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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의 학문적 이론 수립의 현황과 발전좌표
이 돈 희(서울대학교 교수)
Ⅰ. 다시 묻는 질문 -- “교육학은 어떤 학문인가?”
교육학자들은 심리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보다 자기네들이 연구하는 학문의 성격에 관하여 훨씬 자주 반추적(反芻的) 질문을 하는 것 같다. 그 빈도를 정확히 따지기는 어렵겠지만 철학자들만큼이나 자신이 종사하는 학문의 정체성을 두고 반성적 사고를 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학문의 전통으로 볼 때, 교육학은 미성숙으로 인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 데 비하여 철학은 노쇠로 인한 정체성의 위기를 종종 경험한다. 나는 오늘 주어진 주제와 관련한 논의는 어쩌면 진부하게 여길 수도 있는 “교육학은 어떤 학문인가?”라는 질문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개별과학으로서의 교육학은 학문적 과제나 방법에 있어서 대내적 혹은 대외적 변화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학문의 방법론적 추세에 변화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교육현장의 세계에 새로운 실천적 과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50여년 동안 한국교육학회와 국내의 크고 작은 연구조직에서 교육학의 성격을 재검토하기 위한 주제를 수차례 설정하여 토론을 한 바 있다. 주제들은 주로 과학으로서의 교육학은 어떤 특징을 지닌 것인가, 교육학의 연구에서는 일차적 관심을 이론의 보편성에 둘 것인가 아니면 문제의 특수성에 둘 것인가, 교육학의 연구에 있어서 방법론 혹은 사조의 다양성은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는가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교육학은 그 자체의 성격상 밝혀져야 할 원론적 질문들을 자체 속에 안고 있다. 예컨대, 교육학은 독자적 학문인가 응용적 학문인가, 인문과학인가 사회과학인가, 이론적 학문인가 실천적 학문인가, 규범적 이론인가 사실적 이론인가, 방법론적 다양성 혹은 이질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어떠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들이다. 물론 어느 것도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성질의 질문도 아니고, 이분법적 논리에서 어느 것을 배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결론적 해답이 있어야 교육학이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교육학의 학문적 성격에 관한 많은 쟁점들을 엄격히 검토해 보면, 교육학의 역할을 잘못 설정해 놓은 결과로 대립적 관계에 있지 않은 개념과 사고를 마치 상쟁하는 노선에서 나온 것으로 인식하고 불필요한 공격과 비판으로 일관하는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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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볼 수 있다. 예컨대, 교육학이 규범과학이냐 사실과학이냐의 질문을 두고 전개된 논쟁이라든가, 교수이론이 실증주의적 심리학의 응용적 산물이기 때문에 반실증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교육이론으로 부적합하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대개 이러한 과잉반응적 태도는 교육의 문제 그 자체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보다 철학이나 사회과학의 방법론적 관심을 교육학에 그대로 적용한 데서 연유한 바가 크다. 교육이론은 그것을 연구하는 의도에 따라서 규범과학일 수도 있고 사실과학일 수도 있다. 그리고 실증주의적 심리학의 이론에 의해서 개발된 교육방법의 원리나 기법이 반실증주의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개발된 교육원리에 전적으로 모순을 이루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혼란을 비켜가기 위하여 나는 먼저 교육학의 유형과 기능을 분석적으로 검토해 볼 필요를 느낀다.
Ⅱ. 교육학의 유형과 기능
“교육학은 어떤 학문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고 할 때, 우리가 어떤 이론적 틀이나 관점 혹은 편견 속에 들기 전에 먼저 그 질문의 내용을 이루는 원초적 요소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교육”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할 때, 그것의 가장 소박한 의미로는 어떤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친다거나 혹은 부모가 자식을 학교에 보낸다거나 하는 일을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일에 관해서 좀 더 체계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체계적으로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내용(지식 혹은 기술)을 가르쳐야 하는가? 누구에게나 그것을 가르칠 필요가 있는가? 그것을 왜 가르쳐야 하는가? 그것을 가르치면 어떤 인간이 되는가?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가? 어떤 조건 혹은 환경 속에서 가르쳐야 하는가? 어떤 사람들이 그 가르치는 일을 맡아야 하는가? 그런 일을 사회적인 제도의 형태로 행한다면 어떤 기관들이 있어야 하는가? 그 기관은 누가 운영해야 하는가? 그 기관들의 설립과 운영에 대하여 사회(공동체) 혹은 국가는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역사적으로 어떤 교육이 있어 왔으며, 현실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교육은 어떤 특징을 지닌 것인가? 여러 가지의 교육적 제도들은 인간의 삶 전체에 어떤 위치에 있었으며, 어떤 영향을 주어 왔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는 천차만별의 대답들이 있을 수 있고, 그 각각의 대답들에게 정당화를 요구하면 장황한 이론들이 성립될 수가 있다. 교육학 혹은 교육이론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여러 가지 종류의 대답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 질문들이 이론적 관심을 가지고 제기하는 것이라면 그 의도에 따라서 교육학적 연구에는 적어도 네 가지의 서로 다른 차원의 연구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이상적인 교육의 모습을 밝히려는 차원의 연구가 있고, 둘째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실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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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를 개발하는 차원의 것이 있으며, 셋째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활동이나 제도가 어떤 성격의 것이냐의 이해를 위한 차원의 것이 있고, 넷째 그러한 교육의 활동이나 제도에 숨겨져 있는 문제의 비판적 분석을 주로 하는 차원의 것이 있다. 이 네 가지는 반드시 실질적으로 각기 완전한 별개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적어도 관심과 의도에 있어서 다르며 논리적으로 구별될 수 있는 특징을 지닌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다. 교육의 이상적 조건과 당위적 규칙을 추구하는 이론적 활동을 “규범적 교육학”이라고 하고, 교육의 효율성을 높이는 원리와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를 “공학적 교육학”라고 하며, 현실적으로 전개되는 교육의 특징을 밝히는 데 주된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를 “설명적 교육학”이라고 하고, 교육의 제도와 활동에 내축된 문제의 노출이나 비판을 주로 하는 연구를 “비판적 교육학”이라고 각각 이름을 달리하여 구별할 수가 있다.
규범적 교육학과 공학적 교육학은 공히 가치의 실현을 위한 탐구이다. 교육이 추구하는 목적 혹은 가치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그 실현을 위한 체제를 개발하고자 한다. 이러한 교육학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실천되고 있지 않아도 좋은, 즉 일종의 상상적 혹은 구상적 이론이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설명적 교육학과 비판적 교육학은 실제로 우리의 현실 속에 전개되고 있는 교육의 활동과 제도에 관한 연구이며, 실제의 이해를 위한 설명 혹은 비판을 주된 과제로 한다. 이러한 교육학은 방법론적 규칙에 따라서 현실적 교육에 대하여 가치중립적 태도를 견지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실증주의자들이 즐겨하는 설명적 교육학은 가치중립적이라면, 비판이론가들이 즐겨하는 비판적 교육학은 현실적인 것에 대한 적극적 가치주장을 감행한다.
Ⅲ. 규범적-공학적 교육학
우리의 교육학이 조직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던 1950-60년대에 가장 두드러진 위세를 발휘한 것은 행동주의 심리학의 영향을 입은 공학적 교육학이었지만, 교육학은 그 전통으로 볼 때 본래 규범적 교육학으로 출발한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교육학의 창시자라고 일컫는 헤르바르트(J. F. Herbart)가 교육학은 교육목적론과 교육방법론으로 대별될 수 있고 전자는 윤리학을 후자는 심리학을 기초로 한 응용이론이라고 본 것에서부터 그러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규범적 교육학은 교육학의 가장 전통적인 형태이다. 헤르바르트 훨씬 이전의 고대사회로부터 금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교육의 이론은 대개 이러한 성격의 것이었다. 그래서 교육학은 흔히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세계나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설명과학의 일종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규범과학이라고 여겨 온 것도 바로 이러한 전통적 경향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론,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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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적 관심은 현대에 이르러 다양해졌지만 아직도 규범적 교육학은 교육연구의 대종을 이루고 있으며, 다른 형태의 교육학도 궁극적으로는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이러한 규범적 교육학의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대체적으로 말해서 규범적 교육학은 크게 교육목적론과 교육방법론의 두 영역, 그리고 이 두 영역의 연구에 요구되는 기초연구의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일반적으로 기초연구는 철학, 사회학, 심리학 등의 응용분야로서 교육철학, 교육사회학, 교육심리학 등으로 각각 불려지는 소영역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기초연구의 영역이 따르는 것은 교육목적론과 교육방법론이 광범한 기초학문의 이론들을 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목적론은 주로 교육을 왜 하느냐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대체적으로 사람들을 어떤 인간이 되도록 길러야 하느냐를 밝히는 데 역점을 두게 된다. 여기서의 인간은 사회적 맥락 속에 있는 존재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육의 목적은 개체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개인적인 목적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생각하는 사회적 목적을 포함하는 것이 된다. 어느 쪽에 더 역점을 두며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느냐에는 인간관과 사회관의 다양한 형태를 반영하는 여러 가지의 이론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교육목적론은 교육받은 결과의 인간을 논하는 것이지만, 교육을 초월하여 인간은 본질적으로 어떤 존재이며, 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서의 사회적 조직, 특히 국가를 어떤 성격의 실체로 보느냐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육목적론은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관한 학문인 철학과 사회과학의 광범한 이론을 기초로 하게 된다.
교육방법론은, 넓은 의미로 이해될 때, 목적론에 관한 이론을 제외한 전부에 상당하는 것이다. 즉, 교육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요구되는 모든 수단적, 전략적 조건들을 통칭하여 교육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어떤 내용의 경험을 선정하여, 어떤 조직의 형태에서, 어떤 방법적 기술을 동원할 것이며, 이런 일들이 어떤 제도적 장치 하에서 이루어져야 하느냐 등의 전부가 넓은 의미의 교육방법론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교육방법론은 일반적으로 그러한 광역으로 규정하지 않고,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의 방법적 원리에 국한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즉 주어진 내용과 제도적 여건 속에서 교육의 목적을 어떻게 타당성 있게 실현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어떻게 능률적으로 달성하는가의 연구에 한정된 의미로 이해된다.
좁은 의미의 것을 두고 말한다면, 여러 현대적 사회과학이 발달하기 전에는 교육의 방법론적 원리를 개발할 때 주로 철학의 인식론과 심리학이 그 기초가 되었다. 인식론은 주로 객관적인 세계의 사물을 어떻게 알게 되며 그 확실성을 어떻게 보장하느냐에 관한 이론이므로 자연히 인간의 마음의 작용을 다루게 되고, 따라서 그것은 일종의 심리학적 설명을 포함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육의 형태가 개인을 대상으로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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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혹은 기술을 지도하는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사회적 제도의 모습을 갖추어 가게 되자, 교육방법론적 관심도 거시적인 규모로 바뀌게 되었다. 또한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가 발달함에 따라서 심리학만이 아니라, 사회학, 인류학, 통계학 등이 교육방법을 개발하는 기초로서 응용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 가치의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로 인한 위험 부담을 경계하는 교육학자들 간에는, 가치의 문제를 교육이론에서 배제하거나 초월해 버리는 방법을 취하기도 한다. 교육학은 교육방법론에만 한정하는 것이 안전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교육학은 보다 과학적인 이론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학, 즉 교육방법론만으로서의 교육학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를 상정하고 있다. 하나는 인간은 능력, 성향, 습관, 태도, 행동 등에 있어서 변화하는 존재이며 이러한 변화를 지배하고 있는 법칙에 따라서 계획적으로 통제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계획적 통제는 어떤 가치관에도 도구적으로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의 교육학은 교육에 있어서의 가치판단의 기준에 관련된 논의의 문제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롭고자 하며, 어떤 가치기준에 의하든지 간에 길러 주기로 주문된 인간을 가능한 한 차질 없이 길러주는, 즉 일종의 “공학적 능률성”을 높이는 원리를 개발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이를 “공학적 교육학”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그것이 교육적 필요나 욕구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과정을 통하여 능률적으로 실현시키는 원리와 이론을 개발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물론, 이러한 교육방법적 연구는 규범적 교육학의 한 부분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공학적 교육학에서의 교육방법적 원리들은 특정한 교육목적론과의 연계에 의해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교육목적론 혹은 가치체제에 개방적으로 봉사하는 이론으로서 그 자체가 이론적 가치와 기능적 특징을 지닌다는 데에 차이가 있다. 대개 심리학에만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교육이론의 많은 경우에, 그리고 교육의 제도나 체제의 능률성을 평가하는 모형의 개발에 관련된 교육행정학적 연구의 대부분은 이러한 공학적 교육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공학적 교육학은 능률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며 여러 가지의 교육관이나 사회적 요구에 대하여 하나의 도구로서 봉사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규범적 교육학과 마찬가지로 그 특징에 있어서 응용학문적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심리학이나 사회학 혹은 인류학, 때로는 여러 가지의 사회과학적 공학을 응용하여 교육의 효율성을 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개인적-사회적 특성에 관한 여러 가지의 연구와 인간의 노력을 조직화하는 이론을 활용하여 교육의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도록 하는 원리의 연구가 공학적 교육학이다.
위에서 언급한 규범적 교육학은 교육을 통하여 추구하여야 할 가치를 규명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의 원리를 개발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면, 공학적 교육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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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적 가치를 밝히려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나 어떤 과정에 의하든지 간에 설정된 가치의 실현을 위한 원리를 개발한다는 점에서는 규범적 교육학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교육학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의 활동이나 제도에 대한 분석의 결과를 참고할 수는 있으나,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교육학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교육의 활동이나 제도를 설명하거나 평가하는 일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헤르바르트 당시와는 달리 교육목적론이라고 해서 반드시 철학의 응용학문으로 간주되는 교육철학의 영역만도 아니며, 교육방법론이라고 해서 심리학의 응용학문으로 간주되는 교육심리학의 영역만도 아니다. 지금은 사회학, 인류학, 통계학, 행정학 등의 광범한 사회과학적 영역으로부터 응용되는 교육학의 분야들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교육사회학, 교육인류학, 교육통계학, 교육행정학 등이 바로 그러하다. 지금까지도 교육학의 하부구조에는 응용학문적 분야들이 상존하고 있고 교육학은 바로 이러한 하부구조의 통합체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현재의 한국교육학회에 속한 분과연구회들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Ⅳ. 설명적-비판적 교육학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의 활동이나 제도가 어떤 역사적-사회적 배경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며, 그것이 정치나 경제나 종교나 군사 등의 다른 사회적 활동이나 제도와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회의 교육과는 어떤 특징에 있어서 서로 다른가 등에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를 밝히려는 활동이 있다면 이러한 활동도 교육학적 연구의 활동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교육학을 우리는 “설명적 교육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설명적 교육학은 어떤 교육이 참으로 이상적인 교육인가는 일차적 관심으로 삼지는 않으나, 기존하는 교육의 활동이나 제도의 특징을 설명하고 이해하고 평가하고 비판하는 일을 주된 연구의 과제로 삼는다. 설명적 교육학은 전통적인 교육연구의 영역인 교육사, 비교교육학, 교육사회학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론들이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에 와서는 현행의 교육활동과 제도에 대한 분석이 활발해지고, 197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갈등이론”, 영국을 무대로 하여 전개된 “신교육사회학” 등이 출현하면서 교육학의 새로운 국면이 개척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추세와 병행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자본주의 사회의 제도적 체제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본격화하면서부터 비판적 교육학의 범주에 속하는 활동이 매우 왕성해졌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적 교육학은 실증주의자들이 현상의 객관적 혹은 가치중립적 설명의 방법론에 집착하는 태도를 공격하면서 특히 교육의 이데올로기적 구조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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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설명한 규범적-공학적 교육학은 어떤 교육이 좋은 교육이며 어떻게 하면 교육을 잘 할 수 있는가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는 데 비하여, 설명적-비판적 교육학은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이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를 밝히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규범적-공학적 교육학이 개발한 이론들은 일차적으로 교육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교육행정가나 교원들에게 공급되는 것이나, 설명적-비판적 교육학에서 개발된 이론들은 교육의 전문가들에게만이 아니라 교육의 활동이나 제도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일반의 대중이나 다른 사회과학도들에게도 공급되는 것이다. 규범적-공학적 교육학에서 개발된 교육이론은 “실천할 교육”에 관한 것, 즉 교육을 실천하는 원리이지만, 설명적-비판적 교육학에서의 교육이론은 “실천된 교육”에 관한 것, 즉 이미 이루어진 교육의 성격과 특징에 관한 기술, 설명, 분석, 혹은 비판이다.
규범적-공학적 교육학은 철학, 심리학, 사회학, 인류학, 그리고 때로는 행정학이나 경제학이나 정치학 등의 이론을 기초로 하여 교육의 목적을 밝히고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적 원리들을 연구하는 응용학문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설명적-비판적 교육학은 그 자체로서 규범적-공학적 교육학에 대하여 기초학문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다른 학문의 응용을 필연적으로 전제하지는 않는다. 물론, 설명적-비판적 교육학도 철학, 사회학, 심리학, 행정학, 경제학, 정치학, 인류학, 역사학 등의 학문들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지만 기초와 응용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인접한 학문으로서의 관계를 가진다. 예컨대, 규범적-공학적 교육학에서는 행정학을 기초로 하여 교육행정의 원리를 개발하고자 한다. 그러나, 예컨대 설명적-비판적 교육학이 취학률의 변화에 관해서 연구한다면 이는 사회학이나 경제학 등과 같은 사회과학의 공통 관심의 주제일 수가 있다. 물론, 설명적-비판적 교육학도 필요에 따라서는 다른 학문들의 이론을 응용할 수가 있다. 예컨대, 교육의 제도나 조직 내에서의 정치적 관계를 분석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때때로 정치학적 분석을 해야 할 상황에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어떤 다른 학문에서도 있는 일이며 그것이 설명적-비판적 교육학을 성립시키기 위한 필연적 조건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실증주의적 경향을 띤 교육학자들은 교육의 활동과 제도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자신이 취하는 문제의식이나 연구과제의 선택에서는 자신의 관심, 취향, 혹은 가치관이 개입하는 것을 불가피한 사실로 이해하지만, 연구되는 대상에 대하여 어떤 형태의 가치편견이 작용하거나 연구과정에서 자신의 가치주장이 개입되면 그 연구는 객관성을 잃은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연구의 결과에 대한 해석과 그것에 기초한 대안의 제시 혹은 정책적 비판은 교육을 연구하는 사회과학도로서가 아니라, 정책의 비판자로서 취하는 행위로 여긴다.
그러나 반실증주의자들, 예컨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실증주의적 방법은 공학적 교육학의 경우와 같이 지배 이데올로기(혹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의 도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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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봉사하는 한갓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고, 연구의 의도나 과정이나 결과가 현실적 교육의 활동과 제도를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폭로하는 것을 사회과학적 연구의 본질적 모습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증주의자들은 사회적 사실로서의 교육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가치중립성을 방법론적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으나, 반실증주의자들은 가치중립성은 사회과학적 연구에서 중요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제도와 체제를 변증법적 대립의 관계에 두고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성격을 띤 연구의 형태를 선호하고 있다. 반실증주의자들 중에는 교육학이란 본래 현실적 제도와 체제를 비판하는 일, 즉 비판적 이론으로서의 특징을 지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설명적-비판적 교육학은 전통적 교육학의 응용학문적 특징에서 벗어나서 사회과학의 부문에서 하나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고 인접학문과의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게 하였다는 점에서 교육학의 중요한 발전적 현상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기초와 응용의 관계가 함의하는 바와 같은 독립과 종속의 관계는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과거의 전통적 관계의 맥락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기초와 응용의 관계는 주로 기초학문의 내용을 응용학문의 목적에 맞게 번안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으므로 그 관계를 “번안적(飜案的) 관계”라고 한다면, 지금은 두 개의 독립된 영역이 서로 교차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에 있다. 이를 “접변적(接變的) 관계”라고 하자. 접변적 관계를 지닌 개별학문들 간에는 여전히 위세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규범적-공학적 교육학의 기초학문은 설명적-비판적 교육학의 인접학문의 위치에 있을 수 있지만 기초학문이 지닌 위세를 별로 잃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하여 설명적-비판적 교육학이 전개된 이후에도 여전히 교육학의 하부구조는 교육철학, 교육사회학, 교육심리학, 교육행정학, 교육인류학 등의 이름으로 존재하고, 철학, 사회학, 심리학, 행정학, 인류학 등의 영향을 받는 “식민지적 영토” 속에 존재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이제는 그 관계가 내용의 응용을 의미하는 번안적 관계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방법의 원용을 통하여 접변적 관계의 특징을 지닌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철학의 각종 사조나 학파는 교육철학 속에도 있으며, 심리학의 각 연구영역은 그대로 병렬적으로 교육심리학에도 존재하고, 사회학의 문제들은 그대로 교육사회학의 관심사로 복사된다. 행정학과 교육행정학의 사이는 다소 다른 것 같으나, 그것은 교육행정학이라는 연구의 분야를 행정학만이 아니라 경영학, 재정학, 정책학 등을 포함하는 광범한 영역들과의 관계를 모두 교육행정학의 관심사항으로 확대해 버린 탓이다.
그러면, 왜 교육학은 전통적 기초학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나는 적어도 두 가지의 배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교육학은 전통적으로 규범과학으로 발달해 오면서 응용과학적 특징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것이 타성적으로 이어져 온 결과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학의 학문적 관심과 대상을 잘못 설정한 데서 연유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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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교육이론의 제도적 조건
그러면 교육학의 관심과 대상을 잘못 설정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나는 여기서 교육학이 기초학문과의 번안적 관계나 인접학문과의 접변적 관계를 청산하고 독자적 영토와 자율적 기능을 소유한 자체충족적인 학문으로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단지 나는 교육학이 규범과학적 전통 속에 있을 때 다른 학문과의 사이에 세워진 관계 그 자체를 철칙으로 여기고 인접학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운신(運身)의 폭”에만 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과, 인접학문과 대등한 위치에 서려면 교육학은 그 기능과 역할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먼저 나는 어떻게 가르쳐야 잘 가르칠 수 있으며, 어떤 인간으로 길러야 하며,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면, 어떤 활동도 교육학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보기로는, 교육의 활동과 행위가 이루어지는 제도적 형식을 상정하지 않고 무엇이 교육이며 어떻게 교육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는 적어도 교육학적 관심사로는 덜 중요하거나 별로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상태에서는 교육행위를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교육이 아니며, 인간의 행동이나 태도가 변화되고 있다고 해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또한 고상한 정서나 고매한 지혜나 탁월한 학문이나 정교한 기술을 획득했다고 해서 교육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이 적어도 객관적 인식이 가능한 교육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으려면, 어떤 수준에서든지 제도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교육적 행위라야만 한다.
인간의 행동적, 정서적, 이지적, 신체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대한 어떤 이론적 설명도 그것이 “교육”이라는 제도적 맥락을 떠나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심리학적, 사회학적, 역사학적 설명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교육학적 설명의 직접적 관심사는 되지 못한다. 교육활동의 내용과 방법의 가치론적 타당성이나 방법론적 효율성을 논할 수 있고 또 논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그 활동이 제도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활동이 어떤 객관적 가치의 실현을 위한 제도적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때 그것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교육학적인 것이 된다.
우리의 주변에서 행해지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교육학적 연구 중에는 온갖 기초학문의 지식이나 별별 일상적 경험에 대하여 교육적 가치나 교육학적 의의를 부여하고자 하는 단편적인 발상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어떤 위인이 일러준 교훈, 때로는 어떤 고전이 담고 있는 지혜, 때로는 이질적 사상체계 간의 엉뚱한 연결 등에 의해서 기발한 원리를 세상에 내어 놓고, 그것이 마치 탁월한 교육의 이론인양 주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이런 것들은 제도적 맥락을 떠난 상태에서 검토하게 되면 언제나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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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히 “교육적”이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것으로 말한다면, 시골 노인의 이야기에도, 히틀러의 구호에도, 소크라테스의 지혜에도, 괴테의 시구(詩句)에도, 운동선수의 경기 후 소감에도, 성공사례를 발표하는 농부의 경험담에도, 심지어는 흉악한 강도의 반성담에도 인간 생활의 어떤 면에든지 적용될지 모르는 어떤 의미의 교육적 가치가 있다. 많은 것들은 체계적인 이론의 지원도 받고 있다. 이런 것들은 언젠가는 어떤 교육의 상황에서 유의미할 것이라는 막연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으나, 적용될 구체적 사회제도의 맥락에서 보면 실제적인 의미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교육학적 연구가 이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교육이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회제도라는 인식이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교육학은 개방적 의미로 사용되는 “교육”이라는 말의 적용대상을 연구하는 것이라는 다듬어지지 않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제도적 과정에 대한 인식을 결하게 될 때, 흔히 우리의 주변에 있는 적지 않은 수의 교육이론가들의 주장에서 볼 수 있듯이,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기만 하면 교육적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체계적 지식, 능률적 기술, 도덕적 습관, 심미적 자질 등의 범주에 속하는 그 어느 것이든지 구체적인 교육의 상황과 대상에 관련시켜 검토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것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엄격히 생각해 보면 그 어느 것도 제도적으로 규정된 교육 대상의 성장이나 그가 살고 있는 구체적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즉 그것이 교육받는 대상과 어떤 유의미한 관계에 있는가를 검토하지 않고는 결코 “교육적 가치”라고 하기가 어렵다. 첨단의 물리학적 지식, 고상한 고전음악의 감각, 고매한 성현의 교훈, 탁월한 수공적 기술 등은 모두가 성취할 만한 교육적 가치로서 권장되고 있다. 그러나 그 각각이 어떤 경우에나 모든 사람에게 유의미한 가치는 아니다. 그러한 가치들이 차등 없이 교육의 내용으로 제공된다고 해서, 그리고 그 학습의 과정이 만족할만한 수준의 능률성을 보인다고 해서 교육이 잘되고 있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성취할 필요나 의미를 지니지도 못한다. 인간의 어떤 변화가 혹은 학습의 어떤 내용이 교육적으로 좋은 것이냐? 이 질문은 주어진 교육의 제도적 성격과 그 과정에 있는 대상의 특성을 체계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그 내용 자체만으로 대답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그러면 여기서 “제도”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어떤 형태의 교육활동이든지 간에, 그것이 참으로 교육답다거나 교육답지 못하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공적(公的)인 기준”을 묵시적으로나 명시적으로 가지고 있다면, 그 교육활동은 “제도적 형태”로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제도의 경우에 그러하지만 교육이라는 제도도 상대적으로 더욱 형식적인 것이 있고 덜 형식적인 것이 있다. 아무런 명시적인 규칙은 없지만 교육에 관한 판단의 사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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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이 묵시적으로 주어져 있고 그것이 준수되고 있다면, 거기에는 다소 덜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일종의 제도가 성립되어 있는 셈이다. 관습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일종의 제도이다.
형식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사실상 인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거의가 제도적 교육이다. 원시시대의 교육이나 현대사회의 교육은 모두 일종의 사회제도이다. 그러나 어떤 제도는 다른 제도에 비하여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체제나 그것을 실현시키는 방법에 있어서 덜 보편적일 수가 있다. 가정교육은 어느 사회에서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으나 각각의 가정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이를 실현시키려는 방법은 가정에 따라 특수하다. 효도나 우애는 모든 가정에서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중요시하는 규범들이지만, 효도하고 우애하는 구체적 방법은 다르다. 가정 혹은 가문마다의 교육적 판단의 기준은 반드시 보편성을 띤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어떤 기업체나 어느 특정한 시기의 군대에서 이루어지는 교육도 일종의 제도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서 추구되는 가치는 기업적 혹은 군사적 목적과 연결되어 있고, 이를 실현시키는 방법도 교육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데보다는 대체적으로 특수한 가치기준과 방법에 의하여 능률성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물론, 가정에서의 교육이나, 기업체에서의 연수나, 군대에서의 훈련도 우리의 일상적인 가치추구의 생활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고, 이를 실현하는 방법도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가정교육에서의 화목과 경애, 기업훈련에서의 협동과 창의성, 군대교육에서의 용기와 기율 등은 거의 어디에서나 수용되는 덕목들이다. 그러나 각각이 어떤 일관된 원리에 의해서 다른 것과 가치체제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이를 실현하는 방법적 원리에 있어서도 반드시 일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각각은 반드시 그러한 가치추구의 일치를 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가정의 교육에서는 가정 내에서의 생활보다 가정 밖에서의 활동을 더 중시하고, 기업체의 교육에서는 때때로 다른 기업체와의 경쟁이나 소비자의 필요를 의식하며, 군대의 교육에서는 전투에서 살상의 대상인 적과의 대치를 상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러한 각기의 관심은 사회의 다른 부문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에서도 반드시 보편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교육적 가치는 그것이 교육이라는 제도의 과정을 통하여 실현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라면 어느 수준에서나마 보편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제도의 형식성을 가늠하는 기준은 이것이라거나 혹은 저것이라거나로 정확히 언급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제도를 성립시킨 규칙들과 그것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좀더 객관화(형식화)되어 있다거나, 혹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상대적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 학교교육은 사회교육이나 가정교육에 비하여 교육적 판단의 기준이 좀더 객관화되어 있고 제도적인 규칙들도 좀더 명시적이다. 물론, 학교교육이 모든 구체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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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에서 전적으로 객관주의를 지향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의 활동들이 참으로 “교육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이 교육적일 수 있게 하는 기준은 어느 수준에서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거나 성립시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교육을 흔히 “형식교육”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리고 흔히 “비형식교육”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회교육이나 가정교육도 학교교육과 같이 제도적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교육적 판단의 기준을 묵시적으로 가지고 있든가 아니면 학교교육에서 추구되는 일반적 기준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제도적 교육과 비제도적 교육의 구분이나, 형식교육과 비형식교육의 구분은 제도의 형식성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달리 인식되는 관례적 구분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교적으로 말해서 형식성이 높은 교육일수록 교육학적 관심의 대상으로 더욱 적절하다고 말할 수는 있다.
우리가 각기의 성장에 유의미한 학습의 장을 그 개체의 교육기회라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교육학은 교육기회가 성립되는 배경과 과정, 교육기회의 체제가 조직되고 작용하는 원리, 교육기회가 배분되고 활용되는 규칙, 교육기회로서 주어지는 학습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의 본질과 기준, 그리고 교육기회와 다른 사회적 가치와의 관계 등에 관한 학문이다. 이런 것들을 규범적으로 연구할 수도 있고, 공학적 관심의 수준에서 연구할 수도 있으며, 설명적-비판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 연구를 할 수도 있다. 아무리 기발한 교육적 지혜라고 하더라도, 아무리 체계적이고 확실성 있는 교육이론이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고답적인 가치개념을 내포한 교육의 사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도적 교육기회의 질을 결정하는 요인으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없는 것이라면 교육학적 관심의 대상이 될 이유가 없다. 교육이 인간의 성장에 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개인적인 수양의 원리나, 교육의 제도적 맥락에 수용되기 어려운 학습의 과정이나, 단편적인 인간변화의 기법이나, 어떤 위인(偉人) 혹은 성현(聖賢)의 교육적 교훈을 음미하는 수준의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에 몰두한다고 해서 교육학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런 것들과 교육학이 전혀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것에는 공적 기준을 적용받는 제도적 차원의 교육에 관한 연구의 결과가 원용될 수는 있으나, 교육학적 활동의 본격적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체적으로 다른 사회과학들은 사회제도의 한 부문을 다루는 경향이 있으나 교육학은 탈제도적 맥락에서 교육행위의 원리를 함께 다루어 왔다. 정치학이라고 해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가정의 가장이 가족을 잘 다스리려면 어떤 능력과 방법이 요구되는가, 권위적 지도력에는 어떤 추종자들이 남게 되는가 등과 같은 정치행위들의 모두에 관심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은 오히려 주로 국가라는 제도적 조직체의 차원에서 권력의 형성, 기능, 분할, 그리고 사회적 힘의 상호작용 등에 관한 것을 연구의 내용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경제학이라고 해서 어떻게 하면 재산을 가장 잘 모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주어진 재산을 가장 잘 유지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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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며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가 등과 같은 경제행위의 모두를 관심의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경제학은 오히려 사회적 재화 혹은 가치를 생산하고 교환하고 분배하고 소비하고 재생산하는 제도적 과정에 관한 연구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교육학은 지금까지 그렇지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지식을 잘 가르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어린이를 균형 있게 성장시킬 것인가, 어떻게 하면 아이를 개성 있게 키울 것인가 등과 같은 교육행위들의 모두에 관심을 두어 왔고, 또한 학교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가, 학교제도는 어떻게 계획되어야 하는가, 대학의 학생을 어떻게 선발해야 하는가 등의 제도적 부문도 관심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이와 같이 교육학이 탈제도적 맥락의 교육행위와 제도적 맥락의 교육활동을 모두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으나, 그 역사로 볼 때 주로 교육학의 이론은 오히려 전자에 관한 것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해 왔다. 교육학의 이러한 탈제도적 맥락의 특징은 제도적 규범을 의미하는 분배적 정의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게 된다. 거기에다 교육행위의 연구는 심리학의 응용이론으로 발달하였고, 교육제도의 연구는 주로 행정학의 응용이론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에 이론적 통합이 어려웠다.
나는 교육학이 하나의 통합된 학문으로서 성장하기 위해서 기초학문의 이론적 틀에서 탈피하여 교육의 제도적, 활동적 과정 그 자체에 대한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성찰과 분석과 비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기회에 관한 제도적 연구는 교육행위의 차원에까지 침투된 것이어야 하고 교육행위의 원리에 관한 연구는 제도적 맥락의 관심과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 제도적 맥락을 벗어나면 교육행위에서 문제 삼는 교육적 판단의 기준은 교육이론과 무관한 것이 되거나 아니면 임의로 선택된 가치관에 의존해 버리게 된다.
예컨대, 어떤 위인의 교육사상을 두고 연구하는 경우를 두고 생각해 보자. 크고 작고 간에 역사적으로 알려진 위인들은 어떤 형태로든지 교육관을 체계적으로 지니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 위인이 지닌 가치관에서 어떤 교육관을 추출해 낼 수 있게 되어 있다. 석가,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 그 누구든지 매우 고매한 가치관과 탁월한 교육관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들은 사람들을 어떻게 가르쳤으며 사람들을 어떤 인간으로 되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한 위인들이다. 그러나 그러한 교육관이 교육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사상이나 신념이나 행적으로부터 어떤 교육적 지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제도적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교육행위의 이해나 개선에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수양이나 교화나 지혜를 얻는 것을 교육이론의 내용으로 삼는 것이 되고, 그러한 교육이론들은 서로 통합될 수 없는 개별적인 교훈적 체계에 불과한 것이 된다. 교육학적 이론과 교훈적 지혜는 같은 것이 아니다. 교육학적 이론들은 어떤 수준에서든지 간에 교육의 제도적 체제와 과정의 설명, 혹은 제도적 교육행위의 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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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한 것이며, 개념적 구조와 방법론적 특징에 있어서 “논의의 공통된 관심”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교훈적 체계는 그 자체만의 의미의 세계를 가질 뿐이다.
Ⅵ.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
교육학은 보편성을 전제로 하는 학문인가, 아니면 특수성을 전제로 하는 학문인가, 이 문제를 두고 우리의 교육학계에서는 한 때 치열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이 논쟁은 광복 후 우리나라에서 전개된 교육학 이론들이 주로 미국의 교육학에 크게 의존한 데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특수론자들은 교육이론이란 언제나 역사성과 사회성을 지니는 것이므로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실적인 사회적 문제를 달리하고 있는 다른 문화권의 이론에 의존한다는 것은 한국적 문제를 해결하고 교육의 방향을 인도하는 데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내세웠다. 반면에 보편론자들은 이론이란 그것이 발생한 사회적-문화적 배경에 있어서는 다를 수 있지만 그것이 설명하는 바와 추구하는 바는 보편성을 띠는 것이므로 타문화권의 이론이라고 해서 수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논박하였다. 내가 보기로 이러한 두 가지의 주장은 모두 일시일비(一是一非)를 지닌다고 생각하며, 다소간 보편성과 특수성의 개념에 대한 혼란된 이해가 이러한 논쟁을 발생케 한 원인이라고 여겨진다.
교육이론에 있어서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는 적어도 세 가지의 차원에서 발생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연구내용적 차원으로서 교육학적 연구의 관심대상, 즉 연구내용이 보편성을 띤 것인가, 아니면 특수성을 띤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많은 다른 학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가 교육학적 관심을 가지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내용이 여러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문제에 관한 것일 수도 있고 특정한 사회적-문화적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관한 것일 수도 있다. 교육학의 관심은 적어도 일차적으로 어느 것에 두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고 보편성과 특수성의 논쟁거리가 성립한다. 둘째는 연구방법적 차원으로서 연구의 관심대상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에 접근하는 방법론적 원리가 문화권에 따라서 특수성을 지니느냐, 아니면 보편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이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특수론적 관점에서 보면, 방법론적 특수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것은 한국의 교육연구가 자율성을 지니지 못하고 타문화권에서 개발된 이론에 종속된 상태, 즉 학문적 식민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될 수 있다. 그러나, 반면에 보편론적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특수론적 주장은 탐구의 원리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태도로서 객관성을 잃고 있으며 학문을 정치와 혼돈시키는 결과를 가져 온다고 비판을 받는다. 셋째는 학제관계적 차원으로서 교육학과 인접학문의 관계, 특히 교육학을 응용학문이라고 전제하고 그것이 의존하는 기초학문과의 관계로 볼 때, 기초학문의 보편적 특징에 비추어 응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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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적 특수성을 지닌다는 주장의 타당성 여부에 관한 것이다. 응용이론은 기초이론을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니만큼 당연히 특수성을 지닐 수밖에 없고, 교육학은 바로 그러한 학문이며 따라서 한국에서의 교육학은 한국적 문제에 응용하는 한국적 교육학이어야 한다는 특수론자의 주장이 성립한다. 그러나, 과연 교육이론이 응용이론이냐, 그리고 응용이론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의 응용은 항상 특수상황에의 응용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보편론자의 반론이 또한 제기될 수 있다.
어느 차원에서 발생한 문제의식이든지 간에, 특수론은 주로 국내에서 수련된 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된 것으로서 한국의 교육학이 대외적으로, 특히 미국의 교육이론에 크게 의존하고 타율화되어 가는 것에 대한 각성과 경고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면, 보편론은 주로 해외에서 수련된 학자들에 의해서 주도된 것으로서 이론이 지니는 보편성의 가치를 무시함으로써 전통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한국교육학이 이론적 빈곤과 학문적 폐쇄성에 빠질 가능성을 우려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내가 보기로 이러한 대립적 사고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논리적 관계”를 일종의 “존재론적 관계”로 보는 데서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편성과 특수성은 두 개의 다른 세계를 나타내는 개념이 아니라 같은 실체나 관념의 다른 차원에 관한 것이다.
교육이론은 그 어느 것이든지 간에 그 자체의 “사회적-역사적 배경”과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자는 그 이론을 낳는 특수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그 이론을 특징짓는 방법론적 원리를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담고 있다. 어떤 이론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사회적-역사적 배경이 일차적 결정요인으로 하는 반면에 어떤 이론은 논리적 세계가 일차적 결정요인이 된다. 예컨대, 1950년대 후반의 미국에서 전개된 “학문중심 교육과정”이니 “지식의 구조”니 하는 것은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발사된 후에 미국사회가 받은 충격이 사회적 동기가 되어 개발된 것이다. 그러나 “교수공학”이니 “행동수정이론”이니 하는 것은 현대의 행동주의 심리학이 발달하면서 그 영향으로 나타난 것이다. 어떤 것은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준 것도 있다.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이론은, 한편으로 19세기의 신교육운동가들에 의해서 이어져 온 아동중심적 교육사상과 듀이 등에 의해서 전개된 프래그마티즘 등의 이론적 체계가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산업화 과정과 사회적 성장을 주도할 수 있는 사상적 체계가 요청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전반적인 배경이 된다.
사회적-역사적 배경과 논리적 세계는 하나의 교육이론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어느 하나가 다른 쪽보다 일차적으로 작용하거나 동시적으로 작용한다고 할 뿐이지 어느 하나만이 결정요인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육사상이나 교육이론의 전통적인 것을 오늘에 소생시키고자 하거나, 아니면 외래적인 것을 수용하고자 할 때, 한편으로는 그 사상과 이론을 성립시키고 성장시킨 사회적-역사적 배경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또 한편으로는 그 자체의 논리적 구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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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을 확인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전자는 현실적인 우리의 삶과 교육에 어떤 유의미성을 지니는가를 검토하는 일이며, 후자는 그 자체의 내적 논리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일이다. 이러한 비판적인 과정 없이 전통적 혹은 외래적 사상이나 이론이 우리의 교육현장이나 교육연구를 지배하게 될 때, 그 유의미성도 문제이거니와 그것을 맹신한 결과도 문제를 낳게 된다.
교육이론에 있어서 보편성과 특수성은 논리적으로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보편적인 것과 무관한 특수한 것이 있고 특수한 것과 무관한 보편적인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이론적 특성에 있어서 보편성을 탁월하게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적용되는 곳은 특수한 상황들이므로 문제의식의 특수성에 봉사할 수 없으면 이론은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특수한 상황에서 얻은 이론은 그 논리가 아무리 정교하고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회적인 용도의 가치밖에 없으면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학계에서는 한때, 서구적인 혹은 외래적인 것은 보편성을 지니고 내국적인 혹은 자생적인 것은 특수성을 지닌 것이라는 논리가 묵시적으로 있었던 적이 있다. 서구의 문화권에서 개발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그 문화권을 넘어서서 설명력이나 응용력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보편성을 보장받지 못한다. 그리고 보편성, 즉 그 문화권 밖에서 설명력과 응용력을 지닌다면, 그것이 외래적인 혹은 서구적인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배척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같은 논리는 내국적인 혹은 자생적인 이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만약 한국의 교육학계에서 개발된 이론이 문화권을 넘어서서 설명력과 응용력을 지닌다면 그것은 보편성을 지닌 이론이다. 그리고 어떤 서구적 이론이 한국의 교육에 대하여 설명력과 응용력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보편성을 잃은 이론이기 때문에 우리가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지 그것의 보편성 때문에 우리의 교육에 무의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첫댓글 A. 이돈희의 문제의식: 교육학은 사회제도에 대한 사회과학이어야 한다. 문제의식으로부터의 도출: 先 교육제도 後 교육적 경험 -> 교육정의론 / B. 장상호의 문제의식: 교육학은 자율학이어야 한다. 문제의식으로부터의 도출: 先 타 학문 개념과 구분되는 교육학 개념을 통해 포착되는, 수많은 이질적인 사실들과 구분되는 교육 後 수많은 이질적인 사실 -> 교육본위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