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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떠돌이 화가
a, 짧은 여름 밤의 꿈
파리만 날리던 전시가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인야에게는 예기치 못한 엉뚱한 사건 하나가 찾아왔다.
이틀 전 금요일이었다.
아담하고 아름다운 한국 수녀원 건물을 설계했던 에두아르도 씨가 다시 전시장을 찾아왔다.
그는 인야의 작품을 눈여겨보며 멕시코시티 북부에 있는 다른 대학 전시실에서의 차기 전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수녀원을 오가며 알게 된 이래 줄곧 전시를 언급해오던 그였지만, 인야로서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전시조차 작품이 팔리기는커녕 찾아오는 이도 거의 없는 실패작이나 다름없는데, 빈털터리나 마찬가지인 처지에 또 다른 전시를 꿈꾸는 것은 현실성 없는 환상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두아르도씨와 구체적인 의견을 조율하며 반신반의하던 그때, 사람 하나가 전시장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멀리서부터 천천히 걸어온 것처럼 아련한 모습이었다.
벽화 답사 수업 때 낯을 익힌, 아담하고 귀여운 아가씨였다.
구면이었기에 인야는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인야가 대화를 마칠 때까지 조용히 혼자 그림을 감상했다.
10분쯤 뒤 에두아르도씨가 떠나자 자연스럽게 그녀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인야가 이름을 묻자 그녀는 수줍은 듯 짧게 대답했다.
"루스(Luz)요."
'흠, ‘빛’(스페인어로 Luz는 '빛'이란 뜻도 되면서, 이름으로도 쓰여진다.)이라니, 이름도 좋고 이쁘구나!' 하면서 인야는 그녀에게,
"이렇게 전시장에 찾아줘서 고맙다!"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그런데 역시 다소곳하면서도 약간 수줍어 하는 듯한 그녀에게 전시 작품을 안내도 하다가, 어쩐지 끌리는 느낌이어서(왠지, 그녀가 그림만을 보러 전시장에 찾아온 건 아닐 거라는 느낌에),
"우리, 밖에 나가 조금 걸을까?" 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와 전시장을 나와 '소깔로(Zocalo)' 광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근데, 이 아이가 왜 나를 찾아왔을까?' 하는 생각이었고, 기분이 묘했다.
그렇게 광장 주변을 걷다가 그늘 쪽에 잠깐 앉아서 얘기를 하다 보니,
인야는 그녀가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벽화에도 관심이 많고, 시내 중심에 있는 한 변호사 사무실에서 비서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집은 광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 등등을 알게 되었다.
어차피 전시장에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다음 월요일에 점심 약속을 하는 것으로 헤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약간 들뜬 마음으로 전시장으로 돌아왔는데......
7월의 첫날, 루스는 약속한 시간에 맞춰 전시장에 나타났다.
갓 스물을 넘긴 풋풋하고 청순한 아가씨와의 식사 자리는 서먹하면서도 묘하게 떨렸다. 후식을 먹던 루스가 갑자기,
"수저가 떨리네......" 하고 혼잣말을 했다.
긴장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인야가,
"나 때문에?" 하고 물으니, 그렇다는 것이었다.
"풋!" 하고 인야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식당에서 나와 길을 걸었는데,
"오후에는 뭘 할 거냐?"고 인야가 물었다.
"학교에 가 볼 일이 있어요."
그렇잖아도 전시하느라 요즘 통 학교에 발걸음을 못하고 있던 인야가,
"나도 학교 상황도 점검해야 하는데, 그럼, 같이 갈까?" 하면서 함께 버스를 타기 위해 가는데,
"전시하는 화가에게 무슨 선물을 해야 하나요?" 하고 그녀가 물었다.
"무슨, 선물? 그러지 말고 너는, 나에게 '빛'을 선물해라! 하 하 하......" 하고 크게 웃었다.
그녀의 이름이 바로 '빛'이란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둘이 함께 들른 벽화 실기실에는 삐메가 침울한 표정으로 라디오를 만지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고, 삐메는 처음엔 '이게 무슨 일인가'하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그 아이를 살펴 보면서는(둘도 아는 사이였다. 어차피 벽화 답사 때도 같이 갔던 사이이까.) 다시 놀라는 눈치였다.
"삐메, 요즘 실기실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어?" 하고 인야가 멋쩍게 물으니,
"어차피 방학인데, 더구나 인야 너도 없는데... 이렇게 한가할 뿐이야......" 하는 엉뚱한 얘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삐메의 인야를 향한 음흉한 웃음 속에는 지금의 인야 상황을 꿰뚫어본 게 분명했다.
그런데 실기실엔, 인야가 전에 사다가 그림까지 그려 전시 중인 '제왕 오랑캐꽃'이 만개한 상태로 그 새빨간 색을 맘껏 발산하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꽃이 피었다지?" 하면서, "넌, 주인도 없는데 혼자서 이렇게 피어 있었냐?" 하고 인야가 다소 들뜬 기분으로 말을 하자,
"왜, 혼자야? 내가 있었는데!" 하고 다소 뚱하게 삐메가 대꾸했다.
"삐메 니가 사람 같지가 않은가 보지, 뭐. 그러니 얘가 나에게 외롭다고 '텔레파시'를 보내서, 이렇게 내가 온 거 아냐?" 하고 인야가 둘러대자,
그들 둘 다 뻥 터지고 말았다.
7월 1일, 인야는 그렇게 '빛'을 만났고 꽃을 맞았다.
하지만 현실의 무게는 여전히 차가웠다.
다음 날 아침, 한국의 형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시 팜플렛을 받았다고, 돈도 없을 텐데 무슨 전시까지 하느냐고, 전시 성과는 어떠냐고... 물어왔다.
물론 형은 모든 게 너무 궁금했을 터였다.
그렇지만 인야의 입장에서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 이럴 바엔... 그러니까 전시가 이렇게 돌아갈 줄 알았다면, 차라리 아예 전시 카탈로그마저 보내지 않았던 게 나았을 걸......' 하는 생각이면서도, 말로는,
"벌 거 아녜요. 그래서 미리 알리지 않은 거니, 그저 조용히 식구들끼리만 알고 계세요......" 하는 식으로 말해주었을 뿐이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몸이 좋질 않으신가 보았다.
그래서 인야는,
"내일 내가 어머니께 전화드리지요."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그날은 전시장에 가는 대신 학교로 향했다.
실기실 문을 인야가 열고(삐메는 나중에 도착했다.) 캔버스 하나를 짜고 그림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만 해도, '빛'은 세 번이나 벽화 실기실에 나타났다.
처음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자기네 수업이 교수의 부재로 내일로 연기 되어, 일하러 가야 된다고 했고,
두 번째는, 일하러 가려는데 교수가 나타나 수업이 정상적으로 진행 될 거라 했고,
수업이 끝난 뒤에도 마치 보고라도 하려는 듯 인야를 보러 왔다는 것이었다.
‘조그만 소녀’인 '빛'이 더욱 앳되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삐메가 기어코 독설을 내뱉었다.
"인야, 너 도둑놈인 거 알아? 아주 어린 여자애하고 바람나서 좋아 죽네."
그렇지만 인야는 그의 놀림도 감내를 해야만 했는데,
어차피 그녀의 수업이 끝난 데다 인야 역시 전시장에는 들러야 해서, 그녀와 함께 실기실을 나와 버스에 올랐다.
둘은 하룻사이에 많이 가까워진 상태로 여러 얘기를 나누었는데, '소깔로' 광장에 다다르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임시 우의를 하나씩 사서 걸치고, 전시장 앞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는 헤어졌다.
전시장 입구엔 뭔가 시험이 있다며, 사람들이 가득 찬 상태로 슬라이드인지 비디오인지를 보고 있었다.
그래도 인야의 전시장은 텅 비어 있었다.
한숨이 아니 나올 수 없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이내 물을 쏟아붓듯 내리는 것이었다.
우박도 섞여 있었는데, 대학 본부는 순식간에 군데군데 물이 넘치고도 있었다.
멕시코의 비가 그렇다는 걸 얘기로만 들었었는데, 인야는 그 실체를 본 것이다.
씁쓸한 기분으로 전시장을 나와, 인야는 '댄스 교습소'에 가서 수업을 받았다.
그런데 인야는 운동신경이 없어서겠지만, 지난 주에 배운 것도 잊은 상태였고...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몸놀림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오히려 강사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기왕에 배울 거면 좋은 학생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도 미안한 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인야는 어머니와 통화했다.
밥이랑 잘 먹고 지내냐고, 그림은 혹시 팔았느냐고......
인야는 거짓말은 할 수 없어서, 몸은 건강한데 그림은 못 팔았다고 솔직하게 대답해 드렸다. 그러면서,
"원래 그림을 팔려고 전시를 한 건 아닙니다, 어머니......" 하는 약간의 거짓말도 했다.
그래야 어머니께서 조금이라도 걱정을 덜 하실 것 같아서.
그 길로 학교에 갔지만, 아무 것도 하기가 싫어... 그냥 빈둥거리기만 했다.
학교 행정실에 들렀던 교수가 오더니,
"인야, 전시는 어때? 그림은 몇 점이나 팔았냐?"고 물었다.
인야는,
"노(No)!"란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자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교수는,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어떻게 해? 니 스스로 나서서 그림을 팔아야 하지 않아?" 하고 나무라듯 말을 하더니, "인야, 가만히 보니, 너는 작품은 죽자사자 열심히 하던데, 그런 쪽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아, 안 그래?" 하고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인야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뭔가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아,
"나는 그림을 팔 방법을 몰라요......" 하자,
"그걸 누가 알려 줘? 그래도,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만나고 하면서......" 하다간, "허긴, 여기 멕시코도 요즘 경제도 안 좋고, 그림 시장은 영 말이 아니라서......" 하는 식으로 안타까움만을 비추다 교수는 돌아갔다.
그러다가 삐메에게 수지침을 맞게 해주려고 수녀원에 데리고 갔다.
어차피 홍씨와도 알게 된 상황이라, 그리고 홍씨도 머잖아 학교에 등록할 예정이라... 겸사겸사 인사도 시킬 겸 데려갔던 것이다.
그렇게 수녀원에서 나온 다음, 삐메가 집에 가는 길에 인야도 그 쪽으로 함께 가면서 '춤 교습소'에 들렀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이 흥이 나질 않는데 춤이 잘 될 리가 없었다.
다음 날도 아침에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차 한 대가 인야 앞에 섰다. 그래서 보니, 학교 행정실에 근무하는 비서였고, 인야더러 차에 타라고 했다.
그 차를 타고 학교에 갔는데, '알폰소(Alfonso)'가 실기실까지 찾아와 전에 얘기했던 비평가 한 사람을 소개시켜주겠다며 그의 전화번호를 가져왔다.
어쩐지 하루의 시작이 기분 좋은 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전시장에 나가 가뭄에 콩 나듯 한두 사람이 왔다가는 모습을 둘러보다가,
루스가 와서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그녀가 인야에게 뭔가 비죽이 내밀어서 보니, '기타 줄'이었다.
그러니까 며칠 전 인야의 그림 '기타 치는 사람'에 대해 얘길 하다가,
"인야, 기타 칠 줄 알아요?" 하고 그녀가 물었고,
"그럼, 칠 줄도 모르면서 그림을 그렸겠냐?" 하고 인야가 웃으면서, "근데, 얼마 전에 줄 하나가 끊어져서 요즘에는 못 치고 있어......" 했던 말에 대한 반응이었던 것이다.
인야는,
'어린 것이, 마음은 깊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두 사람은 '국립궁(Palacio Nacional)' 정부 청사에 가서 리베라 벽화를 보았다.
그런 뒤 다시 전시장에 들렀는데, 인야는 가지고 다니던 녹음 테잎의 음악을 틀어보고 싶어 카세트를 틀었다.
그러자 전시장의 분위기가 썩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루스는 피아노(전시장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았고,
그런데 그 때 전시장을 지키는 사람이 눈치없게 자기 자리는 비워놓고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더니, 계속 주변을 맴돌기에... 인야는 음악을 바꾸러 카셋 있는 쪽으로 갔는데, 그가 루스와 뭔가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었다.
그렇게 인야는 조금 떨어진 채, 그랜드 피아노 뒤 쪽 조각상 받침대에 앉아 그와 얘기하는 루스를 응시하게 되었는데,
'참 이쁘네!' 하고 있었다.
때를 같이 해, 인야가 방금 튼 트럼펫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는, 누군가와 얘길 나누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이뻐보이는 것이었다.
또 부인 둘이 전시장으로 들어왔다가 한 바퀴를 돌며 나가는데, 인야가 카탈로그 한 부씩을 건네주려고 따라가다가...
얼른 피아노 윗 부분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인야를 바라보았고,
"너, 참 이쁘다!(Eres muy guapa!)" 하고 인야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놀라면서도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면서 웃었다.
그렇게 몇 곡의 트럼펫 음악이 끝난 뒤, 둘은 밖으로 나왔다.
빗방울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가져온 빠알간 우산을 쓰고 둘은 '소깔로' 광장을 향해 걸으며 얘기를 나누었다.
인야가 그녀에게 자신의 얘기를 했다.
"너를 처음 봤을 때, 어쩐지 니가 이뻤었다. 그렇지만 그러려니 했다. 세상을 살면서 어느 날 우연히 마음에 드는 사람을 길에서 스친 것처럼...... 그런데 벽화과정이 끝날 무렵, 벽화 답사의 사흘 일정에 매일 니가 나타난 걸 나는 반기고 있었다. 말수가 적고 아담하고 이쁜 니가 며칠 동안 내 마음을 끌었었다. 그렇지만 난 너에게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길을 가다 우연히 이쁜 여자 애를 본 것처럼, '이쁘구나!' 했을 뿐이다. 그러다 니가 내 전시 오프닝에 나타났지만, 내가 경황이 없었고 또 정신을 차려 보니 넌 없었고, 그래서 그걸로 끝이리라 여겼다. 그런데 또 하루, 내가 전시장에서 다른 사람(Eduardo씨)과 얘기하고 있던 중, 넌 전시장에 홀연히 나타났다. 마치 꿈처럼......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무슨 꿈처럼...... 그 날에야 나는 니 이름을 알 수 있었고, 너와 개인적으로 말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인야의 얘기를 들으면서 루스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인야는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전달하고 싶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난 니가 이쁘다. 그리고 좋다. 그러나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전시회 카탈로그를 통해), 내 나이가 마흔(우리 한국 나이론 마흔 하나)이니, 우리의 나이 차이가 너무 크다. 그게 나에겐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내가 널 일부러 꼬신 건 아니지만(인야는 조심스럽기만 했다.), 사람들은 날더러 '날강도'라고 하잖겠냐? 근데, 넌, 한 외국인을, 그것도 20년이나 나이가 많은, 나 같은 동양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냐?"
루스는 바로 답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인야가 말하는 사이에 자신도 사이사이 몇 마디를 하긴 했는데,
자기도 조금 겁이 난다고, 그러나 모든 건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그렇지만 두 살 위인 언니한테 둘의 관계 얘길 했더니, 언니도 걱정하고 있다고......
'소깔로' 광장에 있는, 인야가 살아오면서 본 제일 큰 이 세상의 국기의 '하강식'이 끝났고,
빗방울은 여전히 이어졌고, 두 사람은 광장 한 곳에 서 있었는데,
갑자기 루스가,
“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Me encantas!)” 하는 거 아닌가. 팔짱까지 끼면서.
그러면서 인야에게 온몸으로 전달되어 퍼지던, 뭔가 아늑하고 설레는 듯한 감정,
그렇게 '소깔로'광장에서 둘은 한 단계 발전한 모습으로의 ‘예비 연인’(?)이 되었다.
빗방울이 굵어져서 지하도로 들어갔다.
인야는 자신의 가방에 있던 비닐우의를 그녀에게 씌어주었고,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을 주시하기도 했으며,
빠알간 우산을 둘이 같이 쓰고 지하도를 나와 비가 내리는 소깔로 주변을 걸었다.
그 순간, 인야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국립궁(Palacio Nacional)' 벽쪽에 비를 피해 서서 빨간 우산 속의 동양인과 조그만 아가씨의 데이트를 쳐다보는 무수한 시선과, 빗방울, 빗방울......
그녀의 '소깔로'에서 가까운 집에 바래다 주고 인야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자신이 마치 뜬구름 같았다.
결국 삐메가 인야를 잡고 늘어졌다. 그 음흉하고 가슴치레한 눈으로,
"안야, 그동안 내내 학교 실기실에서 '마이떼'가 너 좋다고 난리를 칠 때는 관심조차 갖지 않더니, 걔는 맘에 드는가보지?" 하며 입술을 실룩거리며 물었다.
인야가 고개를 휙 돌려 보니, 평소 그가 음흉한 소리를 할 때 짓는 입표정이기도 해서, 그리고 뭔가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이자 그렇다고 뭐 특별히 대꾸할 말도 없고 해서, 어깨만 들썩이자,
"목석 같던 인야도 요즘, 드디어 바람이 났네, 바람이... 아주 어린 여자애 하고... 히 히 히......"
그가 무슨 호재라도 만난 듯 신이나서, 의뭉스런 웃음을 멈추지 않는 것도 모자라, 아예 인야의 어깨를 다독이는 것이었다. 마치 아랫사람 어르 듯.
"시끄러! 지금 전시 때문에 코가 석자나 빠져있는 사람을... 그렇게 놀려도 돼?" 하고 인야가 딴청을 부리려 하자,
"웬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게 '전시'하고 무슨 상관인데?" 하면서, "지금, 오리발 내밀고 싶은 거지?" 하기에,
"내가 니들 멕시코 사람 같은 줄 알아?" 하고 되레 큰소리를 치자,
"아이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지? 그런 사람이 어리디 어린 여자애하고 그렇게 좋아 죽어? 히히덕 대면서?" 하고 아예 콧방귀를 뀌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인야가 그저 당하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삐메, 혹시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니가 이런 식으로 나를 몰아세울 수는 없지. 여자들, 그것도 젊은 여자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건 바로 너잖아? 어따 대고 큰 소리야, 지금?" 하고 인상을 쓰자,
"아이고, 그런 너는, 너는?" 하고 윙크를 하듯 한 쪽 눈을 살짝 움직이면서, "생전 여자하고는 말도 안 걸 것처럼 내숭을 떨더니, 어느새 그렇게 확 변해가지고... 이쁘고 어린 여자가 좋긴 했던가보지? 히 히 히 히... 그러면서, 무슨 오리발?" 하고 다시 옆구리까지 찌르니,
"됐어, 됐어! 이제, 그만!" 하고 인야가 인상을 썼는데,
"인야, 일루 와 봐..." 하더니, "니네 같은 경우를 보고,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바로, ‘마흔 살과 스무 살(Cuarenta y Veinte)’이라는 거야, 알아? 여기 '호세 호세(José José)가 부르는 노래 제목 말야..." 하더니,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멘띠라스 손 또다스 멘띠라스(Mentiras son todas mentiras)~" 하는......
"뭐어?" 하고 인야가 관심을 보이자,
"이런 노래가 있다니까! 바로 니 얘기야! 그러니까 마흔 살 남자와 스무 살 어린 여자의 사랑..."하니,
"'사랑'은 무슨...." 하다간, "뭐야? 그런 노래도 있다고?" 하고 인야가 놀라자,
삐메는 다시,
Mentiras son todas mentiras
Cosas que dice la gente
Decir que este amor es prohibido
Que tengo 40 y tu 20
하고 느물느물 노래 한 대목을 불렀다. 아주 인야를 놀리는 표정과 몸짓으로.
물론 인야는 잔뜩 호기심에 젖어 그 노래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인야 역시 좋아하던 그 가수의 다른 노래(Llora Corazon)와는 리듬이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멜로디는 싫지 않았고, 척 듣기에도,
거짓말이야, 모두가 거짓말.
사람들이
내 마흔 살 너 스무 살의 사랑을
'금지된 사랑'이라고 하는 건.
하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그 노래의 노랫말 자체에도, 세상 사람들이 인정을 하지 않으려 하는 스무 살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랑 얘기에 대한, 장본인의 하소연 겸 합리화(?)시키려는 의미의 노래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능글맞은 삐메의 몸짓과 표정과 너무 잘 어울리는 것 같은 멜로디에 목소리까지가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인야에게는 소름까지 돋는 기분이어서,
'아니, 이게 사실인가?' 하는 생각이 아니 들 수가 없었다.
'가뜩이나 지금 내가 처한 상황도 미심쩍기만 한데,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노래까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지,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삐메가 지금 내 앞에서 직접 그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겠지만, 그렇다면, 내가 '멕시코'라는 나라에 와 있는데, 무슨 이유로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일이 생겨 있는지......'
갑자기 인야의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 같았다.
그러면서 삐메는 또 유들유들,
"인야, 니가 여기 멕시코에 와서 죽도록 일만 하더니... 그런데 또, 춤을 배운다나 어쩐다나 하더니... 또 어떻게 그토록 빠르고 정확하게 멕시코 문화를 흡수해나가는지, 신기하잖냐?" 하면서는, "니가 '선구자'다, 선구자! 우 히 히 히......" 웃어젖히는 것이었다.
"뭐야? 나는 그런 거 몰랐어! 그 노래도 지금 처음 듣는 거고...... 그게 진짜인지 니가 꾸며서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공박을 가하니,
"너는, 내 말을 도대체 믿으려 들지를 않아! 이렇게 노래까지 불러줘도?" 하고 의외로 인상까지 쓰면서, "모르고 알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니가 지금 이 노래 가사와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거야, 안 그래? 도둑놈! 바로 인야 너도 도둑놈이 돼 있다는 거야." 하고 눈에 힘을 주고 바라 보니,
딱히 인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인야는 그 순간,
"근데, 이게 어디 나만 그래? 너도 그러잖아? 맨날, 아가씨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면서, '세뇨리따, 세뇨리따~' 하잖아?" 하면서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푸 후후.." 웃었고,
"그래서 여기가 멕시코 아니겠어? 히 히 히 히......" 하고 삐메가 실눈을 뜨는 걸로,
'그렇다면.... 아, 나도 여기 멕시코 식의 '도둑놈 클럽'에 가입이라도 된 기분이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결코 영광스럽지만은 않은, 그런데 인야로서는 결코 웃어넘길 수만도 없는... 사랑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 근데, 왜 이런 상황이 돼 있다지? 스페인에선 열 다섯 살 차이 '끌라우디아'와 그랬는데, 얘(Luz)하고는 스물 하나?' 뭔가 싸한 느낌이면서 인야 스스로도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일부러 어린여자들만 찾는 사람도 아닌데,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고 있다지?'
사실 인야는 불안했다.
좋다기 보다는, 뭔가 이상하게(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듯한) 돌아간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학교 한복판에 있는 행정실에 다녀왔던 삐메가,
"인야, 이거 한 번 읽어 봐!" 하면서 내민 건 바로, 그 노래 가사였다.
'호세 호세(José José)의 꽈렌따 이 베인떼(Cuarenta y Veinte)'.
인야는 우선,
'이놈의 나라는, 쓸 데 없이 이런 엉뚱한 것만 발달해 있는 거 같어......'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읽어 보니,
(위에 나온 부분 생략)
인생에서 나는 가을이라면, 너는 달콤한 봄인데,
사람들은 내가 '여름'이란 재산을 간직하고 있다는 걸 몰라,
내가 너를 바라볼 때 너를 불타오르게 하는...
나는 마흔 살 너는 스무 살.
나는 마흔 살 너는 스무 살.
사랑은 다른 사람들의 말이 중요한 게 아니고
당사자들이 더 중요해
나는 마흔 살 너는 스무 살.
나는 마흔 살 너는 스무 살.
.
.
.
하는 내용으로 뒤로도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인야는 정말, 그런 노래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이었고, 수긍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참, 말도 잘 갖다 붙인다!' 하면서도,
'아, 나도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잠을 다시 이룰 수 없어서 이어폰을 귀에 꼽은 채 음악에 빠져 있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가 왔나 보았다.
그래서 받아 보니 스페인의 '누리아'였다.
인야의 전시 카탈로그를 받았다고, 그림은 팔았냐고......
그렇게 누리아는 늘 인야의 큰누님처럼 챙기곤 했다.
전화를 끊고 멍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K씨 전화를 받았다.
아직도 시차적응을 못했고 몸이 좋질 않지만, 다음 날 비행기로 멕시코시티로 인야를(전시회) 보러 오겠다는 것이었다.
인야는 아침 일찍 전시장으로 갔다.
평론하는 교수가 들른다기에 오전 내내 기다렸으나 나타나지 않아, 몇 시간 동안 몇몇 이들이 잠시 들렀다 가는 전시장에서 역시 오늘도 비참함을 느끼고 삭이기를 반복하다가,
루스가 와서 같이 밖으로 나왔다.
'루스'라는 빛이 찾아왔음에도 전시장은 연일 실패의 그늘이 짙어만 갔다.
학교 전시실을 빌려 쓰는 탓에 주말이면 문까지 닫혔고, 인야는 텅 빈 전시장보다 더 텅 빈 자신의 통장을 마주해야 했다.
이제 전시도 막바지였다.
인야는 더 늦기 전에, 그러니까 삐메에게 선물할 '꼴촌(메트리스)' 살 돈마저 바닥나기 전에 마음먹은 일을 실행하기로 했다.
그림이 단 한 점이라도 팔렸더라면 그럴싸한 선물을 하며 생색이라도 내려 했지만, 당장 길거리로 나앉을 처지인 인야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인야는 그동안 삐메의 집을 드나들며 눈여겨본 게 하나 있었다.
키는 자신보다 조금 작지만 덩치는 커서 몸무게는 훨씬 많이 나갈 삐메가, 침대도 없이 맨바닥에 깔고 자는 메트리스(꼴촌)가 어찌나 눌렸는지... 여차하면 구멍이 날 정도로 푹 꺼져 있었던 것을.
그래서,
"삐메, 너도 잘 알다시피... 내가 이번 전시에 돈만 많이 썼지, 단 한 푼도 못 건졌잖아?" 하자,
삐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인야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내가 이번 전시를 끝내면서, 너에게... 그동안의 고마움의 표시로, 뭔가 선물을 하나 하려고 했었거든?" 하자, 삐메는 약간 당황스런 기색으로,
"그, 그게 무슨 소리야?" 하고 말까지 더듬었다.
"말 그대로야. 그동안 너한테 많은 것을 배웠고, 학교 생활도 충실하게 할 수 있었던 건 물론 전시까지 하게 돼서, 나는 늘 너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이번 전시에서 뭔가 좀 풀리면... 너에게 좋은 선물을 하나 하려고 했었는데......" 하면서 그의 눈치를 살피자,
"나야, 뭐... 내 할 일을 했을 뿐인데......" 하고 이제는 삐메가 인야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니가 봤다시피, 이번 내 전시가 실패 그 자체잖아?"
"그림 값을 너무 비싸게 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하고 삐메가 역공을 하듯 물었다.
그동안 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얘기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인야는 침착하게,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래서... 너도 알다시피, 나는 수입없이 살고 있기도 하고, 이젠 한국에서 가져온 돈도 다 떨어져 가니...... 그래도 최소한, 뭔가 내 마음의 선물은 하나 해주고 싶은데......" 하자,
"돈도 없으면서, 무슨 선물?" 하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인야를 바라보았는데,
인야는 가방 옆 주머니에서 준비했던 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거, 얼마 안 되는 돈인데, 내가 보니... 삐메 니 꼴촌(메트리스)이 거의 빵꾸날 수준이어서... 내 생각으론(어떻게 쓰든 자기 맘대로겠지만), 니가 이 돈으로 꼴촌 하나를 새 것으로 사서, 잠이라도 좀 편히 잤으면 해......" 하자,
삐메는 당황한 듯 말도 못하고 있었는데,
"삐메, 어차피 나는 곧,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나올 거고, 당분간 어딘가 바닷가로 떠날 생각이거든? 그러기 전에 너에게 이 조그만 선물이라도 하는 거야......" 하자,
그제야 삐메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이었다.
"미안해, 삐메! 더 좋은 선물을 해줬어야 했는데, 이건 너무 보잘 것 없어서...... 그리고 그동안 날 위해서 애쓴 것 너무 고맙다!" 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에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공짜를 좋아하는 멕시코인답게 봉투를 덥썩 받아들였다.
미안해하는 인야를 뒤로하고 삐메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면서 금세 태도가 달라지더니, 인야가 오디오로 살사 음악을 녹음하는 동안, 그는 신이 나서 콧노래까지 부르며 엉덩이를 실룩거렸다. 젊은 여자라도 만나러 가려는지 꽃단장에 여념이 없는 그를 보며 인야는 헛웃음이 났다.
순진한 건지 철이 없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인야는 아무 말 없이 그 집을 나와 댄스 교습소로 향했다.
'저 삐메처럼 세상일 다 잊고 푼수처럼 춤을 출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면서.
이틀 사이에 과달라하라에 있던 K씨가 왔다 돌아갔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라 인야는 일기마저 쓰지 못했고, 루스에게는 손님 핑계를 대고 다음 주에나 만나기로 했기에, 잠시 그녀를 잊고 친구와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인야는 K씨에게 삐메를 소개하고 싶었고, 삐메에게도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하는 친구 K씨를 보여주고 싶었다.
K씨가 도착하자마자 곧장 삐메의 집으로 향했다.
인야의 중간 역할이 무색할 정도로 그들은 금세 어울렸다. 삐메의 집 특유의 흥겨운 음악과 웃음 속에 시간을 보내다 오후가 되어 출출해질 무렵, 셋은 택시를 타고 유명한 야외 '따께리아'로 향했다.
평소 따꼬를 그리 좋아하지 않던 인야였지만, 그날 밤의 분위기와 맛은 각별했다.
떼낄라를 몇 잔씩 들이키며 밤늦도록 이어지던 그 술자리는 인야가 멕시코에서 가졌던 가장 기억에 남고 행복했던 술자리였다.
K씨의 유창한 스페인어 덕분에 인야는 통역의 의무감 없이 하고 싶은 말만 하며 온전히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삐메와 미리 밀약을 맺어 루스의 존재를 K씨에게 숨겼던 터라, 묘한 공범 의식 속에 번지는 야릇한 미소도 술맛을 돋웠다.
밤늦게 K씨와 집으로 돌아와 함께 자고, 월요일에 다시 문을 연 전시장으로 가 자신의 전시를 보여준 뒤 K씨는 일정을 마치고 다시 과달라하라로 돌아갔다.
K씨를 버스 터미널까지 바래다주는 길, 그는 뼈 있는 조언을 남겼다.
"이 형! 앞으로 멕시코 사람들과 일할 때는 이번 전시처럼 돈을 선불로 주면 안 돼요. 돈만 받고 배 째라며 일을 안 한다니까요. 단계별로 확인하며 찔끔찔끔 나눠 지불하라고 과달라하라 친구들이 펄쩍 뛰며 조언을 하더라고요."
한국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지인들이 많은 이곳 멕시코로 삶의 터전을 옮길지도 모른다는 K씨.
스페인에서의 인연이 멕시코까지 이어진 것이 인야에게는 더없이 반갑고 소중했다.
하지만 K씨를 보내고 돌아온 전시장은 여전히 찬바람만 불었다.
비참함은 다시 인야의 몫이었다.
이제 전시도, 이 집에서의 생활도 일주일뿐이었다.
전시를 끝내고 바닷가로 떠나려 하는 인야는,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신세로 전락할 상황인데도... 이상하게 마음은 태평했다.
그런데 만 사흘 만에 인야가 만난 조그만 아가씨 루스가 이상해져 있었다.
전화를 걸어도 사무실에 없었고, 어렵게 연결된 목소리는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나타난 그녀에게 무슨 일이냐 물어도 아무 일 아니라는 대답뿐이었다. 점심조차 거부한 그녀와 국립박물관 복도 벤치에 앉았는데, 인야는 뭔가 껍데기와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그녀가 자청해서 얘기를 시작했다.
자기는 멕시코를 떠나기 싫다고, 다른 여자처럼 그저 결혼해서 애낳고 남편만 따라다니면서 살기는 싫다고......
'얘가 왜 이런다지?'
인야는 실망과 함께 놀라움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번엔 인야가 그녀에게 말을 했다.
"누가 너한테 니 일 다 집어치우고 나만 바라보고 살자고 했냐? 아직 그런 얘긴 꺼내지도 않았지만, 만약 그렇더라도 난 그 반대다. 니 할 일을 하고, 나는 내 할 일을 하고, 니 하고 싶은 일을 내가 도울 수 있으면 도와주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아직 어린 니가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거 아니냐? 어쩌면 지나치리만치...... 그래, 니 말대로, 설사 너와 어떻게 돼서 결혼까지 한다고 해도, 나는 멕시코에 남아 있을 사람이 아니다. 애당초 나는 여기 멕시코에 살 생각으로 온 사람이 아닌, 잠시 들렀다 떠날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그런 나를 감안해서 니가 천천히 생각해 보고 결정을 내리면 될 것인데, 왜 벌써부터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두면서 혼자 고민을 했단 말이냐? 글쎄, 사람 일이란 모르기 때문에, 설사 우리가 어떻게 된다 해도 이런저런 해결해 나가야 할 일들이 많겠지만, 그건 서로가 상의해 가면서 해결점을 찾아야 할 건 너무나 당연하겠는데, 우리가 서로 미치도록 좋아한다면, 모든 걸 걸고 사랑한다면 어떻게든 그런 문제는 해쳐나갈 수 있겠지만, 아직 우리는 그런 단계까지는 아니고(너나 나나 마찬가지로), 어린 너는 그저 니 마음 가는 대로 순수함을 유지한다면, 그게 더 아름다운 일 같은데... 그러면 이렇게 니가 벌써부터 그런 복잡한 것까지 마음에 두면서 심각해질 일 없이, 나머지는 나이가 많은 내가 처리를 해나갈 텐데, 아무렴 너는 나를 그리 무책임한 사람으로 본단 말이냐? 그 흔한 너희 멕시코 남자들처럼?
아니다, 무엇보다도 책임감이 강한 난, 너에게 못된 짓을 하고 떠날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너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도 아니지만, 좌우간 뭐가 그리 바빠 이렇게 빨리 홱 니 태도가 바뀌어 있단 말이냐? 난, 너무 빨리 일어난 니 감정의 변화에 놀랄 뿐이다."
루스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인야 역시 더 이상 그 얘길 하지 않았다.
'흠, 요 며칠, 난 모처럼 뭔가 ‘사랑의 감정’을 느꼈었는데, 이렇게도 빨리 뭔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나도 겁이 나는구나......'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또 하루가 갔다.
그런데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는 전시는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아, 나는 언제나 관람객들로 북적이는 전시를 열 수 있을까? 하는 전시마다 파리를 날리다 보니, 그 상황에 너무 익숙해져가는 기분이기도 하고, 결코 그런 전시는 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가 진행될수록 죽을 상으로 변해가는 기분이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서글픈 것 같아, 인야는 바로 학교로 가 세상을 잊기 위해 ‘자화상’을 붙잡고 있었다.
그건 어느 정도 효과가 있긴 했다.
그렇다고 그게 모든 걸 해결해 줄 리는 없었다.
뭔가 불안해서, 최소한 집에 가서 짐이라도 정리해 두자며... 인야는 돌아오는 길에 학교 게시판 앞에서 잠깐 서서 다음 학기 '학사 일정'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안녕(Hola)!" 하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루스였다.
인야는 놀라움 반, 반가움 반으로,
"무슨 일이냐(Que pasa)?" 물었다.
그런데 자신이 느끼기에도 상당히 냉정한 어투였다.
그러자 그녀는,
"아무 것도 아녜요(Nada)." 하고 도망치듯 가버리는 것이었다.
인야는 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를 따라가거나 잡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금 전시 뒤처리도 해야 하고, 집을 나오는 일 등... 너무 복잡하고 산만한 상태다. 아니, 어두운 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다. 나에겐 지금 당장, 미래가 없으니까. 그리고 너에게 정성을 쏟을 수도, 그런 심리싸움으로 더 복잡해지기도 싫다. 나는 떠나야 하고, 더구나 사랑은 사치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하면서 그 길로 집에 돌아와 일단 짐 정리를 했다.
버릴 것은 버리고, 몇 가지 종류로 구분하여 완전한 짐을 싸기 위한 사전 준비작업을 해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밤이 되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에 있는 J사범한테서 전화가 왔다.
누리아의 연락을 받고 전화를 걸었을 텐데, 그는,
"아니, 전시가 다 끝나갈 때에야 받게끔 카탈로그를 보내면 어떻게 해요?" 하고 불평을 하면서도, "만약에 멕시코에서 다시 전시를 한다면, 그 때에는 누리아랑 함께 갈께요."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인야의 마음은 이미 저 먼 바닷가로 향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