 그린 것처럼 보인다. 혹시나 했으나 겸재가 그린 행주산성 주변 그림은 행호관어, 낙건정, 귀래정 세 점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다음 회에 계속>
제660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19.12.09 09: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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