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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李 씨의 50년 사랑과 우정/단편 소설
<1> 두 이(李) 씨의 조우(李는 '오얏 ' 이 가 아니고 '자두' 이 다)
이런 농담은 어느 모로 보나 바람직하지 않다. 촌놈 성(姓), 김(金) 가(哥) 아니면 이(李) 가 라는…. 그런데 술자리 같은 데에선, 아직도 횡행하기 예사이니 어쩌랴. 그만큼 이 씨와 김 씨가 대한민국에 많이 산다는 뜻이다. 그런가 하면, 이 우스갯소리도 이제 식상하다.
“남산에서 돌멩이 하나 아래로 던지면, 김 씨나 박 씨 집 지붕에 떨어진다던데?”
한데 실제 우리나라 김 씨와 이 씨, 박 씨를 합했을 때 인구의 절반에 가깝다.
본관이 성주(星州)인 이 씨는 현재 4만 5천여 명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의 천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시조는 이순유(李純由)이고, 신라 말엽의 재상이었다. 기울어져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순유의 12세손 이장경(李長庚)이 성주 이 씨의 중시조(中始祖)다. 중시조란, ‘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이란 뜻. 어쨌든 이장경은 고려 고종 때의 인물로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그 아들들의 이름이 뭇사람의 상상을 초월하게 하는 바, 백년(百年), 천년(千年), 만년<萬年), 억년(億年), 조년(兆年)이었다더라.
성주 이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양반이다. 왜 하필이면 이장경이 ‘년’을 다섯 아들들의 이름 끝 자에 썼을까? 행여 항렬자였을지 모른다 해도, ‘조년’만은 지금이라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를 일이고말고. 이년, 저년, 그년, 고년, 조년….‘년’이라는 명사가 이장경(생몰연도 미상) 시대만 해도 적어도 욕을 가리키지는 않았으리라.
어쨌거나 위 다섯 형제는 모두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성공하였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 중에서도 막내 동생인 이조년이 더욱 걸출했다고 한다. 일흔 살이 넘어 예문관 대제학의 벼슬을 얻었고, 그 4년 뒤에 기세(棄世)했다고 전해진다. 당시만 해도 장수(長壽)이고도 남을, 일흔 네 살이 넘을 때까지 산 셈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자는 '원로(元老)'였다.
하지만 이런 자질구레한(?) 설명보다 이 시조 한 수가 그를 대변하고도 남으니, ‘창(唱)’으로 창밖으로 쏟아내 보자.
이화(梨花)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일지 춘심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배꽃(梨花)은 4월 즉 봄에 핀다. 수십 그루가 꽃망울을 터뜨렸을 때, 마침 하얀 달빛이 무너져 내렸다 치자. 시간도 삼경 즉 열한 시를 넘겼으니 밤도 깊었다. 지금 그 배를 먹는 가을이다. 한갓 아둔한 촌로인 이일우조차, 이 평시조를 목청에 싣는 건 허물이 아니다. 오늘은 한가위 달이 밝다.
물론 장구채도 이일우(李日雨) 자신이 잡는다. 아 참, 잊을 뻔했다, 종장의 ( )속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여기서 어느 누구의 말을 전해 보자. 이 시조 ‘다정가(多情歌)’는 , 이조년이 충혜왕에게 충간(忠諫)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 은거하면서 지은 거다,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씨를 나타낸 것이라더라.
이조년에 버금가는 경주 이 씨의 조상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백사 이항복이다.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남긴 시조(時調)가 그러하니,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산 원루를 비 삼아 띄웠다가/ 님(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 본들 (어떠리)
백사 이항복은 경주 이 씨 가문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상서공파다. 그는 이조판서 병조판서 영의정 등의 벼슬을 지냈다. 위 시조는 그가 광해군 때 이이첨(李爾瞻) 등이 주도한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유배되어 가면서 지은 거란다. 자신의 억울함을 임금에게 하소연하는 뜻이다.
어쨌거나 이조년과 이항복은 시대를 달리했지만, 너무나 큰 업적을 남겼다. 성주 이 씨와 경주 이 씨라면, 각기 이조년과 이항복을 기억해야 하리라.
오늘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이일우는 경주 이 씨 중시조 이거명의 38세손이다. 그리고 이항복과 같은 상서공파….
감히 성주 이 씨 중시조 할아버지의 휘자(諱字)를 마구 들먹였다. 경칭을 쓰지 않고.. 백사(白沙)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조상들의 꾸지람을 받게 생겼다.
맨 앞서 이장경의 다섯 아들 이름 이야기를 했는데, 이항복의 할아버지(조부) 형제들도 만만찮았다. 인신(仁臣), 의신(義臣), 예신(禮臣), 지신(智臣), 신신(信臣) 등이다. 항렬이 신하 신 자였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백년, 천년, 만년, 억년, 조년과 대비된다. 여기서 웃을 수만은 없는 아쉬움 하나.
만약 이장경이 여섯 째 아들을 두었더라면? 당연히 조의 만 배인 '경(京)' 자를 썼을 수밖에. 하지만 그때 '경'이란 수사가 있었을지 모른다. 또 하나. 만약 이몽량 할아버지의 경우는 참 난감했겠다. ‘신(信)’ 다음을 잇는 한자가 찾기 힘들어서이다. 헌(獻)? 용(勇)? 충(忠)? 아서라, 그만두자. 머리만 혼란스럽다.
뒤늦은 서술인데, 경주 이 씨와 성주 이 씨의 조상은 알평(謁平) 할아버지다. 말하자면 두 이 씨는 분족(分族)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일우는 아직도 낯선 땅에서, 살아 있는 사람보다는 죽은 이를 많이 만나는 편이다. 거 무슨 뜻이냐고? 아무 무덤이나 찾아가 잠시 고개를 숙이는 게 거의 취미가 되었다는 표현으로 변명하자. 물론 생전에 이름이나 날렸던 사람도 거기 포함된다. 아니 후자(後者)의 경우가 더 많다는 게 솔직할지 모르겠다.
국립현충원에 가면 이등병에서 장군의 묘역에서 경건하게 고개를 숙일 수 있다. 시내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가수 황금심 ‧ 고복수 내외며 최희준도 쉬 만난다. 황병기 가야금 명인도 마찬가지. 김수환 추기경이며 앞에서 십자성호를 긋는다.유토피아 추모관에 간다 치자. 이일우의 혈육과 장모도 거기 누워 있다. 물론 거기서 눈물을 뿌린다. 친구인 가수 박상규도, 교우(敎友) 신해철도, 세계 챔프 최요삼, 액션 스타 장동휘도….
그런데 그가 얼마 전에 산책을 나갔다가, 15년 전에 헤어졌던 친구 이병갑과 조우한 것이다. 희한하게도 성주 이 씨 가족 공원 묘지에서였다.
경위를 적어 보자, 날씨가 더워 차량 통행이 그리 많지 않는 도로 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거기 묘비가 하나를 발견했다. 상당히 컸다. 습관처럼 주인공 즉 그 무덤에 묻힌 사람이 누굴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하는 게 아닌가? 가까이 다가갔다.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으니 이병희 전 무임소장관의 묘라고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일대기 즉 약력도 새겨져 있었다. 장군의 무덤? 늘상 그랬던 것처럼 관심이 갔다. 그런데 거기서 이병갑과 맞닥뜨린 것이다.
이병갑은 고양에 산다고 했다. 종친회 일을 조금 보고 있는데, 이병희 장관 비문 탁본을 하러 왔다나?
대충 작업을 끝낸 병갑이 바로 위에 자기들 성주 이 씨의 가족 묘원에서 수백 명(분)의 조상과 종친들이 누워 있다는 게 아닌가.
“그랬었군. 진즉 알았더라면 내가 진작부터 찾아 왔을 건데….우리 두 이 씨는 시조가 알평 할아버지 아니신가?”
마침 점심시간이 가까웠기 때문에 둘은 근처 비빔밥 집으로 찾아 들었다. 둘 다 시장했던 터라, 빈 그릇을 내미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시 둘은 손을 잡고 바로 앞 호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메리카노를 3천원에 내는 데다. 거기서 무려 네 시간 가량 둘은 지난날을 회억했다. 하지만 여기 어떻게 그 기나긴 이야기를 다 적겠는가? 해서 둘과 어느 여교사와의 우정과 사랑을 압축해 여기 옮긴다.
병갑은 B사범대학 출신이다. 2년제 초급대학인 B사범대학은 시 중심가가 아닌 변두리에 있었다. 거기 졸업하면 중학교 2급 정교사 자격증을 주어 초 중학교 교사로 임용했다. 고등학교는 불가. 사범대학엔 미술과 체육과 음악과가 있었다. 한데 나중에는 졸업생 모두가 B교육대학교 동창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사범학교와 교육대학(2년), 부산사범대학 학생들이 한 운동장을 쓸 만큼 마치 잡동사니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복잡했다.
이일우는 사범학교에서 십 년 넘게 사환 노릇을 하며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나이 스물 대여섯을 넘긴 청년이었다. 그런데 사범학교가 없어진다는 게 아닌가? 63년 마지막 졸업생을 끝으로….말하자면 교육대학이라는 초급 대학 과정의 새 학교가 생기고 거기 통합된다는 것. 사범학교 학생들은 반발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본 계획대로 통합되었다.
드디어 15회도 졸업해 나갔다. 이제 남은 16회 240명(남녀 각각 반)이 1년 뒤 저 교문을 나가면, 적어도 일우는 설자리조차 없을밖에. 그는 내심 울부짖으며 절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교감선생님이 그를 부른 것이다. 교감 선생님은 자기를 따라오라고 앞장섰다. 교장 선생님이 반겨 맞았다.
“이 군, 이 학교에서 몇 년간 일했지?”
“십년 조금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교장 선생님.”
교장선생님은 강산이 변할 세월이라더니, 학교 공부는 어디까지 했느냐며 다시 물었다. 야간 상고를 졸업했다고 대답했다.
“이 군 그동안 수고했으이. 자네를 마지막 졸업생에 포함시키기로 했네. 앨범도 찍고 하게. 내일부터 교사 수업을 개인적으로 받도록 하게. 부속 초등학교로 출근하면 자네에게 교사로서의 자질이며 지도 기술을, 부속초등학교 연구 담당 교사가 전수해 줄 걸세.”
그는 귀를 의심하였다. 야간 상고를 나온 자신이, 교사 자격증을 얻고 교단에까지 서게 된다? 지난 갖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정말 이튿날부터 그는 바로 아래층 부속초등학교로 출근하였다. 물론 연구 담당 선생님 교실에서 수업을 참관하고, 틈만 나면 두 학교의 크고 작은 등사(謄寫)도 열심히 했다.
졸업식은 2월 28일에 열렸다. 아버지 어머니가 참석하여 눈시울을 적셨다. 여섯 달 만에 첫 발령을 받았다. 면 소재지 원당국민학교 이영 분교장(分敎場)이었다.
시골이라 참 좋았다. 경주 이 씨들 20여 호가 소규모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으니 마음 편하게 근무할 수 있었다. 이런 비유가 맞지는 않지만, 서당 개 3년이면 풍월 읊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십 년 가까이 사범학교에서 사환으로 근무하면서 보고 들었던, 여러 가지가 일우에겐 자산이었다.
둘은 다시 손을 잡았다. 그리고 터놓는 말.
“우린 정말 숙명 같은 인연을 엮으면서 여태껏 살아 왔네.”
“누가 아니라나?”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다니 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그건 그렇고 . 이나영 선생의 후문을 듣고 싶네.”
“그러세나. 괴로운 이야기지. 털어 놓으면 속이 시원할지도 몰라. 우리 셋의 우정과 사랑! ”
<2> 여교사 이나영
이병갑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병갑 선생은(이하 이병갑이라 하자) 고향이 전남 보성이다. 거기 성주 이 씨 집성촌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사업을 따라 부산으로 온 게 중학교 때였다. 고등학교도 부산에서 마쳤다. 워낙 노래를 좋아하다 보니, 중학교 때부터 합창단 등에서 활동을 한 걸, 그는 내심 자랑스러운 스펙으로 여기고 있었다. B중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교내 가곡 경창 대회 등에 나가 입상도 하였다. 그의 단골 곡은 ‘봄 처녀’. 중학교 때 한 번은 역사 시간에 무릎 위에 ‘봄 처녀’ 악보를 놓고 몰래 내려다보다가 선생님에게 들켰다.
“야 인마, 이병갑(이름표를 보고 성과 이름을 다 불렀다)! 이리 나와, 그대로….”
병갑은 그때 <학원> 잡지 속에 악보를 끼워 놓고 있었는데, 벽력같은 고함 소리에 놀라 책과 ‘봄처녀’를 그대로 들고 나갈 수밖에.
“이 녀석이 공부 시간에 <학원>을 봐?”
그러면서 주먹을 날렸다. 병갑은 그대로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한 달 뒤의 교내 독창 대회에서 보란 듯이 당당 대상을 받았다. 쓴웃음이 나왔다.
다른 일화 하나. 어느 날 음악 선생님이 현란한 솜씨로 피아노를 연주하더니 노래 솜씨가 어떻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선생님이 재차 질문을 했다. 그 노래 아는 사람 있느냐고. 애들이 어리둥절해 하자, 선생님은
“그거 내가 작사한 ‘회상’이란 노래야. 대중가요지만, 제군들도 그 정도는 부를 나이가 되지 않았어?” 수업 시간엔 안 되지만. '생각마다 그리운 그대의 모습-' 뭐 그런 노래야. 그건 그렇고. ‘봄처녀’ 부를 친구 추천해 봐.“
‘병갑이’란 소리가 사방에서 튀어나왔으니, 그대로 따를 수밖에. 덕분에 Old Black Joe까지 앙코르로 보답했다.
Gone are the days when my heart was young and gay/ Gone are my friends--
그 체험이 뒷날 병갑이로 하여금 뒷날 흑연 영가를 남보다 많이 부르게 된 계기로 매듭지어진다.
어쨌든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병갑은 노래 실력을 더욱 쌓아 가고 있었다. 음악 가창 실력 하나 갖고는 좋은 대학에 갈 수 없다는 사실 정도는 병갑도 알고 있었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B사범대학 진학이었다. 중학교 교사가 되어서 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싶다는, 어찌 보면 하찮은 단견(短見)도 진로를 그 방면으로 결정하는 데 한 몫 거들었다.
정말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특히 나운영의 ‘달밤’, 대회에 나가서 실력을 뽐내기에 알맞은 곡이기도 했다. 높은 ‘라’까지 뿜어내는 그 자체만으로도 병갑 자신이 환희에 젖었다.
한데 결핵을 앓았다.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할 수 있을 정도의 건강이 나빴다. 하지만. 보약도 먹고 섭생도 잘 하며 휴식을 해서 뒤늦게 사범대학에 진학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역시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가끔 객혈을 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휴학을 할 수밖에. 3년 동안 아버지 고향인 보성에 가 있었다. 재종 형 집에 녹차 밭 일을 돕고 약을 먹었다. 혹자는 녹차가 많아 건강에 해롭다고 하지만, 적당량을 정성 들여 달여 마시면 결핵 치료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3년 만에 복학했다. 물론 완치가 되었다.
후배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도 그런 대로 재미있었다. 처음 몇 달 동안 음악실에서 피아노로 반주를 해 가면서 음악실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병갑은 이일우를 알게 되었다. 병갑이 하도 음악실 출입을 열심히 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일우가 찾아 간 것이다. 이일우는 오르간 실력도 부족하고 코르위붕겐 실력도 뒤쳐졌다. 둘의 나이 같았다. 스물다섯 살. 그렇게 지내다 보니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아 말을 터놓고 지내기도 했다.
때 맞추어 음악실에 가끔 들르는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다. 사범학교 막내인 이나영이었다. 시골이 고향이어서 사범학교, 교육대학, 사범대학 등 세 교사양성 기관이 한울타리 안에 있는, 시골 같은 곳이 좋다고 이나영은 말했다.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이듬해 3월 1일 셋은 모두 발령을 받은 것이다. 공교롭게도 양산군 관내였다. 셋은 물금(勿禁) 전통 찻집에서 만나 모교 음악실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이윽고 병갑은 군대에 가게 된다. 스물여섯 살이라 매우 늦은 입대여서 적응이 힘들 거라 염려했지만, 병갑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잘 이겨나갔다. 사단 본부 정훈 참모실에 근무했는데, 당시만 해도 한글 미해득자가 병사가 있어 그들을 대상으로 노래와 한글 지도를 했다.
3년 가까운 군 복무를 마치고 복직을 한 것이 69년이었다. 사전 교육청에 들렀더니 혹시 희망하는 데가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천 분교장이라고 했다. 이일우와 이나영이 거기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벽지 근무를 꺼리던 터라, 교육청에서는 얼씨구나 싶어 그곳에 발령을 내 주었다. 이일우와 이나영이 반겨 주었다.
일우는 그새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두고 있었다. 작고 불편하지만 벽지 교사들을 위해 정부에서 지어 준 사택에서 살고 있었다. 나영도 비슷한 규모의 대여섯 평 주거 공간에서 친구와 자취를 하였다. 나머지 교사 셋은 미혼이었고, 생활 방식은 어금지금.
나영은 교사이기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큰 키에다 바짝 마른 몸매였는데, 그 티를 완전히 벗고 있었다. 저녁이면 셋이서 아니 이일우의 부인과 넷이서 모여 앉아 한창 유행하기 시작하던 고스톱을 치기도 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 옛날 셋이 음악실에서 모여 보내던 그 시절을 재현하면서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병갑과 나영은 서로 이성으로서 호감을 갖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나 시골 동네에서 처신을 잘못하면, 학부모들의 입줄에 오르내리기 마련, 둘은 조심 또 조심이었다.
그렇게 서너 달이 흘렀다. 어느 날 병갑이 극비리에 나영에게 쪽지를 보낸다. 시을 뺀 볼펜에 그걸 넣었으니 정말 감쪽같은 비밀이었다. 내용인즉슨 29일 둘이서 어디 여행이나 갔다 오자고. 정확하게 말하면, 1969년 7월 20일 일요일이다. 늦게라도 귀가해야 이튿날 출근이 가능하다. 해서 아침에 떠나 저녁에 돌아오는 걸 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OK 사인을 받고 병갑은 뛸 듯이 기뻤다. 밤새 한숨도 잠을 못 이루었다.
새벽 다섯 시가 안 되어 둘은 채비를 차리고 사택을 나섰다. 둘 다 자전거가 있었다. 시골길을 두 시간 가량 달려 역에 도착했다. 가면서 둘이서 의논한 건 이랬다. 경전남부선(완행)을 타고 가는 데까지 기 보자.
일곱 시 반쯤이었으리라. 다행히 열차는 연착을 하지 않고 플랫폼에 닿았다. 등산객들이 쏟아지듯 왁자지껄 내렸다. 둘이 객실 안에 들어섰으나 자리가 없었다. 승강대에 서서 마주보고 웃으며 몇 열차가 몇 정거장 더 달리도록 기다리는 수밖에.
삼랑진역을 지나 낙동강역, 한림정역을 열차는 느릿느릿 기다시피하며 스쳐 지나갔다. 진영역에 와서야 자리가 생겼다. 둘은 창가 쪽에 자리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지나가는 홍익회 이동 매점을 불러 세우곤 삶은 달걀이며 빵, 양갱 등을 사서 아침 겸 점심을 때웠다.
열차의 속도 따윈 둘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둘은 웃으면서 속삭이듯 동시에 이 말을 터뜨리기도 했다. 철마야 달려라, 세상 끝까지!
마침내 열한 시간! 열차는 종점인 광주역에 둘을 내려놓고 긴 기적을 한 번 헛기침처럼 뿜었다. 역사(驛舍)의 시계 긴 바늘 짧은 바늘이 6과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쩌지?”
“오빠, 제가 오빠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에요. 지금 돌아가는 열차는 없구요.”
“일단 우리 저녁 먹고 이야기하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했으니….
의외로 나영의 표정은 밝았다. 광주 시내를 둘은 팔짱을 끼고 걸었다. 한참을 그러다가 중국집이 하나 보이기에 거기 들어가, 늦은 저녁을 먹은 뒤 다시 거리로 나왔다.
어느 극장 간판 앞에 걸음을 멈추고 병갑이 손짓으로 영화 한 편 보자며 동의를 구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리 밴 클리프, 지안 마리아 블론테 주연인 서부극 ‘석양의 무법자’가 상영되고 있었다. 나영이 오히려 먼저 쪼르르 매표소로 달려갔다. 이윽고 둘은 극장에 들어섰다.
빈 자리가 많았다. 둘은 맨 뒤 으슥한 의자를 찾아가서 앉았다. 둘은 스크린에 시선을 제대로 못 박지 못했다. 그저 둘이 몸을 맞대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는 데 바빴다. 마침내 병갑이 나영의 어깨를 감싸 쥔 순간 둘의 입술이 포개졌다.
영화를 보고 나선 커피를 마셨다. 밤이 깊어가는데, 둘이서 의향을 물어 필요가 없었다. 호텔로 발걸음을 재촉하게 된 거다. 바깥이 잘 내다보이는 객실 하나를 얻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닐 암스트롱이 조금 뒤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착륙할 거라는 보도를 내보내고 있었다.
둘은 깊은 포옹을 나누었다. 이나영이 또 수심 어린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오빠 어쩌지요? 이 도피 행각이열 시간 안 지나서 들통이 날 텐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법!”
그러는 병갑의 표정도 밝지는 않았다. 그는 휘파람을 날렸다. 케세라 세라….
드디어 둘은 한 침대 위에서 뒹굴게 된다. 병갑은 여자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해서 말인데, 서투른(?) 솜씨로 나영에게 돌진하였다. 그래도 둘만의 불은 뜨겁게 타올랐다.
한 차례 ‘전쟁’이 끝나자 나영은 이병갑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병갑은 나영이 건네주는 타월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닦아 내다가 감탄사를 토해 내었다.
“아 나영이 고마워!”
나영은 처녀였던 것이다. 새빨간 치, 병갑은 눈시울이 젖었다.
밤새 늦게까지 둘은 그렇게 분탕질(?)을 하다가 새벽에 가까워져서 잠들었는가 싶었는데,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밝지는 않았지만, 달빛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둘은 간이복으로 갈아입고 객실 문을 열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거기엔 달빛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둘의 입에서 나온 노래 한 곡
등불을 끄고 자려 하니/ 휘영청 창문이 밝으오/ 문을 열고 내어다보니/ 달은 어여쁜 선녀 같이/ 내 뜰 위에 찾아오다/ 달아 내 사랑아/ 내 그대와 함께 이 한밤을/ 이 한밤을 얘기하고 싶구나
<3> 영원한 작별
다시 객실로 돌아왔을 땐 날이 바뀌어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닐 암스트롱이 달을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을 내보내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계인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열광했다.
“저것 봐, 대단하지?”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지요. 지금쯤 이일우 선생님이 걱정하고 있을 테고. 몇 시간 뒤면 학교에서 온통 난리가 날 건데…. 그래도 ‘하늘이 어쩌고저쩌고 이야기가 나와요?”
“…….”
그런데 병갑의 침묵은 그런데 오래 가지 않았다. 꼭 거짓말 같은 코멘트가 아나운서의 입으로부터 터져 나온 것이다. 정부는 닐 암스트롱의 역사적인 달 착륙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을 임시 공휴일로 정했다는 것! 순간 둘은 일어나 부둥켜안고 길길이 뛰었다.
“그것 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지?”
“정말 그래요, 오빠. 이제 한시름 놓아도 되겠네요.”
“사실 난들 왜 걱정이 안 되었겠어?"
나영은 눈물을 글썽였다. 나영은 말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 해도, 만인의 축복 속에서 면사포를 써야지요. 말 한마디 없이 시골 분교장을 온통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고 애정행각을 벌인 뒤 마치 수습이라도 하는 듯 법석을 떠는 건 언어도단이에요.”
그런데 정작 청천벽력 같은 사실 하나가 이어서 기어이 터진다. 병갑이 질문을 던졌는데, 본관이 어디냐는 거였다. 나영은 성주라고 말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이윽고 병갑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영이 놀라지 말아. 나도 성주가 본관이야. 우린 결혼이 불가능할지 몰라.”
순간 나영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병갑은 애써 태연한 척하고서는 그런 나영을 부축하여 침대에 뉘여 안정을 취하게 했다. 나영의 말이다.
“죽고만 싶어요. 양반인 줄 알았는데, 우리가 문중을 더럽혔군요.”
“절망은 안 돼. 힘을 내면 방법은 있을 거야.”
“오빠, 참담해요. 달나라에 인류가 착륙한 오늘부터 50년 뒤, 우리 둘 어떤 모습일까요 살아 있기는 할까요? 흑흑"”
귀갓길이 순탄할 리 만무다. 둘은 마치 벙어리처럼 말문을 닫고 역순으로 역에 닿아서 자전거로 귀가했다. 일우가 걱정했다며 둘을 맞았다. 물론 눈치 못 채도록 둘은 조심하였다.
그러나 나영이 이튿날부터 뭔가 변해 가는 게 아닌가! 끼니를 때에 때우는 것 같지 않았다. 얼굴에서 웃음기도 사라지고 있었다. 말수도 줄었다. 차림새도 옛날 같지 않았고. 누구보다 그런 사실을 병갑은 알고 있었다. 며칠 뒤 방학이라 병갑은 나영을 역 다방에서 만났다.
“나영이 내 잘못이야. 나는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어. 우리가 동성동본인 걸 말이야.”
“…….”
“누가 뭐래도 우린 결혼해야 돼. 아는 변호사를 만날 생각이야. 나영이 본관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구. 내년 3월에 나영이가 내신해서, 다른 시군의 학교로 옮기면 돼. 우리 같은 경우가 예상 외로 많아.”
“오빠가 왜 진작 이야기를 안 해 주셨어요? 성주 이 씨는 정말 양반이잖아요?”
“너무 나영이를 사랑했기 때문이지. 절망하지 말아. 나영이 본관을 바꾼다면 경주 이 씨로 해. 이일우 선생과 극비리에 의논해 볼게.”
그러나 모는 건 희망 사항일 따름이었다. 방학 중인데도 나영은 60일 병가를 내는 게 아닌가. 방학 중에 근무해야 하는 당직 명단에서도 나영은 빠져 있었디.
그리고 개학을 한 다음에도 나영은 학교에 출근하지 않았다. 극심한 위염이라는 소문만 들렸다. 그리고 다시 한 달여, 나영은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본교에 표를 냈다면서, 짐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 이부자리며 책 등을 챙겨서는 횅하니 떠나가 버리는 것이었다.
모두들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특히 병갑은 나영이 그리 된 까닭이 자기한테 있는 줄 아는 터라,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동안 병갑이에게서 약간 귀띔을 들은 일우도 넋을 잃었고.
그러고 난 뒤엔 종무소식(終無消息)이었다. 나영의 동기들을 가끔 만나 물어도 그들의 대 대답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몰라 안타깝다고 했다.
일우와 병갑은 그 뒤 35년 넘게 평교사로 근무하다가 정년 퇴임하였다. 62세, 2004년 8월 31일. 그래도 둘 다 가는 곳마다 합창부나 관현악부를 만들어 열심히 지도해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우 이씨는 타관에 산다.
병갑이 하도 적적하여 음악 학원에 나가서 초 중등학교 학생들의 가칭 지도를 보조한다. 배재대학교에 출강하는 최긍운 교수의 보조.
몇 달 전 일이다. 부산교대 동창회 총무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선배님, 시간을 좀 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 총무 사범 16회 박평향입니다.”
“알고 있소. 근데 뜬금없이 시간을 내 달라니….나 동창회에 잘 나가지도 않잖아?”
“매년 6월 사범과 교대, 사대 등이 모인 B교대 동창회 작은 음악회를 열거든요.”
알고는 있다고 대답했더니, 거기서 독창 한 곡만 해 달라는 거다. 간곡하게 사양했는데, 박평향은 막무가내였다. 한참 실랑이 끝에 곡은 마리안 앤더슨의 ‘깊은 강’으로 합의해서 음악회에 가기로 했다. 최긍윤 교수가 반가워했다. 그러곤 반주를 해 주며, 음정 박자 발성(발음)에서 부족한 분을 친절히 지도해 주었다.
프로그램을 스마트폰으로 보내 주기로 했는데, 일이 묘하게 꼬이려고 해서 그런지, 병갑이 최긍윤 교수에게 녹차 한 잔을 달여 대접하려다가 숙우(熟盂)에 스마트폰을 빠뜨리는 바람에 그 소중한 것을 전달받지 못했다. 그러나 병갑이 문학의 집에서 팝송 콘서트를 연 적이 있고, 가톨릭 문인회 출판기념회 등에 많이 다녔던 터라 별 걱정 없이 당일 가서 ‘Deep River’를 소화시키기로 작정했다.
드디어 당일. 남산 입구의 문학의 집 대강당. 객석이라 해 봤자 2백 개 남짓이다. 최 교수가 운전하는 승용차가 밀리는 바람에 제법 늦었다. 문학의 집 앞에 도착했더니, 세상에 시작하고 반시간이나 지났지 뭔가?
다행히 병갑의 출연까지는 좀 시간이 남았다. 한숨 돌라고 연미복으로 갈아입고 대기석에 앉아 프로그램을 들여다봤다. 조졸했지만 다양한 레퍼토리였다. 약기 연주가 많았다. 그러다가 병갑은 이미 지나간 프로그램 맨 처음의 독창 곡목에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 거기에 ‘달밤’/ 那英 Chung이라 적혀 있었던 것이다.
달밤? 처음엔 병갑은 한자와 영어가 섞인 이름을 보고, 외국 교민이 찬조 출연한 줄 알았다. 그러나 아내 알아채렸다.
"아, 나영이가 왔구나."
병갑은 총무를 손짓으로 불렀다. 이 사람이 누구냐고? 총무의 대답이다.
“선배님, 우리 동기인데 학창 시절 이름이 이나영이었습니다. 50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거기서 음악 활동을 하는 친구지요. 아무도 나영이 소식을 몰랐는데, 보름 전 귀국했지 뭡니까? 성을 이 씨에 서 정 씨로 바꾸어서, 우리 모두 영문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병갑은 그렇게 헤어진 나영이 미국으로 떠났다는 사실 앞에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이나영이 어디 있느냐고 다급하게 물었다. 한데 ‘달밤’을 부른 뒤 곧장 떠났다는 게 아닌가. 지금쯤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고 있을 거라 하곤 입을 다물었다.
병갑은 뭔가 뭔지 구분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런데 나영의 사범 16회 동기인 김길순이란 친구가 봉투 하나를 내민다. 나영이 전하라던 것. 병갑은 떨리는 마음으로 그걸 뜯었다.
나운영 ‘달밤’과 닐 암스트롱. 50년 뒤인 오늘 못 만나고 갑니다. 영원한 행복을 누리십시오. 늦깎이라고 폄훼하지 마시고 좋은 소설 창작하시고요. 동래 後人 정(鄭)올림(오하이오 洲/ *닐 암스트롱의 고향)
모든 게 그렇게 끝났다. 병갑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기어이 성까지 바꾸고 이민을 해서 반세길를 보냈다니-.까짓 양반이 뭐길래 크나그토록 자책했단 말인가. 병갑은 이윽고 자기 차례가 되어서 독창을 했지만, 도무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튿날 바로 승용차를 몰고 광주에 다녀왔다. 호텔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8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