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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포초교36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종훈
늦었지만 가을휴가를 맞아 떠나는 여행,나는 이곳(동해)에서 떠나가는 가을을 배웅하고 다가올 겨울을 미리 가늠해보고 싶었다. 언제나처럼 여행은 나를 설레게한다.이 설레임은 언제쯤 나의 곁을 떠날까? 이런저런 생각을하며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드니 제법 길이 막힌다. 나처럼 막바지 가을여행객들이 제법 많은가 보다. 첫번째 방문지인 강릉 오죽헌에 도착하니 벌써 초저녁,아침 11시경에 출발했으니 족히 5시간은 걸렸다. 점심식사를 위해 휴게소에 들린 뒤 오수까지 즐겼으니 막상 운전한 시간은 3시간 30분 정도? 해가 점점 짧아지는 것이 이제 겨울이 코앞임이 실감난다.
오죽헌 정문에는 5만원권 화폐의 주인공으로 신사임당이 선정된 것을 축하하는 프랑카드가 걸려 있었다. 요즘 시대의 어머니상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둥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선정 뒤끝이지만 신사임당이 태어나고 자라난 강릉시에서는 이를 축하할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강릉 오죽헌에 대해 알아보자. 자료는 다음 백과사전을 참조하였다.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보물 제165호.신사임당(1504∼1551)과 그녀의 아들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오죽헌은 1975년 대대적인 정화사업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강릉을 대표하는 명소로 자리잡았다.
아무리 가을의 뒤끝이라지만 단풍은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있었다.올해는 단풍이 유난히 오래가는 것 같다.
현재 오죽헌에는 율곡 선생의 사당인 문성사(文成祠)와 율곡 선생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태몽을 꾸었다는 몽룡실(夢龍室), 정조의 명으로 지었다는 어제각(御製閣), 오죽헌의 사랑채에 해당하는 구옥(舊 屋), 율곡 선생과 신사임당, 매창 등의 유품을 전시하고 있는 율곡기념관 등이 있으며, 입지문(立志門) 너머로 강릉시립박물관과 향토민속관 그리고 강릉 지역에서 출토된 선사유적 등이 있다.
오죽헌의 정문을 들어서면 시원한 진입로를 지나 자경문(自警門) 앞 광장에 이르게 된다. 이 자경문 안쪽이 오죽헌이라 할 수 있다.
자경문(스스로자, 경계할 경, 글월문 - 스스로 경계하는 글 15조)은 나이 13세 때 진자초시에 오른 총명한 대유학자인 율곡이 19살에 금강산에 들어갔다 와서 외할머니한테 들려 남긴 글로서 율곡의 마음을 기려 마음을 특히 경건하게 해야 할 곳이다.
자경문을 들어서면 율곡기념관 앞의 제법 넓은 공간이 있고, 자경문 앞에 율곡선생 유적 정화 기념비가 있는데, 그 옆으로 율곡 선생의 사당인 문성사로 들어가는 문이 있다.
문성사는 1975년 오죽헌 정화사업 때 율곡이이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문성"은 1624년 인조임금이 율곡선생에게 내린 시호이다. 뜻은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율곡 이이 선생 영정은 1975년에 표준영정으로 선정된 것으로, 이당 김은호가 그렸다. 영정은 선비들의 평상복인 심의를 입고 검은색 복건을 쓰고 있다. 현판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
율곡 초상화의 진실?
율곡선생 영정의 실제 주인공은 14대 종손.
단아한 흰 도포에 관모를 쓴 율곡 이이 선생의 초상화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5천원짜리 지폐에서도 율곡 선생의 초상은 쉽게 만나게 된다.
그러나 덕수이씨 율곡파 종친회에 따르면 율곡 선생의 초상화는 공식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한다.
실제로 강릉 오죽헌에 봉안돼 있는 율곡 선생의 초상화는 지난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명에 의해 이당 김은호 화백(79년 작고)이 그린 것으로 돼있다. (그 전까지는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1926년에 교육용으로 제작한 것으로, 김 화백의 그것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모델이 됐던 인물이 바로 율곡 선생의 14대 종손인 이재능 씨였다. 현 15대 종손인 이천용씨의 부친이다. `직계 종손이니까 비슷한 얼굴 아니겠느냐'고 해서 이씨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가족이 보관하고 있는 이 사진은 40대에 찍은 것이라고 한다.
지금의 문성사는 원래 어제각이 있던 자리였다가 오죽헌 정화사업을 할 때 옮긴 것이다.오죽헌을 들어서 제일 먼저 대해야 할 것이 율곡 선생의 영정이라 하여 지금의 문성사를 지었다.
문성사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신사임당이 율곡 선생의 태몽을 꾸었다는 몽룡실이 있다. 몽룡실 (보물 제 165호로 지정된 것은 몽룡실 건물임)은 1450년 경 지어진 우리 나라 민가주택으로서는가장 오래된 것 중의 하나이며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몽룡실'은 찬란히 빛나는 검은 용이 동해바다로부터 날아오는 꿈을 꾼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았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엔 '오죽헌'과 '몽룡실'이란 현판이 두 개 붙어있으며, 본 살림채가 아니라 별당 건물이라 한다.
이 몽룡실(夢龍室)은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별당 건물로 현재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도 그리 큰 건물은 아니지만 그 고풍스러움이 사람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밖에 정조 임금이 1788년 율곡의 유품인 『격몽요결』의 원본과 벼루를 보관하도록 지어준 어제각도 있다. 임금의 어명으로 지었다고 해서 어제각이며 격몽요결과 용연벼루가 전시되어 있다가 지금은 율곡기념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으며 현재 이곳에는 율곡 이이선생의 초상화, 오죽헌과 벼루가 도안되어 있는 5천원권 지폐가 전시되어 있다.
열매 맺듯이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에서 새겨진 것이라 한다.
오죽헌 옆 문성사 주위에 '오죽'이 자라고 있으며, 율곡선생 생전에도 있었다는 수령 600년된 배롱나무도 앞뜰에 있다. 율곡선생은 어린시절 이 배롱나무 아래에서 무슨놀이를 하며 놀았을까?
오죽헌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붙여진걸까? 줄기의 빛깔이 까마귀처럼 검은색이어서 생긴 이름인 오죽(烏竹)은 화분과에 속하는 다년생 풀로 첫해에는 초록색이었다가 한 두 해를 넘기면 완전히 오죽이 된다고 한다.
손가락 굵기 정도의 가는 오죽이 "몽룡실"과 "문성사"주위에 무리 지어 심어져 있는데 집 주위에 오죽이많아 생긴 이름인 <오죽헌>은 외조모 이씨에게서 이 집을 상속받은 율곡 이이의 이종사촌 권처균의 아호를 '오죽헌'이라 부른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484호 "강릉 오죽헌 율곡매(栗谷梅)"는 오죽헌이 들어설 당시인 1400년경(수령 600년 추정)에 이 매화나무도 같이 심겨졌다하며, 신사임당과 율곡이 직접 가꾸었다고 전해진다. 매화의 여러 품종 중 꽃 색깔이 연분홍인 홍매(紅梅) 종류이며, 3월 말경 꽃이 필 때는 은은한 매향이 퍼져 오죽헌을 더욱 경건하게 한다. 1975년에 대대적인 오죽헌 정화사업이 있었는데, 이 때 율곡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를 비롯해 자경문, 율곡기념관 등이 신축되었다.
문성사와 오죽헌 가운데 작은 중간문을 지나면 안채 건물이 있다. 안채의 주련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판각해 놓은 것이다. 오죽헌의 사랑채를 일부를 재현해 놓은 구옥(舊屋)인데 이 구옥 옆으로 어제각이 있다.
구옥 앞의 문을 나서면 율곡기념관 앞으로 나온다. 율곡기념관은 율곡 선생과 어머니인 신사임당 그리고 누이인 매창의 유품과 여러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율곡 기념관에는 성학집요 (임금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요목을 적은 것), 벼루(용연벼루), 호송설(율곡이 친구 김열에게 쓴 시로 자연보호=소나무를 보호하는 설이라 하지만 풀어 설명하면 효 사상), 자수병풍, 초충도 등이 있다.
신사임당의 유품으로서는 습작매화도, 초서병풍, 초충도병풍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초충도에서는사임당의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조선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때의 묵매 양식을 잘 보여주는 매창(율곡의 누이)의 매화도와 한송이의 국화가 단정하게 그려진 옥산 이우(율곡의 아우)의 국화도가 전시되어 있으며, 초서에 뛰어났던 이우가 소년기에 쓴 귀거래사가 전시되어 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자운서원의 율곡기념관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규모는 좀 작은 편이다.
이 문을 나서면 향토민속관과 강릉시립박물관 그리고 강릉 지역에서 출토된 고분과 유적을 재현해 놓은 곳이 있다.
이곳 입지문의 단풍이 나의 시선을 잡아끈다. 바같에는 오죽도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향토민속관에는 이곳의 풍습과 변천사, 여러 생활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고, 복식연구가인 김영숙 선생이 기증한 전통의복, 장신구 등의 전시품 7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되어 있다.
향토민속관과 똑같이 생긴 강릉시립박물관에는 강릉 일대에서 발굴된 토기 등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영동지방에서 출토된 각종 선사ㆍ 역사유물과 도자기, 고문서, 전적, 서화류 등이 전시되어 있다.
구석기시대 유물로는 발한동 유적, 신석기시대의 유물로는 지경리 유적, 청동기시대 유물로는 방내리 유적, 포남동 유적, 초기철기시대의 유물로는 강문동 유적, 병산동 유적 출토물이 전시되어 있다.
향토민속관 옆으로 병산동 고분과 유적, 금산리 고분 등을 재현해 놓은 곳이 있다. 어머니의 집인 셈이다. 즉, 신사임당의 친정이자 율곡 선생의 외가인 것이다.
율곡 선생은 외가인 이 오죽헌에서 태어나 6세 때까지 이곳에서 자랐다고 한다. 당시 율곡 선생의 본가는 파주에 있었으며, 현재도 경기도 파주에 율곡선생의 무덤과 위패가 있는 자운서원이 있고, 율곡 선생 이 즐겨 찾았다는 화석정이 있다.
시간이 늦어 마음이 급하다보니 제대로 다 둘러보지를 못했다. 내년봄 홍매화가 필때 다시 한번 올 기회가 생기려나?
어느덧 해가 산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잠자리는 동해시 망상오토캠핑리조트의 캠핑카를 잡아놓았다. 지리에 익숙하지 못하니 더 어둡기 전에 길을 재촉하련다.
이 기회에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선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자료출처는 다음 백과사전.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조선 중기의 예술가.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이이(李珥)의 어머니로 사대부 부녀에게 요구되는 덕행과 재능을 겸비한 현모양처로 칭송된다. 본관은 평산. 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명화(名和), 어머니는 용인이씨로 사온(思溫)의 딸이다. 이이는 〈행장기〉를 지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순효한 성품 등을 기록했다. 사임당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의 당호이며, 이밖에 시임당(媤任堂)·임사재(妊思齊)라고도 했다. 강릉 외가에서 자랐으며, 19세에 덕수이씨 원수(元秀)와 혼인했다. 그뒤 친정에 머물다가 38세에 시집살이를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왔다. 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은 40폭 정도인데, 산수·포도·묵죽·묵매·초충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즐겨 그렸다. 산수에서는 안견파 화풍과 강희안 이래의 절파 화풍을 절충한 화풍으로, 16세기 전반에 생겨난 산수화단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월하고주도 月下孤舟圖〉에서 산들은 나지막하고 옆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수면을 따라 전개되는 공간은 막힘이 없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작품의 구도나 공간처리 등은 안견파의 것을 확산시킨 듯하지만, 필묵법이나 준법은 절파 계통의 영향이 가미되어
있다. 〈초충도 草蟲圖〉에서는 여성적인 섬세한 필치와 미려한 설채법을 구사했다. 8폭의 〈초충도〉중에서 '가지'를 살펴보면, 화폭의 중앙에 곡선진 가지의 두 줄기가 좌우대칭을 이루며 서 있고, 섬약한
줄기들에는 밤색과 흰색의 가지들이 곱게 열려 있다. 가지 주변에는 종류가 다른 화초와 곤충들이 배열되어 있어 그림에 생동감을 더해준다. 안정된 구도, 몰골법(沒骨法)으로만 이루어진 묘사, 아담하고 음
영을 살린 설채법 등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보여준다. 이밖의 주요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노안도 蘆雁圖〉·〈연로도 蓮鷺圖〉·〈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 등이 있다. 사임당의 화풍은 넷째 아들인 우(瑀)와 맏딸인 매창(梅窓) 이부인(李夫人)에게 전해졌다. 글씨는 초서 6폭과 해서 1폭이 남아 있다. 1868년 강릉부사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했다. 강릉을 떠나 대관령을 넘어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과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사친 思親〉 등의 시가 유명하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중종 31)~1584(선조 17).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버지는 사헌부감찰 원수(元秀)이며,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어려서는 주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서 3년간 시묘(侍墓)했다. 1554년 성혼(成渾)과 교분을 맺었다. 그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 하산하여 스스로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다시 유학에 몰두했다. 1558년 23세 되던 해에 예안(禮安)의 도산(陶山)으로 가서 당시 58세였던 이황(李滉)을 방문했다. 그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나 격물(格物)·궁리(窮理)의 문제를 왕복문변(往復問辨)했다. 156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기까지 모두 9번에 걸쳐 장원을 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었다. 1564년 호조좌랑에 처음 임명된 뒤 예조좌랑·정언·이조좌랑·지평 등을 지냈다.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여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사직했다가 1571년 다시 청주목사로 복직했고, 다음해 다시 해주로 낙향했다. 1573년 직제학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했으며, 다음해 우부승지·병조참지·대사간을 지낸 뒤 병으로 사직했다. 그후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직하고,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1581년 대사헌·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이듬해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3년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탄핵으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정월 49세를 일기로 죽었다.
이이의 이기론(理氣論)이 가지는 특색은 다음과 같다(→ 성리학, 주기론). 이(理)는 무형무위(無形無爲)한 존재이며 기(氣)는 유형유위(有形有爲)한 존재로서, 이는 기의 주재자(主宰者)이고 기는 이의 기재(器材)이다. 즉 이는 이념적 존재이므로 시공을 초월한 형이상적(形而上的) 원리로서 만물에 공통적인 것이며, 기는 질료적(質料的)·작위적(作爲的) 존재로서 시공의 제한을 벗어나지 못하는 형이하적(形而下
的) 기재로 국한적인 것이다. 이이는 이와 같이 무형과 유형의 차이로 이통(理通)과 기국(氣局)을 설명하고, 유위와 무위의 차이로 기발(氣發)과 이승(理乘)을 설명했다(→ 이통기국론). 이처럼 이이는 이존론
(理尊論)을 주장하는 이황과 달리 이의 능동성을 부정하고, 이기의 부잡(不雜)보다는 불리(不離)를 강조했다. 즉 이기가 서로 떨어질 수는 없지만, 묘합(妙合)한 가운데 이는 이이고 기는 기여서 서로 협잡할 수없는 것이므로 일물(一物)이 아닌 것이며, 이는 이이고 기는 기라고 하더라도 이와 기는 혼륜무간(渾淪無間)해서 선후와 이합이 없기 때문에 이물(二物)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따라서 이와 기는 서로 독립해
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이와 기의 성질을 구분하여 형이상·형이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발이승일도설).이러한 그의 이기관은 그대로 인간관에 반영된다. 먼저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그는 칠정은 사단을 포괄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을 본래 하나의 성으로 여기고, 이만을 지칭할 때에는 본연지성이라 하고 이와 기를 서로 관련시켜 파악할 때에는 기질지성이라 한다고 했다. 기질지성은 본연지성을 겸하게 되는 것이다. 또 인간의 모든 감정을 총괄하여 말하면 칠정이고 그중에서 특히 선일변(善一邊)만을 지칭하면 사단으로서, 칠정은 사단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사단과 칠정은 근원적으로 둘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사단은 도심이라 할 수 있고,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총괄해서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심에는 천리(天理)도 있고 인욕(人欲)도 있어서 인심과 도심은 근원적으로 둘이 아니며, 인심과 도심은 다만 도의(道義)를 위해서 발했는가, 육체적 욕망을 위해서 발했는가에 따라 구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는 인욕을 천리에 배치된다고 보는 기존의 천리인욕설과는 대비되며, 인간의 의식주에 대한 초보적인 욕구를 당연시함으로써 생산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긍정하는 견해로 이어진다. 다음으로 이이는 모든 사물이 변화한다고 여겼다. 그는 변화의 기초에 음양에 구비되어 있는 동(動)과 정(靜)의 속성과 그 음양을 동정하게 하는 법칙성이 작용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운동변화의 원인을 기 자체의 속성 대신 소이연(所以然)으로 설명했다. 주목되는 것은 그가 변화에 대한 이해를 사회현상에 적용한 것이다. 그의 변법사상의 기초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회개혁사상.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가 중쇠기(中衰期)로서, 오랫동안 도학(道學)이 행해지지 않아 시폐(時弊)가 쌓여 있으므로 이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때 시폐는 공물납부와 진상의 폐해, 군역의 불
균, 관리들의 부정 등이었다. 이에 그는 공물분정을 공평하게 하고 진상을 경감할 것을 주장했으며, 나아가 잡다한 일체의 공물을 폐기하고 전답의 면적에 따라 쌀을 징수하는 수결수미법(隨結收米法)을 전국에 시행할 것을 제안했다. 호조의 관리로 하여금 전국의 한정(閑丁)을 조사·색출하여 이들을 군적에 편입시키는 한편 변장(邊將)들이 군졸들을 수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생활을 그 지방의 창고곡식으로 보장해주는 방안과 군졸들이 휴식할 수 있도록 병역교대제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진전개간(陳田開墾)을 장려하기 위해 휴한지나 황무지를 개간할 경우 실제 경작면적에 따라 세를 부과할 것을 주장했으며, 파산상태에 빠져 있는 국가재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수입을 헤아려 지출할 것과 관료기구를간소화하고 낭비를 근절하여 국가재산의 손실을 방지할 것을 제안했다.
이이는 이러한 제반 시폐의 개혁은 시세(時勢)가 마련되어야 실현될 수 있으며, 그 실현여부는 군주의 개혁하려는 입지(立志)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현신(賢臣)이 있는가 없는가에 달렸다고 여겼다. 특히
가장 이상적인 통치형태로서 도학이 행해지는 삼대지치(三代之治)의 회복은 군주 일인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때 도학이란 격치(格致)로써 선(善)을 밝히고 성정(誠正)으로써 몸을 닦아 몸에 쌓이면 덕(德)
이 되고 그것을 정사에 베풀면 왕도(王道)가 되는 학문이다. 이처럼 이이는 개인의 윤리도덕규범·가치규범이 그대로 확충되어 통치규범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유로 이이는 성학(聖學)의 이름으로 군주를 교도하여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군주개조론인 〈성학집요 聖學輯要〉를 저술하여 선조에게 올렸다. 그리고 시폐의 개혁은 단지 시폐의 혁거(革去)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혁을 통해 양민(養民)에 이르는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백성을 주자학적 질서에 순응하도록 교화시키고자 했다. 결국 그의 개혁론은 시폐의 개혁, 양민, 그리고 백성의 교화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의 개혁안의 시행여부를 결정하는 개혁기구인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하자는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실정에서 향약은 그의 개혁사상을 실천하는 한 방도가 될 수 있었다. 그는 파주향약의 서문(序文)을 짓고 서원향약(西原鄕約)·해주향약(海州鄕約)·사창계향약(社倉契鄕約)·해주일향약속(海州一鄕約束) 등을 만들었다. 이 향약의 사회적 기능은 지방사족의 주도로 농업생산층이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 향촌사회의 신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교적 윤리 및 가치관 등을 향촌민에게 주입시켜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이의 개혁사상은 16세기 사회발전의 진전에 따라 동요하는 사회체제와 신분질서를 다시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고정시키고자 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이이는 점진적으로 각종 제도를 개혁하고 향촌질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이는 붕당(朋黨)을 국가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요소로서가 아니라 소인이 무리를 이루듯, 뜻을 같이 하는 군자들끼리 집단을 이루는 불가피한 정치의 현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은 주자의 붕당론에 근거한 군자소인변(君子小人辨) 위주의 붕당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붕당긍정론에서 출발하여 군자당·소인당의 엄격한 분별과 진퇴를 강조함에 의해 군자당으로 자부하는 사림의 정치활동을 정당화해주는 논리였다. 그러나 심의겸(沈義謙)·김효원(金孝元) 사이의 시비로 인하여 분붕(分朋)의 조짐을 보이던 1575년 이후 이이는 그 해소에 진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붕당론을 수정하게 된다. 이이는 동인·서인이 모두 사류(士類)이며 그 분열은 의견의 차이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에 기존의 입장인 군자소인변은 적용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신 동서를 타파하는 방법으로 양시양비설(兩是兩非說)과 보합조제론(保合調劑論)을 제시하게 된다. 먼저 동인·서인 명목 성립의 기초가 된 이른바 심의겸·김효원 시비에 대해 양시양비론을 적용하여 비생산적인 논쟁을 마무리짓고, 함께 조정에 나와 보다 막중한 국사와 민생문제에 중지를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583년 자신을 소인으로 공격하는 삼사의 언관에 대해서 엄정한 시비분별을 요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모든 논쟁에서 양시양비론을 적용시킨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동인과 서인에 군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인도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당론 위주의 인사정책에 반대하고 당색에 구애되지 않는 조용(調用)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조건적인 수용이 아니라 청탁(淸濁)을 분별한 것이었고, 집권세력에 의해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보합조제론은 수십 년에 걸친 훈척과의 투쟁에서 체득한, 집권당을 견제할 수 있는 상대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과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사류의 중지를 모아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상과 같은 이이의 사상은 17세기 이후 그의 문인들로 형성된 서인 노론계에 의해 계승되어 이들의 정치사상·정국운영의 기반이 되었다. 이 시기 격렬하게 진행되던 봉건사회 해체 양상에 신진관료·지주 중
심의 정치사회 운영론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이들은 이이의 사상이 주자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것임을 밝히는 데 주력하는 한편, 이황이나 조식(曺植) 등의 사상을 계승한 학파·정파를 배제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특히 17~18세기의 격변기에 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한원진(韓元震)으로 이어지는 이이학파는 이같은 작업에 토대를 놓음으로써 이후 정치·사상계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했다. 저서로는 〈성학집요〉·〈격몽요결〉·〈소학집주개본 小學集注改本〉·〈중용토석 中庸吐釋〉·〈경연일기 經筵日記〉 등이 있다.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 송담서원(松潭書), 풍덕 구암서원(龜巖書院), 황주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등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