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여치(중국 한나라의 창업자 유방의 아내)
어제 저녁 아내와 함께 남산 밑의 한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방학이지만 자유로운 시간이 많지 않아 서로 밥한끼 먹기 어려웠습니다. 이야기 도중에 '여후본기'에 관한 내용을 서로 나누면서 역사에서 참 안타까운 삶을 살다가 한 여인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한 남자의 부인이 되었는데, 그 남자는 술을 즐겨하며 가정의 삶에 큰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그나마 친정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여유로웠기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사람좋아하고 술을 좋아해서 늘 길바닥에 누워있기 일쑤인 남편과 사는 여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결과적으로 유방과 같이 한 나라의 창업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공부하느라, 온갖 프로젝트를 하느라... 또 전공이 이상해서 해외로 나돌아야 했던 제 모습을 돌아봅니다. 한 해 평균 해외에서 호텔밥을 먹은 날 수가 120일이나 되는 삶... 사실 아내를 신뢰하는 정도가 컸기에 집안 일은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고, 특히 하나 뿐인 딸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아버지였습니다.
밖으로 나도는 남편 유방을 바라보며 또 어린 두 자녀을 생각하며 여치의 삶은 많이 고달펐으리라 생각해봅니다. 관상만으로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지만, 그 관상이 맞다는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나마 겨우 맡게된 정장일도 별로였습니다. 주변의 관리들과 사이도 별로 좋지 않고,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에도 실패하고, 술만 들이키는 남편... 그나마 밭에서 일하다 만난 한 노인의 덕담에 기대를 해봅니다.
두 아이가 장차 귀하게 될 사람이다는.....
남편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는 여인은 자식에게 집착할 확률이 높다는 교육심리학자 리차드 핑커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습니다.
제 아내의 딸에 대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엄마의 탄압과 압제 속에서 잠도 제대로 못자고 고통받는 아이가 안스러워 여러번 심하게 다투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엔 부드럽게 보여도... 아파트 18층에서 텔레비젼을 창밖으로 던진 사람입니다. 새벽이었고, 지나는 사람이 없었기에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딸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대안을 갖기에 너무 분주했기에 큰 관심을 갖지 못한 사람이 무작정 간섭하는게 싫었던 아내는 딸의 교육에 대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집착을 보이며 남편의 개입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천하의 주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막연한 기대를 가졌기에 남편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어느정도 양보할 수 있었지만, 큰 일이 무엇이라고 도망중에 자식을 버리는 남편에게 가정에 대한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여치는 무조건 자식이
'귀한 자'가 되어 자신의 서러움을 달래줄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하급관리 시절 남편의 잘못으로 인해 대신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도, 항우에게 붙잡혀 모욕과 치욕스러운 고통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남편의 도움으로 위기를 벋어나는 것보다 자식이 귀하게 되어 안락과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다는 기대가 컸기에 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냅니다.
마침내 천하를 얻은 남편, 그리고 만인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여성이 된 여치... 그러나 그녀 앞에는 더 큰 고통이 다가옵니다.
천하를 도모하기 위한 거대한 목표라는 이유로 가정과 자신에 대해 무관심했던 남편이 사랑을 하기 시작합니다.문제는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고 다른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이 사랑을 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시실을 알고 여후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더욱 큰 충격은 그 여인의 아들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에서 멀어진 여인이, 그동안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식을 바라보며 견뎌왔던 여인이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 까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긴긴 밤들을 지새웠을까요? 남편을 위해서, 아니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을 위해서 어떤 일도 했던 여후는 목숨을 겁니다.
저는 아이를 키우는 제 아내가 딸을 위해 무슨 일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아이가 고3일때 매일매일 직접 요리를 해서 기숙사로 학원으로 나르고, 주말에 집에 오면, 제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답니다.
하늘이 그녀의 눈물을 불쌍히 여긴것 같습니다. 마침내 그녀가 바라던 자신의 아들이 '귀한 존재'가 됩니다. 거추장 스럽고 일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남편이 마침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제 아내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여후와 같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제가 조금 힘든 병에 걸려 몇 해 고생을 했는데, 아내가 그렇게 집착하던 딸을 내려놓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아무튼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 여후는 그 집착을 광적인 분노로 표현합니다. 한 때 위협이 되었던 남편의 사랑의 대상인 척부인을 잔인하게 '돼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아들에게 위협이 되는 자는 누구든 '독살'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모든 인생을 걸었던 자식이 멀어지는 고통을 받습니다. 사랑이 지나치면 집착이 되고 이 집착은 사랑하는 대상을 고통스럽게 만든다는 것이 교육심리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입니다.
여치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자식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으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모두 었었다고 생각한 그 시점에 자식으로부터 멀어지는 견딜수 없는 고통을 받습니다. 그녀의 사망원인은 상실감에서 오는 화병이라는 것이 현대 의학자들의 진단입니다.
여후는 그렇게 자신이 집착했던 모든 것을 잃은 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2천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 악녀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습니다.
어제 우리 부부는 자칫하면 유방과 여후와 같이 살았을 지도 모른다는 아슬함에 서로 놀라고 반성했습니다. 저는 유방과 같이 애인을 만들지 않은 것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아마 제 아내는 저까지도 인간돼지를 만들었을 겁니다.
한 여인의 안타깝고도 억울한 삶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사랑은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특히 자녀에 대한 지나친 사랑이 부모의 삶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 여치의 삶에서 배웁니다.
참 다행스러운 저녁이었습니다. 여후에게는 미안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