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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3)
- 그리스도인의 재물관 -
누가복음 16장 14-18절 /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본문의 내용과 이것에서 예수께서 알게 해 주시고자 하신 의미는 앞서의 글인‘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1)-(2)’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이 올바르게 알고 있어야 할‘그리스도인의 재물관’에 대하여 다루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잘못 알게 하는 것들 중에는 재물관도 있습니다. 재물을 죄악시 여겨 터부시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은 악하며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악하다는 생각에 따른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재물에 마음을 갖고 있고 여기에 열중하면 믿음을 잘못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하나님이 재물도 권세도 명예도 다 주신다고도 설교하는 참으로 모순되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재물관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재물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리스도인에게서 재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이해도 잘 가져나가야겠습니다.
최근에 두 어 차례 언급한 바 있습니다만, 기독교를 비롯한 여타의 종교계를 막론하고 예수께서 바리새인을 두고“저들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에서 보는 돈의 탐욕에 이끌려 돈 냄새를 좇는 것에 있는 것을 지탄하였습니다. 이광호 목사는 이러한 실태를 두고“한국교회는 돈을 섬기고 있는가? 그렇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할 뿐만 아니라,“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 대다수는 돈을 섬기고 있다. 목사, 장로, 집사 등 거의가 다 그렇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도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혹,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대다수의 성도들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지 돈을 섬긴 적이 없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우리는 종종 돈에게 절을 하는 사람들을 본다. 직접 돈다발을 놓고 그 앞에서 절을 하는 사람들은 흔치 않을지 모르지만 돈을 끼워 함께 절을 하는 것은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불신자들이 제사를 지낼 때 삶은 돼지 머리를 제상(祭床) 위에 올려두고 그 입에 만 원짜리 지폐를 가득 꽂아둔 채 그 앞에서 절을 하는 것을 우리가 자주 보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런 광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우리 가운데 아무도 돈 앞에 절을 하며 섬기는 자들은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 가운데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 NIV)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서 재물이란 곧 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돈을 섬김에 대한 경고를 하셨을 때, 제자들이 돈다발 앞에서 절을 하며 섬길 것에 대한 경고를 하신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느냐, 돈을 섬기느냐' 했을 때 '하나님을 경배하느냐, 돈을 경배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느냐, 돈의 위력을 신뢰하느냐'의 문제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위력 보다 돈의 위력을 더 신뢰한다면 그것은 곧 돈을 섬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돈의 위력을 알고 실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세상이 물량주의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 돈의 위력에 서서히 물들어 가기 시작했으며 이제는 그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많은 교인들이, 자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거의 대다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관념적인 것으로 믿고 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하나님이 과연 그것을 원하시는지 모르겠다는 식이다.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돈의 위력을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위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돈의 위력을 분쇄할 수 있어야 한다. 돈의 위력을 인정함은 곧 주님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하면서,“우리시대는 돈의 위력을 충분히 실감하는 시대이며,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이 있으면 교회당도 지을 수 있고, 돈이 있으면 선교사도 보낼 수 있다. 돈이 있으면 훌륭한 목사님도 청빙해 올 수 있으며 돈이 있으면 거창한 기독교적 사업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돈의 위력을 익히 알고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끌어 모으려 한다. 갖가지 명목을 붙여 교인들로 하여금 연보를 하게 하며 그것을 미끼로 교인들을 경쟁시키기도 한다. 돈이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돈의 위력을 인정하지 않는 참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1)
이 글에서 지적되고 있는 바, 목사를 위시해서 장로도, 집사도, 그리고 성도들도 대다수는 모두 돈의 위력을 알고 이를 인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에서 이게 가능한 것인지요. 그런데도 그러한 모습의 상태에 있다고 하면“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는 바인 선을 가장한 외식일 것이며, 실제는 재물을 섬기는 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 보는 바리새인에게서는 여실히 보는 것이기에 납득이 가는데, 그리고 또한 유대교에서 보는 종교주의의 전통을 그대로 따름에 있어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에서 말하고 있는 바인 거짓 교회로 있는 제도권 교회에서는 납득이 가는데,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따름에 있으며 주님의 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에게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바리새인과 같이 동일하게 돈을 사랑함에 있으며 주님에 대한 신앙은 한낱 위선이요 외식일 뿐인지요.
우리에게로 관심을 돌리겠습니다. 과연 우리에게서는 재물이 어떤지요. 자칫하면 재물이란 돈은 악하다, 죄악되다고 인식하기 쉽습니다. 과연 그런 것인지요. 앞서의‘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1)’에서 언급한 내용을 다시 한 번 설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저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들은 돈이 필요치 않는 자들이며 돈을 소유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김에만 있어야 하는 자들인데 하나님을 섬김에 있는 그들의 마음이 돈을 사랑하는 탐욕에 있었다는 것에서 하나님 한 분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 돈인 두 주인을 섬기고 있었다는 것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으로 있어야 할 마음에 돈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것이 마치 자기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인 양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위하여 돈을 사랑하는 것에 있는 탐욕스런 자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것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들의 마음이 오직 이렇게 돈을 사랑함에 있기 때문에 이것에서 마음이 떠날 수 없는 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는 안중에 없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돈을 사랑함에 있는 마음이 자기들에게 일만 악의 뿌리가 됨을 알지를 못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 한 말입니다.“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바울이 여기서 하고 있는 말인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돈이‘악의 화신(化身, Incarnation of Money)’이라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돈은 그 자체가 악이거나 선이거나의 따위가 아닙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의도는“돈을 사랑하는 것은 온갖 죄의 길로 빠지는 첫걸음이다.”(현대어성경),“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이다.”(공동번역, 한글킹제임스) 라고 하는 것에서 보듯이 돈을 사랑함에 있는 마음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죠. 어떻게인지요.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있다는 뜻에서 하고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이것을 욕심내는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슬픔으로 자신들을 찌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한글킹제임스). 곧“돈을 좇다가, 믿음에서 떠나 헤매기도 하고, 많은 고통을 겪기도 하기 때문”(표준새번역)입니다. 이렇게 믿음에 있을 수 없는 것은 믿음의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 돈을 사랑하는 악한 본성이 온 마음을 지배하고 있어 여기에서 나오는 생각을 좇아 몸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떠나 돈을 사랑함에 있는 이 탐심을 사도 바울은 우상숭배에 있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골 3:5).
바리새인들은, 그리고 이들과 함께 유대교를 이루고 있는 서기관은, 그리고 또 다른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그리고 이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또한 돈을 사랑하는 탐욕에 있었던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말이죠. 하나님 한 분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함이 이들의 마음에는 없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재물인 돈이죠. 이러한 이들의 마음에서 돈은 일만 악의 하나로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일만 악이 주렁주렁 열매로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탐욕스런 것이 이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한 바인“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 17:9)에 따른 것입니다. 기독교의 교리는 이를‘전적 타락 및 전적 부패’로 말합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그 백성들만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에게서는‘돈을 사랑하는 것을 비롯한 탐욕의 본성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일만 악의 뿌리’임을 인식하고 이를 부인함에 있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에게서 이 사실을 가르침을 받으며 들음에도 그렇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며 멸시하고 배척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참으로 주께 감사하고 찬송하며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힘으로 자기를 부인함에 있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셔서 자기 부정에 있으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주로 섬겨 따름에 있어 그 마음에 하나님을 공경함에 우리가 있게 하셨기에 말입니다. 이런 우리에게서는 재물인 돈에 대한 인식과 가치관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인지요.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서 재물인 돈이란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생명을 보전해 가시는 보살핌에 두심으로써 하나님이 복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약속으로 주신 땅 가나안에로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아브라함 때부터 맺어 오신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이루어 가시기 위하여 온갖 곡식과 과일을 내셔서 그들의 생명을 보전해 가셨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서 내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따라 그들의 생명이 안전히 보살핌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땅의 곡식과 과일이 자기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것인 양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풍요로움의 부요를 우상숭배하며 구하는 것에서 주어지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서 떠나 다른 신, 곧 우상을 자신들이 연애할 연인으로 여겨 사랑하였습니다.
구약에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땅 가나안에서 하나님을 섬겨 그분을 공경하면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으로 살아야 했듯이, 그리스도인에게서 재물인 돈이란 그들의 복이신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에 만족하며 누리는 복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서는 날마다 하나님의 권능을 따름에 있는 이적이 일어납니다. 일만 악을 이루는 뿌리가 맺는 돈을 사랑하는 것을 비롯한 온갖 육의 욕망에 이끌린 탐욕에 따른 육체의 열매는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인 구속의 피에 의해 아무런 위력을 지니지 못하고 제거(부인)되고, 의로우시고 선하시며 거룩하심에 의해 있는 성령의 열매가 열립니다. 그래서 말이죠. 성령의 생각을 좇는 생각을 하며 성령의 뜻에 순복해 나가는 자기를 드림에 있어 나갑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짊어짐은 그렇게 있어집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를 열매 맺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갈 5:16-26). 이 은혜를 날마다 입음에 있는 우리입니다. 육체의 옛사람에 대해서는 날마다 죽음을 당함에 있는 우리이며, 성령의 새사람에 대해서는 날마다 산 생명을 받음에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서 재물인 돈이란 어떤 것인지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 관계를 잘 가져나갸야겠습니다. 이에, 앞서‘돈을 사랑하는 바리새인(1)’에서 결론 부분으로 언급한 것을 여기서 다시 한 번 다루며 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는 자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서 돈이란 말이죠. 하나님을 미워하고 돈을 사랑함에 있는 것에서 돈을 소유함에 있고 돈을 사용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쓰일 돈을 관리함에 있습니다. 성도에게서 돈을 소유함이란‘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참으로 복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가 어떤 성격을 띤 나라인지를 잘 말해줍니다. 자비(긍휼)에 부요하신 하나님이시며, 자비(긍휼)에 부요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자비를 입고 있는 자는 이 자비를 공급하여 베푸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돈의 실체는 그리스도인에게서 이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이십니다. 돈의 효력은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입니다. 돈 자체는 그리스도의 존귀함에 비하여 배설물처럼 여겨지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자비로우심이 빠진 돈이란 그 배설물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자비로우심을 입고 있는 자에게서 돈이란 그것이 자기에게 쓰이는 것이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쓰이게 된 것이든 그리스도 안에서 선용되는 것에 있으니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는, 곧 한 푼도 버릴 것이 없는 유용한 것입니다. 구약시대에서는 하나님께 바침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되고자 하는 것에서‘나실인의 서원(서약/맹세)’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모두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이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우리 마음과 우리 뜻과 우리 모든 힘과 우리 목숨까지도 이미 바친 자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에 있는 선언이 그렇지 않은지요. 그리고 그와 같이 또한 우리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동일하게 바쳐져 있습니다. 무엇으로 말인지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으로 쓰이는 의로운 것으로서 말입니다. 그에 따라서 성도에게서는 그 일을 도모함에 마음을 품고 그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따라 열중하며 열심을 갖고 자신을 주께 드린 자로 삽니다. 그렇게 말이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가는 이 믿음에서 결코 다함이 없으며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가 지닌 풍요한 자비를 오늘도 힘입고 또한 이를 드러내어 살고 있는 우리입니다. (*)
1) 한국개혁장로회 실로암교회 이광호 목사, 신학칼럼 33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함’(2017. 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