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폭력적 탄압에 몸부림치는 처절한 저항
1948년 7, 8월에 걸쳐 거의 한 달 동안, 『민전』 산하의 당과 사회단체들은 남북 대의원을 선거하기 위한 남조선의 연판장운동에 온 역량을 투입하여 소기의 목적을 훌륭히 달성해냈다. 하지만 미군정과 남조선의 군정경찰 그리고 분열주의자들은 살인적인 탄압소동을 벌렸다. 남조선 전지역에 비상경계태세를 선포하고 미군 기동부대를 38선 전역으로부터 제주도 끝까지 배치하여, 군정경찰과 반동테러단들을 총동원하여 검거선풍과 살인적인 폭력테러를 들씌웠다. 8월 20일 하루 동안만 하더러도 남조선 전역에서 1370명이 검거되었고 연판장 선거의 전 기간을 통하여서는 수만 명을 체포 투옥 당했으며 또한 수천 명이 테러로 살상 당했다고 했다. 이로써 많은 역량이 손실되었고, 그에 따른 조직선의 노출도 생겨 운동조직에서 많은 허점도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남로당의 지도부는 연판장운동이라는 큰 투쟁을 치르고도 그 역량보존과 조직선의 복구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투쟁 후에도 ‘트’는 그대로 그 ‘트’였고, 조직선은 그대로 그 선이었다. 군당 연락부 레포의 ‘트’와 ‘선’도 그대로였다. 이처럼 복구되지 못한 조직과 선을 그냥 그대로 가지고 9월에 들어서자 당 중앙조직에서는 공화국 선포를 선전하는 ≪공화국기 게양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라고 지령했다. 연판장투쟁과 같은 큰 투쟁을 한 다음에는 비판과 자기비판으로 반드시 그 투쟁에서 나타난 우점(優點)과 결점(缺點)을 파악하고, 노출되고 파괴된 조직선을 복구하는 일이 바로 당면문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투쟁이 성공적이라 해서 그대로 계속 밀고 나가기만 하면 우와 결이 혼동되며, 노출점이 바로 파열구로 전변되는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공화국기 게양투쟁≫은 면사무소의 깃발게양대, 초등학교의 깃발게양대 두 곳 또는 어느 한 곳에 공화국기를 게양하는 투쟁이었다. 대개 깃발 제작은 면사무소•초등학교 소재지의 마을에서 했고, 그 동내에는 경찰관 지서도 함께 있다. 소재지 마을이라 해야 20~30호 정도이고 국도를 따라 취락이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이런 조건에서 깃발제작의 광목천과 물감을 가지고 제작 장소로 정한 집에, 마을에서 얼굴이 잘 알려진 청년들이 들락날락 한 사실은, 몇 사람 안 거쳐 드러나게 되어있다. 비록 조심해서 지서의 경찰관에게 들키지 않도록 했지만 사건이 일어나고 문제가 될 때는 경찰의 수사가 바로 들어온다는 것은 별로 어려운 짐작은 아닐 것이다. 수사가 어렵지 않으니 곧 수배가 되고 따라서 투쟁에 참가한 성원은 도피해야 한다. 그러면 그 성원이 관련된 조직은 깨지고 만다. 어쭙잖은 투쟁 한 번에 조직은 만신창이로 되고 만다. 혈기왕성한 아까운 청년 성원이 일다운 일도 못하고 도피하는 성원으로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당 조직에서는 이 ≪공화국기 게양투쟁≫을 계속하라는 것이다. 이 투쟁을 9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계속하게 된 것이다. ≪공화국기 게양≫을 해도, 그것은 별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애써 제작한 공화국기를, 또한 애써 밤중에 게양했지만 날이 새자마자 발각되고, 비록 깃발을 내리기 어렵도록 깃발을 내릴 줄을 풀기 어렵도록 묶어 매달았지만 단칼에 풀어지고, 그도 저도 안 되면 깃대 자체를 톱으로 썰어 눕히면 끝나는 일이다. 정말 한심한 생각이 들만큼 수고에 비해 선전효과는 없었다. 나는 이 투쟁에 깃발 제작을 맡아 참가했는데, 깃발을 올렸으니, ‘바로 날 찾아봐라!’라고 하는 격이다. 그래서 경찰수사를 일단 피하지 않을 수 없어 군당 연락부 아지트를 떠나야만 했다. 군당 조직에서 나를 『밀양군농민위원회』 조직지도원으로 소환하여, 『군 농민위』 아지트가 있는, 연판장투쟁 때 「강동사람」들과 만났던 상동면의 상도곡리의 그 ‘트’로 갔다. 그 ‘트’는 『군 농민위』 위원장이신, 김씨 성을 가진 택호로 ‘옥산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 40대 중반의 어르신이었다. 눈이 서글서글하고 마을에서 좋은 일이건 궂은일이건, 마을일이건 개인 일이건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일하시는 어른으로, 이 가근방에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존경받고 있는 어른이었다.
마을 한가운데 소달구지 두 수레가 서로 마주 지나갈 수 있는 큰길이 훤히 틔어있는데 동네 밖으로 향해 오른편은 구릉이어서 아래쪽은 황토밭이고 위쪽은 다복솔이 촘촘한데 황토가 군데군데 맨몸을 드러내고 있는 솔밭이었다. 이 길의 왼편은 논이 펼쳐져 있고 그 아래에는 개천이 흐르고 있다. 마을은 길의 오른편에 있는데 ‘옥산 어른’의 집은 가운데쯤에 있었다. 큰길에서 산 쪽으로 수레 길이 나있는데 그 길가의 언덕바지에 공동우물터가 있다. 우물은 쪽박으로 물을 퍼 담을 수 있는 야트막한 샘이지만 그 언덕의 아래에 뿌리를 박고 있는 향나무 밑에 지하수가 퐁퐁 소리가 나듯이 솟아나오고, 그 물은 깊이 한 자 정도이고 폭이 석자 쯤 되는 샘이다. 샘에서 넘쳐나는 물과 거기에서 쌀이나 남새 등 다른 먹새를 씻은 허드레 물이 흘러내려 그 수레 길 밑으로 난 수로로 해서, 또한 큰길 밑으로 묻은 공굴 토관으로 흘러 개천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 샘에서 길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언덕에 비스듬하게 도로 올라가는 경사진 좁은 길이 나있는데 그 길을 올라가면 그곳으로는 귀한 돌로 쌓은 축대가 있다. 그 축대 위에 안쪽으로 5미터 들어가서 아담한 3간 초가집이 있다. 방문 앞에는 두어 자 폭의 좁은 툇마루가 놓인 방이 두 간, 서로 나란히 있고 그 왼편 한 간은 부엌이다. 그 부엌은 두 방 중에서 왼편 방에 군불을 때는 역할만 하는 것 같다. 오른편 방은 그 오른편 뒤 안에 아궁이가 있다. 바로 이 오른편 방이 내가 거처할 방이었다. 나는 끼니는 옥산 어른의 집에서 하고, 거처는 이곳 초가집의 오른편 방, 바로 작은방이라고 불리는 방에서 자는 것이다. 옥산 어른은 이 동네 상도곡리 마을과, 거기에서 아래쪽으로 1킬로미터 좀 못되는 거리에 있는 하도곡리 마을을 합쳐 도곡리 전체의 마을 구장을 맡고 있었다. 이 도곡리는 김씨 일족의 마을이어서(관향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처럼 타성의 사람들은 ‘옥산 어른’이라고 부르고, 동네 사람들은 ‘옥산 아재’라고 불렀다. 나는 이 마을에서는 이 ‘옥산 어른’ 집의 머슴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머슴이라지만 그냥 일하는 흉내만 내고 실제는 다원에서 노출을 피해서 이곳 ‘트’로 피신 온 것이다. 때때로 나무지게를 지고 나무꾼으로 행세하며 군당 연락부의 지도원 동지 ‘청도샌님’과 엄광에서 또는 안당골에서 접선하고 상황을 분석토론하곤 했다. 『5.10선거』 이후, 남조선의 정세는 미국의 신식민지 예속정권을 창출해나가는 과정에서 폭력적 탄압기관의 체제를 정비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단」 등을 비롯해서 김두한, 시라소니 이성순, 「양호단」 등이 살인적 폭력을 휘둘러댔고 온 남조선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었다. 이 폭력단은 그들에게 걸리는 날에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폭력을 당하거나 불구가 되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경우이고, 타살, 익살, 교살, 압살, 생매장도 했다. 특히 「대동청년단」, 「서북청년단」의 테러는 1948년 하반기에 이르자 그 폭력성은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중 정치깡패 김두한은 이승만의 양아들이라면서 그 폭력은 무소불위로 수많은 애국자와 민주인사들을 죽였다. 이 시기에 나의 고향 밀양에서도 극우폭력은 다른 지방에 질세라 그 격렬함이 극에 이르렀다. 이들 중 안영이라는 자는 술자리에서 술이 얼큰하게 오르자 그 당시 단장면에서 부린 자신의 폭력행각을 무슨 무용담처럼 추억하면서, 그의 특기인 사람의 생매장을 한 광경을 실감 있게 나에게 토로한 바가 있다. 그의 입을 통해서 여러 폭력배들의 살인행각의 무용담도 들었다. 이러한 살인적 폭력 테러에 의하여 민족분단을 반대하고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민족해방운동세력은 날이 갈수록 허물어지고 조직이 와해되고 붙잡혀 맞아 죽어갔다. 경주 내남면에서는 「대동청년단」의 이협우(李協雨)라는 자가 좌익운동을 했던 농민들에게 다가가서 잘 봐준다면서 토지문서를 잡은 다음, 이들을 산골짝에 끌어가서 학살하고 그 토지문서로써 그 땅을 자기 소유로 등기하여 엄청난 부를 챙겼다. 그 돈으로 국회의원을 세 번이나 해먹었다. 4.19 이후 그의 살인이 재판을 받아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박정희의 군사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석방되어 그 더러운 잔명을 유지했다. 날이 갈수록 탄압은 혹독했고 테러는 살인적이었다. 따라서 운동조직은 와해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투쟁은 격렬해졌다. 1947년 4월 3일에 제주도에서는 전도민이 경찰의 폭력적 탄압과 이북깡패집단인 『서북청년단』의 횡포에 대항하여 궐기해 나섰다. 8.15해방 이후, 북조선의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많은 친일지주가 토지개혁과 친일민족반역자 처단에서 당하게 되자 이들 세력이 이남으로 넘어와 「서북청년단」을 조직하고 이남의 혁명세력을 탄압하는 데 앞장서 나갔다. 게다가 이승만을 비롯한 반동세력은 공공연하게 제주도는 월남 이북사람의 땅으로 한다는 말로써 「서북청년단」을 부추겼다. 여기에 일제경찰에서 동포의 탄압에 앞장섰던 친일 배족의 경찰들이 미군정의 군정경찰로 변신하고, 일제의 관리를 하던 자들이 군정 관리로 되어 사복을 채우며 민중을 수탈했다. 이런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집회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출동한 기마경찰의 말굽으로 어린이가 치이는 사고가 나자 민중들이 돌을 던지며 항의시위를 했다. 경찰은 시위하는 군중에게 총을 쏘아 시위하는 민중을 6명이나 죽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도당은 이 시위를 조직적 민중저항으로 발전시켰다. 그 결과 3월 10일에 전체 민중의 약 95% 이상이 경찰의 발포에 항의하여 총파업을 단행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정은 조사단을 파견하여 진상조사에 나섰으나 경찰의 발포에 대한 조사보다 민중의 편에 선 남로당을 탄압하는 데만 집중하고 제주도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관리의 간부를 전원 육지인으로 교체하고, 육지에서 경찰과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 단원들을 대거 동원하여 섬에다 끌어들였다. 당시 미군이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를 ‘붉은 섬(Red lsland)’로 규정하고 ‘제주도 인구의 70%가 빨갱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미군정에 의해 동원된 군정의 조병옥 경무부장을 중심으로 한 응원경찰과 새로 온 제주도 도지사 유해진의 호위병 역할을 하던 『서북청년단』 단원은 3·10 총파업 이후 이듬해 4·3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약 1년간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하고, 2,500여명의 민중을 구금하고 고문했다. 이에 대해 저항조직을 지도하고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350명의 조직된 무장대가 제주도내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했다. 이들은 경찰과 서북청년단의 무자비한 민중탄압을 중지하고, 남조선 단독선거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했다. 사태를 경찰력과 『서북청년단』의 힘으로 수습하지 못하게 된 상황으로 발전하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와 군정장관 딘은 남조선 국방경비대에 진압작전의 출동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과 무장대 측 김달삼 사이의 ‘4·28 협상’으로 경비대와 무장대는 한때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는데 합의하기도 했으나 「서북청년단」이 일으킨 ≪오라리 방화사건≫으로 결렬되고 말았다. 방화사건 직후 김익렬 연대장이 현장 조사를 벌려 우익청년들의 소행임을 밝혀냈지만 미군정은 이를 무시하고, 지상과 공중에서 방화 현장을 입체적으로 촬영하여 『제주도의 메이데이』라는 기록영화를 만들어, 이 사건을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했다. ≪오라리 방화사건≫ 이틀 후 5월 3일 미군정은 경찰 중심의 진압작전을 걷어치우고, 국방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했다. 미군정이 강경진압으로 돌아선 것은 5.10단독선거를 앞두고 제주도사태를 조기 진압한다는 것으로 주한미군사령관 하지가 결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8년 5월 10일의 남한 단독선거에서 제주도는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고, 다음달 23일에 재선거를 실시하려는 미군정의 시도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재선거마저 무산되자 미군정은 브라운을 제주지구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강경진압을 계속했다. 이런 과정에서 5월 20일 국방경비대원 41명이 탈영하여 무장대에 가담했고, 6월 18일 경비대 박진경 연대장이 부하 대원의 손에 의하여 암살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 후 얼마동안 소강상태였으나 남과 북에 정권이 성립되고 나자, 이승만 정권은 그 해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여 이와 함께 본토의 군 병력을 증파하고 11월 17일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앞서 9연대 연대장 송요찬은 중간 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를 폭도로 간주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고, 중간 산간마을에 대대적 진압작전이 벌어졌다. 1948년 11월부터 중간 산간마을에 대한 강경진압으로 마을의 95% 이상이 불에 타 없어지고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은 중간 산간마을 주민 약 2만 명이 산으로 들어가 무장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명이라도 없는 경우에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하여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이른바 '대살(代殺)'을 자행하기도 했고,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을 집단학살이라는 동포로서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했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로 교체 되었지만 강경진압은 계속되었다. 한 마을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400여명의 주민이 집단으로 총살당한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세화•성읍•남원 등의 마을에서는 무장대의 습격으로 민가가 불타고 주민들이 희생되기도 하였다. 제주도의 이 인민항쟁은 남조선 국군 반란으로 이어져 여수•순천의 인민항쟁으로 발전되었다. 1948년 10월에 여수주둔의 남조선 국군 제14연대의 병사들은 제주도인민항쟁을 진압하라는 동원령을 반대하고 동족을 살육하라는 출동을 거부하고 반란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에 참가한 병사는 약 3,000명이었다. 이 폭동에 대해 여수의 민중은 병사들의 봉기에 적극 호응하였고, 무장한 민중까지 합하면 무장인원은 5,000~6,000명에 이르렀다. 이 이후부터 남조선의 산야에는 유격대가 조직되어 새로 만들어진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이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이 유격대의 지역이 아닌 곳에서는 민중에 대한, 그리고 당 조직에 대한 탄압은 더욱 살인적으로 극심해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