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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남북 공동성명 |
6.15 남북공동성명 |
1.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적 해결 |
1.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 |
2.서울과 평양간의 상설 직통전화 가설 |
2. 1국가 2체제의 통일방안 지향 |
3.남북적십자회담에 대한 적극 협조 |
3. 이산가족, 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 |
4.상대방에 대한 중상비방, 무장도발 포기 |
4. 제반 분야의 협력, 교류 활성화를 통한 서로의 신뢰 회복 |
5.남북간 다방면의 교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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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남북조절위원회 구성 |
5.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 개최 합의 |
왜 박정희 대통령은 이런 말도 안되는 공동성명에 합의 했으며, 일부에서 박근혜에 대해 걸린 저주라고 떠들어 대는 6.15공동성명에 대해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선 7.4공동성명을 전후한 남북이 처한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과거에 일어난 일을 현재의 관점으로 판단하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닌가?
● 1968년
# 1월 21일 - 1·21 사태: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기습 미수사건.(김신조 간첩일당 청와대 피습사건)
# 1월 23일 -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발생함
# 1월 29일 음력 1월 1일 - 베트콩이 남베트남을 상대로 구정공세를 시작하다.
# 4월 8일 향토예비군 창설
# 10.30-11.2 :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이승복어린이 살해사건)
# 11월 6일 - 월남 평화협상 시작(제네바)
● 1969년
# 10월 15일 - 베트남 전쟁: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미국에서 반전 시위를 벌이다.
● 1970년
# 11월 2일 - 조선로동당 제5차당대회(4대군사노선의 완성선언)
북한은 1962년 12월 조선노동당 제4기 5차 전원회의에서 국방력 강화를 위해 '전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간부화', '전지역의 요새화', '전군의 현대화' 등 4개항을 채택하여 68년에는 완성단계에 접어들어 이를 점검하고자 1.2사태를 비롯한 울진삼척등 수많은 무장공비를 남한에 침투시켜 사회혼란을 획책 하였다.
당시 남한의 실정은 경제적으로도 북한보다 훨씬 뒤쳐졌고 군사력은 말할것도 없었다.
M1소총과 칼빈으로 무장한 육군과 예비군, 불과 몇백대의 M47천차, 월남전 참전을 댓가로 지원받은 소수의 F4 팬텀기가 최신예 기종을 이루던 공군 군사력의 격차는 북한과 비교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북한군은 ‘전인민의 무장화’로 현역은 물론, 노동적위대, 붉은청년 근위대등 수백만의 인민이 AK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소련제 전차와 장갑차, 포병전력, 최신예 미그기로 무장을 하여 수적인 면은 물론 질적인 면에서도 비교가 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마치 6.25직전의 남북한 전력이 재현된 것같은 상황이었다.
국제적으로도 당시 월남전에서의 지지부진한 실적으로 수십만의 반전데모대들이 미국을 뒤흔들어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더라도 대규모 미군의 파병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절대적으로 열세한 군사력과 경제력, 여기에 미군의 지원마저 불투명한 당시의 상황은 언제 전쟁이 벌어져 북한에 점령될지 모르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거의 며칠에 한번씩 북한은 무장간첩을 보내어 우리의 대비태세를 시험하며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남북한간의 군사적 안정이 필요했던 실정이었고 7.4공동성명보다 더 불리한 합의를 하고서라도 시간을 벌어야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朴正熙 대통령이 남북조절위 예비회담 대표에게 써준 메모를 보면 북한과의 회담에 대한 대비가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덕분에 우리는 북한의 위협을 덜받고 충분한 시간을 얻어 지금의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다.
남북적십자 본회담時 박정희대통령의 지침
1. 평양에서 있었던 일은 공식·비공식을 막론하고 모두 보고해야 한다.
2.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할 때는 사전에 전략을 세워놓고 해야 한다.
3. 북한 위정자들과 우리가 핏줄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誤算이다.
4. 우리 적십자사는 인도적 사업이라고 보나 북한은 정치적 사업으로 본다.
5. 북한 요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 정치적이다.
6. 우리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7. 술을 마실 때도 상대방이 공산당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8. 북한 사람들과는 어떤 자리에서도 감상적으로 흐르지 마라.
9. 북한이 남한 언론을 비판하면 자문위원들은 즉각 반박하라.
10. 대표단과 자문위원 사이는 긴밀한 협의를 하되 매일 저녁 결산토록 하라.
1979년 1월29일, 朴正熙 대통령이 남북조절위 예비회담 대표에게 써준 메모는 이렇다.
北傀의 陷井
1. 南韓 政府 不認: 北傀外廓團體와 同一格下
2. 調節委 技能無力化
3. "大民族會義"로써 統一戰線戰略試圖
*外軍撤收論議
*連邦制지지논의
4. 我側戰力增强計劃中斷, 現狀凍結, 裝備導入禁止
5. DMZ內 工事中止: 南侵땅굴防害 없이 工事해내려오자는 것
6. 平和攻勢로 美軍撤收促進
7. 앞으로 中斷時 責任轉稼
메모를 읽어보면 朴正熙 대통령은 북한 김일성의 노림수를 정확히 읽고 있었고 이를 한 장의 메모지에 더도 덜도 없이 깔끔하게 요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메모를 해설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북한은 이번 회담에 이런 함정을 파놓고 이런 전략으로 나올 것이다.
첫째, 그들은 한국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정부를 그들 외곽단체의 하나쯤으로 취급하려고 한다.
둘째, 그들은 조절위원회의 기능을 無力化시키려고 획책할 것이다.
셋째, 그들은 남북간의 모든 단체가 참여하는 大民族회의를 열자고 주장하여 통일戰線전략을 밀고 나올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회의에서 외군철수 및 연방제 지지를 논의하자고 덤빌 것이다.
넷째, 그들은 한국군의 전략增强계획을 중단하고 현상태로 동결하도록 요구하고 장비 도입도 하지말라고 억지를 부릴 것이다.
다섯째, 비무장지대안에서 공사를 하지 말도록 요구함으로써 그 안에서 자신들이 남침용 땅굴을 파는 것을 방해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여섯째, 평화공세로 주한미군 철수 분위기를 띄울 것이다.
일곱째, 회담이 중단될 때 그 책임을 우리쪽에 전가하기 위한 함정을 팔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이 6.15공동선언을 할때는 모든 상황이 7.4공동성명 당시와는 정 반대였다.
우리가 세계10위권의 경제대국을 이룬데 비해 북한은 수백만명이 굶어죽어가는 세계 최빈국으로서 언제 망해도 이상할 것 없는 절대 우위의 상태에서 6.15 공동선언을 한 것이다.
즉 똑같은 칼이었지만 박정희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살리는데 사용했고 김대중은 나라를 망하게 하기위해 사용한 것이다.
1국 2체제의 연방제 문제만 제외하면 7.4공동선언이나 6.15공동선언이나 내용에 별 차이가 없다.
김정일과의 6.15공동선언에 대한 담화가 아니라도 7.4공동선언만 해도 부친인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를 구하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 사용했던 박근혜에게 남겨진 굴레이다.
6.15 선언은 박정희대통령의 7.4공동성명을 모방한 똑같은 형태의 칼이다.
똑같은 형태의 칼을 사용했던 두사람 모두 유명을 달리하고 이제는 7.4공동선언과 6.15라는 두 개의 칼이 박근혜의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똑같은 칼이라도 주방장이 사용하느냐 살인강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용도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지금은 제대로 사용되어지지도 않은 두 개의 칼이 선반위에 놓여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를두고 왈가왈부 하는것은 개가 칼을 든 강도를 보고 짖는게 아니고 선반에 놓여진 칼을보고 짖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지만 우리 주변엔 선반에 놓여진 칼을보고 짖는 개들이 너무도 많은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