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와 만물, 무욕과 유욕, 이 둘은 같이 현 玄이라고 부르니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못 신묘함의 문 門 이 된다
힘은 무엇인가? 현玄은 문자적으로 어둡고, 고요하고, 텅빈 것이다. 어둡고 텅빈 고요한 곳에서 사물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듯이 이러한 상태에서는 감각적이고 이성적 판단이 불가능하다. 이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이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의 무욕과 유욕이 아직 뚜렷이 구분되지 않은 선악 미정, 가치 미정의 상태다. 왜냐하면 이 상태야 말로 모든 사물과 현상세계가 시작되는 원초적인 뿌리미지 근원이요. 출발점인 도道 즉, 로고스의 시작 단계이기 때문이다.
이제 천지의 문은 열렸다. 이는 빛이 세상에 임했으나, 아직 세상이 빛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와 같다.
그 빛은 천지와 만물을 조명하고 인간의 선악간 모든 행위도 비추게 될 것이다.
천지가 열리고 민물이 열렸으니 천하 만물의 돌아가는 모습은 어떠할까 ?
<도덕경> 2장에서 이를 살펴 보자.
제2장 상대적 세계와 성인 聖人의 길
무위無의 길, 아가페의 길
천하사람 모두가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지만 天下 皆知美之爲美(천하개지미지위미)그것은 흉함이 있다는 것을 뜻하며, 斯惡己 (사악이)
천하사람 모두가 착한 것을 착하다고 하지만 皆知善之爲善 (개지선지위선)
그것은 착하지 않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斯不善已(사불선이)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도 서로를 낳고 故有無相生 (고유무 상생)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難易相成 (난이 삼성)
길고 짧음도 서로 비교되고 長短相較 (장단 상교)
높고 낮음을 서로 바뀌며 高下相傾 <고하상경>
소리와 울림이 서로 어울리고 音聲相和 (음성 상화)
앞과 뒤가 서로 따른다 前後相逍 (전후상수)
이는 (도덕경)이 우주만물의 상대적 세계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각각 다를 수 밖에 없고 선善의 기준 또한 보는 이에 따라 다르다.
있고 없고의 문제도 상대적인 것이어서 기준이 일정하지 않고 쉽고 어렵고의 문제도 상호적 관계 속에 있다 어려움이 쉽게 해결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쉬운문제도 상황에 따라 어렵게 풀리는 법이다 길고 짧음도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긴것이 더 긴것에 비하면 오히려 짧은것이 되고 짧다고 생각되는 것도 더 짧은 것에 비하면 긴것이 되기도 한다 높고 낮음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높았던 것이 낮아지게 되기도 하고 낮았던 것이 높아지기도 한다 악기소리와 목소리가 서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가 하면,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노래 소리가 서로 어울리기도 한다.
앞뒤의 문제도 따지고 보면 선후가 없어서 서로가 서로를 따르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도덕경>의 상대적 세계이해는 이세상에서의 절대적 인식기준을 의심하게 만든다. 선악, 미추, 고저, 장단이 모두 그러할진데 무엇을 일러 우리는 옳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가치 판단의 문제에 있어서도 절대적 기준이 없고 상대적 기준에 따르는 것이라면 인간의 윤리적 행위는 그 정당성을 주장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러한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대해 성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넘어서는 유일한 길은 사랑이라는 내적인 눈을 뜨는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몸이 맑을 것이요, 네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마태복음 6장 22-23절)," 성서가 말하는 눈은 단순한 육신의 눈만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말하고 있다. 마음의 눈이 맑은 사람은 상대적 세계의 대립을 넘어선 화해와 융합의 세계를 볼 줄 안다.
이 마음의 눈은 등불의 역할을 하기에 우선 자신의 몸을 밝히고 나아가 세상을 밝힌다. 이 빛이 곧 사랑이라는 내적인 빛이다 . 오직 사랑만이 상대적 세계를 넘어선
자리이타 自利利他의 세계를 비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무위無爲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