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기 10:13-22
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면 사람들은 등장인물에 자신을 이입해서 보곤 합니다. 꼭 모두가 주연을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조연에 주목하며, 심지어 단역에 애정을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욥기를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욥의 아내의 입장에 공감합니다. 내가 욥이었다면 벌써 하나님을 저주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욥의 입장에 철저히 자신을 이입시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욥의 친구들의 이야기가 맞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내가 힘들고 속상했던 일을 말하면 “그건 니가 잘못했네”라고 말해서 본전도 못 얻는 많은 남편들은 욥의 친구들 편일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판단자의 위치에 서며, 공의롭고 정당하게 남의 상황을 평가하곤 합니다. 특별히 욥의 결론을 예상하지 않고, 드라마 보듯 한 회 한 회 보다 보면 더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인 10장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욥의 불경한 소리와 불평의 말을 듣자면, 새로운 친구를 한명 더 등장 시켜서 욥의 말을 논리적으로 시원하게 반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저도 어렸을 적 처음 욥기를 읽었을 때, 엘리후가 등장하자 속으로 환호성을 외친 적이 있습니다. 아 이제야 욥의 말을 제대로 반박할 마지막 주인공이 등장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친구들 편에 자신을 두는 순간, 욥기의 함정에 걸려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에서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친구들보다 낫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판단하고 정죄하고 평가하고 욥의 불경을 막고 싶어 했던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이 이러한 의심과 외침들의 과정들을 정당한 것이라 여기셨고, 끝내 자신을 드러내시어 욥의 모든 고민에 답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함께 보며 불경하고 의심 가득한 고백이, 어떻게 정당한 신앙의 과정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해보겠습니다.
우리를 공격하는 듯한 하나님(13-17)
(13) 그러한데 주께서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나이다 이 뜻이 주께 있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13절은 8-12절을 기반으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창조주 되시고 기르시고 먹이셨음에도, ‘이것들’을 마음에 품으셨고, ‘이 뜻이’ 주께 있었다는 표현입니다. ‘이것들’과 ‘이 뜻’이라는 단어가 명확하지 않은데, 문맥상 그 능력과 돌봄에도 하나님께서 사실은 욥을 향한 나쁜 뜻을 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새번역은 13절을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주님께서는 늘 나를 해치실 생각을 몰래 품고 계셨습니다’라고 번역합니다.
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진실로 욥의 창조주 되신다면 그것이 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능력으로 이제는 욥이 공격당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돌보셨다면 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관심으로 이제는 욥이 범죄하지 않을까 지켜보며 벌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시고 보살피셨다면 더욱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높은 만큼 욥에게 더욱 큰 낙차의 함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은 14-1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새번역성경입니다.
(14-17) 주님께서는, 내가 죄를 짓나 안 짓나 지켜 보고 계셨으며, 내가 죄를 짓기라도 하면 용서하지 않으실 작정을 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죄를 짓기만 하면 주님께서는 가차없이 내게 고통을 주시지만, 내가 올바른 일을 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나를 믿어 주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나는 수치를 가득 덮어쓰고서, 고통을 몸으로 겪고 있습니다. 내 일이 잘 되기라도 하면, 주님께서는 사나운 사자처럼 나를 덮치시고, 기적을 일으키면서까지 내게 상처를 주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번갈아서, 내게 불리한 증인들을 세우시며, 내게 노여움을 키우시고, 나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욥이 13-17절까지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수동적으로 욥의 고난을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벌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욥에게 하나님은 사자처럼 잠복했다가 덮치시는 분입니다. 새로운 증인을 세워 그를 고립시키시는 적극적인 분입니다. 보호와 돌봄이라는 미명 아래에서 감시하다가 죄를 짓기만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고통을 주는 심판자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아래 세상이 창조 되었듯,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아래 공격당하기에 자신은 도저히 대응할 수 없다고 욥은 말합니다. 그는 마치 편집증 환자처럼 모든 증거를 조합해 하나님이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려 하며 공격하는 것처럼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느낌에는 근거가 있습니다. 실제로 욥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현실에서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세상에 세밀하게 관여하신다면, 그 전지전능함이야 말로 욥이 의심하는 하나님의 공격성의 증거가 됩니다. 욥에게는 하나님의 공격성은 새롭게 알게 된 교리이자 냉혹한 현실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욥의 이러한 외침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심정적으로도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없으며, 이성적으로도 하나님이 정당한 이유 없이 인간에게 고통으로 다가간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때로 모순적이며, 하나님은 역설적으로 임재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늘 의인의 복 받음과 죄인의 벌 받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쉽게 압니다. 야곱은 분투하는 인생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하나님과 격투를 벌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브니엘’, 즉 하나님의 얼굴이라 명명합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은 마치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곳에서 죽고, 새롭게 태어납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사람에게서 태어나는 존재들이 아니라 성령으로 태어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옛 자아에서 죽고 새로운 자아로 태어나는 사름들입니다. 그렇기에 성도의 삶은 늘 죽음의 자리로 갑니다. 그 자리가 실제로는 생명의 자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실로 우리 삶에 죽음을 가져오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에도, 마치 나를 죽일 것처럼 달려드는 모습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십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그 과정을 과장하거나 속이지 않고 진실하게 받아들이며 느끼는 대로 내뱉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알량한 머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하나님께 아부하지도 않으며 자기 내면의 혼돈과 의심을 정직하게 드러냅니다. 때로는 답보다 풀이가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은 이제야 병든 답이 아닌 건강한 풀이의 시작에 섰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것일 때가 있습니다. 학습을 통해 배운 의미 없는 병든 답을 되뇌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서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며 풀이과정을 거치는 것 말입니다. 짐짓 괜찮은 척 점잖게 있으며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용기 있게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도전하는 자세가 우리 신앙을 한 단계 더 나아가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의 항변과 외침은 더 거칠고 감정적으로 이어집니다.
고통받는 자의 외침(18-22)
(18-19) 주께서 나를 태에서 나오게 하셨음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렇지 아니하셨더라면 내가 기운이 끊어져 아무 눈에도 보이지 아니하였을 것이라 있어도 없던 것 같이 되어서 태에서 바로 무덤으로 옮겨졌으리이다
욥은 3장에서 생일을 저주했던 그 고백을 더욱 발전시킵니다. 3장에서는 하나님이 수동태로만 언급되었지만 이제 그는 하나님을 모든 재앙의 원인으로 지목합니다. 3장에서는 우연히 자신의 존재와 고난이 닥치게 된 것으로 여겼다면, 이제는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생각하며, 그 계획을 무로 돌이키기 위해 죽고 싶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욥의 모든 거친 말들은 그 자체로 진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욥의 고통과 감정은 진실합니다. 그는 철저하게 고통당하는 자의 외침 속에 있습니다. 실상, 범죄 이래로 모든 인류는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2장 24절에서 말씀하시듯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고통당하고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시며, 그 외침 가운데로 역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존재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욥이 진실로 죽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생명과 죽음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시작했고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도 글자로 주어지는 답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실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포기치 않아야 합니다.
(20-22) 내 날은 적지 아니하니이까 그런즉 그치시고 나를 버려두사 잠시나마 평안하게 하시되 내가 돌아오지 못할 땅 곧 어둡고 죽음의 그늘진 땅으로 가기 전에 그리하옵소서 땅은 어두워서 흑암 같고 죽음의 그늘이 져서 아무 구별이 없고 광명도 흑암 같으니이다
욥의 마지막 고백은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기에 해결책은 하나님의 부재만이 남은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내버려 두세요’라고 간구합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기에, 잠시라도 평안을 주기를 간구합니다.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쉬는 것을 간절히 원할 정도로 그는 기력이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징벌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징벌을 잠시만 멈춰달라고 부탁합니다. “땅이 어두워서 흑암 같다”는 것은 창조의 역전을 말합니다. 욥의 운명은 창조의 능력이 역전된 어둠만이 존재하는 그곳 직전에 있는 것 같이 희망 없는 상황입니다.
욥이 실제로 하나님에게 자신을 떠나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부재를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합니다. 욥은 그 상황에서도 값싼 희망으로 도피하거나 자신을 마취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직하게 자신 앞에 놓인 절망을 하나님 앞으로 들고 나갑니다. 이것이 욥이 앞으로 나아가는 시작이 됩니다.
환자는 자신의 문제를 진실하게 말할 수 있을 때 의사에게 치료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의사가 “왜 오셨나요”라고 물을 때 환자가 “아 사실 저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냥 병원이 궁금해서 구경 왔어요”라고 말하는 것만큼 황당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점잖음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그렇게 우리 존재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포장된 모습으로 나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함, 우리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아픔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자리가 될 것이며,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욥은 자기 옆을 지키며 잔소리 해대는 친구들의 말이나 시선에 주눅들지 않습니다. 그럴 여유가 없었던 것이 더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하나님은 욥의 외침 가운데 역사하시고 응답하실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늘 그렇게 고통 받는 자의 외침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을 때, 예수님은 온 인류 역사의 고통 받는 자의 외침 한 가운데 계셨으며, 그 외침을 대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판단하고 정죄 받는 자들 가운데 거하지 않으셨고, 존재 가운데 혼란을 겪고 고통 받는 자들 가운데 먹고 마셨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한 맹인이 소리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이릅니다. 그러자 그는 마치 친구들의 비난과 정죄에도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찾았던 욥처럼. “더 크게 소리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예수님은 고통 받는 자의 외침을 외면치 않으시고 그에게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수많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사람들과 달리, 그는 예수님을 길에서 따릅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존재하는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고통 받는 자들의 외침 속에 있는지, 아니면 욥기를 읽다가 함정에 빠지는 독자들처럼, 실제 인생 속에서도 욥의 친구들의 편에 서서, 인류의 고통을 진실 되게 마주하지 못하며 병든 답에 숨어 버리지는 않는지 말입니다. 다른 이의 고통을 평가하고 비난하는 자리에 선 것은 아닌지, 심지어 자신의 고통조차 이미 주어진 답으로 감추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판단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론 속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외침 속으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알게 되는 저와 교우님들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을 깊이 아는 자리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의 강이라는 우리의 인생을 건너야만 가능함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또한 주눅 들거나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건너 하나님을 향해 외치는 주의 백성 되게 하옵소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 없는 일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포기치 않고 간구하는 우리들 되게 하시며, 그리하여 문자로만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과 존재를 헌신하여 하나님을 깊이 아는 자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이 낯설게 느껴지거나, 나에게 고난을 주신다고 느꼈던 적인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2. 욥의 일련의 불평이나 고백을 들으며 어떤 감정이나 생각이 들었는지 고민해 봅시다.
3. 내가 가진 영혼의 문제나 현실의 고통을 하나님 앞으로 철저히 가지고 나아가는지 돌아봅시다.
4. 주변에서 고통 당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를 볼때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 돌아봅시다.
(작성: 송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