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7일 오후 익산 정각사에서 파노라마 같은 인생 역정을 거쳐 출가자의 삶을 살고 있는 한 비구니 스님을 만났다. 전성기 시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밝은 미소만큼은 여전했다. 속세의 인연을 끊고 출가한 지도 어느덧 27년. 바로 인기가수, MC 등으로 80년대 연예계를 주름잡던 가수 이경미(법명 보현스님)다.
그는 한창 활동할 당시 길용우‧김혜수 주연의 KBS드라마 ‘사모곡’의 주제곡을 히트시키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사모곡’은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며 연모하는 마음을 표현한 노래로 감성적인 멜로디와 애절한 목소리가 더해져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방송인 이상벽씨는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그의 전성기 시절 인기에 대해 지금으로 치면 ‘아이유’를 생각하면 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가수생활을 접고 돌연 연예계를 떠나 출가자의 길을 걷게 됐을까.
“사람들이 저를 보고 왜 출가했는지 궁금해 합니다. 잘나가던 연예인을 그만두고 왜 하필 스님이 됐느냐고 물어오죠. 그럴 때마다 저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부처님 제자로 살고 싶었던 것이 그 이유라고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스님의 길을 가렵니다. 스님의 길은 숙명인 것 같아요.”
◇촉망받던 가수 시절…연예계 활동 회의감 들어 돌연 잠적
그는 여고시절 친구와 남산에 놀러갔다가 영화진흥공사 광고 기획자의 눈에 띄어 길거리 캐스팅된 후 화장품과 음료, 제약회사 광고 모델로 발탁돼 연예계에 입문했다.
이후 TV의 한 프로그램에서 에어로빅을 선보인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색소폰 연주가인 故 이봉조씨의 눈에 띄어 가수로 전격 데뷔하게 된다.
첫 데뷔곡 1집 타이틀 곡 ‘소녀시절’에 이어 2집 설마, 3집 사모곡까지 그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높아갔다.
1984년 당시 ‘J에게’로 인기몰이 하고 있는 이선희와 함께 KBS가요대상 신인 가수상을 놓고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인기에 힘입어 당시만 해도 CF 편당 1천만원이라는 높은 개런티를 받는 등 가수와 함께 모델로서도 성공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 한 구석은 허전했다.
무엇을 해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남모르는 고통이 찾아왔다.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대중의 시선과 인기 연예인이라는 수식어는 늘 부담으로 다가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돈과 명예를 향해 질주할수록 점점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짜여진 방송 스케줄 의해 매번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반복적인 생활, 인형 같은 삶이 싫었다. 화려한 무대 뒤에 감춰진 연예계의 단면은 충격적이었다. 재벌과 권력층이 여자 연예인을 꽃으로 비유하는 연예계의 검은 커넥션의 실체였다. 자괴감에 빠져 들었다. 탈출하고 싶었다.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한 방송사의 ‘100분 쇼’ 생방송 도중 마이크를 놓고 사라진 것. 방송 펑크를 내고 돌연 잠적했다. 1986년의 일이었다. 모두들 의아한 반응이었다. 방송국 관계자들은 그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사모곡으로 한창 인기가 절정을 누리고 있을 때여서 의구심은 커져만 갔다. 당시 언론은 실종설 등 온갖 추측기사를 쏟아내며 여자 연예인의 묘연한 행방을 앞 다투어 보도했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방송국을 나와 찾아 들어간 곳은 인왕산의 한 암자였다. 그곳에서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공양주로 생활했다. 하지만 그것도 몇 달 가지 못했다. 수소문 끝에 그의 소재를 파악한 동료 선후배 연예인들과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로부터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결국 어머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어머니는 한걸음에 달려가 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하지만 또 다시 감행된 가출. 어머니에게는 미국에 가서 바람을 쐬고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다음 다시 인왕산의 암자를 다시 찾아가 주지스님에게 칩거할 만한 곳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스님은 한 사찰을 소개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바로 지리산 칠불사. 비로소 머무를 곳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대하는 스님의 반응은 매몰찼다. “절은 도피 장소가 아니다. 당장 돌아가라”며 스님은 단호하게 뿌리쳤다. 그럴수록 돌아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죽어도 여기서 죽겠다고……. 결국 그의 고집은 3년간의 지리산 행자 생활로 이어졌다. 몸은 부서질 듯 고됐지만 부처님 곁에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만은 편했다.
◇초등학교 4학년 불교와 인연…출가의 길을 가다
불교와의 첫 인연은 초등학교 4학년 시절로 거슬러 오른다. 당시 집과 학교의 거리는 2km 남짓. 등교를 하기 위해서는 이 길을 걸어야 했다. 더욱이 산 밑에 살다보니 학교를 가려면 마을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 데 중간 쯤 걷다보면 몸이 약해 경기(驚氣)로 기절하기 일쑤였다. 그때 마다 그를 데리고 와 침을 놓아준 사람이 바로 집 근처 사찰의 주지스님이었다.
“비몽사몽 간에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떳을 때 그곳엔 항상 부처님이 계셨어요. 그래서 어린마음에도 이곳이 절이란 것을 알게 됐지요.”
그 뒤로 주지스님을 따라 유발상좌가 된 그는 스님을 도우며 절에 살다시피 했다. 그는 “그때부터 내 마음 속에는 스님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싹트고 있었다”며 “학창시절과 연예계 생활 동안에도 이 마음은 한 번도 변치 않았다”고 전했다.
◇출가자로서 복지 포교에 혼신…장애아; 미혼모 아이들을 돕기 위한 삶
승가대학을 졸업하고 포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수원 권선구에 위치한 성불원 법당에서 지체 장애아들과 함께 생활하며 5년 동안 어머니 역할을 했다. 소외받고 어려운 이웃을 향한 스님의 발심은 그렇게 조금씩 세상을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이후 충남 천안 동면의 몽각산 기슭의 한 폐교를 임대해 개조하고 ‘부처님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터를 잡고 지체 장애아들을 돌보아 왔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 스님은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다.
“언제가는 부처님 마을 앞에 5명의 아이들이 버려져 있더라구요. 누군가 이곳 스님에게 맡기면 잘 키워 준다는 말을 듣고 놔두고 간 것이지요. 너무나 가슴 아팠어요.”
현재는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로 자리를 옮겨 음악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있다. 장애아와 미혼모 아이들을 돕기 위해 음성공양 봉사와 함께 음반 발매 등을 통해 수익금을 마련하고 있다.
“한국 불교의 미래는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에 있습니다. 제가 원래 가수이고 모델이었잖아요. 지금은 출가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제가 가진 역량을 통해 그들의 재능과 끼를 발굴하는 조력자 역할을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