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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문화동 성당 25주년사에서 발췌
[1] 서 언
신앙의 여명이 이 땅에 들어온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견해는 1784년 9월 북경에서 이승훈(베드로)이 세례를 받았던 때를 가리키고, 둘째 견해는 1796년 주어사에서 강학회가 시작된 시기를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사 연구가들은 이승훈이 세례를 받던 1784년 9월을 한국 천주교회의 설립으로 보고 있다.
유학이 조선의 치국 3대 이념으로 채택되어 있던 이 땅에 천주교의 전래는 오묘하신 하느님의 섭리라 할 수 있겠다. 당시 조선의 사회상은 두 차례의 큰 전란을 치른 후 계급 사회적 모순의 병폐가 드러나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이론 쟁론과 대의명분에만 집착하던 주자학과는 달리 사회를 구제하고 백성의 복리를 실현시킬 새 이념으로서 실학 운동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때 북경을 왕래하던 사신들의 손을 거쳐서 들어온 외국(서양) 서적들-특히 서학 관련 서적-을 통해 일부 지식인들은 학문으로서 천주학과 접촉하게 되었다. 신앙의 선조들은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면서 이를 더 깊이 연구하였고, 유교적 문화의 바탕 하에서 자발적으로 천주 신앙을 수용하여 종교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다른 가치관을 가진 낯선 땅에서 천주교 신앙은 거목으로 크기 위해 엄청난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4대 박해를 통해 순교자들의 피가 이 땅을 적시었고, 교회는 오랫동안 박해의 손길 아래 짓눌렸지만, 그 피의 대가는 헛되지 않았다. 삶 보다는 죽음을, 오류보다는 진리를, 부유함보다는 가난함을 택한 증거자인 초기 신자들의 삶은 오늘의 교회 신자들에게 세상 안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에 본 글에서는 천주교회 도입과 창설,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박해 속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은 초기 교회 신자들의 신앙을 살펴본 후 일제시대 이후의 한국 교회사를 다루고자 힌다. 이 시점에서 한국 교회사를 되돌아보고 , 우리 교회의 뿌리가 어떻게 내려졌고 성장해 왔는지 알아보고 그 의의를 되새겨본다면,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한국 교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며, 개개인의 신앙심을 재점검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신앙의 선조들이 물려준 순교의 열매를 수학하고 그 불씨를 후손에게 전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기 때문이다.
[2] 18세기 후반기의 사회상과 천주교 도입
1) 18세기 후반기의 사회상
천주교가 전래되기 전 조선 후기의 사회상은 격변과 개혁의 움직임이 거세어지기 시작한 시기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큰 전란이후 농토는 황폐해졌고, 지배층 및 기층 민중 속에서도 신분제가 갖는 모순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싹트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주자학은 현실 개혁의 대안이 되지 못한 채 지배층의 집권 유지에만 도움이 되었다.
전란의 후유증이 수습되면서 중앙정부에서도 나름대로 제도의 개선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려 했으나, 어디까지나 양반 중심의 혹은 소수 족벌들의 정권을 안정화시키는 차원에서만 그쳐 버리고 말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를 살펴보면 새로운 농업기술과 농경방식을 통해 종전과 다른 농업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상업과 수공업 역시 전근대적인 억압이 차츰 해소되면서 여기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도 높아져 갔다.
하지만 이앙법1) 등이 도입되면서 대규모의 토지를 경작하는 부농들이 등장하였고, 영세농들은 이농을 강요당한 채 이곳저곳으로 살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또한 상공업의 발달로 일부 도고상인(조선시대의 도매상인)들이 상공업을 지배하고 부를 축척하게 되자 영세상인들은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까지 오르게 되어 갖가지 사회의 모순이 대두되었다.
18세기는 사회적으로도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예로는, 조선 왕조를 지탱하던 신분제도라는 사회 질서가 흔들리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양반과 천민으로 구분되는 신분제도인 반상제로 인해 사회 진출이 금지된 이들 중에서는 족보를 사거나 사칭하여 양반행세를 하게 되었고, 양반 중에서도 정권에서 쫓겨난 몰락한 양반들은 천민과 다름없이 지내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들을 중심으로 신흥종교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운동은 참되고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요구하는 민중의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렇듯 신분제 자체를 부정하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새로운 사상이 요청되고 있었기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변화로는 실학의 대두를 들 수 있다. 조선사회를 지탱하던 이념과 토지제도의 근간인 농업과 신분제도가 흔들리게 되자 당면한 사회 현실에 대응하기 위하여 학문적 반성이 촉구되었고, 이 반성 속에서 새로이 일어난 학문이 실학이었다.
중앙 정부에서도 영·정조시대에는 탕평책을 써서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자 실학의 학풍을 진작시켰지만, 부분적이고 방패적인 개혁책이었기에 모든 이의 공감을 얻지 못하였고, 평민이나 천민들 역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피해자로서 진정한 개혁을 바라게 되었다. 그때 제일 먼저 상황의 긴급성에 눈을 뜬 이들이 오랫동안 정권에서 축출된 남인들이었다. 이들은 당시 역사의 모순과 현실의 개혁에 큰 관심을 가졌으며, 이때 천주교 관련 서적들과 만나게 되었다.
천주학이 제시한 이념은 우주를 주도하시는 한 천주님 아래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것이며, 모든 인간이 천주님의 자녀로서 서로 도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서양에서 전래되어온 천주학은 남인학자 중심으로 깊은 연구와 토의를 거쳐 신앙운동으로 발전되어올 수 있었다.
2) 천주교의 도입
18세기 후반기의 사회를 살펴보면 새롭고 참다운 종교가 강렬히 요청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요청 때문에 천주교는 자발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 접촉을 통해 들어온 천주학을 천주교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상 황을 보면,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새로운 개혁을 꿈꾸던 이들이 진리의 학문을 찾다가 서학과 만나게 되었고, 서학(천주학)에서 가르치는“인간은 전능하신 천주의 모상으로 존엄한 바 신분의 귀천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형제로서 평등하다.”이념
대로의 삶을 이 땅 위에서 건설하고자 하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초창기 서학 연구자들은 궁금하고 의심나는 점에 대해서 토론과 연구를 통해 궁극의 진리에로 나아가는 데 열심을 다하였고, 특히 이벽, 이가환, 권철신, 정약종. 약전. 약용 형제들은 주어사에 모여 교리를 계속 탐구하였다.
이 공동체가 바로 유명한 주어사 강학회로서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이 작은 모임이야말로 천주교 도입의 불씨가 되었고, 이 땅에 신앙으로서 천주교를 뿌리내리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3)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해에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종전부터 교리를 연구해 오던 이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새로운 입교자들을 얻게 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1784년 전반기에 서울 명례동(지금의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새로운 신앙의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이 공동체의 출현은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
을 말하는 뜻깊은 사건이라 하겠다.
천주교가 이 땅 위에 이상적인 삶을 약속하는 진리라는 확신을 가진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일찍부터 『주교요지』나『성교전서』와 같은 교리 해설서를 저술하여 일반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저술 행위는 교리의 토착화를 이미 실시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울러 명례동 김범우의 집에서 종교 집회를 가지면서 비록 가성직제도3) 이었지만 열심한 신앙생활 공동체를 만들어 나갔다. 그런데 1785년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을 통해 명례동 모임자들 전부가 체포되었다. 대부분이 양반이었던 신자들은 방면되었지만 중인인 김범우만은 체포·유배되어 사망하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박해는 100년을 훨씬넘게 계속되었다.
[3] 한국 교회의 박해와 성장
1) 신해박해(1791년, 일명 진산사건)
김범우의 순교에 이어 1791년(정조 15년)에 일어난 신해박해의 원인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의 제사 금지령에 따라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운 데서 시작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족벌 중심의 양반 사회의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서학서의 구입을 금지함은 물론 이미 들어온 홍문관의 서학서도 불태우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시켰다. 이 사건 이후 양반층 신자들 중 일부는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는 스스로 양반의 특권을 포기한 인물들과 아녀자들, 일반 민중만이 남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일은, 1795년 한국 최초의 외국인 성직자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 활동하던 중에 ‘명도회’라는 평신도 단체를 설립한 점이다.
이 단체는 평신도들의 교리연구 및 전교단체로 소수인으로 구성되었는데, 명도회원들은 우선 자신들이 천주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도록 노력하였고 집회를 통하여 교리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은 후 격려하고 협조하면서 신앙의 진리를 신자들과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는 활동을 주로 하였다.
2) 신유박해(1801년)
교회가 평신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되던 중, 천주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하였던 정조가 사망하고 11세의 순조가 등극하자 정순왕후 김씨의 섭정이 실시되었다.
정순왕후는 당파 싸움에서 밀려 귀양간 오빠에 대한 복수로 반대파를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그 반대파인 남인들의 대부분은 천주교를 믿고 있었기에 사학(邪學)을 금한다
는 구실을 붙여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그 결과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한 정약종, 황사영, 유항검, 강완숙 등 교회의 지도적 인물들이 순교를 당하게 되어 교회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 교회는 목자 없는 시대가 되었고, 박해의 손길을 피해 교우들은 각처로 흩어져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신태보, 권기인, 이여진을 중심으로 성직자 영입 운동이 계속되었으나 당시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지배하에서 선교사 파견은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이면서 샴(지금의 태국) 교구의 부주교였던 브뤼기에르 주교는 한국에 파견되는 선교사를 자원하여 1831년 9월 9일 북경 교구에서 독립된 조선 교구가 설정될 수
있었다. 조선 교구의 주교직을 맡은 브뤼기에르 주교는, “지금의 조선 교회에서야말로 사도시대의 교회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 후 1836년 프랑스 성직자가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고 교회는 급속도로 발전해갔다.
3) 기해박해(1839년)
신유박해 이후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기간 동안에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분위기였기에 조선 교회가 견고하게 다져질 수 있었다.
그러나 1839년 당시의 양대 세도가였던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중 풍양조씨를 배경으로 한 이지연 등이 천주교에 관대한 안동김씨 세력을 몰아내고자 천주교를 사학으로 몰았고, 궁지에 몰린 대왕대비 김씨는 다시 천주교 박해령을 내렸다.
이런 정치적인 이유와 함께 조선에 외국인 신부들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정에서는 외국 신부를 처단하기 위해 교우들을 잡아들였던 것이다. 이 박해로 앙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땅 신부, 유진길, 조신철, 김제준 등이 순교하였다.
두 신부는 죽음을 앞두고도 교황청에 조선 교회의 형세를 적어 보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교우 총수는 약 1만 명이었고, 예비자는 600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정하상이 『상재상서』4)를 지어 신앙을 변호하던 때가 바로 이 박해 때였다.
박해의 와중에서도 1845년 8월 17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김대건 안드레아 부제가 상해에서 20리쯤 떨어진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고 주교님의 주례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5) 이것은 조선 교회가 창립된 지 61년 만에 맞은 경사였다.
4) 김대건 신부의 순교와 병오박해(1846년)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해 김대건, 최양업 등을 선발하였고, 김대건 신부가 서품을 받고 페레올 고 주교와 안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입국한 후 몇몇 신도들과 메스트르이 신부의 입국을 주선하다가 1846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김 신부는 온갖 고문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탄압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 무렵 프랑스 군함 세 척이 충청도 부근에 닻을 내리고, 기해박해 때 세 명의 프랑스인 성직자, 즉 앙베르 주교와 샤스땅 신부, 모방 신부를 무고하게 살해한 책임을 물어왔다. 이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에 반발한 조선 당국은 교인들을 잡아 죽이도록 박해를 일으켰으며 김 신부의 사형도 앞당겨지게 되었다.
김 신부도 순교를 각오하고 페레올 고 주교와 교우들에게 하직 편지를 썼었다. 김 신부는 외국인과 교섭했다는 죄목으로 역률(逆律)이 적용되어,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김 신부의 시체는 40일 후 새남터에서 미리내로 안장되었고, 1901년 용산 신학교로 이장되었다가 1951년 혜화동 대신학교에 모시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사상과 영성의 핵심은 이 세상을 창조한 임자와 이 임자에 대한 효애(孝愛)이다. 김 신부는 그리스도교의 하나님(天主)을 ‘임자’로 표현하였다. 임자이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임자이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임자에 대한 절대적 효애를 가르치는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순교를 통해 솔선수범을 보였다.교회가 예수의 고난 중에 세워지고, 또한 고난 중에서 자랐듯이 한국 교회도 고난 중에 자랄 수밖에 없다고 말한 김 신부는 이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동시에 교우들에게 고난 가운데서 용감히 하느님을 증거하고 사랑 속에서 서로 봉사하도록 권고하였다.
5) 병인박해(1866년)
고종의 후견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통상요구와 남하정책에 의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대원군의 부인인 민부인과 남종삼 승지가 이 기회를 신앙의 자유를 얻는 호기로 생각하여 청원서를 올려 프랑스 힘을 빌어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다고 하자 대원군도 호의를 보였으나, 중국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는 편지를 받은 후, 천주교에 반대하던 조씨 문중의 책동으로 천주교의 탄압을 결심하였고 선교사 체포령을 내렸다. 이와 함께 흉년으로 인해 민심이 동요되자 대원군은 천주교의 박해를 강행하였다.
1866년부터 시작된 박해는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 되었고, 프랑스 선교사들과 대략 8,000여 명에 이르는 신자들이 순교를 하여 가장 많은 교우가 죽음을 당하였다.
6) 교우촌의 형성과 전교
거듭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는 끊임없이 성장하여 갔다. 성령께서는 박해 과정을 통해서 공동체를 흩으시고 세상에 파견하셨다. 그래서 달레는, “박해의 폭풍이 오히려 복음의 씨를 날렸던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박해가 계속되고 있던 그 당시 천주교 신자들의 행동은‘믿음을 증거하는’참된 신앙인의 모습이었다. 서로 복음을 권면하고 전교하는 데 힘을 다하였고,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같은 공동체 안에서 따뜻하게 형제로서 받아들여 주었다.
또한 박해를 주도한 사람들 앞에서도 복음이 진리임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았고, 심지어는 감옥에 갇혀서도 서로 위로하고 전교하며 아껴주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다. 하루 아침에 재산과 가족을 잃고 관리들의 추적을 피해 산간벽지로 들어 가더라도 다시 그곳에서 교우촌을 만들어 전교하였고 서로 돕고 살았다.
박해의 상황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토록 극한상황에서도 가능했던 사도적 활력을 들 수 있겠다. 이 사도적 활력으로 말미암아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다른 어느 삶의 조건보다 우선순위에 놓을 수 있었다고 본다.
즉,‘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진 체험’을 보존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 노력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전국 곳곳에 흩어진 교우들과 공동체인 교우촌을 형성케 하였다. 이 교우들은 신분상 천민이 아니었고, 오히려 신유박해로 몰락한 양반 교우의 가족들도 꽤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신분에 관계없이 서로를 교우라고 부르면서 유대감이 깊고 특별한 형제애를 지닌 교우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노동을 천시하던 당시 사회 풍조와는 달리 그들은 옹기의 생산과 판매를 공동으로 하면서 이익도 공동으로 분배하는 생활을 하였다. 박해에서 오는 궁핍을 덕행실천의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이런 공동체의 모습은 외교인들까지 감탄하게 하였고, 이것이야말로 행동하는 신앙인들의 살아서 증거하는 신앙의 전교 모습이라고 하겠다.
[4] 신앙의 자유 이후의 현대 교회
1) 신앙의 자유 획득운동
한국 천주교회는 설립된 직후부터 최대한의 관심사를 신앙의 자유 획득에 두고 끊임없이 노력하였지만, 정교(政敎)의 분리를 경험해 보지 못한 조정과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천주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성취하기 위하여 피땀을 흘리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 예로 박해 시대의 1만여 명에 이르는 순교자들의 투쟁을 들수 있으며, 1886년의 한불조약 이전에 종현에 성당터를 구입하고, 부흥골에 신학당을 세우는 한편, 서울에 고아원을 설치하여 운영한 과정으로 볼 수 있겠다. 드디어 1899년에 조인된‘교민조약’7) 통해 신앙의 자유가 공인되고, 1904년에 체결된‘선교조약’을 통해 보안되었지만 1899년에 이르러 한국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2) 교회의 발전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후 교회는 더욱더 발전하게 되었다. 국내에서는 성직자 양성사업이 본격화되었으며 명동 대성당의 건축도 이루어졌고 출판문화 활동도 활발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더불어 샤르트르의 성 바오로 수녀회와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한국 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한편 1911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조선 교구에서 대구 교구가 분할되었으며, 조선 교구의 명칭도 서울 교구로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의 발전은 한국인 신자들과 외국인 선교사의 수고를 통하여 이루어 졌다고 볼 수 있겠다. 1937년 한국인 교구장이 관장하는 전주 교구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는 한국 교회가 선교사 위주의 교회 운영에서 한국인에 의한 교회의 관리라는 새로운 단계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교회의 증설과 함께 한국 교회는 각종 신심활동, 문화사업, 사회사업에 힘을 써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나타내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앙의 전통을 이어주는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점이다. 1925년 한국 79위 순교복자 시복식과 1931년의 조선 교구 설정 100주년 경축대회를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3) 교회의 고뇌
만주사변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한국 교회의 발전에 어두움을 던져 주었다. 전쟁 기간 동안 많은 신도들은 징집과 징용을 강요당했고, 교회 시설은 침략전쟁의 도구로 징발되고 선교사들의 상당수는 연금되거나 추방 당하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박해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가를 소리 높여 부를 수 없었고, 성당종의 공출을 걱정해야 했으며,‘황군의 무운장구’를 위해 강요된 기도를 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1942년에는 노기남 신부가 주교로 성성(性聖)되어 처음으로 한국인 주교가 탄생하는 기쁨을 맞을 수 있었다.
[5] 민족 분단기의 천주교회
1) 1945년 해방 이후의 교회
1945년 8월 15일 일제에 시달리던 한국 민족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한국 천주교회에도 이 감격의 여파는 커다랗게 와 닿았다. 이젠 우리말로 마음 놓고 기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밝은 전망을 제시하여 해방의 기쁨은 전개되었지만, 해방 직후 한국 교회는 남북 분단을 겪게 되었다. 남한의 교회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지만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은 비록 종교의 자유는 공언했으나, 교회 활동에 대한 제약을 가해 나갔다. 따라서 북한 교회에서는 선교의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한편 미군정이 존재하고 있었던 남한에서는 좌익과 우익간의 대립이 심하여 교회에 대한 종교를 부정하고 유물론을 신봉하던 공산주의의 위협이 심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 교육을 강조하였으며, 그리스도교적 원리를 밝히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2) 교회와 민족의 시련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공포되고, 북한에서는 평양정권이 성립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민족의 분단은 심화되어 갔고, 남한의 교회는 순조로운 발전이 진행되었지만 북한에서는 혹심한 탄압이 가해지게 되었다. 더욱이 6·25동란의 발발로 인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게 되었고, 남북한의 교회는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그 후 휴전이 성립되자 한국의 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가톨릭 액션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 되어 갔고, 많은 수도회들이 한국에 진출하여 한국의 교회사업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신심운동과 순교자 현양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교회는 전쟁과 실정(失政)으로 인한 절대 빈곤의 상황을 스스로 타파하기 위해 신용협동조합운동을 일으켜 신도들의 자립의 의지를 키워주었다. 가톨릭 노동 청년회가 창설된 때도 이때이다.
이처럼 교회는 내적으로 성숙되어 갔지만 자유당 정권의 장기집권과 독재적 성향의 강화로 또다른 고통을 당해야 했다. 경향신문의 폐간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4·19와 5·16을 치른 교회는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고 새로운 선교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3) 새로운 선교 방향의 전개
1962년은 한국 교회사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던 해이다. 한국 교회가 독립된 정식교구로 승격되었으며, 이 해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한국 교회의 쇄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의 결과로 성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성서 말씀을 생활화하기 위한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더불어 공의회 정신에 의해 시행된 한국어 미사는
신도들에게 전례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와 같이 1960년대에는 신도들의 많은 증가와 새로운 교구들이 설정되었으며, 김수환 서울 대교구장이 추기경으로 서임된 점을 중요한 점으로 들 수 있겠다.
이처럼 한국 교회는 우리 민족 사회의 문제에 대해 능동적으로 관심을 갖고 올바른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을 계속하던 중 1970년대를 전후해서는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와 천주교 정의 구현 전국 사제단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사회 정의를 실천하려는 교회의 본격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전개되었지만, 교회와 유신정권 사이에서 불편한 관계를 빚었고, 복음 선포 방법에 관한 이견이 제시되기도 했었다.
1980년대의 한국 교회는 새로운 시대의 전개와 함께 우리 민족의 구원을 위한 자신의 존재를 재점검하며, 교회의 나아갈 길을 재확인하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서 1980년대의 한국 교회는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사업을 전개 하였고, 분단된 민족의 통일을 위하여, 침묵하는 북한 교회를 위하여 기도회를 마련하였다. 무엇보다도 뜻 깊은 행사로는 1984년 5월 6일에 있었던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시성식, 1989년의 세계 성체대회를 들 수 있으며, 이 행사들을 통해 발전하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전 세계에 알릴 수 있었다.
이제 2천년대를 바라보는 90년대 중반의 한국 교회는 한반도의 통일과 민족 복음화가 과제로 되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초대 공동체의 모습을 구현하고자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장기적인 안목하에 전개시키고 있다.
[6] 맺는 말
이 땅에 진리의 빛이 들어오는 데는 평신도들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그들은 연이은 박해 속에서도 증거하는 삶의 모습을 통해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본론에서 살펴본 대로 당시 조선 사회는 하느님의 섭리하심으로 신학문에의 호기심과 이를 현실에 실천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기에 신앙의 씨가 뿌려질 옥토가 될 수 있었고, 서학의 연구에서부터 시작되어 천주교 신앙의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되었다. 초기 교회 신자들은 주어사·천진암 강학회와 같은 교리 연구단체를 만들어 신앙
을 내 것,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였으며 복음을 이웃에 전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였다.
『주교요지』와 『성교전서』와 같은 교리서를 신자들이 직접 저술하였고, 이를 사본으로 베껴서 주위 사람들에게 권하면서 전교에 힘썼다.
이렇듯 성장한 신앙을 통하여 목자나 교회 지도자가 없는 상태에서도 초기 교회 신자들은 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가성직제도이긴 하지만 대세를 주었으며, 공소를 유지하였고 사제 영입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처럼 당시의 평신도의 역할은 자주적이며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자율적인 사도적 실천과 더불어 교우촌 안에서‘나눔의삶’을 실천함으로써 복음의 정신대로 살았던 것이다. 또한 일제시대 때는 정교 분리의 원칙 하에서‘국권 회복운동’과‘애국 계몽적 성격의 교육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조직적인 사도직 활동이 국내외 신자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 졌다. 해방 이후에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사회참여 운동인 학생운동과 가톨릭 노동청년회 및
레지오 마리애가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으며, 바티칸 공의회 이후인 1968년 7월 23일에는 한국 가톨릭 평신도 사도직 중앙협의회가 창립되어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6·25동란 이후 남·북한으로 분단된 상황하에서 북한의 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현대사가 반쪽 역사이듯 우리 교회 역시 반쪽뿐인 역사로 진행된 셈이다. 그러나 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개방되는 날을 소망하며 그때를 위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의 소명이다. 우리가 기나긴 교회사를 알아
야 할 까닭은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손길 속에 시대적인 계시를 읽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교회 역사 안에서 나타나는 그 빛은 우리들의 잘못을 비춰주고 앞으로 교회가 참으로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밝혀 준다.
단순히 신앙인 공동체만 잘 되는 노력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아픔을 하느님 손길이 되어 치유하고 올바른 평신도 사도직을 수립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발전·성장해 가는데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들의 몫인 것이다.
기도하고, 탐구하고, 저술하고, 실천하면서 전교했던 신앙의 선조들은 복음대로 살면서 진리를 생명으로써 증거 하였다. 그분들은‘Accipe domine(님이여, 받아들이라!)’부르심에 전인적인 응답을 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살 수 있었다. 우리도 그분들처럼 살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고, 순교 성인들의 통공에 힘입어 오늘의 교회도 종교적 이기주의에 종말을 고하며 이 땅에 그리스도의 평화를 가져오는데 그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열린 교회의 모습으로 거듭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본다.
참 고 문 헌
⦁ 한국 가톨릭 대사전, 한국 교회사 연구소, 1985
⦁ 샤를르 달레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상⦁중⦁하, 분도 출판사, 1979~1980.
⦁ 박도식, 순교자들의 신앙, 유니버셜 문고 28, 1981.
⦁ 이기우,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에 관한 교회론적 고찰-라틴아메리카의 기초공동체 운동을 중심으로, 1987.
⦁ 가톨릭 디다케, 한국 천주교회사란 무엇인가, 서울 대교구 우체국, 1982. 9월호
⦁ 가톨릭 디다케, 한국 천주교회사(Ⅱ), 서울 대교구 우체국, 1982. 10월호
⦁ 가톨릭 디다케, 한국 천주교회사(Ⅲ), 서울 대교구 우체국, 1982. 11월호
⦁ 가톨릭 디다케, 한국 천주교회사(Ⅳ), 서울 대교구 우체국, 1982. 12월호
⦁ 가톨릭 디다케, 한국 초대교회의 선교와 교리교사, 서울 대교구 교육국, 1984.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