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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 에세이】 ‘칠갑산 호랑이’ 특집
■ ‘올곧은 생활철학’으로 살아온 충남 청양의 한 농촌 여성 「97수(壽) 생애」를 통해 본 ‘삶의 가르침’
♣ ‘칠갑산 호랑이’ 별명은 누가 붙여 드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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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순서 = 제1부 = ○ 청양 칠갑산 호랑이 특집[1] 구순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조선일보) = 제2부 = ○ 청양 칠갑산 호랑이 특집[2]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월간문학』) - 권갑하 시인(서예가)의 편지와 서예작품 - 낙암 정구복 교수(역사학자) 소감 - 초강 송백헌 교수(문학평론가) 소감 - 일송 송하섭 교수(문학평론가) 소감 ▣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장수마을 ‘낙지리(樂只里)’사연 = 제3부 = ○ 청양 칠갑산 호랑이 특집[3] ‘부적(符籍)’에 얽힌 추억(월간『경찰고시』) - 처가에 급히 다녀오던 날 2019.06.14. “딸과 사위 얼굴이 보고 싶다” = 제4부 = ○ 청양 칠갑산 호랑이 특집[4] 부엉이 소리와 토끼 발자국 소리(『한국문학시대』) - 칠갑산 가는 길 = 제5부 = ○ 청양 칠갑산 호랑이 특집[5] 고향 후배의 ‘장례 성심 공덕(功德)’(『수필예술』) |
= 제1부 =
【윤승원 에세이】
청양 칠갑산 호랑이 특집[1]
조선일보 에세이
구순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
윤승원 대전수필문학회장
충남 청양의 칠갑산 아래 산골 마을에 아흔이 다 되신 장모님이 사신다. 어르신에게 유일한 벗은 TV이다. 온종일 틀어놓는 TV의 높은 볼륨 탓에 대화가 불편할 정도다.
하지만 나는 TV 볼륨을 줄이지 않는다. TV 소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은 도회지에서 사는 나의 예민한 귀 탓이지, 시골 노인의 귀에는 상관이 없다. 혼자 적적하게 사시는 노인 귀에는 이렇게 큰 음량이 익숙해 생활에 아무런 불편이 없으니, 문안드리는 사람이 굳이 TV 볼륨을 줄여 드릴 필요가 없다.
이곳은 TV 소리마저 없으면 절간이나 다름없다. 사람이 사는 집인지, 빈집인지 모를 정도이다. 일찍이 홀로되신 장모님은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호랑이처럼 무섭게 살지 않았으면 살아가면서 별의별 어려움을 겪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자 혼자 살아가니 나약한 면을 보여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그 많은 전답을 혼자 관리하려면 장정(壯丁) 못지않은 완력과 기세도 필요했다. 거친 농사일에 자식 키우는 일까지 억척스럽게 일인다역(一人多役)을 해내신 분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외로운 분이었다. 일찍이 남편과 사별해 경험했듯이 뜻하지 않은 불행을 이겨내려면 보이지 않는 신령(神靈)도 믿어야 했다.
이때부터 일진(日辰)이며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엄격히 따지면서 '가리고 삼가는 일'이 많아졌다. 먹는 것, 물건 사는 것, 심지어 장거리 출타할 때도 '좋은 날'을 따져야 했다.
30여 년 전 내가 이곳 깊은 산골 마을로 장가갔을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대문 앞에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는 가시 달린 나무였다. 악귀(惡鬼)를 쫓는다는 '엄나무'였는데, 장모님의 수호신(神)이었다.
그 나무는 세월이 흐르면서 태풍에 쓰러졌지만 뿌리는 아직도 죽지 않고 새순을 피워 올려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아내는 그 산골 마을에서 '콩밭 매는 아낙'이었다. 대중가요 '칠갑산'의 노랫말에 등장하는 것처럼 아내도 '홀어머니 두고' 내게 시집왔다. 찬바람이 불면 아내는 김장을 한다.
우리 식구 먹을 양만 하는 게 아니라 시골에 홀로 계신 친정어머니가 드실 김치도 담근다. 요즘은 손쉽게 택배로 부쳐도 된다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지난 휴일 김장 단지를 승용차에 싣고 청양으로 달려갔다. 허리가 활처럼 휜 장모님이 이것을 보시더니, 사위한테 '큰절' 받으시는 것도 잊으시고 김장 단지가 놓일 장소부터 지시하신다. 그래도 나는 큰절이 먼저다.
'호랑이 장모님'한테 큰절부터 올리지 않으면 나중에 혼쭐이 난다. 장모님은 사위나 손주들에게 선물을 원하지 않는다. 큰절이면 그만이다. 왜 그러실까?
아내한테 들은 이야기다. "친정어머니는 일찍이 혼자되시어 아버지 몫까지 대신해 오신 분이고, 자식들 교육도 그렇게 엄격히 하셨어. 객지의 자식과 손주들이 찾아뵙고 올리는 큰절도 어머니에겐 그래서 각별한 의미가 있지."
그러면서 "자식이나 손주들이 오랜만에 찾아뵙고 큰절을 하지 않으면 어쩐지 인사받은 것 같지 않아 서운하다고 하신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 뒤로 나는 처가에 가면 무조건 '큰절'부터 올린다.
또 하나 신경 써야 할 일이 있다. 작별 인사하면서 장모님께 용돈을 드릴 때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언젠가 대문 밖까지 나오셔서 배웅해 주시는 장모님께 용돈을 드리는데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셨다.
그래서 치마 주머니에 찔러 드리는데 그냥 드리기가 뭣해서 "고기나 사 드세요"라고 말씀드렸다. 예부터 어르신들께 용돈을 드리면서 자식들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내 딴엔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말씀드린 것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아내를 통해서 책망하시는 말씀이 들렸다. "왜 용돈을 주면서 꼭 '고기를 사 드시라'고 했느냐"는 것이다.
"그냥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주었으면 초파일에 절에 가서 '사위 무사 기원 등(燈)'을 달려고 했는데, 사위가 '고기 사 드시라'고 한 말 때문에 임의로 기원을 드리지 못했다"는 말씀이었다.
결코 융통성이 없어서 그러신 게 아니다. 노여움으로 하신 말씀도 아니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장모님이 사위에게 서운한 마음으로 하신 말씀 같지만 실은 그 말씀이 '바른 가르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깊은 사랑'이다.
이제 내게는 다른 어르신이 안 계신다. 장모님 한 분이 유일한 어르신이다. 남달리 정직하고 올곧게 살아오신 분,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라고 늘 강조하는 그분의 엄격한 가르침이 나의 느슨한 의식에 바늘처럼 꽂힌다. 그 꼿꼿한 가르침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누리고 싶다. (2011.11.30. 조선일보)
대전문학관 기획전시
『한국문학시대 』문학대상 수상작가 작품
(2018.3.16 - 6.30.)
- 윤승원 作 『호랑이 장모님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 』
대전문학관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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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
【윤승원 에세이】
청양 칠갑산 호랑이 특집[2]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윤승원 수필】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한국문인협회 발행 《월간문학》2020.7월호
수필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윤 승 원
100세를 바라보는 장모님을 모시러 시골에 갔다. 거동 불편한 노인을 시골집에 혼자 계시게 할 수 없었다. 아내와 아들도 동행했다. 연로하신 장모님을 업어 바깥마당에 주차한 승용차로 모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동식 들것을 별도로 준비하지 않았다. 등에 업어 차에 태워 드리면 되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달려온 것이다.
재래식 시골집 구조는 연만하신 노인에게는 불편하기 그지없다. 안방에서 마루로 나오면 뜰팡[土房]이 있다. 뜰팡에서 안마당으로 내려오면 대문 문턱을 넘어야 바깥마당으로 나올 수 있다.
장모님이 마루까지는 가까스로 나오셨는데 마루에서 뜰팡에 내려오기 힘들었다. 내가 업으려고 하자 장모님은 손사래를 치면서 한사코 거부하셨다. 아내가 업으려고 했다. 하지만 힘이 부쳤다. 안간힘을 쓰면서 업으려 했으나 허리조차 펴지 못하고 마룻바닥에 주저 않고 말았다. 바깥마당 승용차 운전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들을 불렀다. 외할머니를 등에 업어보라고 했다.
아들이 장모님을 업으려고 등을 구부렸다. 그러자 장모님은 역시 외손자의 등을 단호히 거부하셨다. 이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절대 안 된다.’고 고개를 저으셨다. 난감한 일이었다. 마루에서 더 이상 운신(運身)하지 못하고 오도카니 앉아계신 노인이 안쓰러웠다.
안마당 한 구석에 바퀴 달린 농업용 손수레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얼른 손수레를 갖다 대었다. 사위와 외손자의 등을 완강히 거부하시던 장모님이 손수레에는 순순히 올라 타셨다. 2인이 뒤에서 밀고, 1인이 앞에서 끌어당겨 가까스로 대문 앞에 이르렀으나 이번엔 문턱이 장애물이었다. 손수레에 타고 계신 장모님을 3인이 마치 가마 들어 올리듯 번쩍 들어 올려 바깥마당 승용차 안으로 모셨다.
장모님께 여쭈었다. “사위와 외손자가 업어서 차에 태워 드리려고 했는데, 왜 한사코 마다하셨어요?” 장모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귀가 어두워 잘 알아듣지 못하셨는가 싶어 큰 소리로 재차 여쭈었으나 역시 침묵하셨다.
대전에 도착하여 처제네 집 앞에 차를 댔다. 처제가 자기 집으로 모시겠다고 일찌감치 예고하고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제가 승용차 뒷좌석에 누워계신 장모님을 업으려고 하자 장모님이 벌떡 일어나 순순히 업히셨다. 놀라운 일이었다. 사위의 등 다르고 딸자식 등이 다른 이유가 뭔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처제도 60대 중반의 나이지만 아내보다는 힘이 셌다. 3층까지 좁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하는 주택 구조인데도 처제는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혼자서 장모님을 등에 업고 거뜬히 계단을 올라갔다. 처제가 장모님을 편안히 모시는 것을 보면서 비로소 안도했다.
집에 돌아오면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아내에게 말했다. “딸자식(처제)의 등에는 순순히 잘도 업히시면서 왜 사위와 외손자 등에는 업히시기를 한사코 거부하셨을까?”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본래 까다로운 분이잖아요. 남자 등에 여자가 업힌다는 게 어머니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것이지요. 더구나 사위 등에 업힌다는 것은 남세스러운 일이고, 아직 장가도 안 간 총각인 외손자 등에 여자가 업힌다는 것은 더구나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이 어른의 상식이고, 평생 몸에 밴 법도인 셈이지요.”
법도? 모처럼 듣는 말이라 신선했다. 어디서 잠자고 있던 말이 여기서 툭 튀어 나오는지 생경하면서도 언어의 무게가 느껴졌다. 아내의 뜻하지 않은 해석을 들으면서 문득 과거 총각시절에 고향 이장님이 내게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자네가 이웃동네 원(元)씨 가문으로 장가간다면서? 어려울 걸! 윤(尹)씨도 둘째가라면 서운한 ‘꼿꼿 가문’이지만 원 씨네 가문도 대단히 어려운 집안이지. 참한 아가씨 고른다고 애쓰더니, 결국 그 어려운 댁으로 장가를 가는구먼! 쯧쯔~”
축하의 말씀 대신 ‘쯧쯔~’라니, 혀를 차는 동네 이장님이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40여 년을 살아보니, 옛 시골 이장님 말씀이 틀린 말씀이 아니었다. 당시 이장님이 내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까다롭게 느껴지는 ‘어려운 상황’을 수없이 경험했다.
구체적인 사례 설명 없이 ‘어려울 걸!’이라고 막연하게 암시했던 당시 이장님의 애매한 표현을 달리 해석해 보면, ‘법도를 지키면서 올곧게 살아가기가 결코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나 마찬가지였다.
법도란 무엇인가. 원칙과 상식이다. 전통을 말한다. 예의범절을 뜻한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도 함축돼 있다. 공맹(孔孟)도 들어 있다.
‘그런 것을 지키면서 왜 불편하게 사느냐’, ‘좋은 세상에 왜 옛 사고방식을 고집하느냐’라고 물으면 집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본디 그렇게 보고 배웠기 때문이지요.’, ‘몸에 밴 생활 습성인 걸 당장 어떤 식으로 바꾸라고 요구하지 마세요.’
그렇다. 불편하게 산다는 것은 그렇게 보는 사람의 눈이지, 정작 본인은 까다롭다거나 외곬인생이라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정도(正道)라고 생각한다.
장모님이 융통성이 없어서 그런 옛날 방식의 생활철학을 고집하는 분은 아니었다. 따뜻한 정을 가진 분이다. 초파일이 되면 절에 가서 사위 무사기원 등(燈)을 다셨다. 몸을 아낄 수 없는 경찰관 직업을 가진 사위를 위해 부적(符籍)을 만들어 오신 적도 여러 번 있다. 지갑 속에 소중히 넣고 다녔다. 그 덕분인지 모르겠으나 거칠고 험한 경찰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고추장 담글 거라면서 시골에서 무거운 찹쌀을 머리에 이고 오신 적도 있다. 찹쌀 한 말쯤 가까운 쌀가게에 전화만 하면 손쉽게 배달해 주기도 하고, 더 편케는 만들어 놓은 고추장을 사다 먹을 수도 있는 것을 노인이 멀리서 시외버스를 두세 번씩 갈아타면서 힘겹게 머리에 이고 오셨던 것이다.
사위가 용돈을 드리면 한 번도 덥석 받으신 적이 없다. 언제나 손사래를 치면서 도망가다시피 했다. 그러면 쫒아가서 치마 주머니에 찔러 드리곤 했다. ‘염치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분, ‘분수를 지키라’고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 주신 분, ‘예(禮)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視聽言動 四勿(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논어)]’라고 가르치신 분.
이제는 거동이 어려워 방안에만 계신 노인이지만 사위가 찾아뵈면 여전히 어려워하신다. ‘남자’인 사위나 손자들 앞에서 조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정숙한 장모님.
사위가 문간에 들어서면 화들짝 놀라면서 옷매무새부터 고치시는 100세 노인. 남에게 폐 끼치지 말고 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시는 어른의 반듯한 가르침과,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꼿꼿한 충청도 선비 가문의 극기복례(克己復禮) 정신을 나는 존경한다. ■
권갑하 시인(서예가)이 보내준 서예작품
등기우편 2020.10.27.
△ 권갑하 시인(서예가)의 편지 - 『월간문학』에 실린 수필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한 대목을 붓글씨로 정성껏 써서 우편으로 보내 주었다. 2022.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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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감 : 윤승원 수필을 읽고
낙암 정구복(역사학자,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출처 :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 카페]
1) 윤승원 선생! 선생의 수필을 읽고 나니 장모님 생각이 50여 년 전 기억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새삼 떠오릅니다. 장모님은 제가 시골에서 살 때 논에 오셨다가 가시는 길에 저의 집 앞을 지나가시면서 몇 차례 만나 뵙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때 장모님은 ‘법 없이 사실 분’이라는 평이 나있던 분이십니다. 장모님이 지금 건강이 불편하시다니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백세에 가까우셨다는 말씀에 저의 숙모님과 거의 동년배이신 것 같습니다. 바르게 키우신 두 따님 덕분에 장수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2) 훌륭하신 사위님과 외손자가 올바르게 활동하심을 보시고 고생하시면서 살아오신 자랑스러움을 느끼실 것입니다. 장천선생의 깊은 인연으로, 그리고 장모님과의 인연으로 저에 대한 과분한 칭찬을 해주신 점이 송구스럽습니다.
앞으로 장모님께 맑은 마음과 바른 마음으로 다음 세상에서는 축복이 있기를 삼보님께 기원합니다. 귀가 듣기에 불편하시다니 전화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습니다. 함께 기도해드립시다.
3) 그리고 장천선생의 주옥같은 수필로 ‘뜰팡’이라는 표현을 보니, 시골집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한 장의 사진보다도 더 정겹고, 인간의 애정이 넘치는 멋진 수필이었습니다. 장모님을 위해 시 한 수를 지어 올리겠습니다.
90평생 힘든 여행하셨습니다.
바르고 올곧게 살아오신 공덕
자식과 외손자에 큰 힘을 주셨도다.
이런 공덕 크게 자라나
내생의 새 인연 심으셨네요.
건강하게 100세를 넘겨 사시옵소서!
장모님의 기억을 더듬으면서 삼보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 낙지리 출신 정구복 합장 3배 올림
■ 답장(필자 윤승원)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 카페
거동은 어려우시지만 총기는 여전히 좋으셔서 사리 판단도 명확하시고 말씀도 잘하십니다. 청력이 좀 떨어지시다 보니 언어 소통이 예전만 못하십니다. 장모님이 평소 칭송하셨던 정 박사님과 제가 이렇게 따뜻한 인연의 정을 이어가는 모습을 장모님이 아신다면 참으로 기뻐하실 일입니다. 정 박사님이 저희 장모님 50년 전 옛 모습을 기억해 주시고, ‘법 없이도 사실 분’이라고 존중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제가 이런 삶의 이야기를 쓰면서 마치 잊혀 가는 과거를 재생하는 작업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습니다. 온갖 세상 풍파를 다 겪으시고 100년 세월을 살아오신 어른이시니, 자식 손자에게 들려주시고 싶은 말씀이 얼마나 많으시겠습니까. 이제는 자식, 손자들이 평소 어른이 강조하셨던 말씀을 컴퓨터 기억장치에 잘 저장해 놓고 필요할 때마다 재생해 보면서 생활의 나침반으로 삼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정 박사님의 정중하면서도 따뜻한 정이 배어나는 귀한 말씀에 두서없는 답글 감상을 적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의 장모님을 위한 정 박사님의 ‘만수무강 기원 시’는 제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감동입니다.
장모님도 불심이 깊으셨습니다. 절에 가셔서 기원 드리시고 우리 가족 건강과 행운을 비는 연등도 다셨습니다. 언젠가 부처님 오신 날, 장모님 뫼시고 공주 신원사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정성을 드리시는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평소에는 가까운 정혜사에 다니셨습니다. 정 박사님이 저의 장모님 만수무강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합장과 3배 올려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 윤승원 수필을 읽고
초강 송백헌(문학평론가,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출처 : 이메일]
윤승원 수필가님!
보내주신『월간문학』7월호에 발표하신 글「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잘 읽었습니다. 어제는 집안 일이 있어 미처 컴퓨터를 열지 못했다가 오늘 새벽에야 컴퓨터를 열고 보니, 윤선생의 글이 실려 있더군요.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읽었습니다.
노인문제가 관심 밖으로 밀리면서 윤리 도덕이 땅에 떨어진 오늘 참신한 소재로 쓴 이 글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것입니다.
페미니즘이라는 구호가 지나쳐 여성 상위시대에 처한 오늘날 남녀간에, 부부간에 지켜야 할 도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되묻는 내용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적어도 전통 있는 집안이라면, 아니 평범한 가정이라도 남녀가 각각 자신이 지켜야할 도리는 있었습니다. 굳이 맹자의 四物을 이야기 않더라도 어느 가정이나 여자의 行實이 나쁘면 지탄을 받았고, 남자의 경우도 學行을 인격의 바로메타로 여겨 왔었지요.
우리 세대는 봉건 잔재가 상존하던 시대에 태어나 그 풍습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교과서가 아닌 부모님 슬하에서, 혹은 어른들과의 대화에서 간접적으로 바른 행실을 터득토록 가르쳤던 것입니다.
가령 물건을 흥정할 때 옆 사람이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로 거래를 한다든지, 젊은 아녀자는 함부로 장바닥에 내보내지 않고 나이를 든 어른이 대신 장을 보러 다닌다거나 했지요.
“양반인 체는 독판 하면서 젊은 며느리 장에 내보내는 집”이라고 비난하던 이야기도 흔한 대화 중 하나였지요. 너무 지나치면 고루하다고 하겠지만, 男不言內 內不言外란 말처럼 ‘남자는 집 안의 일에 지나치게 간여하지 않고 여자는 남자가 하는 일을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예절은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6. 25 전쟁 후 가난한 시절 밀가루 등 원조물자를 업고 들어온 서양의 기독교 문화가 급작스러운 남녀 평등문화 등을 함께 가져와 이제는 젊은 여인이 남자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낯설지 않게 TV에서 방영되는 현실에서 한 번 쯤 되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옛날 오정동에는 선산 곽씨 宗幹이라는 선비는 맹자의 四勿이 부족해 非禮勿思를 추가하여 그것을 실천한 도덕적인 선비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五勿先生이라 불렀고, 그가 사는 동네를 五勿이라 하여 불렀던 것이 五勿→오우물→梧井으로 변하여 지금의 대덕구 오정동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도덕을 실천한 선비를 추앙했던 옛 이야기입니다.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윤리가 허물어져도 삼강오륜은 지켜져야 합니다. 다소 현대의 풍습에 맞지 않더라도 그 장점만은 살려야 하지 않을까요? 집안에 어버이나 마을의 어른들을 공경하고 선후배 간에 예의를 지킴은 보여 주기 식 쇼가 아니라 몸에 밴 행동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윤선생의 글은 100세를 바라보는 장모님의 작은 예이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들에게 좋은 교훈을 주는 것이기에 매우 값지다고 하겠습니다.
내내 문운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20년 7월 1일 아침에
송백헌 드림
■ 답장[필자 윤승원]
이메일 대화
존경하는 송백헌 박사님께
역시 한 평생 문학작품을 연구해 오신 송 박사님의 귀한 평을 들어봐야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고, 깊고, 풍부해집니다.
저의 부족한 글에 대한 송 박사님의 귀한 소감은 단순한 해설 차원을 넘어 지식을 보충해 주시는 것이니, 필자는 보석을 얻는 것만큼이나 기쁩니다. 혼자 간직하기 어려운 마음의 풍요입니다.
이 세상 많은 독자들에게 저의 부족한 글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송 박사님의 귀한 소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사모님이 편치 않으신 가운데 신경 쓰실 일도 많은데, 저의 졸고를 세밀하게 살펴 주시고, 정성과 사랑이 가득 담긴 답장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2020. 7. 1.
윤승원 올림
■ 윤승원 수필을 읽고
송하섭(문학평론가, 전 단국대학교 부총장)
[*출처 : 카카오톡]
윤 선생님 수필 잘 읽었습니다.
저는 글이 나무의 나이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무의 나이테를 보면 그 나무의 전모를 알 수 있다지 않습니까?
윤 선생님이 쓰신 이 글로 장모님의 전모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인성, 교양, 생활력, 법도까지 보여주셨네요.
윤 선생님의 장모님도 무병장수하시고 윤 선생님도 건강하셔서 더 좋은 작품 많이 보여주시길 기원합니다.
송하섭 드림
■ 답장[필자 윤승원]
카카오톡
부족한 글을 따뜻하게 살펴 주시고, 늘 격조 높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온갖 세상 풍파 이기시고 백년 세월 나이테를 쌓아 오신 어른의 생애를 필력이 부족한 사람이 만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함이 죄송한 일입니다.
일상의 소소한 에피소드 하나로 어른의 생애와 생활 철학을 조명한다는 것도 무모한 일입니다. 부족한 필력이나마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자식, 손자들을 의식한 측면도 있습니다.
‘저 어른이 왜 저런 말씀을 자꾸 하실까?’ 평소 이해할 수 없는 어른의 반복되는 똑같은 말씀도 훗날 그리운 가르침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이 글을 가족채팅방에도 올려 온가족과 함께 공유하면서 많은 의견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제는 언어 소통이 불가능한 백세 노인입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좋은 추억만 가족과 나누고 싶습니다. 고령화 시대에 어느 가정이나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독자도 많을 것입니다.
송 교수님의 따뜻한 격려 말씀, 저의 인생노트에 귀하게 기록될 것입니다. 송 교수님도 늘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귀한 말씀 빠른 답장으로 주셔서 행복합니다.
윤승원 올림
■ 전민(시인)
[*출처 : 페이스북(한국문학시대)]
장모님 사랑 !
좋은 글 감동적이네요.
고맙습니다.
■ 답장[필자 윤승원]
페이스북
따뜻한 격려 감사합니다.
늘 힘이 되는 응원 보내주시네요.
■ 瑞梅 가기천(수필가, 전 서산시부시장)
[*출처 : 밴드(대전수필문학회)]
윤승원 선생님.
‘월간문학’ 7월호에서 윤 선생님의 옥고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예의 가르침을 행하시는 빙모님의 반듯하고 사려 깊은 모습을 그려봅니다. 윤 선생님의 빼어난 글도 메아리로 번집니다.
빙모님의 강녕하심을 기원합니다.
■ 답장[필자 윤승원]
대전수필문학회 단체대화방
졸고를 읽으시고 과분한 말씀 주시니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운 마음이 앞섭니다. 어른의 인품과 가르침을 필력이 부족하여 만분의 일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구독자가 가장 많은 문예지에 거동 불편하신 백세 노인의 일상적인 단면을 소개를 했으니 어른에게도 죄송스럽고 독자의 질책도 두렵습니다. 가 선생님의 따뜻한 눈길에 큰 위안을 삼습니다. 고맙습니다.
■ 이임수(퇴직공무원협동조합 이사)
카카오톡
축하합니다~!
장모 되시는 분이 참 대단하십니다.
편찮으신 와중에서도 그 도리를 지키려 하신다는 게
몸에 배지 않은 보통사람으로선 어려운 일이지요
참으로 훌륭한 가문에 처가를 두셨네요.
■ 답장[필자 윤승원]
보통 어른은 아니시지요. 처가에 한번 다녀오면 지나칠 수 없는 에피소드가 생기네요. 거동 불편하신 어른의 모습을 세상에 알려 죄송스럽기는 하지만, 어른의 가르침을 자손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런 글을 남깁니다. 과분한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 ♧ ♧
後記
■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장수마을 <낙지리(樂只里)>사연
▲ 청양 <건강 장수 마을> 낙지리 - 즐거울 낙(樂)자가 들어간 '낙지리(樂只里)'라는 지명이 뜻이 좋아서 일까. 칠갑산 정기(精氣)가 흐르는 '농촌 건강 장수 마을'을 다녀올 때마다 이곳의 청량한 공기와 맑은 물이 장수(長壽)와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고향 선배님이자 저명 역사학자인 낙암(樂庵) 정구복 박사(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의 아호에도 '낙(樂)'자가 들어가 있다. 정 박사는 낙지리 지명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 낙지(樂只)라는 말은《시경》의 <소아편>에 세 번 나오고 있다. 하나는 "낙천적인 군자여! 나라와 가정의 바탕이로다.(樂只君子 邦家之基)"요, 다른 하나는 "낙천적인 군자는 천자 나라의 후원세력이 된다.(樂只君子 殿天下之邦)"요, 마지막은 "낙천적인 군자여 만복이 함께 하리라!(樂只君子 萬福攸同)"이다. 참으로 멋진 마을 이름이다. 이를 볼 때 아마도 '낙지리'는 어느 한학자가 붙인 이름으로 생각된다. (정구복 著《우리 어머님》137쪽)
장모님께서도 청양 낙지리 출신 역사학자 정구복 박사에 대해 기회 있을 때마다 칭송하셨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 자수성가(自手成家)한 분으로, 학문과 인품이 훌륭하여 성공한 학자로 평판이 나 있다." 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고 했던가. 내 고향 청양 출신 중엔 그 말에 합당한 훌륭한 인물들이 많다. 이곳 산수(山水)와 지령(地靈)은 전래 미풍양속과 인간의 기본 도리를 강조하는 법도와도 맞닿아 있다. 예(禮)를 중시하는 연로하신 어른의 평소 생활 철학과도 무관하지 않다.
▲ 면사무소 민원실에서 글씨 쓰시는 모습 - 인감증명서를 떼기 위해 청양군 장평면사무소에 가셨을 때의 일이다. 고령의 장모님이 글씨 쓰시는 모습을 이 때 처음 보고 놀랐다. 또박또박 쓰시는 글씨체가 반듯했다. 서체(書體)에 '반듯체'라는 용어는 없지만, 당시 구순 넘으신 노인이 장부에 기재하는 성함 삼자도 함부로 흘려 쓰지 않고 반듯하게 정성을 기울이시는 것을 보면서 '반듯체'라는 서체 이름을 '장모님 글씨'에 붙여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성이 깃든 장모님 서체에서 평소 정숙한 몸가짐과 건실한 생활방식까지 엿볼 수 있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자동차 타시는 걸 좋아하셔서 시골에 갈 때마다 사위인 내가 승용차로 모셨다.
▲ 외손자와 무 구덩이 파는 모습 - ROTC 육군 장교로 복무하던 외손자가 휴가 나왔을 때다. 외할머니와 함께 남새밭에 무 구덩이를 파고 있다. 고령임에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시는 것도 장수 비결인 듯하다. 휴가 나온 외손자가 열심히 삽질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견해 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외손자를 끔찍히도 사랑해 주셨다. 두 아들이 외가를 방문하면 '외할머니 즉석 강의'를 최소한 한 시간 정도는 들어야 자리를 뜰 수가 있었다. '강의 내용'은 생활 법도와 건강비결을 주로 말씀하시면서, 특히 '저출산 시대'에 '다산(多産)'을 강조하셨다. 집안이 번창하고 대(代)를 온전히 이어 가려면 '자식(아들)을 많이 두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어른의 지론이자 소원이셨다.
▲ 시골집 풍경 - 서양화가인 외손자가 고드름 매달린 시골 처마 밑에서 겨울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 예술가에겐 이채로운 '화재(畵材)'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외할머니가 한 평생 생활하셨던 안방과 마루, 뜰팡이 보인다. 184cm 장신(長身)의 외손자가 등을 바짝 구부려 거동 불편하신 외할머니를 바로 이곳 마루에서 업어 승용차에 태워 드리려고 했으나, 완고하신 외할머니는 '남자 등'에 업히는 것을 끝내 허(許)하지 않으셨다.
♧ ♧ ♧
= 제3부 =
【윤승원 에세이】
청양 칠갑산 호랑이 특집[3]
부적(符籍)에 얽힌 추억
[필자의 말] 애틋한 사연과 재미 있는 에피소드도 많으신 우리 장모님! 장모님은 저의 졸고 수필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셨습니다. 장모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글감[隨筆 素材]이 될만큼 우리 가족에게 던지는 삶의 메시지는 소중했습니다. 자손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모두 귀한 가르침이 되었고, 깊은 사랑을 담고 있어 '가정교육 자료'로 차곡차곡 쌓였습니다. 제가 장모님을 주인공으로 글을 쓰면 잡지사에서는 최우수작으로 대접하는가 하면, 유력 일간지에서는 삽화까지 곁들여 큰 지면을 내줄만큼 '글 대접'을 제대로 해주었습니다. 저의 글이 대단한 게 아니라 장모님 말씀이 이 시대 귀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춘추 96세이십니다. 천수(天壽)를 아시는지, 자식들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하셔서 집사람과 함께 황급히 달려가 찾아 뵈었습니다. 운전은 둘째아들이 수고해 주었습니다. |
■ 처가에 급히 다녀 오던 날 2019.06.14.
"딸과 사위 얼굴이 보고 싶다"
- 장모님 찾아뵙던 날 -
윤승원 수필문학인, 前 대전수필문학회장
충남 청양의 칠갑산 아래 ‘농촌건강장수마을’에 100세를 바라보시는 장모님이 사신다. 한밤중이나 새벽에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한다. 연로하신 어르신이 계시는 집안에서는 그래서 늘 불안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살아간다.
엊그제는 처가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장모님이 “자식들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하신다는 전화였다.
이제까지 그런 말씀은 들어 본 적이 없기에 가슴이 철렁했다. 평소에 여장부소릴 들으면서 강직한 성품을 보여주신 분이다. 객지의 자식 ․ 손자가 걱정되는 말씀은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분이다. 그런 분이 갑자기 ‘자식이 보고 싶다’고 하신다니,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위중(危重)하시다는 뜻으로 들렸다.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착잡한 심경을 가누기 어려웠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장모님에 대한 이런저런 추억이 수없이 떠올랐다. 아내와 함께 시골로 달려갔다. 운전은 둘째아들이 했다.
장모님을 찾아뵈니, 걱정했던 것보다 표정이 밝으셨다. 귀는 잘 안 들리셔도 말씀은 정상적으로 하셨다. 거동은 불편해도 일어나 앉으실 정도의 기력은 갖고 계셨다. 다행이었다.
큰절부터 올리니, “누구냐?”고 하셨다. ‘딸과 사위, 그리고 외손자도 왔습니다.’라고 말씀 드리니, 활짝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눈이 점점 더 어두워지면 자식 ․ 손자 얼굴도 못 알아 볼 게 아니어. 그래서 얼굴 좀 보자고 했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수발드는 사람이 미음(米飮)만 간신히 떠 넣어드리는 것으로 상상하면서 황급히 달려 왔는데, 천만 다행이었다.
큰절도 받으시고, 가벼운 방걸레질까지 하신다. 아내가 준비해간 음식도 맛있게 드신다. 황망히 달려 올 때는 착잡한 심정 가누기 어려웠는데, 말씀도 잘하시는 장모님의 밝은 표정을 뵈니 마음이 한결 누그러졌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에게 말했다.
“올해 장모님 연세가 아흔 여섯 아닌가? 언젠가 내가 장모님 연세를 몰라 우리 형제들 앞에서 민망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는군. 장모님이 시골에서 찹쌀을 한말 머리에 이고 오셨던 날이었어. 고추장 담글 거라고 하시면서…
쌀가게에 전화만 하면 쉽게 배달해 주는 찹쌀 한 말을 노인이 시골에서 무겁게 머리에 이고 오신 걸 보고 가족 모두 염려하는 말씀을 드렸지. 그날은 마침 집안 행사가 있어 형제들이 다 모였는데, 큰형님이 내게 장모님 연세를 갑자기 묻는 거야.
기억이 잘 나질 않아 머뭇거리니까 옆에서 누님이 얼른 ‘난 아이들 나이도 갑자기 물으면 모르겠더라.’ 하시면서 난처해진 동생의 입장을 두둔해 주시는 거야. 그 후, 장모님 생년월일을 수첩에 적어가지고 다니면서 연세를 기억하게 됐지.”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아마도 100세는 너끈히 사실 거야! 무엇보다 정신력이 또렷하시잖아. 총기도 좋으시고.” 내가 깜짝 놀라 아내의 말을 제지했다.
“그런 소리하지 마. 연로하신 어르신 찾아뵙고 오면서 앞으로 더 사실 연세를 장담하거나 점치는 언사는 불경스러운 일이어.”
그러자 지금껏 말없이 운전만 하던 둘째아들이 아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덧붙였다.
“연로하신 어르신은 아무리 건강해 뵈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잖아요. 그저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마음만 가지면 돼요. 저는 100세를 바라보시는 외할머니를 뵙고 오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어요. 검소하고 부지런한 생활방식이 ‘장수비결’이에요.
그 연세에 방걸레질하시는 걸 보세요. 손을 잠시도 놓지 않고 움직이시고, 잡숫는 음식이며, 입고 계신 옷 좀 보세요. 대쪽 같이 올곧은 성품에다가 검소한 생활철학을 가지신 외할머니! 세상 돌아가는 것도 다 아셔요. 나라 걱정하시는 것 좀 보세요. 저는 외할머니가 갑자기 위대해 보였어요.” ■
♧ ♧ ♧
■ 추억의 수필
■ 추억의 수필(1990년작)
월간 《경찰고시》
필자가 현직 경찰관 시절, 당시 전국 경찰관들이 애독하는 교양잡지가 있었다. 매달 봉급에서 책값을 뗄만큼 전 직원들의 '필독서'였다. 현직 경찰관뿐만 아니라 경찰가족들도 애독하는 교양학습지 성격의 월간 ≪警察考試≫였다. 이 잡지에서는 매달 일선 경찰관과 경찰가족들의 글을 뽑아 게재하고 시상했다. 이 글은 1990년 7월호에서 <최우수작>으로 뽑힌 글이다.
부적(符籍)
윤승원 충남경찰청 정보과
시골에 계신 장모님께서 고추장 담글 거라고 하시며 찹쌀 한 말을 머리에 이고 오셨던 날이다. 어찌 생각하면 찹쌀 한 말쯤 가까운 쌀가게에 전화만 하면 손쉽게 배달해 주기도 하고, 더 편케는 만들어 놓은 고추장을 사다가 먹을 수도 있는 걸 노인이 멀리서 직접 이고 오신 것이다.
그 날은 마침 집안에 행사가 있어 형제들이 모두 모였는데, 모처럼 오신 장모님께서 사돈댁 식구들이 많이 모여 자리가 불편하셨는지 한나절도 안 되어 바로 가시겠다고 일어 나셨다. 적이 서운했지만 막무가내로 가시겠다고 서두르시는데 더 이상 머무르게 해 드리기 어려웠다.
하는 수 없이 큰길까지 따라 나가면서 여비를 드렸더니 그것마저 극구 사양하시고, 오히려 잊고 갈 뻔했다며 허리춤에서 봉투 한 개를 꺼내시더니 내 주머니에 찔러 주시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뭐예요, 장모님?”
영문을 알 수 없는 봉투를 받고 어리둥절해 하는 내게 장모님은 웃으시며,
“그냥 지니고 다니게!”
한 마디 하시고는 총총걸음으로 버스에 오르셨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장모님이 주신 봉투가 궁금했다. 돈은 아닌 것 같고, 가정에 충실하라는 당부의 말씀이라도 적어 넣으셨을까?
접혀진 봉투를 꺼내어 조심스럽게 뜯어보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의 그림 한 장이 나왔다. 붉은 색깔로 야릇한 모양을 그린 노란 종이였다.
누구네 집에선가 벽에 붙어 있는 이것을 본 적이 있지만, 내가 직접 받아 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내심 놀랍기도 하고 어쩐지 신비스럽게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이 비밀스런 것을 행여 누가 볼까 싶어 얼른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원래 불교나 도교(道敎)를 믿는 집에서 재앙을 방지하고 잡귀(雜鬼)를 쫓기 위하여 부(符)자를 적은 종이를 몸에 지니기도 하고, 소중히 여기는 곳에 붙이기도 하는 것이 부적(符籍)이라 들었는데, 이를 장모님께서 내게 주신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몸을 아낄 수 없는 '경찰관'이란 직업이 가진 사위의 건강을 염려한 때문이리라.
시골 처가집 대문 옆에 귀신을 쫓는다는 속설을 가진 ‘엄나무’가 우람하게 서 있는 걸 보더라도, 일찍이 홀로 되신 장모님이 심어 놓으신 ‘수호신’임을 나는 평소 느껴왔다.
그뿐 아니라, 옛 조상님들이 그랬듯이 음양오행(陰陽五行)설과 불로장생, 승천(昇天)의 도교적 사상을 지극히 신봉하시는 모습을 생활 속에서 쉽게 엿볼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정성은 자신의 부귀영화보다는 자식들을 위한 모정(母情)이 더 큰 것이었다. 희생에 가까운.
장모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니 큰 형님께서, “그 무거운 걸 이고 모처럼 오셨는데 바로 가셔서 여간 서운치 않구나” 하시며 “올해 어른 춘추가 몇이시냐?”고 물으셨다. “연세요? 글쎄요….”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평소에 그저 나이 드신 어른으로만 생각했지, 장모님의 정확한 연세를 기억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 침묵하고 있는데, 옆에 계시던 누님께서 얼른, “난 집에 아이들 나이도 갑자기 물으면 모르겠더라”고 궁색해진 동생의 입장을 두둔해 주셨다.
“하기야 요새 처가 식구들 나이까지 알고 지내는 젊은이가 흔치 않을 거야” 형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여태껏 장모님께서 사위에게 베풀어주신 정성에 비해 사위는 장모님 연세도 잊고 지내니, 이 같은 소홀함이 또 있는가. 부모님을 여의고 장모님 한 분 계신데, 부모님께 생전에 못한 도리를 장모님께마저도 다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부끄러운 마음 그지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내가 있는 주방으로 갔다. 그러나 아내에게 장모님 연세를 새삼스레 묻지는 못하였다. 아무리 가까운 게 아내라지만 스스럼없이 선뜻 던질 수 있는 물음이 아님을 순간 느꼈다. 아무 것도 아닌 그 한 마디 물음이, 왜 그렇게 어렵게 느껴졌는지…. 그건 어쩌면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부적’ 때문인지도 몰랐다. ≪警察考試≫ 1990년 7월호
◆ 뽑고 나서 / 편집국장 李三憲(시인) 이달에 투고된 작품은 모두 27편이었다. 다른 사람의 글을 뽑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투고된 작품들이 한자한자 정성을 썯은 글들이고보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투고된 작품 모두를 게재할 수는 없는 현편이니, 부득이 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는 달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들에도 옆으로 미루기 매우 어려운 작품들도 많았이 있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최우수작> 符籍(윤승원) 부적을 최우수작으로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글을 엮는 솜씨가 매끄럽고 표현이 뛰어나다. 장모님이 주신 부적에 얽힌 이야기지만 그 주변 인물들의 인간미도 은은하게 드러나고 있어 더욱 글의 격을 높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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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부 =
【윤승원 에세이】
청양 칠갑산 호랑이 특집[4]
부엉이 소리와 토끼 발자국 소리
수필
부엉이 소리와 토끼 발자국 소리
윤승원 수필문학인(1990, 한국문학), 전)대전수필문학회장, 전)금강일보 논설위원
노인을 갑자기 요양병원으로 모실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사정이 생겼다. 칠갑산 아래 산골마을에 사시는 97세 장모님이다. 노인을 모셔온 칠순의 아들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자 거동 불편한 노인 혼자 시골집에 계시게 할 수 없었다. 객지에 사는 아내와 처제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의논 끝에 요양병원으로 모시자는 결론을 냈다.
그런데 처제의 스무 살 대학생 딸이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했다. 엄마와 이모가 거동 불편한 외할머니를 모시는 문제로 크게 걱정하는 것을 곁에서 듣다가 “제가 보살펴 드릴 게요”라고 선뜻 제안한 것이다.
외할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실 거면 자기가 아르바이트 겸 요양보호사 역할을 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신세대 젊은이로서 기특한 일이었다. 장모님은 100세를 바라보는 고령이지만 총기(聰氣)도 좋으시고 말씀도 잘하신다.
문제는 낙상사고로 다리를 다쳐 거동이 힘드시니, 대소변 처리와 목욕 수발도 해 드려야 한다. 어린 대학생이 감당하기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대학생 외손녀의 의지와 결심을 꺾기 어려웠다.
다른 대학생 친구들은 다양한 업종에서 사회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런 아르바이트 대신 외할머니를 위해 힘든 요양보호사 역할을 자처한 처제의 딸이 대견해 보였다. 엄마는 바깥일을 나가야 하니 집안일도 혼자 보살펴 왔다. 남달리 심성이 착하고 성실한 효녀라는 소릴 들었다.
그렇지만 거동이 어려운 노인을 모시는 문제는 다르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노인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과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할머니를 보살펴드리는 ‘수고의 대가’는 외삼촌이 매달 입금시켜주기로 했다. 요양병원에 드는 비용만큼 이른바 ‘알바 비’를 준다는 뜻이다.
사실, 가정에서 자손이 어른을 모시는 일에 ‘알바’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 대학생 외손녀도 “응당 해야 할 도리인데, 어떤 대가를 앞세우면 효심이 반감된다.”라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으니, 더욱 기특해 보였다.
산책길에서 만났던 50대 이웃 아주머니의 탄식과 하소연이 문득 떠올랐다.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 혼자 사시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반 강제적으로 요양원으로 모셨다고 한다.
화가 잔뜩 난 아주머니는 “치매 노인도 아니고, 요양원엔 절대 가지 않겠다고 친정어머니가 사정하다시피 했는데도 오빠와 올케가 강제적으로 요양원에 모셨다”는 것이다. 아주머니는 좀처럼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면서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셔야 재산도 정리되고, 외로운 홀어머니를 자식들이 돌보지 않는다는 불효의 시선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니, 여러 모로 홀가분하지 않겠느냐”라고 했다.
그 뒤로 나는 어딜 가나 눈에 자주 띄는 요양병원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노인 혼자 외롭고 불편하게 사는 것보다 갖가지 편의 시설을 갖춘 요양병원에서 의료혜택까지 받으면서 노후를 편안하게 지내시는 어르신들도 많다. 요양병원에 대한 일부 부정적인 인식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시급한 숙제다.
대학생 외손녀가 연로하신 노인을 모신 지 두 달이 넘었다. 아내에게 물었다. “어린 대학생이 노인을 모시느라 얼마나 힘들까?”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기특하게도 힘들다는 표현은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문제는 아무리 잘해 드려도 자꾸 시골집에 가시겠다고 하시니, 그게 걱정이지요. 농사도 참견하고 싶고, 뒷산 부엉이 소리, 산토끼 발자국 소리도 듣고 싶으신 거지요.”
어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자식들은 그 뜻을 선뜻 받들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대학생 외손녀도 노인의 대소변 처리보다 자꾸만 시골집에 가시겠다고 어린애처럼 떼쓰시는 ‘노인 달래기’가 더 어렵다고 했다.
심심하지 않게 노래도 불러드리고, 재롱도 떨고, 팔다리 근육 운동도 시켜드리고, 대학생 외손녀는 ‘천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대학생 외손녀의 남다른 효심과 노인 달래기 방법에만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외손녀의 지극 정성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귓전에 들려오는 칠갑산 자락의 부엉이 소리와 토끼 발자국 소리까지 차단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 칠갑산 가는 길 :
외손녀가 거동 불편한 노인을 집안에서 모실 때는 그래도 온 가족이 안도했다. 그런데 갑자기 욕창이 발생하여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코로나 사태로 자손들은 문병조차 어려웠다. 요양병원 생활 7개월 만에 건강이 악화되어 지난 연말 동짓날에 별세하셨다. 가정에서 자손들이 좀 더 극진히 보살펴 드렸더라면 100세를 넘기셨을 텐데,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고 가족 모두 슬퍼했다. 요즘 보기 드문 꽃상여를 타셨다.
요령잡이의 구슬픈 만가(輓歌)소리 들으며 떠나시던 날, 천수를 누렸으니 호상이란 말은 그 어느 문상객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생시에 보다 더 잘 보살펴드리지 못한 자손들은 후회스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부엉이 소리와 토끼 발자국 소리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들으실 수 있는 칠갑산 깊고 깊은 길지(吉地)에 잠드셨으니, 편안한 영생(永生) 누리시길 바랄뿐이었다.
♧ ♧ ♧
= 제5부 =
【윤승원 에세이】
청양 칠갑산 호랑이 특집[5]
고향 후배의 ‘장례 성심 공덕功德’
■ 대전수필문학회 2021 연간 동인지 《수필예술》 42호 / 윤승원 수필
수필
고향 후배의 ‘장례 성심 공덕功德’
윤 승 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운구차가 칠갑산 아래 깊은 골짜기에 도착했다. 산 아래 길가에는 요즘 보기 드문 꽃상여가 대기하고 있었다. 상여꾼 10여 명과 산역꾼 20여 명이 왁자지껄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길가 공터엔 천막 3개가 쳐져 있었다. 천막 아래에는 부녀자들이 육개장과 술병을 바쁘게 나르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고향 선후배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코로나 사태로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을 또렷이 분간하기는 어려웠으나 눈빛과 말투만으로도 누군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대부분이 초등학교 동문이었다.
한 상여꾼이 내게 소주잔을 권하면서 말했다. “선배님 명함 한 장 주세요.” 내게 명함을 요구한 사람은 상여꾼이 아니라 하관 절차를 총괄하는 하관명인(下棺名人)이라고 했다. ‘하관명인’이라니, 생소한 호칭이었지만 알고 보니 장례에 관한 남다른 이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 상여꾼은 그를 ‘염(殮) 박사’라고도 부른다면서 엄지 척을 해 보였다.
그는 남의 수많은 주검을 모셔온 특별한 이력을 통해 이 지역 최고 권위의 전문 장례사로 알려졌다. 시골 동네 평판도 좋았다. 평소 내 부모님 모시듯 직접 팔 걷어붙이고 염습하고, 운구하고, 하관하는 일련의 절차 모두 슬픔을 당한 가족 처지에서 성심을 다해왔다고 한다.
고향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전하는 그에 대한 칭송을 듣고 보니, 다소 목청 높여 말하는 그의 자화자찬 입담도 구수하고 듣기 좋았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큰일을 치르게 된다. 갑작스럽게 큰일을 당하여 경황이 없을 때 그의 정성스러운 ‘장례 성심 공덕(功德)’은 유가족들에게 평생 고마움으로 각인되었다. 경향 각지 출향인들에게도 그의 공덕은 널리 알려졌다. 타관에서 별세한 어르신도 꼭 고향으로 내려와 그의 손으로 장례를 치른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내게 스마트폰을 꺼내 보이면서 최근에 보도된 기사를 읽어보라고 했다.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입니다. 하하하”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라면서 크게 웃는 그의 익살스러운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신비로운 힘이 느껴졌다. 연거푸 마신 소주의 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염라대왕 앞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언론 보도를 통해 증명해 보였다.
“염라대왕이 제게 그럽디다. 넌 아직 여기 올 때가 아니니, 좀 더 좋은 일 하고 나중에 오라고요. 으하하하!”
그가 다시 스마트폰을 열어 보이면서 언론 보도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자랑했는지, 그는 기사 제목과 사건 내용을 육하원칙에 맞게 줄줄 외웠다.
『장례식장에서 직접 복어 요리해 먹은 60대 마비 증세』 제하의 기사였다. 국내 거의 모든 언론에 보도됐다면서 기사 내용을 마치 연극마당 변사(辯士)처럼 줄줄 읊었다.
「충남 청양군의 한 장례식장에서 복어를 먹은 60대 A 씨가 마비 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남성은 복어를 조리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지만, 복어를 직접 요리해 먹은 것으로 조사됐다. A 씨는 병원 치료를 받고 안정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으하하하!”
그는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우리 집 애들이 뭐라는 줄 아세요. 아빠가 전국 뉴스에 나왔다면서 대단한 아빠라고 한다.”고 덧붙였다. 내가 말했다.
“듣고 보니, 정말 대단한 고향 후배네, 그려. 사람의 장례를 잘 치러주는 것이 인간 선행 공덕 중 <제1의 공덕>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공덕으로 염라대왕님이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주신 것이 확실하구먼!”
상여꾼들의 왁자지껄한 소주 목축임은 여기서 끝났다. 장모님을 태운 꽃상여는 요령(鐃鈴)잡이의 구슬픈 만가(輓歌) 소리와 함께 가파른 산비탈을 올라 장지에 이르렀다.
복요리 먹고 죽었다가 살아난 초등학교 후배가 모든 하관 절차를 주관했다. 굴착기가 땅을 파헤치고 산역꾼들이 장모님을 조심스럽게 안치하는 절차 모두 그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흙을 뿌릴 때도 마치 떡시루에 쌀가루를 얹는 것처럼 체로 곱게 거르고 걸러 그의 손으로 정성껏 다져 넣었다. 엊그제 염습할 때도 그랬다. 돌아가신 분의 몸을 깨끗이 닦아드리고 비단과 삼베로 감싸주는 그의 손길은 지극한 성심이 묻어났다. 자식인들 저만큼 부모 몸을 성심을 다해 모실 수 있으랴.
하관 절차도 마찬가지였다. 예와 정성을 다하는 그의 손길을 바라보는 가족들은 감사함에 울컥 더 큰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감동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엄숙하고 경건한 순간이 한 생명이 땅에 묻히는 순간이다. 경찰관이었던 나는 일찍이 사람의 주검을 다루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 일인지 경험했다. 초임 경찰관 시절에 변사체를 다뤘다. 변사체는 비정상적인 주검이다. 천수를 다한 주검과는 형태가 다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30대 여인의 시신을 직접 만지고 나서 몇 달 동안 그 슬픔의 현장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장 처참한 주검은 살인사건과 교통사고 주검이다. 시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은 화재현장의 주검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끔찍한 주검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거나 손으로 다루면 ‘트라우마’가 생긴다. 그 마음의 상처는 오랜 세월 두고두고 기억 속에 남아 괴로움으로 재생된다.
그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상주와 유가족들을 다독이고 위로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봉분을 만들면서 그는 자손들이 고인에게 못다 한 효를 깊이 후회하고 성찰케 하는 말도 했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의 한 대목이었다.
▲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한 대목 - 어머니의 가슴을 잠자리로, 어머니의 무릎을 놀이터로, 어머니의 정을 생명으로 자랐거늘 어찌 효의 길을 소홀히 하랴 - 부모은중경 - [자료사진 = 필자 찍음 / 마곡사 입구 입석]
생시에 불효했어도 사후(死後)에 잘 모시면 자손들에게 길(吉)과 복(福)이 온다는 덕담도 했다. 구구절절 가슴에 스며드는 하관 발복(發福) 기원문이었다.
살아가면서 고마운 사람이 많지만 가장 잊을 수 없는 분은 돌아가신 내 부모님을 정성을 다해 품격 있게 모셔주는 분이다. 염습해 주신 분, 상여를 메어 준 분, 그리고 무덤을 정성을 다해 만들어 주신 분에 대한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한다. 어디 그뿐인가.
내 가족이 큰 슬픔을 당했을 때, 눈물 흘리면서 슬퍼해 주시고, 따뜻한 조의를 표해 주신 분들도 평생 잊을 수 없다. 큰 은혜, 가슴에 새기면서 한 분 한 분 비망록(備忘錄)에 적어 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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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의 졸고에 따뜻한 격려 소감 보내주신 존경하는 송백헌 교수님, 송하섭 교수님, 정구복 교수님
서한을 다시 읽으니 감개무량합니다. 소중한 자료라서 <블로그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가족 채팅방과 참여하는 수필문학 단톡방에도 올립니다.
♧ 대전수필문학회 단톡방에서
◇ 박영진(교육자, 수필가) 2023.6.18.오후 3:08
고맙습니다. 장모님이 예의 범절이 바른 분이십니다.
그분의 성품이 남달라 많은 가르침을 주셨군요.
글을 읽으면서도 감명 깊었습니다.
건강하게 장수하시면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시던
좋은 부모님의 모습이 저희들에게 교훈으로 남습니다.
◇ 답글 / 윤승원(필자)
일찍이 홀로 되시어 억척스럽게 1인 다역하시면서 살아오신 분입니다.
장모님을 주인공으로 글을 쓰면서 <호랑이 장모님>이라고 표현이라고 했더니
조선일보 삽화 전문 작가가 <칠갑산 호랑이>를 아주 꼭 맞게 그려 주었습니다.
글을 쓰는 제게는 아주 훌륭한 가르침을 담은 글감을 생시에 제공해 주셨는데,
그 정신을 가족과 함께 되살리는 의미에서 정리해 보았습니다.
박영진 수필가님께서 귀한 소감을 주시니 졸고를 소개한 보람을 느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