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시집 이종암 『꽃과 별과 총』 | 시집속 대표시
저마다, 꽃 외 4편
사월 산길을 걷다가, 엉겁결에
한 소식 받아 적는다
-저마다, 꽃!
연두에서 막 초록으로 건너가는
푸름의 빛깔 빛깔들 그
제 각각인 것 모여, 사월 봄 숲은
그윽한 총림叢林이다
참나무너도밤나무개옻나무고로쇠나무단풍나무소나무오동나무산철쭉진달래산목련아까시나무때죽나무오리나무층층나무산벚나무싸리나무조팝나무서어나무물푸레나무……,
꽃을 가졌거나 못 가졌거나
몸의 구부러짐과 곧음
색깔의 유무와 강약에도 관계없이
오롯이
함께 숲을 이루는 저 각양각색의
나무, 나무들
사람들 모여 사는 세상 또한, 그렇다
저마다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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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엄마
입 주변까지 번진 대상포진으로 고생하는
여든일곱의 우리 엄마, 손순연
37도 무더위에도 지치지 않고 꿋꿋하다
오랜만에 안부 전화를 드리니
“우리 선상님, 어데 멀리 외국 나가셨든게?”
이리 무더운데 요새 뭘 드시느냐 하니
“내사 하늘의 별 따다 안 묵는게.” 하신다
면구스러움에 앞서, 그것 참!
초등학교도 못 나와 한글도 모르는 분이
외국 유람은 어찌 알고
하늘의 별 따다 먹는 것은 또 어찌 알까?
시인이랍시고 까불락대는
헐거워진 내 언어가 다시 탱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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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총詩塚
말조심의 뜻으로 전해져오는 언총言塚을 어느 시인의 시에서 만나고는 캬- 무릎을 쳤지. 얼마 전 한 평론집 서문에서 만난 시총詩塚은 왜 그리 내 가슴을 먹먹하게 짓눌렀던가.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번지, 백암 정의번의 무덤. 백암공은 임진왜란 때 경주성 전투에서 적에게 포위된 아버지와 나라를 구하려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훗날 시신을 찾을 수 없어 그 아비가 아들의 옷과 갓을 들고 경주 싸움터에 가서 초혼하여 빈소를 마련하고, 생전에 뜻을 나누던 지우知友들의 애사哀詞를 모아 관에 담아온 게 시총의 연유다.
수소문하여 찾아간 기룡산 기슭 십만 평 영일 정씨 문중 묘역. 장방형 묘역에 돌올하게 솟은 80여 기의 무덤들이 거대한 책 속의 무슨무슨 글자들만 같다. 시총을 찾아가 비문을 손으로 짚어가며 찬찬히 읽고는 엎드려 절한다. 무덤 속에 있을 여러 편의 시와 공을 추모하며 봉분을 둘러보는데, 홀연 나비 두 마리 무덤을 열고 푸르륵 날아오른다. 나비 허공으로 날아간 궤적에 일순간 펼쳐진 문장을 나는 보았다. <사람의 마음은 빛보다 빠르고 태산보다 크나니, 육신이 없어져도 마음은 남아 시공을 초월하여 통한다.> 무덤 속 백암공과 지우들이 남긴 시들도 나비처럼 날아올라 하늘의 별로 빛나는가. 어둠이 깔리니 열사흘 달빛 아래 하늘의 별과 땅 위 시총의 상응이 무한정 좋다. 시공을 건너는 저 시들은 비바람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겠다. 무덤 속 하얀 언어들 흩날리는 꽃잎처럼 자꾸 내게로 건너온다.
*정진규 시인의 시집 『공기는 내 사랑』(책만드는집, 2009)에서 언총言塚을, 그리고 박현수 교수의 평론집 『황금책갈피』(예옥, 2006)에서 시총詩塚을 만나 이 시를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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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은 없다
-시인 강은교의 말대꾸
청하 내연산 진경眞境을 조선의 백운거사 옹몽진이 발견한 이후 귀암 이정, 해월 황여일, 보경사 스님 의민, 청성 성대중, 대산 이상정 등이 시와 문장을 두루 남겨 세상에 조금 알려졌지만 겸재 정선이 청하 현감으로 내려와 두어 해 남짓 살면서 ‘내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를 그려 더욱 알려졌다
지난 2월 마지막 주말 부산 사는 친구 배재경 시인이 강은교 선생과 동료 시인들 몇 모시고 포항으로 왔다. 다른 길로 나서는 화가 이형수, 수필가 김희준을 불러 함께 그들을 맞이하여 내연산 비하대飛下臺 아래 12폭포로 안내하였다 새로 정자를 세운 선열대禪悅臺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도중 적멸암寂滅庵 터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소르르 수르르 쏴르르르 쏴아- 솔바람 소리가 지나간다 “오, 줄 없는 거문고[無絃琴]다!” 일행 중 누군가 큰소리로 말하였는데 곧장 강은교 시인이 말대꾸를 하셨다 “저 아래 계곡의 크고 작은 주름들, 능선의 소나무와 잡목의 가지가지들 그 모두가 현絃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수필가 김희준이 소나무 우레[松籟]라는 멋진 말씀을 더 보태었지만 제대로 일어서지 않았다 세상 모든 일 괜히, 괜히 그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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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변勘辨
한국전쟁 직후, 버리는 것이 도를 닦는 것이라며 해우소解憂所라는 이름의 단어를 처음 세운 경봉鏡峰 스님, 밤잠 안 자고 용맹정진 수행과 격외의 걸림 없는 사자후 토해내니 그가 살짝 돌았다, 미쳤다 등등의 세상 사람들 입방정에 올랐다 그러자 법 형제 전강田岡 스님이 통도사 극락암을 일부러 찾아가서는 짚고 있던 지팡이로 땅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대가 이 원 안에 그냥 들어가 있어도 죽을 것이요, 원 밖으로 나와도 죽을 것이로다” 한즉, 경봉 스님이 들고 있던 부채를 펴서 그 일원상一圓相 쓱쓱쓱 지워 물리치는 시늉을 하며 울타리 없는 허공을 바라보며 허허허 호탕한 웃음을 날려 보냈다는 이야기의 그,
*감변勘辨: 수행자의 역량이나 근기根機를 점검하는 문답. 불교 서적 『임제록』을 구성하는 목차의 한 이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