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유난히 추억이 그리운 계절이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도 한번쯤 든다. 주전부리도 겨울에 많았다.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도란도란 먹던 군고구마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엿과 인절미, 풀빵, 보리개떡도 있었다. 가난해서 부족했고 그래서 불편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지독했던 그 가난과 불편도 그리움으로 다가선다.
'슬로시티' 담양 창평으로 간다. 창평은 추억의 주전부리였던 쌀엿을 전통방식 그대로 만들고 있는 곳이다. 자연스럽게 어릴 적 즐기던 엿치기가 떠오른다. 기다란 엿을 서로 부딪혀 그 안에 난 구멍의 크기를 대보는 놀이였다.
엿의 구멍이 큰 쪽이 이겼다. 엿의 생명은 '구멍'이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실제 엿은 구멍이 있어야 바삭바삭 맛있다. 찌꺼기도 입안에 남지도 않는다.
북을 쳐서 현감현령의 출퇴근을 알렸던 남극루 앞에 차를 두고 삼지내(삼지천)마을로 향한다. 월봉산에서 시작된 월봉천, 운암천, 유천 등 3개의 물줄기가 모인다고 해서 그리 이름 붙었다. 마을의 역사가 고택의 청태 낀 기왓장에서 금세 묻어난다. 지은 지 100년 안팎의 집이 20여 채나 된다.
돌담길에서 먼저 만난 고택이 고재선가옥. 맞배지붕의 대문 안 마당으로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네모난 연못이 눈길을 끈다. 전형적인 양반집이다.
마을길이 돌담을 따라 이리저리 구부러진다. 돌담 아래로 난 작은 개울도 길을 따라 흐른다. 발걸음을 오른쪽 골목으로 돌리니 길이 좁아진다. 돌담은 더 높아졌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2층 한옥의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천연의 색으로 물을 들이는 두레박공방도 보인다. 최금옥 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제 철에 산과 들에서 얻은 풀과 뿌리가 자연치유력을 지녔다고 믿는 그이다. 철따라 직접 산에 올라 뜯어온 산야채로 약초밥상을 차리고 있다. 그이가 내준 꽃차 한 잔에 마음속까지 따뜻해진다.
면사무소가 있던 자리를 지나 다시 돌담길을 따라 뉘엿뉘엿 걷는다. 그 길에 옛 정취가 넘실대고 있다. 옛적 고향마을 같다. 돌담도 격이 다르다.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그 돌담이 3600m에 이른다. 쌀엿, 한과, 된장 등 슬로푸드와 함께 창평을 슬로시티로 만든 일등공신이다.
고재환가옥으로 가는 길목에도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다. 돌담을 부둥켜안고 있는 담쟁이덩굴에 마음이 애틋해진다. 왼편으로는 솟을대문이 압권인 고정주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옛집의 고풍스러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민속자료로 지정돼 있는 고택들이다.
빈도림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의 생활공방으로 활용되고 있는 고재욱가옥으로 간다. 파란 눈의 독일인 베르너 삿세와 빈도림이 연이어 살면서 널리 알려진 고택이다. 하지만 대덕 옥천골로 옮겨가고 비어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다시 돌담길에 섰다. 돌담이 오래된 집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다. 쉬엄쉬엄 걸으면서 보니 더 매력적이다. 돌담 안으로 쌀엿을 만드는 집이 보인다. 슬로시티추진위원장을 맡았던 송희용 씨네다.
좁은 방안에서 아낙네들이 마주보고 앉아 갱엿을 잡고 밀고 당기기를 하고 있다. 이들의 밀당에 한 덩어리였던 갱엿이 양쪽으로 쭉쭉 늘어진다. 그 사이 한 할머니가 방문을 툭 밀어 젖힌다. 찬 기운이 느껴질 틈도 없이 바로 문이 다시 닫혀진다. 문을 열고 닫기도 정해진 틀에서 되풀이된다.
"엿을 왜 엿이라고 하는지 아요?"
"…. 글쎄요."
"여시 같다고 해서 엿이라요. 방금 문 연거 봤지라. 찬바람을 사람덜이 느끼기 전에 엿이 먼저 알아라. 여시같이. 그래서 엿이여. 이 바람이 엿을 늘여주고, 굵게도 해주고, 맛도 낸다요."
송씨 어머니(김정순)의 말이 재밌다. 화로 위의 물수건에서 묻어나는 수증기는 엿을 부풀린다. 주황색의 갱엿이 하얗게 변하면서 엿의 모양도 갖춰간다. 엿 속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것도 이때다.
삼지내마을을 뒤로 하고 방향을 월봉산 자락으로 잡는다. 산 중턱에 자리한 상월정(上月亭)으로 가기 위해서다. 남극루에서 3㎞ 가량 떨어져 있는 곳이다. 싸목싸목 걸어도 2시간이면 거뜬한 거리다.
삼지내마을 건너편, 달뫼미술관 앞으로 난 길을 따라간다. 하소천을 끼고 용운마을을 거쳐 용운저수지로 가는 길이다. 돌담길은 이 마을에도 많다. 길옆으로 하얗게 펼쳐진 들녘이 넓다. 쌀엿의 재료가 되는 창평쌀의 생산지다. 뒤로 보이는 삼지내마을의 설경도 아름답다.
용운제 둔치에 올라보니 저수지 물속으로 월봉산의 능선이 들어앉아 있다. 그 풍경이 멋스럽다. 여기서부터는 산길로 이어진다. 개울 위에 걸쳐진 나무다리도 건너지만 길은 그리 험하지 않다. 싸목싸목 걷다보면 금방이다.
상월정은 풍류를 노래하던 누정이 아니다.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 학숙이다. 이런저런 생각 다 떨치고 와서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는, 요즘말로 산속 고시원이었다. 호젓한 산속에서 잠시 옛사람의 마음가짐을 흉내 내보며 혼자 웃는다. 돌담길과 마을길, 산길을 번갈아 걸은 것도 흐뭇하다.
여행전문 시민기자ㆍ전남도 대변인실
가는 길
호남고속국도 창평나들목으로 나가 좌회전하면 바로 삼지내마을이다. 국립 5ㆍ18민주묘지 입구에서 고서ㆍ창평방면으로 10분 정도만 가도 창평나들목에 닿는다.
먹을 곳
가마솥에 끓인 진한 국물을 뚝배기에 담아내는 창평국밥이 맛있다. 누린내도 없다. 창평국밥거리의 원조창평시장국밥(383-4424), 전통창평국밥(381-8253), 황토방국밥(381-7159)이 소문 나 있다. 전통의 손두부와 청국장은 창평전통안두부(383-9288), 오리고기는 갑을원(381-6886)을 알아준다. 광주댐 부근의 들풀식당(381-7370)은 산채정식, 절라도(381-4744)는 대통정식과 떡갈비정식이 맛있다.
묵을 곳
마을에 깔끔한 민박집이 많다. 여행객들이 한옥에서(382-3832), 매화나무집(381-7130), 슬로시티(382-8115), 삼지천(383-1039), 삼지내황토(382-8372), 담양한옥(383-8283)을 많이 찾는다. 소나무언덕(382-8171)은 고씨 종손이 운영하고 있다. 담양읍에 있는 명가혜(383-6015)와 소소선방(381-0701)도 좋다.
가볼 곳
명옥헌원림이 가깝다. 늦여름 진분홍색의 배롱나무 꽃으로 황홀경을 연출하는 곳이다. 설경이 아름답다. 고서면에 있는 창평향교도 고즈넉하다. 옛 우물이 그대로 있다. 두레박으로 직접 물을 떠 올려 마실 수 있다.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도 지척이다. 환벽당 옆 광주호 호수공원도 좋다. 담양읍내 죽녹원과 관방제림,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은 겨울에도 환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