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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앙 푸르내] 카페에서 작년 겨울에 이지끼을 님과 토론한 덧글들입니다. 앞으로 이지끼을 님과 토론하실 분들, 참조하시라고 올립니다. 같은 얘기를 자꾸 반복하는 것은 큰 소모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TR-RE가 저(닉네임)입니다. 편의를 위해 보기 쉽게 약간 편집했습니다. 원 글은 여기서 확인하시면 됩니다.https://cafe.daum.net/reformedcafe/jY3M/6>
TR-RE 20.12.20 17:38
쓸 말이 많지만 먼저 하나만 묻겠습니다. 십자가 상의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죽기 전에 세례를 받았습니까 안 받았습니까?
이지끼을 20.12.21 08:14
예수님께서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절) 라고 말씀하신 때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막 10:38절에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세례"는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강도는 예수님께서 세례라고 하셨던 십자가를 예수님 옆에서 함께 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제 글을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선, 세례로 죄사함을 받는 것인지
아니면 현재 우리가 생각하듯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례인지
둘 중의 하나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제 글의 마지막 부분을 보시면,
바울 자신이 AD 34년에 받았던 세례가 어떤 세례였다고,
자신의 설교(AD 59년)를 통해, 말씀하셨는지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그리고 로마서에서 말씀한 세례가 어떤 세례인지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관심이 있으실 것 같아
Luther's Large Catechism 을 소개합니다.
https://blaine-grace-lutheran.org/sites/default/files/mllc.pdf
page 96 부터 part fourth. Of Baptism 입니다.
page 97에 있는 이 말씀은 저의 생각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In these words you must note, in the first place, that here stand God’s commandment and institution, lest we doubt that Baptism is divine, not devised nor invented by men. For as truly as I can say, No man has spun the Ten Commandments, the Creed, and the Lord’s Prayer out of his head, but they are revealed and given by God Himself, so also I can boast that Baptism is no human trifle, but instituted by God Himself, moreover, that it is most solemnly and strictly commanded that we must be baptized or we cannot be saved, lest any one regard it as a trifling matter, like putting on a new red coat. For it is of the greatest importance that we esteem Baptism excellent, glorious, and exalted, for which we contend and fight chiefly, because the world is now so full of sects clamoring that Baptism is an external thing, and that external things are of no benefit.
TR-RE님께서 "오직 믿음이라는 원리도 무너집니다"라고 다른 글의 댓글로 말씀하셨는데
Luther의 말씀에 그에 대한 답이 있는 것 같습니다.
In the third place since we have learned the great benefit and power of Baptism, let us see further who is the person that receives what Baptism gives and profits. This is again most beautifully and clearly expressed in the words: He that believeth and is baptized shall be saved. That is, faith alone makes the person worthy to receive profitably the saving, divine water. For, since these blessings are here presented and promised in the words in and with the water, they cannot be received in any other way than by believing them with the heart. Without faith it profits nothing, notwithstanding it is in itself a divine superabundant treasure. Therefore this single word (He that believeth) effects this much that it excludes and repels all works which we can do, in the opinion that we obtain and merit salvation by them. For it is determined that whatever is not faith avails nothing nor receives anything.
TR-RE 20.12.21 20:19
강도가 십자가에 달린 것이 세례라니요. 실소를 금하기 어려운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강도가 십자가에 달린 것이 정녕 같은 것이라고 보십니까? 이렇게 성경을 억지로 갖다가 끼워 맞추시면, 대화하기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게다가 요한의 세례는 그럼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지끼을 님 말씀대로라면 죄를 사하는 세례는 요한부터 시작된 것 아닙니까? 하나 더 묻겠습니다. 그럼 믿고 세례를 받아야 얻는 구원은 예수님 승천하시고부터 적용이 됩니까? 그 이전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루터의 의견을 제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루터의 의견에 대한 반박과 해명은 이미 숱한 신학자들이 해왔습니다. 한번 찾아보시지요. 루터의 신학은 그 점에서 천주교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지요.
이지끼을 님은 표와 인으로서 세례가 주는 은혜를 그동안 모르고 계셨기에 지금처럼 중세 시대와 비슷한 세례관을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최소한 개혁주의 신자라고 생각하신다면,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나 그밖의 개혁신학자들의 글을 읽어보시고, 세례가 주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아보십시오. 그것을 전혀 모르시니까, 이상한 주장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루터마저도 이지끼을 님 편은 아닙니다. 루터도 세례가 모든 경우에 반드시 필요하다고까지는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Luther says that “in case of necessity, a man can be saved without the sacrament, but not without the word; this is true of those who desire baptism but die before they can receive it.” Similarly, he says in his lectures on Genesis that God is able to save without baptism. Examples of salvation apart from baptism include children who die before being baptized; believing adults who are unable to be baptized before death; and persons who believe they were baptized as infants but in reality had not been."
이지끼을 20.12.21 22:47
1) TR-ER님께서 십자가 상의 강도가 구원받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선 예수님께서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 이전에 “세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소를 하신다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2) “게다가 요한의 세례는 그럼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지끼을 님 말씀대로라면 죄를 사하는 세례는 요한부터 시작된 것 아닙니까? 하나 더 묻겠습니다. 그럼 믿고 세례를 받아야 얻는 구원은 예수님 승천하시고부터 적용이 됩니까? 그 이전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말씀하셨는데
좋은 질문입니다.
그런데 제 글을 잘 안 보신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는 제 글에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동물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보내셔서 죄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동물의 피로 죄사함을 받던 것이 세례로 죄사함을 받는 것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러 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세례가 final은 아닌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이 세례를 계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 하신 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에 따르면 이 “구원”은 죄사함을 받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그 이전 사람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고 하셨는데
이에 대한 답은 저도 질문으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근거로 죄사함을 얻고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동물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구원을 얻었습니까?
4) “이지끼을 님은 표와 인으로서 세례가 주는 은혜를 그동안 모르고 계셨기에
지금처럼 중세 시대와 비슷한 세례관을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세례를 “표”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표”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입니까?
Sign 이라는 말씀인가요? 아니면 베드로가 말씀한 antitype(원형)인가요?
성경 어디에 세례를 “표(sign)”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제 글로 베드로가 “세례”를 antitype(원형)이라고 말씀한 것을 설명했는데
보셨습니까? 물론 한글성경에는 “표”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표”는 sign 의 의미가 아니고 Antitype의 의미입니다.
Antitype과 type에 대해 공부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5) 그리고
“그리고 루터마저도 이지끼을 님 편은 아닙니다. 루터도 세례가 모든 경우에 반드시 필요하다고까지는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셨는데
TR-RE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니 인간의 생각으로 제한 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한 것을 따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외적인 경우를 바라신다면 그렇게 하시면 되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예외적인 경우를 일반적인 경우로 만드시는 것 같습니다.( <== 수정했습니다.)
6)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고 하셨는데
왜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순서를 바꿨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상징적인 의미로, 고백하는 의미로, 또는 “표”로
세례를 받는 것이 되었습니다.
[믿음] – [세례] – [구원]의 순서를 말씀하셨는데
[믿음] – [구원] – [세례]로 바꾼 것입니다.
“루터의 의견에 대한 반박과 해명은 이미 숱한 신학자들이 해왔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Luther가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해하셨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순서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7) 한가지 말씀드릴 것은, 제가 이미 말씀드렸으니 아실 수도 있겠지만,
저는 Luther의 글을 참고해서 저의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위의 글을 대충 마무리 한 때가 6개 월 전입니다.
그리고 제가 위와 같이 순서가 바뀐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동안 배워왔던 성령세례에 대한 이해가
제가 깨닫게 된 성령세례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알아 보니
세례에 대한 이해가 달라 진 것이 그 원인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Luther의 글은 최근에 보았는데, Luther는 예수님의 말씀 순서를 따릅니다.
8) 예수님 말씀의 순서를 바꾼 것이 왜 큰 문제로 이어지는가 하는 것은
이미 다른 글의 댓글로 말씀드렸습니다.
[믿음] – [세례] – [구원]의 순서에서
[믿음] – [구원] – [세례]로 바꾸니
세례만 달라 진 것이 아니라 믿음, 그리고 구원도 달라진 것입니다.
곧 세례의 의미가 달라지니, 다른 믿음, 다른 구원이 된 것입니다.
(한편으로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을 달리 생각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믿음을 오해하니까 믿음이 믿음의 행위와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가 구원과 관계없는 것이 된 것 같습니다.)
9) 예수님께서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하셨는데
이 예수님의 말씀은 믿음, 세례, 그리고 구원이 어떤 관계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를 사도들인 베드로와 바울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례의 의미를 바꾸면서
믿음도 구원도 달리 생각해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도 아니고 세례도 아니고 구원도 아닌 것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10) TR-RE님,
제가 무엇을 지적하는지 아시겠지요?
TR-RE님께서는 저보다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나 그밖의 개혁신학자들의 글”을
더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이유로 예수님 말씀의 순서를 바꾼 것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그 순서를 바꾸면 믿음도 구원도 달라 집니다.
그렇다면 다른 믿음, 다른 구원도 개의치 않는 더 큰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요
타당한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 제가 사과드리겠습니다.
TR-RE 20.12.21 23:29
제가 드릴 말씀은 이지끼을 님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하시는 것"이라는 말씀뿐입니다. 생각들이 너무 많이 틀어져 계셔서 제가 어디부터 말씀드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이지끼을 님이 그동안 우리 믿음의 선조들의 글을 너무 하찮고 소홀히 여기신 까닭에 생긴 일입니다. 혹시 삼위일체는 믿으십니까? 성경에 어디 삼위일체라는 표현이 있습니까? 성례가 표와 인이라는 것은 성경에 꼭 표라는 말이 있고 인이라는 말이 있어서,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례의 의미를 깊이 따져 보니까, 성례가 결국 표와 인으로서 은혜를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신앙고백서에 정리한 것이지요.
제가 강도를 언급하고, 루터의 글을 언급한 것은 이지끼을 님의 논리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지, 그것을 저는 표준으로 삼으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예수님 제자들은 누구한테 세례를 받았습니까? 요한입니까? 예수님이 손수 주셨습니까? 그리고 제자들이 구원받은 시점은 언제입니까?
이지끼을 20.12.21 23:39
1) "표"라는 말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렸는데
계속 sign 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십니다.
한글 성경에서 "표"라고 해서 그게 sign의 의미가 아닙니다.
진정 sign의 의미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다른 단어를 써야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한글성경에서 "표"라고 번역된 단어를 antitype 이라고 했어요
헬라어 원어로도 antitype 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대부분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며
성령을 주신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시점은 그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택하셨을때, 그리고 그 이전에 아셨을때 이미 구원이 결정된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을 이루시지 못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2) TR-RE님께서는 제가 질문드린 것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TR-RE님께서 지키시고 싶은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 세례, 구원이 아니라
다른 믿음, 다른 세례, 다른 구원입니다.
반면에 저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사도들인 베드로와 바울이 설명해 주신 믿음, 세례, 구원이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다른 믿음, 다른 세례, 다른 구원이 되었는지
타당한 이유를 말씀하시면 제가 사과를 드린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요
TR-RE 20.12.22 02:48
제가 언제 베드로전서의 "표"라고 한 적이 있습니까? 교리라는 것은 꼭 성경에 있는 어떤 낱말을 가지고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나타난 생각을 더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면, 성경에 없는 말이라도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저는 그 예가 삼위일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지끼을 20.12.22 07:07
베드로가 antitype 이라고 말씀한 것을 우리는 "표"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례를 "표"라고 하며 sign의 의미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There is also an antitype which now saves us, namely baptism - NKJV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중 antitype을 sign의 의미로 이해하고 베드로의 말씀 중 baptism만 취해서
세례를 표라고 하는 것 같이 느낍니다.
그러면서 세례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의미(saves us)는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TR-RE 20.12.21 23:43
또 다른 경우를 들어보지요.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믿음으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세례를 받지 못해 구원을 못 받은 사람들은, 후에 다시 참 믿음이 생긴 것 같으면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만일 그때도 참 믿음이 아니었으면, 대체 몇 번을 세례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믿음의 행위라는 말도 이지끼을 님은 오해하고 계신 듯합니다. 믿음에 행위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말은, 그 행위가 내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거저 구원을 받을 때, 그 믿음은 반드시 행위를 낳는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십자가상의 강도와 같이 세례도 받지 아니하고, 믿음의 행위를 발휘할 시간이 없어도, 구원을 받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루터가 든 예를 한번 생각해 보지요. 어떤 사람이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기 전에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구원받은 시점은 언제입니까? 믿을 때입니까? 아니면 죽는 순간입니까? 죽음도 세례라고 주장하시겠습니까? 그리고 과연 믿는 순간과 세례 받는 순간이 일치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럼 믿을 때 절반 정도 구원을 받고, 세례 받을 때 나머지 절반의 구원을 받습니까?
이지끼을 20.12.21 23:42
제가 글을 쓰는 동안 글을 쓰셨네요.
제 글을 안 보신것이 확실하네요 아니면 이해를 못하시는 것인가요?
계속 쓸테니 답글 쓰시는 것 조금 기다리십시요
1) 제가 믿음의 행위를 무엇이라고 설명을 드렸나요?
제 글을 다시 보세요.
어떻하든지 이해를 하지 않으시려 애쓰시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행위는 믿음으로 인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b)라고만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모세때 놋뱀을 만들고 그 놋뱀을 쳐다 보면 살았습니다.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놋뱀을 쳐다 봐서 살았습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놋뱀을 쳐다 봐서 살게 된 것입니다.
믿음없이 놋뱀을 쳐다 보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아만의 경우 처음에는 시큰둥했지만
그래도 엘리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조금은 있었던 것입니다.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담그라는 말씀은 엘리사의 말씀이 아니라
엘리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왜 담그라고 하셨습니까? 담그면 문둥병이 낫는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런 믿음으로 몸을 일곱번 담그는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믿고 따른 것입니다.
그러면 몸을 담그는 행위는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인한 것입니다.
말씀이 없고, 또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몸을 일곱번 아니라
수 천번을 담가도 문둥병이 낫지 않았을 것입니다.
3)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에 침으로 진흙을 이겨 바르시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실로암에 가서 씼으면 보게 된다는 의미의 말씀이 아닌지요?
그래서 맹인인데도 가서 씻었고 그리고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그리고 믿음의 행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4)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앞절인 마가복음 16:15절 끝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곧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TR-RE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믿습니까?
TR-RE 20.12.22 02:18
이지끼을 님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이겠지요. 세례가 주는 표와 인으로서 은혜, 벌써 있는 믿음을 보여 주고 확증해 주는 은혜를 모르시니까, 세례가 중생을 가져다준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이지요. 중생의 은혜는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단독 사역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그 은혜를 주시는지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개혁신학에서는 그래서 구원받은 날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현실상 우리는 알기가 어렵지요. 어느날 느닷없이 회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생할 때, 믿음과 회개가 동시에 일어나고, 바로 그 순간 칭의와 양자와 확정 성화의 은혜를 받습니다. 아무리 희미한 믿음이라도, 그래서 자기도 긴가민가하고 남들도 정말 믿음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확실히 알 수 없어도, 중생하는 순간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아마 희미한 믿음 때문에, 세례를 받는 시기가 훨씬 늦추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유아세례를 받았을 때는, 내 믿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순간보다 세례가 앞서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례받는 시기와 거듭나는 시기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례의 의미를 생각할 때, 중생의 은혜가 아니라, 표와 인으로서 은혜를 준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때 받는 은혜는 우리의 희미한 믿음을 강화시켜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 영혼이 예수님의 피로 씻긴다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의 연약한 믿음은 정말 우리 죄를 사해 주셨는가 의심하기 쉽습니다. 영적인 일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인 까닭입니다. 그럴 때 세례는 눈에 보이는 물로써 우리 영혼에 일어난 일, 곧 예수님이 그 피로 우리 죄를 씻겨 주신 일을 더 뚜렷하게 보여 줍니다. 보여 줄 뿐 아니라, 이렇게 물이 너희 몸을 씻기듯이 예수님의 피가 정말로 너희 영혼을 씻겼다 하고 딱 인을 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더 확고히 믿게 됩니다.
여기서 이지끼을 님의 오해가 드러납니다. 세례 때 우리가 믿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지끼을 님은 지금 그것을 오해해서, '믿고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믿음의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세례 때 전해지는 말씀은 복음입니다. 그 복음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듯,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로 이것이 세례에 담긴 말씀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죽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지, 우리가 믿고 세례 받을 때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히 생각을 하시지 않으니까, 그냥 "믿고 세례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오해하시는 것이지요. "믿고"는 무엇을 "믿고"입니까? 여기서 "믿고"는 이지끼을 님 생각처럼 "믿고 세례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곧, 예수님 자신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믿음은 하나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지요. 그래서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4)고 말했습니다. 짐승의 피가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도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이지끼을 20.12.22 10:32
1) “중생의 은혜는 하나님의 홀로 하시는 단독 사역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 그 은혜를 주시는지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개혁신학에서는 그래서 구원받은 날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현실상 우리는 알기가 어렵지요. 어느날 느닷없이 회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생할 때, 믿음과 회개가 동시에 일어나고, 바로 그 순간 칭의와 양자와 확정 성화의 은혜를 받습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제 글을 보시면요 3:5절에 “거듭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 옆에
“위로 부터 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쓴 것을 보실 것입니다.
사실 거듭난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니고데모의 말입니다.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의 글에서 안 쓸 수도 없고 해서 “(거듭)난다” 라고 표시한 것입니다.
2) 위로 부터 나는 것(요 3:3절)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5절), 곧 두가지 요소로 구성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중 성령님께서 나게 하시는 것은 죽은 영혼을 깨우시는 것인데
언제 이런 일을 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회심케 되었다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
TR-RE님께서는 이때 칭의와 양자 확정성화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믿음으로 믿음의 행위인 세례를 받을 때, 의롭다 하심을 받는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약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You see then that a man is justified by works, and not by faith alone) –NKJV
3) “여기서 이지끼을 님의 오해가 드러납니다. 세례 때 우리가 믿는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지끼을 님을 지금 그것을 오해해서, '믿고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이 믿음의 내용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지요. 세례 때 전해지는 말씀은 복음입니다.”
라고 하셨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막 16:15-16절입니다.
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6절의 믿는다는 것은 15절의 복음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승천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4) 베드로는 오순절에 복음적인 설교를 하고
그 설교로 마음에 찔림을 받은 자들이 “어찌할 꼬”라고 묻자, 곧 방법을 묻자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얻으리니)(행 2:38절)라고
말씀합니다.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얻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씀(행 2:38절)은 예수님의 막 16:15-16절 말씀을 바꾸어 말씀한 것입니다.
5) 그리고 39절에서는 이를 “약속”이라고 합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니라 “ 하고 말씀합니다.
이 “약속”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에게 해당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는 “부르시는 자” 중에 한 사람인데
TR-RE님께서는 이 중 한 사람이 아니십니까?
6)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함께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바로 이것이 세례에 담긴 말씀입니다.” 라고 하셨는데
TR-RE님께서는 그와 같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저는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롬 6:3절
"as many of us as were baptized into Christ Jesus were baptized into His death? “
TR-RE님께서는 이 말씀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런 의미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저는 “세례로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자는 세례로 예수님의 죽음에 속하게 된다”는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봅니다.
바울께서는 세례로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다고 합니다.(갈 3:27절)
저는 이 말씀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7) “그래서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 4:12)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4)고 말했습니다. 짐승의 피가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세례도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라고 하셨는데
제가 써 놓은 글이 있으니 바로 말씀드립니다.
*******
레위기 4장 20-35절을 보면 동물의 피를 흘려 속죄합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0:4-11절을 보면
특히 4절을 보면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리고 11절을 보면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치 레위기의 말씀과 히브리서의 말씀이 모순인 것 처럼 보입니다.
레위기에서는 동물의 피로 속죄를 받는다고 말씀하고
히브리서에서는 동물의 피가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동물의 피가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고 지적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없이 한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동물의 피로 속죄받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받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속죄(atonement)에 쓰인 단어는 כָּפַר (kaphar) 인데
이는 덮는다(cover over)는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한편 히브리서에서 죄를 없이 한다 할 때 “없이한다”는 헬라어 단어는 περιαιρέω (periaireó) 인데
이는 제거한다, 없앤다 (remove, take away) 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레위기에서 말하는 속죄는 죄에 대한 속죄는 맞지만
죄를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피로 죄를 덮어 속죄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속죄방법이었지만
완벽하지 않은 방법이었고
완벽하지 않은 방법이었으므로 더 나은 속죄,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완벽한 속죄를 바라고 기다리게 하는 속죄방법이었던 것입니다.
******
8) 그리고 “마찬가지로 세례도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TR-RE님 제 글을 보셨습니까?
바울이 자신이 AD 34년에 받은 세례가,
죄를 씻는 세례, 곧 죄사함을 받는 세례였다는 것을
AD 59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을 향한 설교에서 말씀했다고
제 글에 썼는데 안 보신 것입니까? 아니면 보시고도 모르는 척 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보내신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행 22:16절)라고 했다고
바울이 자신의 설교에서 말씀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AD 34년에 세례로 자신의 죄를 씻었습니까?
죄를 씻는 것이 죄사함받는 것은 아닙니까?
9) TR-RE님은 배운데로 성경을 읽으시는 것입니다.
보라는 것은 보고 보지 말라는 것은 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제가 요약해 드린
(1) 복음을 [믿음] – [세례] – [구원]은 예수님의 말씀을 요약한 것이고
베드로와 바울이 이 순서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1)을
(2) 복음을 [믿음] – [구원] – [세례]로 바꾸면 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 세례, 구원뿐만이 아니라 복음도 달라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과 TR-RE님께서 생각하는 복음이 다른 것입니다.
세례를 오해하는 것은 복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세례에대해 오해할 때 바울은 복음부터 다시 가르치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보세요
TR-RE 20.12.22 22:47
이지끼을 님의 논리는 사실 사계 님이 가장 처음에 올리신 말씀 하나만으로도 바로 무너집니다. 로마서 4장 말씀이지요. 이지끼을 님은 나름의 논리로 그 논증을 반박하셨지만, 사실 그때 저는 벌써 어떤 얘기를 해도 소용이 없겠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 드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저를 이 논쟁에 끌어들이셨습니까? 그래도 이왕 시작했으니 몇 말씀 더 드려 보겠습니다.
오늘은 이지끼을 님이 성경을 읽는 방식이 어떤 방식인지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지끼을 님의 "세례 구원"의 근거 구절인 막 16:16 바로 다음 구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혹시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래도 아마 함부로 독사를 집어올리거나 무슨 독을 마시거나 혹은 아무 환자한테 찾아가서 손을 얹는 일은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성경에 어떤 말씀이 있다고 해서, 그 말씀을 다 액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 해석의 과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는 말씀은 믿으십니까? 이 말씀이 정말 사실인지 한번 검증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 말씀은 어떻습니까?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마 5:29-30). 이 말씀은 그대로 순종하고 계십니까?
이지끼을 님이 막 16:16을 해석하는 방식은 마치 위의 말씀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이지끼을 님이 성경을 읽는 방식은, 성경 한두 구절을 교조 삼아, 그것을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다른 수많은 말씀을 무시하고 그 한두 구절에 다 끼워 맞추는 방식입니다. 사실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정통 교회보다는 사이비 종파에 많습니다. 저는 그래서 이지끼을 님이 성경 읽는 방식이 대단히 위태로운 것이라 말씀 드렸습니다.
저는 논증을 펼칠 때 성경을 별로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잘 몰라서이기도 하지만, 어차피 어떤 말씀을 인용해도 이지끼을 님은 이지끼을 님 마음대로 해석하실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이지끼을 님의 '믿음-세례-구원'이라는 구도가 틀릴 수밖에 없는지, 몇 가지 논리를 가지고 반박했던 것입니다.
루터 얘기를 한번 더 해보겠습니다. 루터가 세례 때 중생을 주장했던 까닭, 그리고 그것이 '오직 믿음'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까닭은 바로 세례가 보여 주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바로 눈에 보이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귀에 들리는 말씀이라면, 세례는 눈에 보이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그 말씀 중에 세례는 '복음'을 보여 줍니다. 세례 때 필요한 믿음은 복음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루터는 사실 복음을 믿을 때 거듭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세례가 바로 복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칼빈 이후로, 이 점을 더 깊이 생각해 보니까, '결국 복음이라는 것은 성경에 담긴 것이 아니냐. 그러면 믿음은 성경을 풀어줄 때, 곧 복음을 전할 때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세례는 무엇이냐? 아, 세례는 성경 말씀, 특별히 복음을 눈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에 보조 수단으로 주신 것이 바로 성례이다'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세례도 성경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치 성찬이 주의 죽으심을 주님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엄밀히 따질 때, 은혜의 방편은 오로지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성례조차도 그 '말씀'을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루터가 세례 때 중생을 주장했던 까닭은 바로 세례가 복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복음을 믿을 때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사실 복음은 세례 때만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 이후 신학자들은 이 점을 알았습니다. '그래 바로 그 복음이 성경에 나와 있지. 그리고 그 복음을 전하는 설교를 듣고 믿을 때 구원을 받는 것이지.' 그래서 구원을 받는 데 세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세례는 필요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례는 그 복음을 눈으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세례 받는 사람이 그 복음에 참여함을 인쳐 줍니다.
이지끼을 님이 연중론 논쟁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지끼을 님의 다음 주장, "이중 성령님께서 나게 하시는 것은 죽은 영혼을 깨우시는 것인데 언제 이런 일을 하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다만 회심케 되었다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 TR-RE님께서는 이때 칭의와 양자 확정성화의 은혜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저의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믿음으로 믿음의 행위인 세례를 받을 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주장은 연중론보다 좀더 심각한 형태의 연중론입니다. 사계 님이 이 연중론을 비판하려고 얼마나 오래 힘써 오셨는지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주장이 왜 문제인지 사계 님의 글들을 한번 찾아보시지요.
그리고 다시 당부 말씀 드리지만, 선조들의 신앙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구약의 선지자, 그리고 신약의 사도들만 보내고 끝내신 것이 아니라, 신약 시대 이후에도 하나님이 하나님 말씀을 해명할 선지자와 사도와 같은 분들을 또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오웬이나 에드워즈를 비롯한 셀 수 없이 많은 청교도, 스펄전, 바빙크, 로이드존스, 또 한국에는 김홍전 목사님 같은 분을 계속해서 보내 주셨습니다.
이지끼을 님이 이분들의 글을 꾸준히 읽어 보고 거기서 배워 오셨다면, 아마 지금과 같은 주장은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지끼을 님 해석이 자의적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역량이 부족하신데도 혼자서 성경을 읽고 끼워 맞추는 식으로 논리를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홀로 그렇게 해 오신 것 훌륭한 일이고, 그 점에서 저보다 나으시다고 처음에 말씀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라도 생각을 조금 바꿔 보시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저는 앞으로도 이 말씀을 따라 우리 선조들의 믿음을 본받을 것입니다.
이지끼을 20.12.23 06:35
1)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세례가 중요하다고 하니, 다들 세례를 독립적인 행위로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TR-RE님께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은혜의 방편은 오로지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세례를 받을때, 그 효력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믿으므로 세례에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
말씀이 있고 그에 대한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례가 중요하다고 해서, 말씀(복음)을 믿지 않고 세례만 받는 것은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안타깝지만
제가 한 말씀 더 드리고 괜찮으시다면 마칠까 합니다.
2) TR-RE 님은 고넬료에게 성령세례가 임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TR-RE님은 고넬료에게 임했던 성령세례가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라고 생각합니다.
곧 고넬료를 중생케 하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있게 했던 성령세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고넬료는 세례를 받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고넬료가 받는 세례이므로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 세례로 생각합니다.
정리하면
성령세례로 중생하고 성령님의 내주하심도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 이후에 성령충만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곧 TR-RE님은 성령세례를 성령충만과 같은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같다고 말씀드린 저의 글 "성령세례에 관한 이해"를
자의적인 해석인 것 같다고 하셨으니,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제가 TR-RE님의 생각을 잘못 알고 있으면 말씀하십시요
하지만, 맞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TR-RE님께서 저의 글에 대해 말씀하신 것도 있고,
TR-RE님께 이것을 가르쳐 준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는지도 제가 잘 압니다)
3) 반면에 저는 성령세례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로 보지 않고
성령충만케하는 성령세례로 생각합니다.
곧 중생(성령님의 내주하심)과 성령세례(성령충만)를 다른 것으로 봅니다.
보통 중생 후에, 성령세례로 성령충만케 된다고 보는데
고넬료의 경우에는 그 순서가 바뀐 것으로 봅니다.
고넬료는 성령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세례로 중생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저는 고넬료가 세례를 받아
죄사함을 받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얻은 것으로 봅니다 (행 2:38절)
이것이 제가 아는 중생입니다.
4) 이제, TR-RE님께서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성경구절을 제시합니다.
바울의 경우입니다.
바울은 먼저 성령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9장,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사흘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나니아를 바울에게 보내십니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행 9: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5) 바울은 성령충만케 되었고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데 TR-RE님께서는 이를 어떻게 설명하실지 궁금합니다.
TR-RE님은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로 구원을 받아 성령님의 내주하심이 있고,
세례를 받고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세례, 특히 죄사함과 상관없는 세례를 받고)
이후에 성령충만해진다고 생각하십니다.
바울의 경우,
성령충만케 되고
그리고 세례를 받는데, 죄 씻음을 받는, 곧 죄사함을 받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참고, 행 9:17-18절, 행 22:16절)
바울은 자신이 받았던 세례(행 9:18절)가,
죄를 씻는 세례, 곧 죄사함을 받는 세례였음을 행 22:16절에서 말씀합니다.
TR-RE님
제가 말씀드린 것, 곧 바울의 경우를, TR-RE님께서 배우신 신학으로 설명해 보세요
못하시겠다면
TR-RE님께서 배우신 신학이 성경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제는 아시기 바랍니다.
6)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던 것 다시 말씀드립니다.
고넬료가 받았던 성령세례는, 베드로의 말씀에 따르면
사도들이 오순절에 받았던 성령세례와 같습니다.
TR-RE님께서도 아십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받았던 오순절의 성령세례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로 해석해 보면
사도들은 성령세례로 중생도 하고 성령충만케도 된 것입니다.
행 2:4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세례와 중생 그리고 성령충만이 동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가능한 것입니까? 설명해 보세요.
이처럼 성령세례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로 이해하면
사도행전의 말씀들과 2 군데에서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는 중생케하는 성령세례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세례로 중생을 하는 것이 아니니
우리가 언제 중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성령세례로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동안 논의 하던 구원의 서정도 많이 바꿔야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TR-RE님
내일이나 모레쯤 제가 고린도전서 1장, 10장, 그리고 12장의 "세례"를
바울께서 어떤 "세례"로 말씀했는지 정리해 드릴테니까
사계님과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TR-RE 20.12.24 20:17
이지끼을 님께서 몇 가지 점에서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고넬료가 성령을 받았을 때 구원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베드로와 예루살렘 성도들이 그 사건을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는 회개는 거듭날 때 하게 됩니다. 그때 또 우리는 믿게 되고 구원의 모든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믿지 않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명을 위해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신다는 생각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이지끼을 님의 성령세례에 대한 글은 제가 몇 번 다시 보니까, 꽤 훌륭한 글이더군요. 이지끼을 님의 물세례에 대한 해석은 여러 면에서 자의적이지만, 성령세례에 대한 해석은 제가 동의할 점이 많다고 느꼈습니다(물론 그래도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덧글을 쓰면서 성령세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로 물세례에 대해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순절 사건이 중생케 하는 성령 세례가 아니라는 점, 저는 동의합니다. 오순절 사건의 가장 큰 의미는 신약 교회의 시작을 알린다는 점입니다. 곧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몇몇 개인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차원의 일이 아닙니다. 바빙크는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비견할 만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이 점은 이지끼을 님도 어느 정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또 고린도전서 12:13도 저는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찾아 보니 이지끼을 님처럼 이 말씀을 물세례로 이해하는 분도 많은 것 같더군요.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학자들끼리 의견이 많이 갈릴 때는 꼭 어떤 뜻이라고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가 세례가 중요하다고 하니, 다들 세례를 독립적인 행위로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TR-RE님께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고 하셨는데, 제가 글을 쓸 때, 이지끼을 님의 의견을 다는 아니지만 몇 가지 오해하고 쓴 점이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지만 저는 왜 세례를 받을 때 거듭나는 것이 아닌지 충분히 설명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복음)을 믿지 않고 세례만 받는 것은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그런데 왜 말씀만 믿는 것은 효력이 없다고 하십니까? 결국 세례가 보여 주는 것도 '말씀'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세례 시에 거듭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세례 받을 때 거듭나는 사람이 아예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대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믿을 때 거듭납니다.
그리고 저는 세례 받을 때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때 큰 은혜를 줍니다. 다만 그것이 거듭나는 은혜가 아닐 뿐입니다. 저는 그래서 표와 인으로서 은혜에 대해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지끼을 님의 해석을 제가 자의적이라고 느끼는 까닭은 너무 어떤 공식에 끼워 맞추듯 성경을 해석하는 느낌이 강해서입니다. 어떤 낱말의 뜻도 좀 획일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도 있으신 것 같구요. 그래도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이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가 아니라는 논증은 꽤 훌륭한 논증으로 보였습니다.
이 글로 조금이라도 오해를 푸시면 좋겠습니다.
이지끼을 20.12.25 07:10
1) TR-RE 님, 말씀 감사합니다.
“고넬료가 성령을 받았을 때 구원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베드로와 예루살렘 성도들이 그 사건을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는 회개는 거듭날 때 하게 됩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조금 달리 생각합니다.
고넬료는 성령세례를 받았고 그리고 세례를 받았는데,
저는 “생명을 얻는 회개”를 세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TR-RE님, 저의 글 “성령세례에 관한 이해”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저의 글에서 중생(성령님의 내주하심) 과 성령세례(성령충만)는 다른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령세례(성령충만)는 ministry를 위한 것이지
중생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윗을 죽이고자 했던 사울도 성령충만을 받았던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의 의견으로는 성령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다윗을 죽이고자 했던 사울이 구원을 얻었다고 쉽게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넬료가 성령을 받았을 때, 곧 성령세례를 받았을때
구원받은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물론 성령세례가 큰 역활을 했다고는 생각합니다.
2) “오순절 사건이 중생케 하는 성령 세례가 아니라는 점, 저는 동의합니다.” 라고 하셨는데
동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순절 사건의 가장 큰 의미는 신약 교회의 시작을 알린다는 점입니다.” 라고 하신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저는 두 가지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하는 것이 좋겠네요.
“또 고린도전서 12:13도 저는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맞습니다. TR-RE님께서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받았던 성령세례가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라고 생각하시게 된 것은
TR-RE님께서 그렇게 배우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성령세례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제 입장에서는 그래도 많은 자료를 찾아 봤는데
대부분 고전 12:13절의 “세례”를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라고 이해하고
그런 이해 위에 쓴 글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그렇게 이해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부분이 큰 문제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3) 제가 오늘까지 고전 1, 10, 12장의 세례가 어떤 것이라고 쓴 글을 보여 드릴려고 했는데
한국은 오늘이 Christmas 네요.. 그래서 하루 이틀 더 있다가 올려 드릴테니
바울이 세례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으셨는지 보셨으면 합니다.
“찾아 보니 이지끼을 님처럼 이 말씀을 물세례로 이해하는 분도 많은 것 같더군요.” 라고 하셨는데
고전 12:13절의 “세례”가 성령세례가 아니라 물세례라면
이 구절의 이해에서 “중생케 하는 성령세례”라는 정의가 만들어졌던 것 처럼
“중생케 하는 물세례”라는 정의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 제가 작년에 알게 된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누가와 바울의 관계입니다.
누가는 AD 50 년에 바울을 만나 기독교인이 되었다고합니다.
그후 바울일행과 헤어져 빌립보교회에 있다가 AD 57년에 바울 일행과 합류하고
그후 바울이 순교하실때( AD 66년경) 까지 바울곁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 바울곁에 있었던 사람은 누가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8장의배경은 AD 61, 62년 경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은 이때 누가가 기록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53-54년경에 썼다고합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고린도전서의 내용을 알고 쓴 것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인데, 누가와 바울이 함께 하셨으니,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할 때 바울이 모두 보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사도행전에서 성령충만케하는 성령세례를 보여줬다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중생케하는 성령세례를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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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것은 다른 글(https://cafe.daum.net/reformedcafe/jY3M/10)에서 이지끼을 님이 칼빈을 인용하시며 본인의 의견이 칼빈과 같다고 주장하셔서 제가 달았던 덧글 내용입니다.>
TR-RE 20.12.29 20:26
이지끼을 님, 칼빈을 그런 식으로 인용하는 것은 부정직한 것입니다. 저는 분명히 칼빈의 생각이 이지끼을 님과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얘기는 아예 듣지 않으시는군요. 이지끼을 님의 생각을 지지하는 듯한 글만 슬쩍 옮겨 적는다고, 칼빈이 이지끼을 님을 지지해 주지는 않습니다. 다음 글은 칼빈의 사도행전 2:38 주석입니다.
"Although in the text and order of the words, baptism doth here go before remission of sins, yet doth it follow it in order, because it is nothing else but a sealing of those good things which we have by Christ that they may be established in our consciences."
이지끼을 님이 말씀하신 '믿음-세례-구원'의 순서를, 칼빈은 윗 글에서 분명히 '믿음-구원(죄 사함)-세례'라고 바로잡고 있습니다. 칼빈의 권위를 등에 업으시려면, 좀 더 정직해지셔야 합니다.
이지끼을 20.12.30 14:57
그렇게 보시는 가요?
저는 칼빈주석을 처음부터 찾아 본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제가 칼빈의 고전 12:13절 주석을 소개한 것은 말 그대로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입니다.
저는 사실 어떤 신학자들의 말을 인용해서 글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공부한 것만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뻔 하였네요.
칼빈이 "믿음-구원(죄 사함)-세례라고 바로 잡고 있습니다"라고 하셨는데
제가 보는 성경과는 다르네요
예수님께서 보내신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라고 하였습니다.
TR-RE님께서 보시기에 바울의 경우 죄씻음을 먼저 받고 그리고세례를 받은 경우인 것으로 생각되시나요?
그리고 Calvin의 행 2:38절 주석은 아무리 생각해도 동의가 안 되네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자들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들아 어찌할꼬" (Brothers, what shall we do?)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무엇을 해야 되냐고,
자신들이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는데 무엇을 해야 되냐고 묻는 것입니다.
방법을 묻는 것이지요?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얻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믿음-구원(죄 사함)-세례"라고 하시니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구원(죄사함)에서 멈출 수도 있겠네요, 세례를 받기 전에 구원을 받았으니..
그런데 사도행전 2:38절 이후를 보시면 "구원을 받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받아 들인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니까
더 이상 "구원을 받으라"고 권하지 않고 제자의 수에 더해졌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생각해 보면
누가는 구원을 받는 방법이 세례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TR-RE님 확인 부탁드립니다.
제가 소개해 드린 고전 12:13절 Calvin 주석에서
Calvin은 고전 12:13절,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의 "세례"를 "물세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지요?
성령세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요?
TR-RE 21.01.02 02:03
예. 칼빈은 그 구절을 "물세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것이 이지끼을 님의 '믿음-세례-구원'이라는 도식을 지지해 주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구원받은 시점도 보통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라고 봅니다. 아나니아가 오기 전이지요. 그래서 칼빈은 사도행전 22:16 주석에서 바울은 벌써 죄 씻음을 받았고, 그 사실을 확증하는 뜻으로 세례를 받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2:38도 이지끼을 님처럼 해석하는 개혁신학자는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이지끼을 님의 주장, 그러니까 '믿음과 믿음의 행위(세례)가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 이것은 '오직 믿음'이라는 원리와 어긋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이지끼을 님이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개혁파와 알미니안 사이에 어떤 논쟁이 있었는지 모르시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입니다. 로마 가톨릭이 '믿음과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이 '행위'는 당연히 은혜의 주입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에서는 구원받는 시점이, 믿음이 처음 발휘되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그 시초에 구원의 모든 혜택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믿음 자체도 순전히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구원은 그냥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와도 관련이 없습니다. 구원에 관해서는, 알미니안처럼 믿음조차 어떤 행위로 보지 않는 것이 개혁신학입니다. '오직 믿음'이 무슨 뜻인지 한번 알아 보시지요. 그 뜻을 모르시니까, '행위 구원'을 주장하시면서도, '오직 믿음'이라고 잘못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할례가 '죄 사함'과 관련 있다는 말을 처음 들어보신다는 이지끼을 님의 말씀도, 이지끼을 님이 그동안 얼마나 개혁신학에 무지하셨는가를 드러낼 뿐입니다. 최소한 <기독교 강요>라도 펼쳐 보셨다면, '아, 내가 그동안 개혁신학을 너무 몰랐구나' 하고 생각이라도 하셨을 것입니다. 이러니 저는 이지끼을 님의 성경 해석을 자의적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 개혁교회 안에서는 이지끼을 님의 생각을 아무도 지지해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례든 할례든 말입니다.

@이지끼을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 16:16)
“믿고”의 정체를 묻는 제 물음에는 모르쇠 하신 채 이지끼을 님 물음에는 “예.”로 답하라 하시며 “예.”로 답하지 않는 저희들을 주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들로 매도하시는데, 다시 묻습니다.
이지끼을 님, 마가복음 16장 16절에 적힌 “믿고”의 정체는 ‘세례를 받을 때(세례를 받아야 만이)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주님”으로 부름으로써 죄 사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을 뜻하는 중생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 의義로 옷을 입는 중생을 한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까?
@이지끼을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도대체 “믿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이지끼을 님은 세례를 받기 전에는 “생명 얻는 회개”가 없었기에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하셨지요? 즉, 세례를 받기 전 이지끼을 님 믿음은 “생명 얻는 회개”로서 믿음이 아니었기에 “예수를 주시라” 하는 믿음이 아니었지요? 그리고 세례를 받는 행함 뒤에야 “생명 얻는 회개”로 “예수를 주시라.” 하셨지요? 제가 신대원에서 신학을 공부하신 이지끼을 님에게 이토록 수준 낮은 질문, 유치원생에게나 해야 할 질문을 해야겠습니까? 제발 앞뒤를 생각하고 글을 쓰시기를 바랍니다.
@이지끼을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 (롬 8:9)
“믿고”는 “그리스도의 영”과 상관이 없는 믿음, “예수를 저주할 자”로 말하는 믿음, 사탄과 상관이 있는 믿음,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의 믿음입니까? 이 물음에는 이지끼을 님은 “예.”로 대답하셔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가 살아나는 중생은 물세례 뒤에 있음을 계속 주장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지끼을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물세례를 받고 중생함으로써 양자의 영을 받는 성령의 내주가 있으니, 로마서 8장 15절 역시 물세례가 낳는 효력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고”의 정체는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없는 믿음, 죄와 허물로 죽어 있는 자가 에수님을 “저주할 자”로 부르는 믿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지 않는 믿음일 뿐입니다. 이지끼을 님, 그렇지요. “예.”로 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그만 저로 하여금 이런 유치한 글 쓰지 않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지 않고 한 문장가지고 집착하니까 문제가 생기는것 같고
초대교회때 성도들 세례받지 못한분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도들도 믿고나서 한참있다가 세례받기도 했구요..
신약학자와 통화하면서 이에 대해 여쭈니 이찌끼을님 주장은 지방교회주장과 같으며 잘못된 주장이라 하셨습니다.
grace님
저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저의 의견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갈 3:27절을 개역한글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이라고 번역했고
개역개정은 "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는"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곧 (믿음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합한다"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다 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합한다는 말은 다르고
이에 따라 두 가지 구원론으로 갈라집니다.
우리가 배운 구원론은 개역한글번역과 잘 맞습니다.
그런데 개역한글만 그렇게 번역했고
제가 찾아 본 번역본들은 다 개역개정의 번역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래서 저는 우리의 구원론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대교회때 성도들 세례받지 못한분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도들도 믿고나서 한참있다가 세례받기도 했구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사도행전에 그런 예가 있는지요?
@이지끼을 사도들이 믿고 바로 세례받았다는 말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