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넬슨 제독의 비교연구
충무공 이순신이라면 요즘 어떻게 하실까?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이름의 거울
The Mirror Named As Choongmoogong Yi Sun-shin

|
월전 장우성 화백이 1953년에 그린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화로 1976년부터 이 충무공의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 |
지금으로부터 470년 전 오늘은 충무공 이순신이 태어난 날입니다. 이순신은 인종 원년인 1545년 4월 28일(음 3월 8일)에 한성(현재의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당시 조국을 누란의 위에서 구했기 때문에 영웅의 차원을 넘어 ‘성웅(聖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충무공 이순신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4월 28일을 이 충무공 탄신일로 지정하여 기념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대는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임을 자부하고 그의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부대마다 기념식을 거행하며 결의를 다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충무공의 후예인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을 가르치면서 “후손이 아니라, 후예라고 표현했을 때는 최소한 그 사람의 삶을 따라 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자, 그러면 이 충무공이 행동으로 보여 주었던 백의종군을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今身戰船 尙有十二)”라는 표현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이 질문은 제 자신에게 가끔씩 던져보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423년 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부터 시작되어 1598년까지 계속된 전쟁을 말합니다.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전쟁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분해서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애써 ‘왜란(倭亂)’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저는 명칭이 수정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인을 왜구(倭寇 ; 키가 작은 도둑) 정도로 폄하했던 조선시대 양반들은 왜구가 일으킨 것을 ‘전쟁’이 아니라, ‘왜란’으로 부르며 격하시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역사가의 한 사람으로서 7년 동안 전국토가 일본군에 의해 유린 당하였으며, 하마터면 일본에 나라를 빼앗길 뻔했던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잘 한 부분은 잘 한 대로, 잘못한 부분은 그 과오를 인정하고 지금부터라도 우리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어야 할 의무과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할 당시 조선은 그야말로 정신을 놓고 있었습니다. 아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양반들은 백성과 나라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정치꾼’으로서의 삶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살았던 그들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안빈낙도와 유유자적한 풍류 생활에 도취되어 정신줄을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당시 양반들은 백성들에게는 죄인들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군제(軍制)를 상비군 체제에서 병농일치의 예비군 체제로 전환시켜 놓은 상태였습니다. 여진족의 침략이 빈번했던 북부지방과 남부의 수군은 상비군이 유지되었지만, 다른 지방에서는 문서상으로만 병력을 유지하고 실제로는 군역을 부과하지 않거나, 대역인을 세워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는 방군수포와 대역납포가 공공연히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기병의 경우에는 상비군으로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주력을 담당했던 보병의 경우에는 병사들의 사기와 질이 현저하게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에 다녀 온 통신사 황윤길이 일본의 전쟁 의도를 알아차려 전쟁 대비를 주장했지만, 조정에서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부사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여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야욕을 애써 모른 체 했던 것입니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3월 중순이었습니다. 만약 정사 황윤길의 말을 듣고 전쟁을 준비했더라면 조선은 그렇게 참혹한 전란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양반들이 국가 안보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반면에, 이순신은 소문으로만 나돌던 일본의 침략을 그냥 흘려듣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정읍현감, 절충장군, 만포점사, 진도군수를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1591년 47세의 나이로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습니다. 부임 후 그는 왜구의 침략을 예견하고 군비를 점검하는 등 철갑선인 거북선 건조에 착수하였습니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포, 당항포 등지에서 거북선을 앞세워 적을 크게 격파하였습니다. 이후 이순신은 한산도 대첩으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였으며, 안골포와 부산포에서도 왜군을 대파하는 등 커다란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듬해 한산도로 본영을 옮겨 최초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습니다. 아래 시조는 이때 진중에서 지은 것입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수루’는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성 위에 만든 누각입니다. 호가는 호인들이 갈잎을 말아서 불던 것으로 몹시 슬픈 소리를 냅니다. 일성호가는 한 가닥 오랑캐의 피리 소리를 말합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을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때에 어디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가 나의 창자를 끊는 듯 하구나.”
여러분은 이 시를 읽으면서 당시 이순신의 애절한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이 시를 통해 당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과 국운을 두 어깨에 짊어진 이순신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명나라 수군 진린 제독은 “하늘을 날줄 삼고 땅을 씨줄 삼아 천하를 경륜할 인재요, 하늘을 깁고 해를 목욕시킬 만한 큰 공로를 세웠다.(有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고 이순신을 평가했습니다.

|
해군사관학교에 전시 중인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 충무공 이순신의 후예임을 자부하고 있는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거북선은 한 척의 전선(戰船)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저는 조국의 바다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해군사관생도가 되기 위해 옥포만에서 첫 발을 내디뎠던 생도시절부터 해군장교로 33년간 근무하며 대령으로 전역할 때까지 거북선을 보면서 제 나름대로 다짐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충무공 이순신이라면 어떻게 할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극복하기 힘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위의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지며 힘을 얻곤 했습니다. 저는 임관 후 교수의 길을 선택하여 위탁교육으로 공부를 했던 고려대 학부 2년, 석사 2년, 美오하이오 주립대 박사과정 5년 美해사 교환교수 2년을 제외한 나머지 기간은 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누구보다 교정에서 거북선을 자주 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 충무공의 후예로서 저에게 거북선은 ‘자부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거북선은 저에게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마음 하나로 거북선을 만들어 적과 싸웠는데,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라는 질문이 저에게는 자부심을 넘어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거북선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세계 최초의 철갑선’, ‘충무공 이순신’, ‘임진왜란’ 등 다양한 단어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미국 군사사 연구에서 교과서로 불리는 저서 「Military Revolution」에도 거북선을 3쪽에 걸쳐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군사사를 전공한 군인이자 역사학자로서 거북선을 생각하면 무한한 자부심과 함께 가슴이 아림을 느낍니다. 임진왜란은 수군 입장에서 보면 승리한 전쟁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임난 이후에 조선이 대한해협의 해상통제권(control of the sea)을 장악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서양의 경우 결정적인 해전에서 승리했을 경우, 일정 기간 동안 그 주변의 해상통제권을 장악하면서 해상무역을 통해 국력이 신장된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 제독. |
영국의 경우 트라팔가해전(Battle of Trafalgar, 1805. 10. 21)에서 넬슨 제독이 프랑스-스페인 연합해군과 싸워 승리했기 때문에 나폴레옹의 영국 침략을 막을 수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110년 동안 대서양의 바다를 장악하며 대영제국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멀리 보지 않더라도 일본의 경우, 러일전쟁 기간 동안 러시아 발틱함대와 대마도 해전(Battle of Tsushima, 1905. 5. 27)에서 승리함으로써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날을 기념하여 해군기념일로 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이길 것이라는 예상을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세계 1위의 육군력과 4위의 해군력을 보유한 군사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당시의 시사만화가가 러시아를 거인에, 일본을 난장이에 비유했겠습니까?
군사사가들은 이순신
, 넬슨, 도고 제독을 전략·전술적인 면에서 비교하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물론 비교할 만한 부분도 있지만, 세 사람은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넬슨 제독과 도고 제독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전쟁을 준비를 하였지만, 이순신 제독은 혼자 힘으로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이순신과 넬슨을 비교한 표는 제가 생도들을 강의하면서 만든 것입니다. 아래 표를 보시면 두 사람을 간단하게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순신(李舜臣)
(덕수(德水) 이씨, 字는 汝諧)
1545. 4. 28 ~ 1598. 11. 19 |
인적
사항 |
호라티오 넬슨
(Horatio Nelson)
1758. 9. 29 ~ 1805. 10. 21 |
16세기 말
(약 425년 전) |
활약
시기 |
18세기 말 ~ 19세기 초
(약 210년 전) |
• 조선중기 유교문화 발전기에 양반 사족
(士族)의 후예로 출생 : 22세 이후 무과
• 부유하지는 않지만 내력 있는 명문가 출신 |
탄생
성장 |
• 영국의 세계 제해권 제패시기 하급성직자의
여섯 째 아들로 출생 : 13세 예비해사 입학
• 가난하지만 귀족적인 가풍 속에 성장 |
• 군령(軍令), 군정(軍政) 등 스스로 모든
방면에서 활약한 CEO형 지휘관
• 임진왜란 극복의 해전 명장 : 일본의 침략
으로부터 조국을 구하고 모국어를 지켜냄 |
주요
활약
(결과) |
• 주로 군령(軍令) 분야 활약
• 나폴레옹의 영국 침략을 좌절시킨 영웅 :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어의 세계화 기여 |
• 거북선(龜船) : 이순신 전력 기획 및 제작
‧ 길이 34.2m(저판 20m), 폭 10.3m
‧ 승선인원 130여명
‧ 화포 14문 장착 / 선상에 철갑 송곳 장착 |
주력전함 (旗艦) |
• 빅토리(HMS Victory) : 국가에서 제작
‧ 길이 56m(용골 46m) / 폭 16m /4배
‧ 승선인원 850명 / 6.5배
‧ 함포 104문 장착 / 7.4배 |
• 거북선으로 적 지휘함부터 타격
‧ 학익진 - 포위섬멸전(결전)
• 明의 금토패문(禁討牌文), 해전 금지 명령 |
전략
전술 |
• 돌격과 함포 공격 통한 지휘부 선제공격 전술
• 국가에서 해전을 독려 |
• 1차 1587년 8월, 여진족과 전투 후 5개월
• 2차 1597년 2월말 삼도수군통제사 파직 하옥
4월1일 출옥 ~ 칠천량해전 직후까지 4개월 |
백의
종군 |
• 1800년 지중해 함대사령관 재직 중 해군성
에 대한 보고 불철저로 해임(1801년 복귀)
※ 소신을 지킨 넬슨을 해임시키려고 상관들이 만들어
낸 죄명 |
• 1587년 8월 여진족 전투시 허벅지 화살
• 1592년 5월29일(사천해전) : 왼쪽 어깨
(左肩) 관통상(銃傷) |
부상
전력 |
• 1794년 칼비전투 : 오른쪽 눈 실명
• 1797년 카나리아 諸島의 테네리페 공격
: 오른 팔 잃음 |
• 근거리에서 쏜 적의 유탄이 겨드랑이
아래(腋下), 가슴 부위에 명중하여 운명함 |
戰死
상황 |
• 프랑스 저격병이 근처 돛대 위에서 쏜 총탄을
가슴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운명함 |
•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
戰死 時
남긴 말 |
• 신께 감사한다. 나는 내 의무를 다했노라 |
• 조선의 정궁 경복궁 정면에 세운 동상으로
본상 7m, 좌대 12m, 전체 19m, 정남향
(1968. 4. 27. 박정희 대통령 / 김세중 조각) |
기념 동상
(공원) |
• 영국 정치의 중심 웨스트민스터 트라팔가
광장에 파리를 향하고 있는 56m 높이의
넬슨 동상을 건립(1841년 완공) |
• 영국 발라드 제독의 평 : 영국인으로서 넬슨과 견줄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렇게 인정할 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는 바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위대한 동양의
해군 사령관 이순신 제독뿐이다. |
• 일본 도고[東鄕平八郞] 제독의 평 : 영국의 넬슨은 군신(軍神)이라고 할 만한 인물은 못 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칭할 제독이 있다면 오직 이순신 제독뿐이다. 이순신 제독과 비교한다면
나는 일개 부사관도 못 된다. |
저는 거북선을 대하면서 자랑스러움을 넘어 가슴이 아린다는 표현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이후부터라도 우리 선조들이 바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바다에 눈을 돌렸더라면 한일합방을 경험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요즘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는 이념 논쟁의 출발점인 한국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우리민족은 900여 회 이상 외침은 받아왔지만, 침략한 적은 없었던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군사사를 연구하는 저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우리 선조들이 힘을 길러서 대마도나 일본의 가장 아래에 있는 섬인 큐우슈우를 우리의 영토로 만들어 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역사적인 가정(historical if)을 해 봅니다. 그랬더라면 요즘 독도 문제는 애초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먹었을 때 가장 마음이 아픈 라면 이름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그 라면 이름은 '그랬더라면'입니다.
오늘 우리의 주변 정세는 중국이 이어도 문제를, 일본은 독도와 위안부 문제로 인해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는가 하면, 북한은 핵을 내세워 주변국을 위협하며 대한민국의 국론을 분열시켜 그들의 야욕을 채우려하는 등, 내일의 국제정세를 가늠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임진뢔란 당시의 선조들은 정확한 정보를 수집할 방법이나 능력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21세기 IT 최대 강국인 대한민국이 작금의 주변 정세를 올바로 읽고 대처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정보는 어린 아이들도 인터넷을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국민의 세금으로 일하고 있는 정부나 군은 정확한 ‘첩보’를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선조들의 희생으로 지켜낸 조국을 후손들에게 지금보다 더 살기좋은 나라로 만들어 물려 줄 사명감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임난 당시보다 더한 위기의 상황에 처해 있는 현실에서 충무공 이순신을 생각하며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오늘,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일을 맞아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바라보며 주위를 탓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솔직한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
2005년 영국해군이 주최한 넬슨 제독의 트라팔가 해전 승전 20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순항훈련 기간 중 대서양을 항해하고 있는 대한민국해군 충무공 이순신함(ROKS DDH-975)의 위용 |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3&mcate=M1004&nNewsNumb=20150417226&nidx=17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