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천국을 가진 황일광 시몬
정민교수, 가톨릭 평화 신문, 내포의 천민 지도자들
황일광(黃日光, 1757~1802) 시몬은 홍주(洪州) 사람으로 최하층민인 백정 출신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의 여파로 1802년 참수되었다. 그의 신분은 백정이었다. 백정이란 유기업鍮器業 특히 도축업屠畜業업에 종사하던 신분으로 천민중에서도 가장 낮은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20세기 중반까지도 그 영향이 지속되었다. 이런 황일광이 천주교를 만나고 천주학쟁이들과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를 만나 고결한 그의 인품과 신앙에 영향을 받았다. 정약종은 그를 진리의 세계로 인도하여 주문모 신부를 통해 세례를 받도록 도와주었으며 같은 밥상에 앉아 호형호제를 하였다고 한다. 황일광은 평소 그리고 신유 대박해로 체포되어 신문관들이 백정이 사교에 빠져 체포되니 어이없이 여기며 ‘배교한다’는 한마디만 하면 옥에서 내보내주겠다고 하였으나, 그는 “내가 이미 이승의 천당을 맛보고 저승의 천당을 확신하니배교는 가당치 않다고”추상같은 신앙을 고백했다.(작은 글씨:게시자 편집) 달레는 어린 시절과 젊은 날 그가 “모든 사람의 멸시와 쓰레기 같은 취급을 받아가며 지냈다”고 썼다. 이하 그의 생애는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와 「사학징의」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했다.
그는 42세 나던 1798년 홍산(鴻山)으로 이존창을 찾아가 그 집에 부쳐 살며 천주교를 배워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이후 그는 고향을 떠나 아우인 황차돌(黃次乭)과 함께 멀리 경상도 땅으로 옮겨가 살았다. 경상도 어디인지, 그곳에 왜 갔는지에 대한 설명은 남아있지 않다.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라고만 했다. 뭔가 맡겨진 역할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간 곳의 교우들은 천한 백정 출신의 형제를 편견 없는 애덕으로 감싸주었다. 천주교를 받아들인 이후 황일광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손가락질당하고 멸시받던 삶, 쓰레기 취급의 응어리가 눈 녹듯 사라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기쁨이 샘물처럼 차올랐다.
그는 편견을 거두고 자신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나눠주는 신앙 공동체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천국이 두 개 있습니다. 저같이 천한 백정을 이처럼 점잖게 대해 주시니, 이 세상의 삶이 제게는 천국이요, 죽은 뒤에 가게 될 하늘나라가 또 하나의 천국입니다.” 하루하루가 벅찬 기쁨의 날들이었다.
1800년 2월, 황일광과 황차돌 형제는 광주 분원(分院)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의 행랑채로 이사했다. 형제는 그 튼튼한 몸과 티 없는 신앙의 모범으로 이존창의 명에 따라 각 지역 교회를 오가며 모종의 역할을 맡았던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경상도에 머물던 그들이, 당시 명도회 회장으로 천주교의 지도자였던 광주 정약종 집의 문간방으로 찾아들어 갈 이유가 없다. 그의 활동 범위는 가히 전국구였다. 그는 이곳에서 정약종과 서울 및 지방 교회를 연결하는 심부름꾼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황일광의 열심은 언제나 주변 모든 이들의 탄복을 부를 정도였다.
어찌 배반하리이까?
1800년 10월에 정약종은 상경해서 청석동에 살던 궁녀 문영인(文榮仁)의 집으로 이사했다. 정조 임금의 국상 중이어서 이 기간 중 일체의 검거 활동이 멈춘 까닭에 잠깐의 진공 상태가 있었다. 10월을 보통 소춘(小春)이라 하는데, 가을의 한복판에서 한동안 봄날 같은 날씨가 이어지는 시기가 들어 있어서이다. 앞서 「벽위편」에서 아녀자들이 겁도 없이 밤중에 쏟아져 나와 길거리를 다녔다던 그 시기이다. 곧 다가올 매서운 추위의 전조 격으로, 일종의 인디언 섬머 같은 기간이었다.
명도회 회장 정약종의 상경은 아마도 주문모 신부의 요청에 따른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는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뒤 궁을 나와 살고 있던 궁녀 문영인의 집에 세를 얻어 서울에 근거지를 확보했다. 이때도 황일광 형제가 이삿짐을 날랐다. 이 집에서 황일광은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고 시몬(深淵)이란 세례명을 받았다. 함께 미사를 올리는 벅찬 기쁨도 맛보았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문영인의 집이 좁아 함께 거처할 수 없자, 형제는 정동(貞洞)의 골목집 사랑채에 들어 땔감을 팔며 생활했다. 서울 생활은 땔감 없이는 밥도 못 짓고 겨울철 난방도 할 수가 없었다. 땔감 배달은 신자들을 방문하여 소식을 전하면서도 남의 의심을 사지 않을 일거리였다.
이들 형제는 1801년 2월, 정약종이 체포되기 며칠 전에 붙잡혔다. 끌려갈 때도 끌려가서도 그는 내내 명랑했다. 관리의 날카로운 추궁과 고문에도 조금의 흔들림이 없었다. 천한 백정이 신앙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며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할 때는 거룩한 아우라가 넘쳤다. 대가는 잔혹한 고문이었다. 다리 하나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11월 12일에 포도청은 형제를 형조로 넘겼다. 그는 정약종, 이존창, 황사영 등 사학 3적(賊)의 심복으로 지목되었고, 혈안이 되어 찾고 있던 황사영의 소재를 대라며 집중 추궁을 받았다. 그의 대답은 구차하지 않았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사학에 빠져서 이를 바른 도리로 알았습니다. 비록 죽는 지경에 이른다 해도 어찌 배반하여 버릴 마음이 있으리이까? 속히 죽임을 당하는 것이 지극한 소원이올시다.” 첫 번째 천국에서의 삶이 이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조정은 그를 고향인 홍주로 보내 그곳에서 목을 베라고 했다. 그곳 천주교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 먼 길을 그는 들것에 실려 갔다. 들것 위에 그를 얹고 서울에서 홍주까지 옮겨야 했던 포졸들은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그는 홍주에 도착한 당일 45세의 나이로 목이 잘렸다. 그는 그날 두 번째 천국에 올라 천주의 품에 안겼다.
황일광 시몬의 빛나는 덕행은 그곳 신자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대신 무한한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천한 백정인 그도 천주의 영광을 위해 저토록 거룩하게 죽었다. 우리도 따라가자. 우리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