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경성방직주식회사 창립
․1920 『동아일보』 설립
․1932 보성전문학교 인수 및 교장 취임
․1938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 및 이사
․1941 임전보국단 감사
․1945 한국민주당 창당
․1946 대한독립촉성회 부회장
․1949 민주국민당 창당
․1951 부통령 당선
● 독립유공자로 포장된 친일파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때 여러 차원의 ‘과거 문제’에 대한 청산의 분위기가 높아졌던 적이 있었다. 그 일환으로 1993년 7월 8일 국가보훈처는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서 1993년 말까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있는 6천2백33명을 대상으로 친일행위자를 가려낼 방침임을 밝히고, 1994년 상반기까지 친일혐의가 있는 서훈자 가운데 친일행위가 밝혀지는 사람은 상훈법 등 관련법을 고쳐 서훈을 취소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하였다. 그때 국가보훈처가 밝힌 ‘독립유공자’의 서훈공적과 친일행위의 혐의는 다음과 같다. 이들 8명은 모두가 한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 말기에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제에 협력한, 즉 ‘전향’한 사람들이라고 주장되었다.
서훈공적 친일행위
이갑성(李甲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밀정
윤익선(尹益善) 3.1운동 주도 정총대
김성수 동아일보 창간 임전보국단
서춘(徐椿) 2.8독립선언 주도 매일신보 주필
이종욱(李鐘郁) 3.1운동 국민총력연맹
이은상(李殷相) 조선어학회 만선일보
윤치영(尹致映) 2.8독립운동 대동아공영권 공조
전협(全協) 대동단 일진회 평의원
이는, 1995년이면 일제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50년이 되는 해이지만, 그 사이에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문제가 얼마나 왜곡되어 처리되어 왔느냐 하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 문제는 그 사이의 독립유공자 선정기준이 매우 무원칙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비난되기도 했지만, 경위야 어찌 되었든 친일경력이 있는 사람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런 ‘독립유공자’야 오히려 선정하지 않는 것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게 되어 버릴 것이다. 독립운동에 공이 있는 선열들의 업적을 추장(推獎)하자는 것이 진정한 ‘독립유공자’ 선정의 목적일진대, ‘독립유공자’ 선정이 친일협력자들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는 구실을 하고 있다면 그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없는 것보다 못한 일이다.
국가보훈처가 지적한 8명 가운데 세간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어 모은 사람은 역시 김성수였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에 비해 그가 매우 화려한 독립운동 경력을 지니고 있다거나, 또는 이승만 정권 아래서 부통령을 지냈다거나, 더 나아가 보수야당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는 한국민주당을 이끈 정계의 거물이어서라기보다는, 그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현실적인’ 힘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이름은 『동아일보』로 대표되는 언론, 고려대학교와 중앙학교재단으로 대표되는 교육, 삼양그룹으로 대표되는 기업으로 이어지고 있고, 이에 따라 현실적으로도 ‘막강한’ 물리력을 지니고 있다.
국가보훈처의 위와 같은 방침이 앞으로 계획대로 추진되어 갈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여기에서 ‘김성수’가 지니고 있는, 또는 ‘김성수’로 대표되는 보수정치권의 현실적인 물리력이 국가보훈처의 방침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조짐은 애초에 국가보훈처의 발표 직후에도 드러났던 것인데, 다른 물리력이 어떤 형식으로 발휘되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그가 경영했던 신문이나 그 밖의 보수성향의 신문이 국가보훈처 심사 대상인원 8명의 명단을 제대로 발표하지 않는다거나, 김성수만을 제외하고 발표한다거나 하여 그 본의를 왜곡하였던 점은 분명히 지적할 수 있다. 이를 전후하여 국가보훈처의 재심사 방침이 흐지부지하게 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져버린 것을 보면 그 물리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김성수를 위시한 8명의 재심사 문제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 재심사계획으로 상징되는 ‘친일잔재 청산’ 문제의 본질이 외부적인 힘에 의하여 은폐되거나 흐지부지되어 버리는 것은 민족사의 전개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재심사 대상이 되는 ‘개인’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 될 것이다. ‘친일잔재의 청산’ 문제가 ‘해방’ 이후 한번도 본질적인 차원에서 진지하게 처리된 적이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짚어봐야 할 문제라고 한다면, 더욱이 민족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통일의 민족사적 정통성이 문제가 될 때가 있다면, ‘그때’에야 ‘친일잔재’의 청산 문제가 본질적으로 거론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 평가의 양극성 속에 파묻힌 실세
한 인물에 대하여 후세의 역사가들이 일치된 평가를 내리는 일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김성수만큼 양극단의 평가가 대립하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는 그의 활동이나 노선이 매우 불명확하여 정확하게 알 수 없다거나, 또는 그의 ‘현실적인’ 영향력이 매우 크기 때문에 현실적인 힘으로부터 분리된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가 힘들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에 대한 평가가 대립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어쩌면 오늘날의 현실, 즉 ‘고도로’ 자본주의화된 남한 사회의 현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두고 그 해석이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먼저 일제하 김성수의 활동과 노선을 평가할 때, 그의 활동과 노선을 ‘실력양성론’에 기반을 둔 ‘근대화론’에 입각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일제 말기의 그의 ‘분명한’ 여러 친일행위들도 그의 노선에 비춰볼 때 자연스러운 것이고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의 하나로 평가하는 입장이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전시체제 아래서의 그의 여러 전쟁협력 행위들은 그리 부자연스럽다거나, 또는 오로지 일제로부터의 ‘강요된’ 행위로만 평가되지 않는다.
이에 비하여 일제 말기 그의 ‘친일행위’들은 오로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강요에 의한 일탈행위로서 그의 활동과 노선의 본령에서 비추어 볼 때 정당한 평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다. 이런 입장에 설 때 일제 말기의 친일활동보다는 교육(중앙학교, 보성전문), 언론(『동아일보』), 기업(경성직뉴, 경성방직 등)을 통한 민족운동에 대한 다양한 기여를 높이 평가해야 하며, 이런 그의 활동은 그의 일탈적인 친일행위를 덮고도 남음이 있다는 평가를 내리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해방 후 한국민주당의 활동과 노선을 둘러싸고도 양극단의 평가가 대립하고 있다. 친일잔재의 청산을 거부하고, 토지문제의 해결에 반대함으로써, 미군정․이승만과 밀착하고, 반탁운동에 편승하여 좌우익 블록의 심화에 기여하였으며, 단독정부 수립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민족의 ‘분단’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이런 입장에 서면 남한정부의 수립 이후에 김성수가 이승만과 분열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보수야당의 원조로서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는 평가도 매우 부정적인 평가로 전환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이승만과의 정권쟁탈전에 다름 아니었으며, 이에 패배함으로써 ‘민주화’의 ‘화신’으로 전환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해방 후 김성수의 활동을 일제하 ‘근대화론’의 연장선상에 선 것으로 평가하며, 이런 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에 비하여 해방 후 김성수와 한국민주당의 여러 활동을,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를 동원하여 미군정과 연합함으로써 초기 국가의 건설에 기여하였으며, 반탁운동을 통하여 남한 사회가 공산화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분단정부’로서의 모습이나마 남한 사회가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유지되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이런 입장에 서면 이승만 정권 아래서의 김성수는 건전한 반대를 형성함으로써 남한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였으며, 이로써 남한 야당사의 거목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는 먼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규명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고서야 그에 대한 평가가 가능할 것이며, 이는 김성수에 대한 평가의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의 평가에는 역사를 보는 관점의 문제가 개재(介在)됨은 물론이다. 여기에서는 김성수를 평가할 때, 먼저 일제하 그의 실력양성론적 근대화론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데서 출발하여, 해방 후 한국민주당의 단정노선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것이 현대정치사에서 가지는 위치를 어떻게 평가하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 등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의 근대화 노선과 단정 노선이 지니는 의미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일은 어떠한 방법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하며, 그 이후의 사회는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눈앞에 두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특히 중요한 문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일제 말기 그의 친일활동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그의 활동을 정확히 평가하는 바탕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시 체제하 그의 활동을 살펴보는 데서 논의를 시작하겠다.
● 동족을 죽음의 전장으로
김성수의 일제 말기 친일활동은 그의 전기(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 1976)에 나와 있는 것처럼, 본인이 집필을 거부해서 담화 형식으로 조작되어 나온 하나의 기사에 그치는 것일까. 그 대답은 명백히 ‘아니다’라는 것이다.
먼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 일제는 조선을 전시 체제로 만드는 데 혈안이 되어, 각 분야의 유력 인사들을 전시 체제에 강제로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김성수 역시 중일전쟁 직후부터 이른바 ‘시국강연’의 연사로 참여함으로써 일제의 전시동원 정책에 협력하게된다. 1937년 9월 서울시의 라디오 강연에 나서서 일제의 전시 동원에 협조하였으며, 또한 춘천까지 ‘강연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 당시에는 발기인 및 이사로 참여하였으며, 연맹 산하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와 아울러 1939년 7월에는 전시 체제하에서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의 치안대책을 강구하며, ‘황국신민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일본 내에서 조직되었던 협화회(協和會)의 ‘재경성 유지간담회’에 참석하여 발언하기도 하였다.
이와 아울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후신으로 1940년에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로 참여하고, 1943년에는 이 단체의 총무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 국민총력조선연맹은 그야말로 조선인을 ‘총체적으로’ 전시 체제에 동원하고, 억압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던 ‘총력 조직’이었다.
1941년에는 조선인 스스로 일제의 전쟁 동원에 협력하기 위하여 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이었으며, 그와 별도로 조직을 준비하고 있던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와 흥아보국단이 합쳐서 하나의 단체로 발족한 것이 바로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이었다. 임전보국단은 이름 그대로 전쟁에 협력하기 위한 단체로 조선인이 스스로 조직한 데에 특징이 있었다. 김성수는 1941년 8월 흥아보국단의 준비위원으로, 그리고 10월 임전보국단의 감사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 임전보국단의 활동이 바로 앞서 본 바 국가보훈처가 김성수의 일제 말기 활동 중 친일혐의를 두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김성수의 일제 말기 활동 중 가장 활발하였고, 가장 많은 발언을 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1943년부터의 것으로 징병제와 학병제의 실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일제는 그때까지 미루어 오던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徵兵制)‘를 1944년부터 실시한다고 1942년에 발표하였으며, 이와 아울러 1943년에는 본격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하기에 앞서 ’학병제(學兵制)‘를 실시하였다. 잘 알다시피 징병제 실시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일제는 이른바 ’지원병제(支援兵制)‘를 1938년부터 실시하고 있었으나, 조선인을 군대에 동원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에 따라 학병제와 징병제를 본격적으로 실시하기 위해서는 일제가 의심하고 있던 만큼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동화작업‘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인 유력자를 동원한 대대적인 선전활동이 필요했던 것이고, 이러한 일제의 의도에 가장 잘 부응한 사람들이 바로 조선 내의 ’지식인‘들이었다.
김성수 역시 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장의 자격으로 1943년 8월 5일 징병제를 찬양하는 장문의 논설을 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기고함으로써 징병제와 학병제 찬양의 ‘포문’을 연다. “문약(文弱)의 기질을 버리고 상무(尙武)의 정신을 찬양하라”는 논설이 그것인데 그 중요 부분만을 살펴보도록 하자.
작년(1942년 - 필자) 5월 8일 돌연히 발포된 조선의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을 통하여 선풍같이 일어나는 환희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吾等) 반도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沈切)하였던 바이다. …
그런데 이 징병제 실시로 인하야 우리가 이제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은 일방으로 전 반도청년의 영예인 동시에 반천년(半千年) 문약의 분위기 중에서 신음하던 모든 병근(病根)을 일거에 쾌치(快治)하고 거일(去日) 신생(新生)할 제2의 양질(良質)을 얻은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아니하며 어찌 감격치 아니하리오. 하고(何故) 오하면 문약의 고질을 치료함에는 오직 상무의 기풍을 조장함이 유일무이의 양약인 까닭이라. …
징병제는 조선반도 청년의 영예이며, 조선인의 단점인 문약과 단결하지 못함을 치료할 양약이니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하여 힘써 노력하여 위대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요지이다.
이어 1943년 10월에 학병을 권유하는 담화를 발표한 후에, 11월 6일에는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라는 조선 내 지식인들의 학병 권유 연재논설 가운데 세 번째로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한다.
현하 우리가 당면한 의무라고 하면 제군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여명을 맞이하여 인류 역사에 위대한 사명을 건설하려는 대동아 성전(聖戰에) 대한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인 것이다. …
대동아의 건설은 제군의 사소한 존재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매진 앞에 제군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잃어버리고 그로 말미암아 반도가 이에 뒤떨어질 때 우리는 대동아 건설의 일분자는 그만두고 황민으로서 훌륭히 제국의 일분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단시일일지라도 위대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내지인이 오랫동안 바쳐온 희생에 필적할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까. 이 임무를 수행할 절호의 기회가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앞에 열려진 것이다. 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안될 것을 나는 확언한다.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반도의 장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과 같은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충성과 희생이 필요하며, 그러할 때에야만이 진정한 황국신민이 될 수 있다는 논리로써 청년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김성수는 그가 운영하고 있던 보성전문학교의 학생들을 비롯하여 조선인 청년 학생들을 ‘학병’으로 내몰기 위하여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11월 8일에는 ‘학도 출진 장행의 밤’이라는 행사를 개최하여 “반도 청년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학도 전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가”라는 요지의 ‘격려사’를 행하여 학병으로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11월 9일에는 보성전문학교의 ‘학부모 간담회’를 개최하여 자식들을 전쟁터로 보낼 것을 부모들을 동원하여 강요하였으며, 그래도 성과가 별로 없자 11월 16일에는 학부모들에게 전보를 발송하여 학병에 나갈 것을 권유하고, 호별 방문을 행하여 강요하기도 하였다. 또한 11월 17일에는 ‘학도 출진을 말하는 좌담회’에 참가하였으며, 같은 날 보성전문학교에서 ‘궐기대회’를 개최하여 훈시하기도 하였다.
11월 26일에는 “황국신민의 연성에 매진해야 한다”는 요지의 담화를 『경성일보』에 게재하였으며, 12월 7일에는 징병에 절대로 협력할뿐만 아니라, 군인의 원호사업에도 참여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12월 12일에는 ‘보전 장행회(壯行會)’를 개최하여 “학병 지원은 이 시대 최고의 영광이며, 한번 길이 열린 이 순국의 대도에 시종여일하게 돌진함으로써 학도의 머리에는 영광이 길이 빛날 것이다”라는 요지의 격려사를 전장에 나가는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학병이 전쟁터로 나간 뒤인 1944년 1월 22일에는 “징병이 닥쳐온다”라는 담화를 발표하여 닥쳐오는 징병에도 열심히 참여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후에는 가두 계몽과 원호금 모금에 참여하였다.
김성수의 이와 같은 조선인에 대한 ‘학병’ ‘징병’ 동원활동이 오로지 일제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활동적’이었음에 놀랄 뿐이다. 또한 당시 ‘강요’당한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강조하고 있듯이, 위험에 빠진 조선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자발적’이고 ‘논리적’이다. 당시 보성전문학교는 1943년에 문과가 폐지되었으며, 1944년에는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개명하여 ‘연명’하게 된다. 이러한 활동이 학교 하나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기에도 그 명분은 너무 약하다. 그는 그의 학교 하나를 살리기 위하여 제자들을 전쟁터로 몰아낸 것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 당시 그가 초기에 운영하던 여러 기업들을 전담하여 운영하고 있던 그의 친동생 김연수(金秊洙) 역시 각종의 전쟁 협력단체에 가담한다거나, 막대한 금액의 전비 또는 비행기를 헌납한다거나, 군수업체를 운영한다거나 하는 등의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전쟁에 협력하고 있었다. 초기부터 『동아일보』의 운영에 참여하여 김성수와 역할을 분담하고 있던 장덕수(張德秀) 역시 보성전문학교의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학병에 동원한다거나, 대동아공영권 사상에 공명하여 적극적으로 선전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친일활동에 ‘광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그의 활동이 단순히 일제의 요구에 의한 수동적인 것이었다는 점으로 ‘옹호’되기에는 너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국가보훈처의 서훈의 근거 역시 명백해져야 할 것이다. 1948년에 제정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에 의하더라도 일제 말기 김성수의 행위는 명백하게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의 제11조는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 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 데 협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한 자”는 반민족행위를 행한 자로 처벌받게 되어 있었다. 앞서 본 일제 말기 그의 활동이 어찌 여기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다만 그 시점에 그는 이승만(李承晩)과 더불어 정부 수립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던 한국민주당을 이끌고 있음으로써 ‘면죄부’를 발급받을 수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활동 자체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 대지주의 아들에서 ‘근대화론’자로
그러면 김성수의 출생과 성장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활동과 노선을 이해해보자. 김성수는 1891년 전북 고부면 부안면 인촌리에서 울산 김씨 김경중(金暻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지역의 울산 김씨 집안은 조선 중기 유학자인 김인후(金麟厚)의 후예로 원래 장성에 세거하였으나 김성수의 집안은 조부대에 고부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김성수는 곧이어 후사가 없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장남으로 출계하게 된다.
김기중, 김경중 형제는 한 말에 주로 줄포를 통한 일본으로의 미곡무역에 종사함으로써 거대한 토지를 축적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부를 바탕으로 관계에 진출하여 군수 등의 관직을 지내기도 하고, 당시 자강운동에 참여하여 학교를 세우기도 한 그 지역의 유력한 개명 지주였다. 이러한 양부(兩父)의 부(富)와 아울러 김성수는 1903년 담양의 토호였던 장흥 고씨 집안의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이후 활동의 유력한 토대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집은 1907년 줄포로 이사하게 되는데, 이는 의병의 습격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줄포에는 일본 헌병이 주둔함으로써 미곡무역을 통한 부를 축적하고, 아울러 의병의 습격을 막기에는 더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는 지역이었다.
김성수는 어릴 때 집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6년 그의 장인이 설립한 평창의 영학숙(英學塾)에서 신식 학문을 수학하게 된다. 이때 송진우(宋鎭禹)와 처음으로 교유하게 되었다고 한다. 송진우는 이때부터 그의 활동에서 없어서는 안될 사람으로, 그와 함께 이후 살펴볼 ‘거대한’ 활동의 영역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1908년 송진우와 함께 도일하여, 정측영어학교, 금성중학교 등의 대학 입학을 위한 예비학교를 거쳐 1910년에는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1914년 와세다 대학의 정경학부를 졸업하게 되는데, 김성수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당시 유학생들의 통합단체였던 동경조선인유학생학우회의 활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시기 유학생들의 활동과 사상은 이후 그의 활동에 토대가 되는 ‘근대화론’의 형성에 있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그는 일본 유학생들의 사상적 주류였던 ‘구사상․구관습 개혁론’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실력양성에 기반을 둔 근대화론의 사상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유학생들은 실력양성의 두 축으로서 교육과 산업을 설정하고 있었으며, 이는 또한 구한 말 ‘자강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였다.
● 일가(一家)의 축재로 활용된 민족주의 활동
일본에서의 유학시기에 형성된 ‘근대화론’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김성수의 일제하 활동은 전개되는데, 이는 그 성격의 변화에 따라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제1기는 1915년부터 1923년까지의 시기인데, 일제하 김성수의 활동의 중심축을 이루는 교육, 기업, 언론활동의 토대를 닦는 시기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제1기의 활동은 ‘민족운동’이 본격적으로 분화되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아직 그 본질적인 측면이 잘 드러나지 않는 시기이기도 하다.
제2기는 1924년부터 1935년의 시기로 김성수가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이른바 ‘자치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민족주의’적 활동을 벌이는 때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그의 활동의 성격과 관련하여 가장 논란이 많은 시기이기도 한데 제3기와는 달리 아직 일제와의 협력이 노골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그의 활동과 노선은 그의 근대화론의 본질적 측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제3기는 1936년부터 1945년까지의 시기로 이 시기는 제2기의 민족주의적 지향성을 완전히 포기한 채 일제에 투항하는 시기로 규정할 수 있다. 따라서 앞서 본 일제 말기 그의 일제에의 협력행위는 일제에 투항 행위의 연장선 위에서 그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제1기(1915~1923) : 민족주의 활동의 토대 구축기
김성수는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교육운동에 투신한다. 1915년에 중앙학회에서 부속학교로 경영하였으나 경영난을 겪고 있던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1917년에는 교장에 취임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동아인맥’ 양성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김성수는 이 학교를 바탕으로 주변 인물을 교사로 기용하거나, 이 학교 출신 학생들을 자기가 경영하는 기업 또는 신문사에 기용함으로써 이후 광범한 인맥형성의 토대를 구축하게 된다. 이런 활동은 해방 이후까지도 지속되었으며, 이런 인맥의 구축이 김성수의 현실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데 가장 큰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후 기업을 인수함으로써 사업이 확장되자 1918년에는 교장을 사임하고 후임으로 송진우를 기용하게 된다. 후에 보성전문학교에서 같이 일하다가 해방 후 고려대학의 총장까지 지내게 되는 현상윤(玄相允)도 이때 중앙학교의 운영에 가담하게 된다.
다음으로 기업활동의 일환으로 1917년에 경성직뉴(京城織紐) 주식회사를 인수한다. 이 회사는 조선인 중소기업가들이 합자하여 운영하던 소규모의 직조회사였는데 역시 경영난에 처해 있던 것을 인수하여 운영하게 된 것이다. 이어 3․1운동 직후인 1919년에는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창립하게 되는데, 이때에 전국에서 주식을 모집하여 공장의 설립에 착수하였다가 1923년에 생산을 시작하게 된다. 사장에는 이미 ‘친일파’로 전락해 있던 박영효(朴泳孝)가 취임하는데, 박영효는 이후에도 계속하여 김성수와 일제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1924년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김연수가 기업활동을 전담함으로써 김성수는 기업활동으로 손을 떼게 되지만 이는 형제간의 역할분담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김성수는 언론과 학교의 경영에 주력함으로써 김연수의 기업경영에 후견인의 역할을 지속하게 된다. 이후 김연수는 중앙상공, 경성방직, 해동은행 등의 기업과 은행 그리고 거대한 토지를 발판으로 조선인 최대의 ‘재벌’로 성장하였으며, 이는 일제와의 타협 아래 예속자본으로서의 본질을 지니고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음으로 김성수는 그의 정치적 기반으로써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동아일보』를 1920년 이른바 ‘문화정치’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설립하게 된다. 이때 조선인에 대한 회유정책의 일환으로 일제는 조선인에 대하여 3개의 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다. 예종석의 대정친목회에 『조선일보』를, 민원식(閔元植)의 국민협회에 『시사신문』의 발행을 허용한 것처럼, 박영효에게 동아일보를 허용하였던 것인데 김성수가 이를 이용하여 『동아일보』의 발행권을 획득한 것이었다.
초기에 장덕수가 주필을, 이상협(李相協)이 편집국장을 맡았다가, 3․1운동에 관여한 혐의로 구속되어 있던 송진우가 석방되자 이후 송진우가 계속 『동아일보』 운영의 중심을 떠맡게 된다. 김성수 역시 고문, 사장, 이사 등의 직책을 두루 거치면서, 송진우와 더불어 『동아일보』를 경영하고, 이를 중심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기 3․1운동에 대한 김성수의 태도는 김성수의 민족주의운동 또는 정치운동에의 관여 양상을 잘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김성수가 경영하던 중앙학교의 운영에 참여하고 있던 송진우나, 현상윤이 이른바 48인으로 참여하고 있으나, 김성수는 학교를 살린다는 명분을 내걸로 향리로 도피함으로써 ‘교묘하게’ 일제와의 정면 대립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의 면모를 스스로는 “내 평소의 성격이 무슨 일이든지 옆에 있어서 일개의 조언자가 되기를 좋아하되 직접으로 그 국(局)에 당하는 것을 즐기는 자가 아닙니다”라고 하여 변명하고 있은, 이는 노선의 토대를 이루고 있던 실력양성론에 기반을 둔 ‘근대화론’과도 관련되어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즉 그는 이미 일제와의 정면 대결은 피한 채, 교육, 기업, 언론 등의 활동을 통하여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먼 장래의 ‘근대화’된 사회만을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제2기(1924~1935) : 자치운동을 비롯한 여타의 민족주의 운동기
앞서 본 바와 같이 1923년까지 기간 동안 김성수는 이후 그의 활동의 토대가 되는 여러 사업들을 차근차근 쌓아나가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민족주의 활동을 펼치게 되는데 그 첫 번째의 활동으로 주목해야 할 운동이 이른바 ‘물산장려운동’이다. 1922년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은 『동아일보』의 입장에서는 1923년부터 생산을 시작하게 되는 경성방직의 시장 개척과도 관련이 있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주도하던 물산장려운동이 경성방직의 시장확장책으로서의 본질이 드러나고, 사회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자 『동아일보』측에서는 바로 물산장려운동을 포기한 채 1923년 말부터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1923년 말부터 은밀하게 진행된 이른바 ‘자치운동’이었다. 자치운동은 민족운동 주도 단체로서의 ‘연정회(硏政會)’ 설립운동으로 은밀하게 추진되었으나, 이 ‘연정회 설립운동’은 그 ‘자치운동’으로서의 본질이 폭로됨으로써 1924년 초에는 그 움직임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 시기의 이른바 ‘자치운동’은 사전에 총독부와 밀접한 협의 아래 진행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치운동’이란 조선 내에 조선인만의 ‘자치 의회’를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본질은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에게 ‘자치’의 환상을 심어줌으로써 조선인을 분열시켜 통치하려는 일제의 의도와, 조선 내에 자치를 ‘실현’함으로써 일제 통치하의 종속적인 자본주의 발전을 이룩하고 이와 아울러 민족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의도가 일치함으로써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924년에 중단되었던 자치운동은 1926년 ‘연정회 부활운동’이라는 형식으로 다시 전개되었다. 그러나 연정회 부활운동 역시 성공하지 못한 채,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 좌파의 위기의식만 가중시킴으로써,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 결성에 박차를 가하는 역할을 한 채 그 종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런 측면에서라면 자치운동을 추진하던 민족주의 우파 역시 신간회 결성에 일종의 ‘기여(?)’를 한 셈이다.
자치운동에 성공하지 못한 동아일보계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우파세력은 이제 신간회의 장악에 주력하게 된다. 1928년에는 경성지회에 송진우가 가입하였고, 이어 김성수도 가입하려 하였으나 이에 위기를 느낀 사회주의자들이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결국 김성수는 신간회에 가입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1929년을 전후하여 신간회는 급속하게 우경화의 모습을 보이게 되고, 신간회 내부에서도 자치운동에 경사하는 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또한 이전부터 자치운동을 회유 수단으로 내걸고서 민족운동의 분열을 시도하고 있던 사이토(齊藤)가 다시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민족주의 우파 세력들의 ‘자치’ 실시에 대한 기대가 또다시 고조되게 되었다. 이를 전후하여 『동아일보』계에서는 또다시 자치운동에 나서게 된다.
1930년 여름에 『동아일보』는 지방 지국 주최로 ‘지방 발전 간담회’를 개최하여 자치제 실시에 대비한 지방의 유력자 포섭에 나섰다. 신간회를 장악하려는 전략을 수정하여 지방에서 ‘자치’ 실시에 대비한 독자세력의 규합에 나섰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자치운동’은 민족주의 우파 세력과 총독부의 의도가 합치함으로써 1920년대 후반에 세 차례에 걸쳐 추진되었으나 결국은 자치의 실시에 도달하지 못한 채 1930년 지방제도의 개정으로 귀결됨으로써 민족주의자가 일제의 의도에 놀아난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시기 김성수를 중심으로 한 『동아일보』세력이 얼마나 총독부와 밀착하여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는가는 김성수의 총독 면담 회수가 13회에 이른다거나, 사이토의 퇴임에 맞추어 김성수가 그의 후의에 감사하는 편지를 즉시 보내고 있다는 사실 등으로도 잘 알 수 있는 일이다.
1930년 조선 내의 ‘자치’가 완전히 무산되고, 1931년에는 신간회가 해소되자, 『동아일보』는 이러한 정세를 이용하여 1931년부터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여름부터 ‘브나로드 운동’이라든지, ‘만주동포 구제운동’ ‘이 충무공 유적보존운동’ 등을 전개하였는데, ‘브나로드 운동’은 하계 휴가로 귀향하는 학생을 이용하여 계몽활동이나 문맹퇴치활동 등을 전개한 것으로, 이는 농촌의 농민들에 대한 영향력의 확대를 노린 것이었다. 만주동포 구제운동, 이 충무공 유적보존운동 등도 언론의 영향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함으로써, 대중들의 민족주의적 정서에 편승한 영향력의 확장을 노린 것이었다고 있다.
1929년 12월부터 1931년 8월에 걸쳐 김성수는 구미여행을 다녀오지만, 이 공백기간에 그가 『동아일보』의 이러한 활동과 무관한 채 여행만 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동아일보』의 여러 활동들은 그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그 정도로 그의 『동아일보』에 대한 영향력은 지대한 것이었다.
김성수는 1932년에 역시 운영난에 빠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한다. 이후 일제 말기까지 그의 활동은 보성전문학교를 위주로 한 것이었다. 1935년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을 포기하고 그 주도권을 일제에 넘겨줌으로써, 일제의 ‘보호망’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게 된다.
․제3기(1936~1945) : 일제 보호 속의 ‘논리’의 왜곡기
1936년 손기정의 올림픽 제패를 계기로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나 『동아일보』가 무기 정간되지만(『동아일보』가 손기정의 유니폼에 달린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실어 발생한 일제의 민족언론탄압사건), 이는 『동아일보』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체육부 기자의 활동이라고나 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을 『동아일보』의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욱이 일장기의 말소에 관여하였던 기자를 퇴진시키는 것을 조건으로 1937년 신문을 속간시킴으로써 『동아일보』는 이제 일제에 투항함으로써 일제의 보호망 속으로 더욱 깊숙이 편입되게 되었다.
이러한 『동아일보』의 동향은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경성방직을 중심으로 한 김연수의 기업활동이 일제에 더욱 깊숙이 예속됨으로써 자본을 확장시키고 있었던 것과 표리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앞서 본 바 김성수의 전쟁협력행위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본격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사변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이시하라(石原莞爾)가 주도하던 전쟁협력단체인 동아연맹(東亞聯盟)의 조선회장에 장덕수가 취임하고, 『동아일보』에서 많은 재정지원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김성수의 전쟁협력행위와 마찬가지로 그의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명백하게 왜곡된 형태의 것이었다. 동아공영권의 사상을 수용함으로써 이제는 침략적인 사상으로 이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해방 후에는 단정 노선으로 정치적 변신을 거듭
김성수의 근대화 노선은 일제 말기 친일활동의 궤도 속에서 일시적으로 ‘왜곡’된 형태를 취하였지만, 해방 후에도 미 군정기와 이승만 정권기를 통하여 그 본질은 유지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방 후 김성수의 근대화론은 단정 노선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인데 이를 각각의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미군정기(1945~1948)
『동아일보』계를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은 해방 직후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와의 합작 요구를 계속 거부하며, 임정봉대(臨政奉戴)만을 내세운 채 칩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군 진주의 소식을 듣자 비로소 세력의 결집에 나섰다. 9월 4일에야 ‘한국민주당’ 발기회를 개최하고,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회’를 개최하여 본격적인 세력의 규합에 나섰던 것이다. 이어 9월 7일 ‘국민대회 준비회’를 개최하여 미군을 환영하며 임시정부의 법통을 지지한다는 뜻을 명확히 하였다.
김성수는 9월 6일 좌익에 의해 주도되던 ‘인민공화국’의 문교부장 취임은 거부한 채 ‘국민대회 준비회’의 상임위원이 됨으로써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였다. 이어 9월 16일에는 ‘한국민주당’이 결성됨으로써 우익 세력의 결집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이때 그 세력 내에 다수의 친일파를 포괄함으로써 ‘임정봉대’ 이외에는 정치활동 재개의 명분조차 갖고 있지 못하던,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국내의 우익에게 있어 미군정은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군정 역시 좌익 세력을 배제한 채 우익을 중심으로 권력을 편성하려 하였기 때문에 양자의 이해관계는 바로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한국민주당 세력은 미군정과 급속하게 결합하였다.
김성수는 9월 29일 미군정의 교육위원으로 취임하였으며, 10월 5일에는 미군정 고문회의의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김성수가 미군정 고문회의의 의장을 맡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는 미군정과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친일경력을 완벽하게 해소하는 구실을 함으로써 정치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어 그는 교육심의위원, 대한체육회 고문 등으로 사회활동도 활발히 수행하게 된다.
더욱이 12월 1일에는 『동아일보』를 중간(重刊)하여 사장에 취임함으로써 이후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유력한 무기를 가지게 되었다. 『동아일보』는 중간 직후부터 반탁 정국에 편승하여 좌익의 ‘타도’에 앞장서게 된다. 그리고 김성수는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의 중앙위원으로 피선되어 반탁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어 12월 30일 한국민주당의 수석총무인 송진우가 피살당하자 바로 김성수가 수석총무로 취임하게 된다. 일제하의 그의 경력으로 볼 때 이는 이례적인 일로서 한국민주당으로서는 대중적인 명망성을 가진 인물이 그만큼 드물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이제 한국민주당은 이승만과도 결탁하게 된다. 친일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보완하기 위하여 미군정을 방패막이로 삼고, 자체의 기반이 취약한 이승만을 등에 업고서 권력에 접근하고자 한 것이 한국민주당의 전략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김성수는 1946년 4월 이승만이 주도하던 독립촉성국민회의 부회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1946년 중반 이후 좌우합작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당원들의 이탈이 빈발하였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10월에는 수석총무를 위원장제로 바꾸고 중앙상무집행위원 30명을 선출하였으며, 김성수는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1월의 입법의원 의원 선거에 김성수는 서울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부정선거로 선거무효 판정을 받고, 재선거를 실시하였으나 여기에서는 낙선하고 말았다. 이로써 미군정의 지원을 받고 있었음에도 한민당이 얼마나 취약한 대중적 기반에 토대를 두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다.
한민당은 지주 자본가들의 결집체로서 일제하의 친일 경력자가 다수 포진하고 있는 정당이었다. 이에 따라 발족 당시부터 해방 직후 민족국가의 수립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일제잔재의 청산과 토지문제의 해결에는 매우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한민당은 대중들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었으며, 이에 따라 미군정을 등에 업고 이승만과 결탁함으로써 그들의 세력을 만회할 수밖에 없었다. 1946년 이후 한민당의 앞에는 ‘반탁’과 ‘단정’의 외길을 달려나가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었다. 1947년 12월에 단정 수립의 불가피성을 강조함으로써 이승만과 더불어 단정 수립의 두 축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은 그들 앞에 전개된 단 한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이승만 정권기(1948~1955)
이승만과 더불어 단독 선거를 주도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에 ‘기여’하였던 한국민주당 세력은 정부 수립 이후에 바로 정국의 주도성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이승만은 권력을 장악하는 데는 크게 기여하였지만, 권력을 유지하는 데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인 한민당 세력을 배제함으로써 그의 권력을 새로이 다지고자 하였다. 이승만은 누구나가 국무총리로 지명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김성수에게 무임소 장관에 입각할 것을 권유함으로써 한민당과 결별하는 명분을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한민당은 귀속 재산의 불하를 통하여 지주계급을 산업자본가화한다는 전략 아래 토지개혁정책을 수용하게 되나, 조봉암(曺奉岩)이 주도하던 농지개혁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됨으로써 자본가로의 변신 의도를 전혀 달성하지 못한 채 토지를 분배당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 아래서 1949년 2월 한국민주당은 신익희(申翼熙)의 대한국민당, 이청천(李靑天)의 대동청년당과 합동하여 민주국민당으로 개편하였다. 그리고 내각책임제 개헌을 시도함으로써 정권의 장악을 기도하였으나 이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1950년의 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국민당은 참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한민당 - 민국당의 실패의 과정 속에서 김성수는 1951년 5월 이시영(李始榮)의 후임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52년 5월 이른바 ‘발췌 개헌’의 파동으로 사임하고 말았다.
사임을 전후하여서부터 그는 뇌혈전증으로 투병생활을 계속하였고, 그 연장으로 1955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국민장’으로 예우되었다. 투병생활이 길어짐에 따라 막상 정통 야당으로서의 민주당의 결성에는 깊이 관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1955년의 민주당 구파의 인맥은 거의가 ‘보성, 동아 인맥’이었으며, 5․16군부 쿠데타 세력도 최두선과 김상협(김연수의 아들)을 내세워 이른바 ‘방탄 내각’을 구성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유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여하튼 한국민주당에 보수 야당의 정통성이 부여됨으로써 김성수는 아직도 야당가의 원조로서 추대되고 있는 것이다.
● 자본 논리에 충실한 자본가
결국 김성수의 활동과 노선에 대한 평가는 단순한 애증의 문제가 아니라, 일제 이후 근대화론과 단정론의 해석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발전의 문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따라 상이한 입장에 설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제 이후 김성수가 추구한 ‘근대화론’이란 일제의 통치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은 채 그 아래서 종속적인 자본주의 발전을 계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데 그 중점이 놓여 있는 논리였다. 이에 따라 대중운동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자본의 안정적인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데 그 운동의 목표가 설정될 수밖에 없었다. ‘자치운동’은 그러한 체제를 만드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또한 일제 말기의 친일활동 역시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는 ‘왜곡’된 근대화 논리로써 설명될 수 있다.
해방 후의 그의 논리 역시 분단이 되더라도 공산화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그들의 물적 토대를 유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세력이 그대로 이전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 형성의 이론적 지주 구실을 선구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그 역할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선에 대한 평가와는 별도로 일제하 그의 친일활동이 남긴 공과는 엄밀히 검토되고 그 성격이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