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시: 2024년 8월 28일 수요일.
2.참가인원: '고브린너' , '그윽한미소', ' 남인', '딱선생', '바람' 그리고 나.
3.경비: 비밀
4.여행 기간: 2024년 8월 28일 수요일~ 9월 1일 일요일.
5.코스: 인천 국제 공항 출발하여 심양 국제 공항 도착 후 가이드 미팅, 통화(심양에서 버스로 4시간)로 이동하여 호텔 투숙및 휴식.
출발
이 여행 계획의 시발점은 고브린너였다. 나이들어 해외 여행 갈 때, 목돈이 들어가니 일정기간 동안 회비 형식으로 모아 그때 쓰자고 제안한 것이 고브린너였다.
그 시작이 2017년 11월이었고 마지막 회비를 2023년 8월까지 낸 것 같다. '남인' 은 회비를 모은다는 사실을 나중에 인지하고, 여행시 돈을 한방에 내기로 했다.
그리하야 회비는 충분히 준비되었는데, 6명의 스케줄을 조정하자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하루 이틀 가는 것도 아니고 4박 5일의 긴 여정이기 때문이었다.
백두산이 조만간 분화될지 모른다는 유언비어가 난무하야, 터지기 전에 백두산을 보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을 연계한 상품을 선택하여 여행사에 의뢰했다. 최종 일정과 단체 여행의 경우 최소 인원이 걸림돌이었으나, 막판에 여행사에서 우리가 선택한 상품이 최종 출발시 6명이라도 진행하겠다고 통지해 주었다.
아무도 안오면 호젓하게 우리끼리 가도 되는데, 문제는 싼 여행 상품이다 보니 노쇼핑이 아니다.
안사자니 뻘쭘의 싸대기를 강하게 맞을 것 같고, 사자니 마누라 등살을 이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이 끝까지 버티니 최종적으로 5명이 더 붙어, 11명이 단체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런다고 '뻘쭘하지 않을까?' 는 아직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남인' 의 이사 날짜가 여행 일정과 겹쳐서, 이사 일을 피해 최종적으로 날짜를 잡았으나, '남인' 의 착오로 백두산 출발 전날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 다음날 새벽 속초에서 오전 10시까지 이곳 인천 공항까지 와야 하는데, '남인' 의 말에 의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과연 충분할까?
그거는 단지 '남인' 의 생각이었으니, 출발 당일 오전 10시 미팅 시간을 후~울쩍 넘긴 11시 20분 경에 도착한 것이다.
단체로 비자를 받았기 때문에 한사람이 못가게 되면 다 못간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안오면 버리고라도 우리끼리 가겠다고 결정했는데, 다행이 나타나 주었다.
5명에게 민폐를 끼치는 상황이 발생했으나, 노심초사 보다는 느긋함의 승리였다.
우여곡절과 좌충우돌을 거쳐 드디어 백두산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출발 백두산으로!
2011년 10월에 베트남 여행 이후 13년 만에 친구들과 다시 가는 해외 여행이다.
13년의 세월을 얼굴에 이고 백두산으로 간다.
벌써 고인이 된 사람도 있으니 우리도 어지간히 나이들을 먹은 모양이다.
이제는 여행의 들뜸보다는 차분함이 더 돋보이는 자세들이다.
뒤늦게 나타난 '남인' 은 미안한지 고개를 못들고 일부러 헐레벌떡이다.
원래 여행사 미팅 장소가 N라운지인데, 너무 늦어 출국 수속하는 남방 항공 E라운지에서 '남인' 을 만나기로 한 것이다
다행이 백두산 여행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딱선생' 은 절대로 시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생명 단축의 지름길이라며 사진은 극구 사양한다.
아마존 밀림에서 살던 원주민들이 사진을 찍으면 영혼이 광탈로 나간다고 믿었다는데, 조상이 혹시 왕족이 아니라 아마존 원시림 부족의 족장 출신 아니여 시방?
나는 남들이 싫어하는 것만 골라 하는 족속의 후손이다 워쪄?
아직도 시간폭탄의 후유증으로 정신줄 놓은 우리의 이쁜이.
우리가 탈 남방 항공은 122번 게이트라 셔틀트레인을 타고 이동해야 한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이동중...
122번 게이트로 이동중.
비행기 타러 가는 길에 아침을 못먹은 관계로 꽃게 라면으로 통일.
우리는 맛나게 먹고 있는데, '남인' 은 어디서 중요한 전화가 왔는지 계속 통화중인데 라면을 제대로 먹었는 지는 모르겠다.
나중에 물으니 조금 먹기는 먹었단다.
탑승구 앞에서 '딱선생' 을 집중 공략한다. 저 미소는 "너는 나를 일찍 보내려고 작정한 거지?" 라는 무언의 항거다.
너는 벽에 똥칠할 동안 잘 살거야 걱정마!
드디어 미소를 찾은 우리의 이쁜이.
탑승구 앞 동영상.
비행기에서.
개인 비자로 출발하는 '고브린너' 는 저 뒤자리를 잡고 따로 떨어져 앉고, '남인' 은 '그윽한미소' 앞 자리에 앉았다.
'남인' 은 독고다이의 전형답게 혼자서 간다.
화장실 앞에서...
여행할 때는 무조건 화장실이 나타나면 빼고 가야 한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말은 결국 여행 내내 금과 옥조가 되었다.
우리 여행 끝날 때까지 똥과 똥구멍은 우리의 화두가 되었다.
똥구멍은 안녕하신가?
심양공항에서...
심양은 중국 둥베이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중국 전체에서도 가장 큰 공업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다. 10세기까지는 요나라의 중요한 국경마을이었다. 17세기 초 만주족이 수도로 삼고 성경으로 개명했다. 선양은 만주족이 중국 전역을 정복할 때 훌륭한 편성기지 구실을 했다. 수도가 베이징으로 옮겨진 후에도 지배왕조의 옛 수도로서 특권을 누렸다. 1895년 이후 만주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한 러시아의 요새가 되었다가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선양을 차지하였다가 일본이 항복한 후 중국의 국민당 군대가 점령했다. 국공내전 당시 공산군이 중국 본토 전체를 정복할 때 기지 구실을 했다. 1950년 이후 선양이란 이름을 되찾았으며, 줄곧 중국에서 가장 큰 만주 남부 종합중공업단지의 중심지였다.
-출전 다음 백과-
통화 가는 길의 풍경 동영상.
끝없이 이어지는옥수수 밭.
일제의 악랄한 731부대가 이곳 통화시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가 패전 후 남기고 간 실험실과 관련 공장시설들이, 훗날 중국 제약사업과 관련된 최고의 도시가 되는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곳은 일본 관광객들이 지은 죄가 많아 쉽게 오지 못한다고 한다.
심양은 중국 요녕성의 성도로 한때 고구려 땅이었는데 당나라 때 중국 영토가 되었다.
17세기 초 만주족인 누루하치가 후금(1616-1636)을 세운 이후 1625년 도읍으로 정했다.
1634년에는 성경(만주어로는 묵던)으로 개칭하였다.
후금의 2대칸이자 청나라 2대 황제인 홍타이지는 1636년에 국호를 청(1616-1912)으로 바꿨다.
이후 청 3대 황제인 순치제때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겼다. 1657년 봉천부로 이름 지어졌고 1950년 이후 선양이라는 이름을 되찾았다고 한다.
통화는 동남부는 압록강을 경계로 해서 북한의 자강도, 서남부는 요녕성 북부는 지린성 랴오위안시, 지린시, 바이산시와 접한다. 시역은 주로 산악과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압록강, 북쪽으로 훈강(비류수)이 흐른다.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다. 구한말 신흥무관학교가 류허현에 세워졌다.
1954년, 통화 전구(通化專區)가 설치되어 옛 관할의 퉁화(通化), 류허(柳河), 하이룽(海龙), 후이난(辉南), 징위(靖宇), 푸쑹(抚松), 창바이(长白), 린장(临江), 지안(集安)의 9현을 관할했다. 1970년에 통화 지구(通化地区)로 개칭했다.
1985년 행정 개혁으로 통화 지구를 폐지하고, 현급시인 통화 시 (1958년 성 직할로 이관)를 지급시로 승격해 통화 현, 집안 현을 관할했고, 혼강(백산) 시도 지급시로 승격해 무송, 정우 두 현과 장백 조선족 자치현을 관할, 해룡 현도 지급시인 매하구 시로 개편되어 휘남 과 류하 두 현을 관할했다. 그러나 같은 해 말에 매하구 현급시로 강등되어 통화 시로 편입되었다.
-출전 위키백과-
통화로 4시간 이동 중 휴게소에 있는 홍타이지 동상 앞에서.
이곳에서 옥수수를 먹었는데, 10여년 전에 중국에서 먹었던 맛 없던 옥수수 맛으로 착각했는데, 눈의 흰자위가 뒤집어질 정도로 가성비와 맛이 좋다.
저녁 식사 전경.
매 끼마다 우리는 고량주와 맥주로 우리의 간에 어퍼컷과 크로스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재중 동포가 운영하는 금화대 주점에서 저녁 동영상.
시작부터 술이다. 조짐이 좋지 않다.
첫날은 만터 호텔이다.
호텔에서 4박을 하는 동안 우리는 매번 체인징 파트너를 하기로 했다.
과연 누가 캐미가 찰떡으로 맞을까?
-계속 이어집니다-
첫댓글 추억여행의 시작!!!
역사를 꼼꼼히 적느라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