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
“성지 탄탄히 다져가며 상생·보살도의 ‘화엄’ 피워내고 싶어!”
“책 한번 실컷 보고싶다.” 고교졸업 후 출가 단행
송광사행 버스 놓치고 화엄사로 가 30년 재적
여법한 취임법회 대신해, ‘문화재 보존활용’ 세미나
구례 집중호우 침수 땐, 화엄원 내주고 수해복구
화합의 시대 전환 위한 ‘화엄석경’ 복원 한걸음
승려복지, 혜택 아닌 기본, 산사 활용 주거 공간 확보
지리산·섬진강 품은 절 ‘느림의 미학’ 선사할 터
화엄사 주지 덕문 스님은 “예로부터 어른 스님들은 지리산(智異山)에 들면 지혜가 저절로 생긴다고도 했다”며 “산사가 선사하는 화엄을 통해 나와 내 가족, 내 이웃의 행복을 기원해 보기를 청한다.”고 전했다.
‘...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 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은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
(이원규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에서)
산사 풍광에 매료됐거나 산중의 스님들을 동경해서가 아니었다.
‘책 한 번 실컷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 챙겨 지리산으로 걸음했었다.
매월 초삼일이면 어머니와 함께 손전등으로 어두운 길을 밝히며
고성암을 올랐던 게 불연의 전부였다. 강진에서 광주로 ‘유학’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방문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부모님의 고민 하나를 듣게 됐다.
“대학 가면 학비는 어떻게 마련하나!”
‘하숙비 대기도 힘겨우셨을 텐데! 내가 철이 없었구나.’
친구들과 광주 원각사를 찾아 허한 가슴 달래볼 뿐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출가하겠다’ 다짐하고 졸업 후 집을 나섰다.
어렸을 때 ‘송광사 큰스님’이라는 분이 집에 들르시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송광사 방장 구산 스님이었을 것이다.
광주버스터미널에서 순천행 버스표를 끊으려는데 막차가 떠났단다.
지인들과 인사까지 마쳤는데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 다음 차가 구례로 가는 버스였다.
‘화엄사에 잠시 머물다 송광사로 가자’는 생각에 몸을 실었다.
일주문에 들어서면서부터 가슴이 설렜다.
처음 발 딛은 산사지만 깊게 내려앉은 고즈넉함이 좋았다.
구층암에서 숭늉 뜨러 큰 절로 내려온 스님과 마주했다.
“출가하러 왔습니다!”
그 이후 덕문 스님은 화엄사를 떠나지 않았다.
계곡이 산의 핏줄이라면 고찰은 산의 심장이다.
지리산을 살아 숨 쉬게 하는 화엄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만 해도 81암자를 안았던 대찰이었다.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백제 법왕(599) 때
3000여명의 스님들이 운집해 화엄사상을 꽃피워냈던 도량이다.
절 곳곳에 남아 있는 성보들이 찬란했던 역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명산고찰의 주지가 바뀐다는 건 이전의 스님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힘을 불어 넣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높이기에 대중의 시선이 집중된다.
2017년 4월 화엄사 주지로 취임한 덕문 스님이 지금까지 내보인 행보는 의미심장하다.
산 속의 절을 산 밖의 절로 내어 보이고,
산 밖의 사람을 산 안으로 들게 하고픈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취임식을 대신해 ‘화엄사 문화재의 보존과 활용’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불교중앙박물관장을 지냈고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을 맡는 등
문화재에 대한 조예가 남다른 스님이라는 건 정평이 나 있었지만
학술세미나로 취임식을 대신 한 것은 아주 이례적이다.
지난 11월에는 화엄사성보박물관과 국립광주박물관 사이의 협약을 맺어
‘화엄석경’과 구례 관련 유물의 교차전시를 단행했다.
‘화엄석경’에 대한 대중인식의 폭을 넓혀 보려 함일 터다.
구례 수해복구에도 덕문 스님은 적극 나섰다.
지난여름 하루 평균 500mm 이상의 기록적인 폭우가 이틀 동안 내려
구례지역 1100여 가구가 침수되자 도량 내 화엄원을 임시대피소로 제공했다.
뿐만 아니라 사중 스님들과 함께 직접 수해현장을 찾아 피해복구를 위한
자원봉사에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다각적인 지원과 지역 난치병 환아에게 의료지원금도 잊지 않았다.
지난 10월 조계종 중앙종회와 상월선원 만행결사 자비순례단이 연
‘한국불교 어디를 걷고 있으며, 어디로 갈 것인가?’
주제 대중공사에서 교계의 현실을 정확히 짚어 내며 전한 메시지는 강렬했다.
“현대 사회의 사찰은 수행과 전법의 도량일 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교육과 문화, 복지의 열린공간으로서 새롭게 변화해야 합니다.”
‘AI 시대’ ‘비대면 시대’로 상징되는 지금,
고답적 사고로는 침체된 불교의 활로를 열수 없다는 일침이기도 하다.
주지 소임 맡았다고 해서 금세 내보일 수 있는 품이 아니다.
그 언젠가부터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아간 결과물일 터다.
화엄사 각황전.
화엄사 불이문 앞에는 ‘화엄석경관’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각황전 자리에는 원래 의상 스님이 주도해 지었다는 3층 규모의 장육전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장육전 내부 사방에는 엷은 청색 돌에 ‘60 화엄경’을 새긴
화엄석경(華嚴石經·보물 1040호)이 장엄돼 있었다.
임진왜란 때 5000여 칸에 이르는 화엄사 대부분의 전각들이 불에 탈 때 장육전과 함께 파괴됐다.
현재 1만 3000여점의 파편이 남아 있는데 화엄사 성보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절에 와 처음 본 ‘화엄석경’은 사과박스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때는 진가를 알 수 없었는데 중국의 방산석경을 보고는
우리 석경이 더 우수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습니다.
‘화엄석경’ 복원의 필요성을 절감한 게 그때였습니다.”
중앙종회의원일 때 회의 참석 차 서울에 오면 잠시 머무는 공간을
‘사경연구소’라 했을 정도로 이 분야에 대한 애정이 깊다.
지난 6월에는 화엄사에 ‘사경원’도 개원했다.
“경전을 사사하는 과정 자체가 공덕을 쌓는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경(寫經)으로 평가 받는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 권1∼10·권44∼50, 국보 제196호)’에
사경의 제작방법과 의식절차가 담겨 있는데 발문에 해당하는 글을 보면
사경불사에 담긴 정성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신라백지묵서화엄경’은 통일신라의 경덕왕 13년(754)에
연기 스님이 간행을 시작해 다음 해인 755년 완성했다.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 스님과 동일 인물인지, 동명이인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다만 사경불사가 화엄사에서 진행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내 지금 미래세가 다하도록 일념으로 서원하노니,
필사한 이 경전 파손되지 말기를. 설사 삼재로 대천세계가 부서진다 해도
이 사경은 허공처럼 파괴되지 말지어다.
만약 중생들이 이 경에 의지하여 부처님 뵈옵고 법문 들으며
사리 받들고 보리심을 발하여 용맹정진하고 보현보살의 행원을 닦으면 곧 성불하리라.’
“‘화엄석경’ 연구는 다양한 각도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글씨체·석각·변상도 연구는 물론이고 전각 내부 사방에 석경이 조성돼 있었으니
장육전 건축기법도 함께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전문성을 갖춘 ‘화엄연구소’ 설립을 추진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021년 하반기에 화엄석경관이 완공되면 ‘화엄연구소’가 들어가 본격적인 학술탐구를 시작합니다.
석경도 전시하겠지만, 이 연구소의 탐구와 결실이 중요합니다.
‘화엄석경’ 복원의 토대를 다지기 때문입니다.”
‘화엄석경’이 복원되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미얀마 쿠도도(Kuthodaw) 석장경과 견줄만한 것으로 학계는 내다보고 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이후 민중의 결집을 위한 정신적인 그 무엇인가가 절실했을 것입니다.
상생·융통을 핵심으로 한 화엄사상이 그 시대를 지탱할 수 있으리라 보았기에
장육전과 함께 ‘화엄석경’ 대작불사를 일으켰으리라 봅니다.
이 정신은 오늘을 사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남북·동서분열, 종교·빈부 갈등으로 점철되어 가는
분열의 시대를 화합의 시대로 전환시키려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 역시 화엄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석경에 담긴 화엄정신을
우리 사회가 공유해야 한다는 사유의 끝에 나온 ‘화엄석경 복원’ 불사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화엄석경’을 서울과 광주에서 전시토록 배려한 이유를 알겠다.
덕문 스님의 상생정신은 절 안에서도 수행공동체 형식으로 실현되고 있다.
스님들의 주거·수행 공간을 내어주는 승려복지 운영사찰과
분담금 형태의 복지기금을 전하는 승려복지 지원사찰을 가동하고 있다.
화엄사 재적승 300여명을 대상으로 교육, 의료, 연금, 주거까지 책임지고 있는데,
화엄사의 승가복지 체계를 성공적으로 세워가고 있어
조계종의 롤모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지 선거 당시 공약 중 하나였던
‘출가에서 열반까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행에 옮기고 있음이다.
“화엄사 30년 재적승으로 살며 느낀 게 하나 있습니다.
말사 주지 소임을 본 어느 스님은 ‘여법한 다비’를 봉행하는데,
어느 선방 수좌는 화장터에서 장례를 치릅니다.
결제 때 참선에 매진한 수좌는
해제 때 선어록과 경전을 보며 공부를 이어가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마땅히 머무를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교를 병행하면서 번뇌망상을 제거하고,
자신과 세계의 실상을 깨우쳐 가는 게 참 공부요 깨달음이라 한다면
‘머무를 곳’의 유무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승가복지는 ‘혜택’ 이라기보다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산사는 수행자가 보낼 마지막 여정의 공간으로 최적입니다.
현재는 말사 주지, 유학, 토굴에 계시는 스님들을 제외하면 재적승 80% 수용이 가능합니다.
연곡사에서 암자를 짓고 있는데 주지 소임을 끝낸 분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하려 합니다.
그러면 100% 수용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한 스님의 방사가 정해지면 법명을 쓴 문패가 걸린다. 언제 어느 때든 머물 수 있게 한 배려다.
스마트한 시대에 맞는 조계종의 변화를 모색해 온 덕문 스님은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지금의 승복을 바꾸자는 것인데 스리랑카와 미얀마 승단에서 볼 수 있듯이
색깔 있는 가사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승복은 모두 대동소이 해서 승복만으로는 종단을 식별할 수 없습니다.
비구·비구니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재가불자들도 승복을 입고 있습니다.
삭발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지며 또 한 번 자신을 추스르곤 합니다.
조계종만의 가사를 입으면 스님으로서의 위의를 갖추려는 데 더 많은 애를 쓸 것입니다.
말 한마디, 걸음걸이 하나에도 좀 더 신경을 쓸 것입니다.”
가슴에 새겨 둔 선·경구를 청하니 ‘화엄경’ 사구게 중 하나를 전했다.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心如工畵師)/
능히 세상사를 다 그려낸다.(能畵諸世間)/
오온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니(五蘊實從生)/
그 무엇도 만들어 내지 않은 것이 없다.(無法而不造)’
“가난하지만 지리산을 품은 채 섬진강을 마주하고 있는 산사입니다.
나를 찾아가는 길이자 사유의 숲이니 ‘느림의 미학’을 만끽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예로부터 어른 스님들은 지리산(智異山)에 들면 지혜가 저절로 생긴다고도 했습니다.
산사가 선사하는 화엄을 통해 나와 내 가족, 내 이웃의 행복을 기원해 보기를 청합니다. ”
이원규 시인의 시 말미가 떠오른다.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
절이 품은 마음도 그러하다. 덕문 스님의 마음 또한 그러하다.
덕문 스님이 전한 일언이 귓전을 맴돈다.
“누구라도 화엄사에 들면 ‘보살의 길을 걷겠다’는 마음을 내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부대중과 함께 좀 더 기품 있는 화엄성지로 다져가겠습니다.”
중생이 스스로 부처임을 확고히 믿고 보살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는
그 찰나를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화엄경’은 전하고 있다.
‘신라백지문서화엄경’을 사경한 뜻도 그러했다.
‘이 경에 의지하여 용맹정진하고 보현보살의 행원을 닦으면 곧 성불하리라!’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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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문 스님은
1985 종열 스님 은사로 수계.
1989 통도사 수선안거 이래 7하안거 성만.
2009 조계종 총무원 호법부장 역임.
2011 보문사· 선본사 재산관리인 역임.
2013 조계종 중앙박물관장 역임.
2014 동화사 주지 역임.
2016 동국대 감사 역임.
이외에도 조계종 13·14·15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단법인 굿월드 자선은행 대표, 정광학원 이사장,
동국대 이사, BBS광주불교방송 운영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2020년 12월 23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