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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제 94편
=====94:1
보수(報讐)하시는 하나님 - 여기서 '보수'는 단수가 아닌 복수형 '네카모트'(*
)가 쓰였는데 이것은 '완전한 복수'를 의미하는 강조사로 볼 수 있다. 하나
님은 피억압 자를 구원하시고 억압자는 완전한 복수, 곧 철저한 형벌로 징벌하시는 분
이시다. 복수는 하나님의 것이니 우리는 그분의 복수하심을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때에 갚으리로다"(신 32:35, 이외에도 사 35:4;겔
25:15 등을 참조하라).
=====94:2
일어나사(* , 힌나세) - 문자적인 뜻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이
다. 마치 앉아계신 하나님에게 일어나기를 요청하는 듯한 이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
현은 악인에게 심판 내리기릍 소원하는 의인의 절박한 요청 의사를 반영하고 있다
(76:9;사 ) 3:13). 그러한 요청을 하는 근거는 하나님이 '땅의 심판자'(창 18:25)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요청하는 문맥에서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또 다른
표현으로는 '쿠마'(* ), '우라'(* ) 따위가 있다(7:6).
교만한 자(* ,게임) - '일어 서다','쳐들다'는 의미의 가아'(* )와
연관을 맺고 있는 이 용어는 하나님에 대항하며 자신을 쳐드는 자들을 묘사할 때 사
용된다(123:4;욥 40:11,12;사 2:12;렘 48:29). 이들의 죄의 내용은 헛된 교만뿐 아니
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롤 거절하는 완악한 태도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롤 거절할 때 그들의 대인 관계는 왜곡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뚱이나 이
웃의 사정과 관계없이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계획을 짜고 그것을 진헹시키려고 온
갖 술수를 동원하기 마련이다.
=====94:4
저희가 지꺼리며 오만히 말을 하오며(* , 야비우 예다
베루 아타크) - 두 동사 '예다베루'(* ), '야비우'(* )가 한 목
적어 '아타크'(* )를 갖고 있는 형태이니, 정확히 직역하면 '그들은 교만한 것
들을 내쏟꼬 말하였다'이다. '내쏟다'는 샘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어인데, 여기서는 샘이 그 속에 가득한 물을 내쏟듯이 그 속에 가득한 교
만을 독설로 내쏟는 악인의 모습을 그리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이 두 동사는 교만
한 자가 거침없이 그 교만을 말로 토해내는 모습을 묘사할 때 흔히 동시에 사용되고
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
다..."(삼상 2 : 3).
=====94:5
저희가 주의 백성을 파쇄하며 - '파쇄 하며'에 해당하는 '다카'(* )는 흔히
상징적으로 사용된다. 욥이 그의 친구들의 말로 눌림을 당할 때 이 용어가 사용되었고
(욥 19:2), 연약한 자가 왜곡된 판결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고통 당하는 장면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잠 22:22). 본절에서는 그와 유사하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지도자들, 곧 악인들의 부당한 법집행으로 인해 억압 당함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되
고 있다(143:3).
=====94:6
과부와 나그네를 죽이며 고아를 살해 하며 - 법 집행 관리들의 대내적인 폭정의 한
예를 고발하는 대목이다. 약자 보호는 강한 자 그리고 법 집행 관리의 의무였다. 특히
과부, 나그네, 고아 등은 하나님의 특별한 돌봄의 대상이었기 때문에(82:3) 그들을 향
한 학정이야말로 배나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 같은 학
정은 특정한 한 시대뿐 아니라 이스라엘 왕국 전 역사 속에 일반화되어 있었다(사
1:15;렘 7:5;겔 22:7;미 3:1-4;말 3:5 등). 여기에서 '죽이며', '살해하며' 등의 서술
적 표현들은 악한 관리들이 과부, 나그네, 고아로부터 생명과 같은 그들의 생필품을
늑탈하거나 문자 그대로 그들의 생명을 해하기까지 한 것을 뜻한다. 즉, 힘없는 계층
인 사회적 약자들이 가진 소량의 소유마저 빼앗기 위하여 살상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악행자들의 비열하고 잔혹한 실상에 대한 암시로 보면 적절하겠다.
=====94:7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생각지 못하리라 -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선과 악에 대해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이다(10:11;73:11;
욥 22:13). 이 같은 해석은 당시 이스라엘의 악한 관리 및 지도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있었던 것으로 간주케 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있었으나 믿음
이 없었던 이유와 아울러 악행에 대한 보응을 즉각적으로 받지 않은 이유로 인하여 악
행을 행하고 이 같은 판단을 내리게 된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 고
백은 무신론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선행을 하기보다는 가증한 소행을 일삼는 자
들을 비난하고 있는 성경 구절이 이것을 간접 지지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1).
=====94:8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 '우준한 자들'(* , 보아림)은 '동물처럼 잔인하
게 되다'는 뜻인 '바아르'(* )의 분사형이다. 이 사실을 고려하여 재번역하면
이렇다. '네 민족들 가운데서 마치 동물들처럼 잔인하게 행동하였던 자들이여'. 몇몇
영역본들은 '보아림'을 '(가장) 잔인한 자들'(ye brutish, KJV) 혹은 '가장 미련한
자들'(dullest, RSV)로 번역하고 있다. '백성'으로 번역된 '암'(* )을 항상 이스
라엘로 국한할 필요는 없으나 여기서는 이스라엘에게 적용되고 있다.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 '모든 지혜의 근원인 바 여호와 경외하기를 언제나
배우겠느냐'는 뜻으로 이해된다(19:9;25:12). '언제나'로 번역된 '마타'(* )
는 어떤 상태나 상황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음을 암시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본 구절
은 악인이 여호와 경외하기를 잊고 악행한 기간이 몹시 길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구절
로 보아야 한다.
=====94:9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 하나님
자신이 그 같은 기능을 소유하지 않으신 채 듣는 기관을 창조하거나 보는 기관을 창조
하실 수는 없겠다는 것이다. 본절은 하나님이 인간과 유사한 기능을 가진, 인간과 유
사한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도리어 창조주 하나
님께서는 그의 피조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월하며, 따라서 그 어떤 악행도 하
나님의 목전에서 속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에 그 의도가 있다. 하나님은
악인의 공개적인 악행뿐 아니라 숨겨진 악행 및 속삭이는 음모까지도 보고 들으신다.
=====94:10
열방을 징벌하는 자...징치(懲治)하지 아니하시랴 -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임의적으
로 평행적 대구를 만들기 위하여 본절을 두개의 의문문으로 나누고 원문에 존재하지
않는 '그가 알지 못하시랴? '라는 구절을 후미에 삽입하고 있다(He that chastiseth
the heathen, shall not he correct? he that teacheth man knowledge, shall not he
know? , KJV;Does he who disciplines nations not punish? Does he who teaches man
lack knowledge?, NIV).그러나 굳이 이러한 변형을 시도하기보다는 개역 성경의 번역
처럼 원문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본 번역을 좀더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인류의 위대한 교육가, 곧 그들이 소육하고 있는 온갖 지식을 부여하신 자가
그들을 징책하고, 바로잡고 훈계할 권리가 없겠느냐? ' 이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도덕적 징치를 암시하는 말이다.
=====94:11
여호와께서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 아시느니라 - 원문상 본절은 '왜냐하면'의 뜻을
지닌 접속사 '키'(* )를 첫 단어로 하는 하반절과 그 앞의 상반절로 나눌 수 있
는데 우선 상반절을 번역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들을 아신다'이다. 그 뜻은 동물
처럼 잔인한 악인들이 즐겨 상상하는 바처럼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모르
시거나 무관심하신 것이 아니며 잠시 동안 그 행위를 징벌하지 않고 두시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가장 은밀한 생각들까지 읽고 계신다는 것이다. 바울은 본 구절을 고전
3:20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 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하반절은 모호한 듯하지만 명사 및 대명사의 성(性)을 분명히 알
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우선 하반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그들
은 헛되기 때문이다'. 여기의 대명사 '그들'은 '생각들'이 아닌 '인간'으로 보아야 한
다. 왜냐하면 대명사 '그들'의 성(性)은 남성이어서 이 대명사가 가리키는 명사 역시
남성이어야 하는데 여기에서 '생각들'은 원문상 여성으로 되어 있고 '인간'은 남성으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복수이고 '인간'이 단수인 문제는 '인간'을 대표
단수로 보면 풀린다. 따라서 하반절의 적절한 번역은 '왜냐하면 인간들은 헛되기 때
문이다'가 되겠다. 특히 여기서 '헛됨'으로 번역된 '하벧'(* )은 '호흡',
'연약함' 따위를 의미한다. 이런 사실을 재종합하여 본절 전체의 의미를 규정하면 이
렇다. '인간은 호흡처럼 연약하고 그 능력이 제한된 존재이다. 심지어 그의 생각까지
제한되어 있고 빈약하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유한한 생각들을 아시고 헤아리신
다'. 결국 본절은 9,10절에서 제기된 물음에 대한 답변에 해당한다(Anderson).
=====94:12
주의 징벌을 당하며(* ,테야스레누) - 원형인 '야사르'(* )는
'가르치다', '교훈하다' 혹은 '징책하다'의 두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 전자의 의미
로 볼 때 상반절은 하반절과 동의적 평행구를 이루게 된다. 후자의 의미로 볼 때도 무
리는 없는데 이것은 단기간의 징책은 신적(神的) 교훈의 일부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
이다. 8-11절에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악인의 행위의 우매함올 비난한 저자는 이제 방
향을 바꾸어 징책을 받고 있든 받지 않고 있든 간에 하나님의 법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복된 자임을 강조하고 있다(신 8:5;욥 5:17).
=====94:13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 나게 하사...평안을 주시리이다 - 원문을 따라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악인을 위한 구덩이가 다 파질 때까지, 역경의 날들로부터
그에게 평안을 주신다'. 보통 '구덩이'(* , 사하트)는 짐승을 잡기 위한 구덩이
혹은 지하 세계(음부)를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상징적 의미인 '완전한 보복' 혹은 '완
전한 멸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49:9, Anderson). 또한 '역경의 날들 동안'이란
하나님이 악인의 행위를 아직 심판하지 않으셔서 악인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인이 고통
을 당하고 있는 시기를 가리킨다. 말하자면 본절은 비록 악인이 완전한 심판을 받는,
완전한 멸망의 날이 아직 이르지 않아 고통이 계속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
을 따라 사는 자는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94:14
여호와께서는...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 - 여기에는 5절의 탄원에 대한
응답이 요약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일시적인 삶의 어려움은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그 영원한 유산을 잃지 않게 되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배신하
지 않으시고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한편,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
들을 택한 것을 기뻐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택한 하나님 자신의 명예 때문이다. "여호
와께서는 너회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삼상 12:22).
=====94:15
판단이 의로 돌아가리니 (* ,아드 체데크 야슈브 미쉬
파트) - 직역하면 '판결이 의에게로 귀결될 것이다'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판결은 결
국에는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명백히 드러내는 내용이 될 것이라
는 의미이다. 좀더 포괄적인 범주에서 이 의미를 풀면 인간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시며 처음에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나 결국은 하나님께서 의의
편에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영향력 때문에 죄로 인해
오염되긴 했지만 세상 속에는 의의 형태들이 존속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생의 행위
들에 대한 엄정한 평가가 내려지고 마는 것이다.
마음이 정직한 자가 다 좇으리로다 - '마음이 정직한 자'란 하나님께 정직하며 인
간을 대함에 있어서 공평한 자를 가리키나 문맥상으로는 '의로운 자'가 되겠다
(7:10;119:7). 한편 '의로운 자'가 좇아야 할 대상은 생략되어 있으나 '의'인 것이
분명하다. '의로운 자'가 '의'틀 좇아야만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의의 편에 계셔서
'의'의 손을 들어 주시기 때문이다.
=====94:16
누가 나를 위하여...치며...칠꼬 - 기자는 본 시편 앞부분에서 악인이 그의 땅에
침입해와서 누구의 저지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유산을 유린했던 사실을 상기한 바 있
는데(3-6절) 바로 그 시점에서 저자는 하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자신을 위해 일어나
서 그 대적을 물리쳐 줄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같이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적시
에 개입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강조적으로 밝히기 위해서이다.
=====94:17
적막 중에 처하였으리로다(* , 키므아트 솨크나 두마) -
직역하면 '곧 침묵 속에 거하였올 것이다'이다. 여기에서 '침묵'은 문맥을 고려하고
또 본 용어가 '스올' 혹은 '무덤' 따위로 번역된 115:17 등을 참조할 때 '무덤'으로
번역해도 무난하겠다. 벌게이트역(Vulgate)이나 70인역(LXX)도 '음부' 혹은 '지옥'으
로 번역하고 있다. 흔히 성경은 무덤을 '조용한 곳', '침묵의 땅'으로 묘사한다(암
8:3 참조).
=====94:18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 - 이것은 갑자기 당한 상황이 아닌 점진적으로 되어온 최악
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말하자면 어뗬 위험한 일을 갑자기 당하여 지르는 탄성이
아니라 인내로 견디어 오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극한 상태에 이르러서 내뱉은 절망
적 탄성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진, 거의 무덤 앞에 이
른 듯한 상황'이라고 해도 되겠다(Barnes).
주의 인자하심(* ,하스데카) - '당신의 견고한 사랑'이라고 번역하면 그
의미가 더 확실히 와 닿는다. 원형 '헤세드'(* )는 언약적 용어이다. 즉, 하나님
과 그 백성이 맺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배려와 사랑을 묘사할 때 흔히 사
용되는 용어이다. 하나님께서 환난의 때에 고통당하는 그의 백성을 고통으로부터 구원
하시는 까닭은 바로 이 언약 때문이다(20:3;41:3;119:117).
=====94:19
내 속에 생각이 많을 때에(* , 베로브 사르아파 베키르
베) - 직역하면 '나의 안에 나누인, 혹은 수많은 생각들이 있는 가운데'이다.
이것은 혼란스럽고 근심스럽고 짐이 되는 많은 일들 때문에 헛되고 무익할 뿐 아니라
목적이나 방향도 없는 무수히 많은 공상과 잡념이 오고 가는 마음 상태를 가리킨다.
(욥 4:13;20:2).
주의 위안이 내 영흔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 여기서 '위안'으로 번역된 '탄후메이
카'(* )의 원형 '탄후밈'(* )은 강조 복수 명사로서 하나
님(욥 15:11) 혹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급된 위안(욥 21:2;사 66:11;렘 16:7)을 말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복잡하고 쓸데없는 생각에 가득 차
서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당신께서 직접 혹은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그 혼란을 제거하
시어 그 마음에 평안을 주신다는 것이다.
=====94:20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하는(* ,요체르 아말 알래호
크) - 직역하면 '율법에 의하여 해악을 꾸미는'이다. 율법의 그늘 속에 그 불의를 숨
긴 채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가리킨다. 즉, 율법을 교묘히 이용하여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체하면서 오히려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를 고려할 때 본구절은 '율법
을 대항하여 해악을 도모하는'으로 의역해 볼 수도 있겠다.
악한 재판장(* , 키세 하우오트) - 여기서 '악한'으로 번역된 '하
우오트'(* )는 '파멸', '멸망이란 뜻도 내포한다. '입을 쩍 벌리고 있다
'(5:9)는 의미로도 번역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이 용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삼킬듯이
달려드는, 그래서 그 상대를 삼켜 멸망시키는 어떤 존재에 대한 묘사를할 때 사옹되는
용어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재판장'으로 번역된 '키세'(* )는 원래 '심판
의 좌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문맥상 이 용어는 거짓된 정의의 가면을 쓰고 그 가
진 권력을 남용하여 예배 공동체를 압박하는 악한 지도자를 묘사하는 용어로 보면 되
겠다. 그 가진 권력을 남용하며 예배 공동체를 억압 멸망시키려는 악한 지도자는 하나
님의 큰 진노률 유발시키기 마련이다(사 10:1-4).
=====94:21
저희가 모여...치려 하며 - 이에 해당하는 '야고두'(* )는 전쟁 용어인
'공격하다', '치다' 등의 뜻인 '가다드'(* )에서 유래된 단어이다(렘 5:17;
미 4:13). 그러나 본 구절은 전쟁에 대한 암시를 준다기보다는 기자를 멸망시키기 위
하여 그 대적들이 마치 전쟁을 일으키듯 소란을 피우며 덤벼드는 모습을 묘사하는 구
절로 보면 되겠다(Barnes).
무죄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려야 하나(* , 담 나키 야르쉬우)
- 문자적인 뜻은 '결백한 피를 정죄하다'이다. 이것은 악한 재판장이 이득을 얻기
위하여 무죄한 자에계 사형을 선고하는 것을 가리킨다(왕상 21: 8-16;마 27:4).
=====94:22
...이시요 - '예히'(* )는 흔히 '...가 되시며'로 번역되며 완벽한 확실성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본절의 경우 그런 의미로 쓰였다. 말하자면 '확실히...가 되시 며'가 정확한 번역이다.
=====94:23
끊으시리니...끊으시리로다 - 70인역(LXX)에서는 동일한 이 두 동사 중 하나를 생 략한다. 아마 70인역 역자는 맛소라 본문(MT)이 중복 오사(誤寫)된 것으로 본 듯하 다. 그러나 본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철저한 보응이 기필코 실현되리라 는 확신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반복법을 통해 시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있다 하겠다.
시편 제 95편
=====95:1
우리 구원의 반석 - '반석'(* , 추르)은 하나님의 별칭으로 잘 알려진 용어이
다(18:2,31,46;19:14;28:1;78:35;89:26;사 2:8;합 1:3). 또한 이 용어는 하나님께 대
한 의존성 및 안전성욜 시사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본 구절은 '그 반석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즐거이 부르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인 '루아'(* )는 '즐거운 소리
를 내다', '개가를 올리다'는 문자적 의미를 지니며 여기서는 '신복의 예틀 표하자'란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사울의 대관식 때에 그 백성의
층성의 외침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동사이기 때문이다(47:1;삼상
10:24;습 3:14;슥 9:9).
=====95:2
그 앞에 나아가며 - '나아가며'에 해당하는 동사 '네카마드'(* )는 '앞을
향하여 재촉하며 민첩하게 나아가다' 혹은 '만나다'는 의미를 지니며, 본문에서와 동
일한 의미로 사용된 곳은 미 6:6이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가 기꺼운 마음으로
민첩하게 나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자세라 하겠다(Perowne)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 여기서 '즐거이 부르자'는 1절에서와 마찬가지
로 커다란 소리를 내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을 근거로 하여 '시'를 '나팔'로 번역하는
역본도 있다(70인역). 그렇다면 나팔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뜻이 되겠는데 큰
무리는 없는 번역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시'에 해당하는 '지므라트'(* )는
'노래', '찬양' 외에도 '기악'이라는 뜻도 내포하지만, 대다수 영역본들은 개역 성경
과 유사한 번역을 취한다(psalms, KJV;songs of praise, RSV).
=====95:3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 여기서 '대저'는 '키'(* )로서 1,2절에 언
급된 기쁜 마음과 큰소리로 감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접속사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크신'에 해당하는 '가돌'
(* )은 일반적으로 '위대한'을 뜻하지만 이상 신들이 대비되고 천지 창조(4,
5절) 및 목자 개념(7절)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유일한 참신 및 창조주 그리고 그의
백성의 목자되시는 자애롭고 크신 권능의 하나님을 암시하는 형용사로 보면 되겠다.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 이방 민족이 섬기는 모든 헛된 우상들보다 크신
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출 15:11;18:11). 주의할 점은 본 구절을 표면적으로 이해
하여 기자가 이방 신을 어떤 실제적인 힘을 지닌 실재(實在)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
고 판단하는 일이다. 기자는 '이방신들도 어느 정도 힘이 있지만 하나님이 더 힘이 세
다'라는 식의 상대적 비교 차원의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절대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95:4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 아쉐르 베야도
메흐케레 아레츠) - 직역하면 '그의 손들 안에 땅의 깊은 처소들이 있으며'이다. 여
기서 '손들 안'이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제 아래'를 뜻한다. 그리고 '찾다',
'탐색하다'의 뜻을 지닌 '하카르'(* )에서 온 '메흐케레이'(* ), 곧
'깊은 처소'란 외관상으로는 알 수 없고 파보아야만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땅 속 가장
깊은 곳 따위를 가리킨다. 결국 본 구절은 인간의 일상적인 관측 능력 밖에 있는 모
든 것들도 하나님의 다스리는 영역 안에 있다는 것, 곧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가
르치고 있다.
=====95:5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 여호와의 자연에 대한 통치는 그가 그것을 만
드셨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없이 그것의 주인은 바로 그분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한
다.
=====95:6
오라(* , 보우) -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
들임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기자는 가장 겸손한 부복(俯伏)과 예배에로의 초청을 통
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를 주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던 사실을 새
롭게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지으신(* , 오셰누). 직역하면 '우리의 조성자'이다. 이것 역시 하
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인격적 언약 관계롤 암시하는 표현이다. 모세의 다음과 같은
꾸지람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그들 간의 언약 관계를 망각한 사실을 겨냥하고 있다.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롤 내신(조성하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
다"(신 32:18).
무릎을 꿇자 - '굽혀', '경배하며'와 의미상의 동의어로서 여호와를 향한 존경과
복종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Anderson).
=====95:8
므리바 - 원어상의 뜻은 '다툼(혹은 겨룸)의 장소'틀 의미하며, 출 17:1 이하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혹함으로써 하나님을 격노케 한 후 모세가
그 장소에 붙였던 이름이다(106:32;출 17:7). 출 17:7을 근거로 하여 혹자는 '므리바'
와 '맛사'는 한 지역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는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이 두 곳은 서로 다론 곳이라고 주장하지만
(North),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는 힘들다. 적어도 '므리바'는 시온 광야 안에 있던 가
데스 바네아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여진다(민 27:14;신 32:51;겔 47:19;48:28).
광야 - 물이 고갈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두
번째로 불평했던 가데스 인근 지역인 신 광야를 뜻한다(민20:1,Perowne).
맛사(* , 마사) - '시험하다', '입증하다'를 뜻하는 '나사'(* )에서 유
래된 용어로 '시험'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Johnson). 70인역(LXX)은 '유혹'으로 번
역하고 있다(신 6:16).
=====95:9
나를 시험하며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지 혹은 그들의 필
요를 공급하실 수 있는지를 의심하여 하나님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았던 광야 시대의
한 사건을 암시하는 표현이다(출 17:1;민 20:1). 그 후 세대들은 이 사건을 불신의 전
형으로 보았다(78:18,41,56)
나의 행사 - 기적 같은 구원, 심판 따위를 포함한 이스라엘 민족을 유지함에 나타
난 하나님의 모든 행동들로 보아야 한다(Perowne, Anderson). 광야에서 물을 선물로
준 한 사실로만 국한시키는 학자도 있으나(Boylan) 그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여
기서 '행사'에 해당하는 '파알리'(* )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78
편).
=====95:10
내가 사십 년을 - 히 3:9에 본 구절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곳에서는 본 구절과 앞절
을 연결시켜 놓고 있다 :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 구절 앞에는 의미상 '그러므로'
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근심하여(* , 아쿠트) - 혐오, 구역질 따위의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강
한 표현이다.
마음이 미혹된(* , 토예 레바브) - 직역하면 '그 마음이 헤매이고 있
는'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방황은 그들의 내적 방황에 따르는 필연적인 징
벌 때문이었음을 반영한다. 동일한 표현을 107:4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적 방황'
이란 다름아닌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됨으로 인해 스스로 갈피를 못잡고 헤매는 상태
를 가리킨다.
내 도를 알지 못한다 - 이스라엘의 광야 방황의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따라서
본 구절 앞에는 '왜냐하면'이 생략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도'(* ,데레
크)의 문자적 의미는 '길', '도로'이며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쏨을 퉁해 계시된 지침
혹은 보다 포괄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
직 곧고 평탄한 한 길 곧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한 것, 그것이 바로 구불구불한 길과
같은 광야에서 방황한 이유이다.
=====95:11
내 안식 들어오지 못하리라(* , 임 예보운 엘 메누
하티) - 여기서 '임'(* )은 부정사(not...) 역할도 지니는 말이나 조건문을 이끄
는 접속사(if...)로도 사용된다. 여기서 본문을 조건문으로 번역해 보면, '만일 그들
이 나의 안식으로 들어간다면'이 된다. 히브리 어법에서 그 맹세의 일부 내용이 생
략된 이 같은 조건문은 강한 부정과 맞먹는 의미를 지닌다(Alexander). 그렇다면 이렇
게 번역될 수 있겠다. '그들은 결코 나의 안식으로 들어올 수 없으리라.' 또한 '메
누하티킥'(* ). 곧 '나의 안식'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처소를 뜻하지만
(132:8,14) 문맥상으로는 광야에서 방황 이후 있을 안식의 터전으로서 약속된 땅, 가
나안이 적절한 의미이다(신 12:9). 약속된 가나안 땅은, 영적 안목에서 보면, 하나님
의 언약을 준수하고 순종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그렇다면 결코 그 안식의 땅으
로 들어갈 수 없다는 본절의 경고는 주님 재림 때까지 오고 가는 모든 세대 중 하나님
의 말씀을 거역하는 모든 인류를 겨냥한 경고이기도 하다. 이처럼 본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말씀은 심판의 경고임에 분명하지만, 이와 아울러 여호와의 메시지를 경
청하여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말도륵 이스라엘 회중에서 권면하는 적극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M. A. Tate).
시편 제 96편
=====96:1
새 노래 - '새로 지은 노래' 라는 뜻보다는 '날로 새롭게 북받쳐 오르는 노래',
'다함 없이 늘 새로운 노래'를 뜻한다 하겠다(33:3;98:1;144:9;사 42:10 참조). 하나
님의 관심과 사랑이 끊임없고 아침마다 새롭듯이(애 3:22,23), 하나님께 대한 찬양도
늘 새로워야 한다는 의미이다(Anderson). 한편,
온 땅(* , 칼 하아레츠)은 그 위에 거주하는 인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
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나 여기서는 시인이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3, 10절 참조).
=====96:2
그 이름을 송축하며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이름이란 그 존재의 속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창 25:19-26 강해, '이름 짓기' 참조). 따라서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라는 깃은 그분의 속성을 알고 그분께 찬양을 돌리라는 말이다. 하나님
의 속성을 밝혀주는 대표적 이름으로는 '엘로힘'(* )이 있는데 이것은 만물
의 창조주와 보존자로서의 하나님을 지칭하고, 또 다른 이름 '엘 솨다이'(* )
는 자연을 은혜로 복속시키는 능하신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지칭하며, '예화'(*
)는 언약에 신실하신 은혜로운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그리고 '체바오트 예화' (*
)는 조직화된 천군 천사들에게 옹위되시어 전 우주를 통치하는 전능
하신 이로서의 하나님을 각각 지칭한다. 이외에도 하나님의 이름들 및 그에 따르는
의미들은 풍성한데 이러한 것들을 더 풍성히 알고 있다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그 내
용이 더 풍성하고 깊고 올바른 찬양이 될 것이다(출 3:7-15강해, '하나님의 이롬' 참
조). 특히 본 문맥은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하고 있다.
구원(* , 예슈아토) - 문자적인 뜻은 '그의 구원'이다. 본 용어는 원
래 위험 가운데 있는 그의 백성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암시할 때 주로 사용되
지만 여기서는 좀더 근본적 의미의 구원, 곧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까지 암시한다.
따라서 본절이 하나님 찬양을 위해 초청하는 대상은 그 구원의 혜택을 받게 되는 모
든 성도가 되겠다(Barnes).
=====96:3
영광(* , 카보드) - 본 용어는 뒤에 나오는 '기이한 행적'과 평행을 이루는
용어로 사용되었다(9:1). 이 두 용어는 여호와의 창조사역(136:4 이하)과 그의 구원
사역(2절)을 찬양하는 문맥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66:2). 본절에서 저자는 여호와
의 구원 사역 및 창조 사역의 경험을 세상 온 백성과 함께 나누도록 이스라엘 백성들
에게 요청하고 있다(사:66:18).
=====96:4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 '광대하시니'에 해당하는 '가돌'(* )은 주로 '크다'
로 번역되며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묘사하는 말로도 많이 사용되었다(창 45:7;출
14:31;32:11;신 9:29;삿 2:7 등). 문맥상 하나님의 창조 사역 및 구원 사역, 바로 그
것이 위대하다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 이 같은 표현은 본 시편 기자가 다른 이방 신들의
존재에 관해서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헛
것이었음이 분명하다(5절). 이방 신들의 허탄함과 무용성에 관해서는 성경의 여러 곳
에서 말하고 있는데 그 절대적 무용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곳은 사41,
44장이다. 한편, 다신교적 배경을 안고 있는 이방 문서들 속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이
다른 신들보다 우월함을 인정하는 글귀가 발견된다(Kraus).그러나 본 시편 기자가 그
문서들을 참조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비교가 아닌, 절대 참신이신 하나님을 강
조적로 증거하기 위하여 이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굳이 다른 문서를 참
조했다면 대상 16:25이 그 출처일 것이다.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극진히 찬양할 것이
요 모든 신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96:5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 열방의 신들은 인간이 만든 것임에 비해서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그의 능력과 위엄을 온 세상에 드러내신다.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본절에서 시인은 하
나님과 우상을 비교하고 있는데, 그 비교는 절대적이요 극한적 차이를 부각시킨다
(Alexander).
=====96:6
존귀와 위엄(* - , 호드 웨하다르) - 이 한 쌍의 용어들은 왕적 권위
를 묘사할 때 사용되곤 한다(21:5;45:3104:1;111:3).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두 용
어를 세상의 왕을 수종드는 신하들처럼 왕 되신 하나님을 수종드는 존재를 상징하는
표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보다 더 분명한 것은 존귀와 위엄이 하
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이다(Anderson). 다시 말해서 존귀와 영광의 진정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 들을 하나님의 현현(顯現)에 관한 묘사
로 보기도 한다(Weiser).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 본문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이곳 저곳을 방황하다가 드디어 다윗 성에 안착한 직후의 다윗의 찬양을 기록하고 있
는 대목인 대상 16:27과 유사한 구절이다. 여기서 '능력'으로 번역된 '오즈'(* )
는 역대 상의 기록과 동일하며, '아름다움'으로 번역된 '티프에레트'(* )
는 그곳에서 '헤드와'(* ), 곧 '즐거움'으로, 그리고 여기서 '성소'로 번
역된 '미크다쉬'(* )는 그곳에서 '마콤'(* ), 곧 '처소'로 각각 되어
있다. 이러한 약간의 변형은 본 시편 기자가 자신이 현재의 시편을 쓰는 시점의 상황
을 고려하여 의도적으로 역대상의 내용을 바꾸었다는 것을 짐작케 하며, 그가 본 시편
을 쓴 시점의 상황은 역대상의 기록 시점과 유사한 포로 귀환 이후의 성전의 재봉헌
무렵이라는 것 역시 추론케 한다. 여기에서 '능력'은 하나님의 처소가 능력의 원천이
라는 사실을, '아름다음'은 성전이 감탄을 자아낼 만큼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보이는
곳임을 각각 암시한다(Barnes).
=====96:7
만방의 족속들 - '족속들'에 해당하는 '미쉬페호트'(* )는 원래 혈연
적 유대로 하나가 된 친족을 가리킨다. 이 사실을 고려해 보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예배가 서로 관계없이 이곳 저곳에서 모인 자들에 의해서가 아
니라 피와 애정을 나눈 가족처럼 강한 일치감을 갖는 자들에 의하여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호칭은 천상적 존재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다(29:1).
=====96:8
예물을 기지고 - 성전 예배 장면으로부터 취한 표현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
는 자는 그분의 위엄과 영광에 걸맞는 예우(禮遇)와 자세로써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예물을 동반하는 것은 동방의 풍속을 반영해 준다. 동방에서는
왕에게 나아갈 자격을 얻었을 때 반드시 예물(선물)을 지참하도록 되어 있었다
(45:12;68:29;72:10).
그 궁정에(* , 레하츠로타이우) - 직역하면 '그의 궁정들에'라는
뜻이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러 개의 뜰이 있었으며 특히 헤릇 성전의 경우 이방인의
뜰, 여인들의 뜰, 이스라엘의 뜰, 그리고 제사장들의 뜰 등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제 기자는 이 모든 뜰을 개방하듯이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이방인의 뜰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이 함께 뜰에 있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Davies). 아마도
이러한 복수형 사용을 통하여 저자는 미래에 있을 이방인의 복음 참여를 암시했는지도
모른다.
=====96:10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지라 - 새 시대가 열려서 참통치자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시작할 때 초래될 현상 중의 하나가 소개되고 있다. 즉, 본절의 상,하반절
을 통해 짐작하건대 본문은 다분히 종말론적 성격까지 내포하는 바, 의와 공평으로
특징지워질(9:8;17:2;58:1;75:2;98:9;99:4 참조) 여호와의 완전한 통치를 암시한다
(Kidner). 아울러 본문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통해 우주 만물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굳게 서 있게 된 사실을 찬양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96:11
하늘...땅...바다 - 태고 이래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실체들, 곧 이 무생물까지
도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 시대를 위한 찬양에 동참하도록 초대하고 있는 본문은 히브
리 시 특유의 웅장함을 더해 주는 의인법적 표현이다(12절;사35:1;42:10;44:23;45:8;
49:13). 여호와 시대의 도래 및 그의 왕국의 확립은 손상된 모든 피조 세계의 조화까
지도 회복시킬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들'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그 위대한
완성을 고대하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피조물의 고대(苦待)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
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
복케 하시는 이로 맡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룻한 데서 해
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8:19-21).
=====96:12
밭과...즐거워할지로다 - 지구 위의 많은 땅 가운데 특히 인간에 의하여 경작되
고 있는 부분이 찬양대의 일원으로 초대되고 있다. 밭이 찬양할 내응은 그 소출의 풍
성함, 아름다음 등이 될 것이다.
그리할 때에 삼림의 나무들이...즐거이 노래하리니 - 밭이 즐거이 노래할 때 나무
들이 노래한다는 것은, 밭과 나무가 마치 성가대가 서로 화답하는 찬양을 드리듯이 노
래한다는 의미이다. 그 가지, 열매, 줄기, 잎사귀 등은 아름다움, 풍성함, 웅장함,
섬세함 등을 인하여 노래할 것이다.
=====96:13
임하시되(* , 바) - 직역하면 '임하고 계시다'이다. 이와같이 현재 진행의 뜻을
나타내는 말로 표현한 까닭은 마치 현재 그 눈앞에 나타나시듯 여호와의 도래를 좀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이 도래는 심판을 위한 도래이나 동시에 구원을 주기
위한 도래이기도 하다. 의와 신실의 심판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평화는 사 11:1-9
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