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천 순대국>
미국에서 온 친구가 순대국을 먹고싶다고 했다. 우리는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외국에 가서 오래 살다보면 가슴을 아리게 하는 그 무엇이 작용해 뼈저린 그리움이 되는 모양이다. 首丘初心이라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향수(鄕愁)가 짙어짐인가? 미국에 사는 내 친구 하나는 인터넷을 뒤져 음식점 리스트를 작성해 놓았다가 한국에 오기만 하면 먹고 싶던 음식을 찾아 나선다. 몇 년전 어디서 먹은 무엇이 맛있었다며 기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인데도... 춥도 덥도 않고 날씨도 쾌청해서 소풍가는 기분으로 지하철을 타고 천안 병천의 순대마을을 찾아 나섰다. '노인들이 공짜로 지하철 타고 병천에 가서 순대국을 먹고 하루를 보낸다'는 기사를 본 기억도 있어서, 소풍삼아 본고장 순대 맛을 보기 위해 각기 본처 1인씩만을 대동하고 공짜 지하철을 타고 천안까지 가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2호선을 타고 가다가 4호선으로 갈아타고 다시 금정역에서 내려 천안까지 가는 지하철로 갈아탔다. 순대국 한 그릇을 먹기 위해, 공짜 지하철을 타고 수백리 길을 나선 것이 우습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문득 "나도 이제 나이들만큼 들었구나", "늙은 백수의 코스로 들어섰구나"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상황 자체를 즐기기로 했다. 이것도 낭만이고 살아가는 재미가 아닌가? 생각의 각도를 바꾸니 지하철 공짜도 좋고,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신록의 아름다움도, 모내기를 하려고 찰박찰박 논에 물을 가둬놓은 들판 풍경도, 안성, 천안을 통학하는 학생들의 풋풋한 젊음도 여간 흥미롭지가 않다. 우리처럼 병천 순대사냥(?)에 나선듯한 노인들의 차림새와 언동도 지루하지 않은 볼거리였다. 내가 앉아있는 대각선 쪽으로는 70이 넘어 보이는 노인 7명이 마주바라보고 앉아서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잠바 차림의 노인, 신사복 정장에 흰색 중절모를 쓴 노인, 등산복을 입은 노인...신사복을 입은 노인은 젊었을 때 부인 속깨나 썩였음직해 보인다. 노인들의 얘기는 손자 녀석 자랑이, 아이들 사교육비 문제로, 부동산 세금이 부당하다는 얘기로 번져갔다. 그러더니 정치판에 대한 비판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無能, 失政, 퍼주기에 대한 무차별 사격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막판에는 육두문자까지 동원되더니 사격의 열도가 높아져 총열(銃列)이 녹아 찢어질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었다. 연세와 상관없이 나라를 걱정하는 열정과 혈기가 아직까지 싱싱하다. 100만의 청년실업, 조(兆)단위의 대북 퍼주기, 살길을 찾아 해외로 나가는 제조업 공장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집권에만 올인 하는 친북 좌파정권의 행태... 이처럼 심각한 국면에도 위정자들은 들불같이 번져가는 백성의 원성을 그토록 헤아리지 못하는가? "心不在焉이면 視而不見 聽而不聞"이라고 했듯이 그들에게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가? 생각이 이에 이르자 한가로움 속에서 낭만과 즐거움을 찾으려던 내 마음은 귓전을 두드리는 노인들의 言說에 어느듯 오염돼가고 있었다. 나는 내 마음의 오탁동화(汚濁同化)와 못된 생각의 가지치기를 막기 위해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내어 끄적거렸다. 그래도 <5월>은 좋다고... <그래서 5월은 좋다> 신록은 꽃보다 아름답다. 산이 꽃보다 아름다운 신록으로 싱싱하다. 젊음은 신록보다 푸르다. 거리는 신록보다 푸르른 젊음으로 넘친다. 5월은 온통 싱싱함과 푸르름 속에 묻혀있다. 노년들도 덩달아 싱싱하고 혈기 방창하다. 늙은 마누라의 미소도 싱그럽다. 그래서 5월은 좋다. -지하철 타고 병천가서 순대국 먹던 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