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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한비문학 편집 고문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데다가 의자 몇 개 내 놓는 거여 <이정록의 ‘의자‘> 어머니가 쓴 시를 받아 적은 시인, 시인과 시인의 어머니는 깨달음으로 한통속입니다. 집을 나서며 몇 마디 던지는 말이라고 할 것들이 시가 되었습니다. 힘들게 세상을 건너온 어머니가 많이 사용해서 고장이 난 몸을 치료하러 병원으로 향하면서 집을 나서는 길에 몇 마디 한 것이 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의 어머니는 아들인 시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시는 이렇게 쓰는 거란다 라면서 굵어진 아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습니다. 읽을수록 흐뭇하고 정다운 시를 만나게 한 것은 순전히 시인의 어머니 덕분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쓴 시이기에 쉬워서 마음이 푸근하고 아늑해지는 시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도 이런 빈틈이 보여야 사람다운 정이 스며드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어렸을 적엔 어른들의 이야기가 잔소리로 들리더니 나이더니 깊은 속내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힘든 삶을 건너서 시냇가에 걸터앉아 나누는 이야기들이 호박넝쿨에 달린 호박처럼 삶의 지혜로 푸짐합니다. 살아있는 것들이 연민으로 다가서는 순간 삶은 어쩌면 어설프기만 한 자신을 끌어안는 순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의자>라는 말에는 정말 다 들어있습니다. 사랑, 고마움, 연민, 연륜, 타자에 대한 이해까지도 고스란히 들어있습니다. 푸짐한 밥상을 받은 기분이 듭니다. 넉넉한 마음이게 한 시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어디 하나 버릴 데 없는 단어들로 조합이 되었는데 이렇게 편안하게 해주는 시가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어머니의 말에 더 보태지도 빼지도 않았는데 한 편의 시가 구수하게 익었지요.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 셈이지요. 시인을 낳았으니 내가 먼저 시인이라는 듯 어머니를 닮아 시가 풍요로 가득합니다. 지식은 학교에서 배우고 지혜는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지식은 체험이 무르익어야 지혜가 되거든요. 아니면 성찰과 사유가 잘 버무려져야 지식이 지혜로 변이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징그러운 모양의 번데기에서 나비로 변해 날아오르는 신비의 현장에 서 있으면 정말 환희라는 말이 떠오르지요. 지식과 지혜가 그렇습니다. 애벌레와 나비의 관계와 같은 것이 지식과 지혜지요. 의식의 전환 그리고 경험의 축적이 잘 이루어지면 지식은 어느 날 삶의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날개를 달게 되는 것입니다. 이정록 시인의 시는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 셈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어머니가 먼저 시인이고 아들은 그 피를 받은 격이거든요. 시는 먹물을 먹은 아들이 썼지만 세상 살면서 자식들을 위해 일만 하느라 아무 생각 없이 산 듯한 어머니의 인생으로 쓴 시는 감동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하지 않습니다. 저물어가는 인생으로 길어 올린 한마디 한 마디가 생기를 머금어 빛나는 시어가 되었습니다. 이 시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다 들어있습니다. 시골에서 텃밭을 일구고 자연과 부딪히면서 깨달은 지혜가 고스란히 봄날에 풀들이 일어서듯 파랗게 살아있습니다. 넉넉한 저녁 밥상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시입니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참 기발한 발상입니다. 헌데 이것을 발상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어머니로서는 아주 편한 비유로 쉽게 던진 말이지만 세상 어느 시인이 이런 멋진 비유를 할 수 있겠습니까. 삶은 묵직한 깨달음 하나를 이 세상에 자연스럽게 던지고 있습니다. 바로 시인 어머니의 삶이 만들어낸 넉넉하고 아주 편안한 생각이지요. 어디 하나 걸림이 없습니다. 이처럼 시는 쉬워야 하거든요. 평론도 아니고, 학문서도 아닌 사람의 감성을 건드려 비가 내리고 하고, 바람이 불게 해야 하는 것이 시인데, 시가 왜 어려워야 하느냐고 저는 반문하고 싶어집니다. 세상을 깨우치고 나면 말도 단순해지지요. 그림도 익으면 단순해지지요. 아름다운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아름다움은 단순미지요. 트집 잡을 게 없어지거든요. 자연이 비비 꼬아가며 세상을 만들지 않지요.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면 봄이 오고, 새 잎이 나지요. 그러다 바람이 차가워지면 가을이 오면서 겨울로 접어듭니다. 어디 하나 걸리는 것 없이 흐르듯 세상은 만들어지고 소멸되어가거든요. 그 가운데 사람은 받아들이며 살기도 하고, 때론 저항하며 살기도 하지요. 순명이 찾아드는 것은 겪어본 후에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지요. 나이기 쉰이면 봄을 쉰 번 만났다는 이야기지요. 나이가 60이면 60번 봄을 만나고 헤어졌다는 것이지요. 만남도 아픔이지만 헤어짐은 더 큰 아픔인데 그것을, 생각해 보세요. 60번을 경험했다고요. 이순이란 말은 그래서 의미 있는 것이지 싶습니다. 60은 동양에서는 다 겪은 것이지요. 마무리와 새로운 출발이 있는 지점이거든요. 이순耳順, 귀가 순해진다는 것은 받아들임이 거칠 것이 없다는 이야기겠지요. 바깥바람이 거칠어지면 안달하며 밤을 샌다고 사과나무에 매달린 사과가 떨어지지 않을 것도 아니지요. 몸으로 나가 막을 수 없다면 그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같은 것을 60번이나 겪었다면 바람이 거칠기로서니 마음의 평정을 잃을 일이 아니지요. 다시 바람은 순해지고 세상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겠지요. 그러한 자연의 순명을 받아들이고 산 시인의 어머니는 넌지시 시인아들에게 세상의 이치를 설명해 줍니다. 이론이나 학자들이 쓰는 전문용어 하나 없이 어제 스쳐간 바람처럼 부드럽게 이야기합니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너무나 깊은 원리를 바람결에 실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허리가 아프니까 /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 꽃도 열매도, 그게 다 / 의자에 앉아있는 것이여> 라고 세월이 만든 철학자가 군더더기 없는 세상의 원리를 한마디로 요약해서 아주 편하게 이야기하는 게지요. <의자>라는 말에는 참으로 많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의자도 받아들임의 공간이거든요. 나이가 들어 지혜로워진다는 것은 받아들임의 순리를 체득한 연후에야 가능한 일이지요. 이 시에서 의자가 가진 다의적인 내포가 전체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사실 의자 하나만 가지고 이 시가 완성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의미가 전환되는 과정에 <의자>라는 단어가 가진 힘은 크고 푸근합니다. 서로 보듬고 아우르는 온기가 느껴져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담겨 있던 속내를 드러냅니다. 시인 어머니의 마음을 아들이게 전이하는 과정이 무던한 권유로 들립니다. <주말엔 /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 그래도 큰애 네가 /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라며 보고 싶은 남편을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전해보는 게지요. 그리고 듬직한 아들에게 그 일을 당부하면서 칭찬 한 마디를 던지고 있습니다. 칭찬 만한 권유가 세상이 있을 라고요. 고래도 춤추게 하는데, 시인 아들이 어찌 물리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큰애 네가 /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라고 하는 어머니 말에 거부할 아들은 없지요. 살아있는 생명을 바라보면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서 부터 일어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직접 몸으로 찾아가는 탐험가나 여행가보다 철학자가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도인이 세상을 등지고 면벽하는 원리가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느리게 이해하되 몸으로 체험한 것을 차곡차곡 쌓아서 이룬 값진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에는 바람소리가 들어있고, 배고팠던 고난도 들어있고, 눈물도 들어있습니다. 사랑했던 남편과 의 기억도 들어있어서 사람의 희로애락이 희, 노, 애, 락으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뭉뚱그려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의자>지요.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면 그것을 보듬어 안는 배려가 생기지요. 생명 모두는 살아가면서 힘들어하거든요. <의자>의 탄생은 그렇게 만들어졌고, 모두를 끌어안은 단어가 되었지요. 절묘하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이지요. 시인보다 더 시인인 어머니의 세상살이는 넉넉함으로 따뜻합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인 셈입니다. 두 분의 동거가 참 아름답습니다.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면 이런 마음이 들까요. 참 푸근한 마음이다 싶습니다.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그 마음이 사람을 흐뭇하게 합니다. 예전 농사철에 시골길을 가다 보면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 세우곤 했지요. 밥 먹고 가라고.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불러서 따뜻한 밥 한 그릇 같이 먹자는 그 넉넉한 마음을 만나는 기분입니다. 참외밭에 지푸라기를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애정을 한 차원 넘는 것이지요. 사람이야 같은 동류의식이라도 발동하는 것이지만 채소밭에 열리는 것까지도 마음으로 챙기는 것을 보면 우주는 하나의 큰 어깨동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읽을 수 있으니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몸으로 세상을 읽는 농부의 마음을 닮은 시인, 이정록 이정록 시인은 1964년 충남 홍성 출생하였습니다. 충청도의 능청스러움이 은근히 배어 있음에서 혼자서 웃었지요. 제가 남들이 멍청도라고 하는 충청도거든요. 사람이 좀 멍청해야지 똑똑하기만 해서 되겠습니까. 헌데 이정록 시인의 시에서 그런 느낌이 들게 하는 부분부분이 있어 반가웠습니다. 1993년《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혈거시대」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고, 시집으로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풋사과의 주름살』『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제비꽃 여인숙』 『의자』등이 있습니다. 시우화집으로는 『발바닥 가운데가 오목한 이유』가 있습니다. 능력만큼 상도 받아서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받았습니다. 능력만큼 인정도 받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어머니의 넉넉한 마음만큼 시인도 넉넉해서 인생도 넉넉하게 베풀어지나 봅니다. 시를 쓰겠다며 밖으로 주으러 다니지 않아요. TV, 아내 등 내 삶의 일상에서 본 것들로 시를 만듭니다. 생체험이 들지 않으면 그건 내것이 아니죠. 이정록 시인의 시 쓰기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몸으로 부딪힌 것들로 소재를 삼고 그 안에서 통찰을 읽어내는 게지요. 이정록 시인을 평한 이혜원의 글을 한 번 볼까요. 이정록은 서정시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시인들 가운데 상당히 주목받는 시인이다. 그의 시가 구태의연한 서정시의 표본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실감을 동반하는 통합된 감수성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생활공간이 도시가 아닌 자연에 가깝다는 사실이 그의 시에 체험의 구체성을 부여한다. 즉 그는 요즘 흔치 않은 자연친화적 삶의 경험이 풍부한 시인으로서 자연에 대한 원초적 감수성에 기인하는 저력을 내포하고 있다. 이정록의 시에서 자연은 관찰의 대상이나 풍경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근거와 감성의 기원으로 작용한다. 그의 시에는 자연에 대한 찬탄과 환호보다는 내밀한 관조와 교감이 자리한다. 그의 삶이 자연에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연 중심적인 관점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는 항상 자연에 대한 관조와 호응에서 출발하지만 결코 인간적인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이 함몰된 자연을 그리기보다는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는 현장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시는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실감을 확보한다. 요컨대 이정록의 시는 이 시대의 서정시가 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관점과 감성의 가능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대표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누에가 뽕나무를 벗어난 적이 없지만 누에고치를 깨치고 나오는 순간, 날개를 가지게 되지요. 이정록 시인의 시는 나비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도리어 묵직한 중량감을 느끼게 하면서 믿음의 시를 만들어내지요. 현장의 시이기 때문이지요. 현장이란 곳이 전쟁터나 사회의 사건현장이 아니라 뽕나무에 사는 누에처럼 자신의 삶을 경험한 만큼으로 한정시켜놓았습니다. 일상의 영역을 확장하지 않은 것은 사는 것이 영역 넓히기가 아니고 삶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쌀 한 톨로도 우주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요. 쌀 한 톨에 4계절이 다 들어있어 계절이 엮어가는 파노라마가 쌀 한 톨에 들어있지요. 온냉을 번갈아 담은 바람이 지나고, 달이 차고 이울고, 태양이 구름을 만나 흐림과 맑음을 번갈아 나누면서 벼가 자라는 것을 돕기도 하고 때론 힘들게 했겠지요. 거기에 농부의 땀은 얼마나 또 들어갔겠습니까. 들이 대자면 한이 없지요. 하나의 열매가 맺어지기까지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엮어져 있습니다. 볍씨 한 톨 매만지다가 앞니 내밀어 껍질을 벗긴다 쌀 한 톨에도, 오돌토돌 솟구쳐 오른 산줄기가 있고 까끄라기 쪽으로 흘러간 강물이 있다 쌀이라는 흰 별이 산맥과 계곡을 갖기 전 뜨물, 그 혼돈의 나날 무성했던 천둥 번개며 개구리 소리들 <흰 별> 앞 부분 이 시는 앞 부분만 소개하고 지나가렵니다. 제가 쓸 지면이 그리 넉넉하지 않아 선별해야 하는데 제 마음이 더 끌리는 시가 있습니다. 짐 꾸리던 손이 작은 짐이 되어 등뒤로 얹혔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 오른 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자신의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 등뒤에 양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 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 낮은 언덕의 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 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 아기를 잘 업을 수 있는 것은 허공 한 채를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 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밀쳐놓은 빈손 위에 무한 천공의 주춧돌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이정록의 ‘뒷짐’> 이정록 시인의 시는 엉뚱하면서 그 엉뚱함으로 큰 각성을 길어 올리지요. 일상에서 길어 올리는 글들이 특별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깨달음에 마음을 둔 사람들의 그런 시각이면서도 생활이 묻어있습니다. 참 특별한 시선입니다. 대부분은 두 가지 중 한 가지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특별하다는 겁니다. 깨달음으로 목표를 설정한 선시가 아닌데 분명 각(覺)의 냄새가 납니다. 그것도 아주 한 발 물러선 사람처럼 짧은 시에 슬며시 깨달음 하나를 놓고 가는 게지요. 그러한 마음은 노인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여유와 관조, 마음씀이 폭넓고 따뜻한 데 있습니다. 이렇듯 여유가 있는 시 쓰기를 하는 시인은 아주 드물지요. 어디에서 발원한 여유인지 몰라도 하나하나가 세상을 많이 산 듯한 느낌을 주지요. 몸으로 세상을 익혀서 세상의 일에 흔들리지 않는 천연덕스러운 농부의 마음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하는 힘이 부럽습니다. 비가 내리면 가타부타 말없이 논배미로 나가 물꼬를 열어놓고 돌아오는 그런 농부를 닮았습니다. 몸으로 행하고 몸으로 말하는 그런 자연을 닮은 노인을 닮았습니다. 세상의 흐르는 이치를 알아서 굳이 밀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품새입니다. 간혹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 마음이 쓰려서 슬며시 뒷짐을 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닫힌 마음이 풀립니다. 욕심도 누그러집니다. 깨달음이 높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가슴에 안아야 할 그러한 것들입니다. 종교적인 깨달음이나 인간을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가는 그런 깨달음이 아닙니다. 깨달은 후에도 역시 보듬어 안아야 할 그러한 것들이지요. 아주 조금만 살려볼까요. 시에 무슨 비평이 필요하겠습니까. 읽는 독자가 가진 마음을 읽어내면 모든 것이 종료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비평가나 평론이 존재하는 것은 정의 내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심의 한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축구해설가가 축구선수보다 공을 잘 차지 못하지요. 유명한 평론가나 비평가가 시를 잘 쓰는 경우는 아주 드물지요. 우리 민족의 입과 마음에 자리 잡은 시인들의 경우도 대개가 그렇습니다. 비평을 잘한 시인이 드물지요. 그냥 시를 썼을 뿐입니다. 그리고 평론가들의 공덕으로 시가 발전했다는 것은 없지요. 축구해설가가 해설을 잘해서 축구가 발전될 리 없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 <뒷짐>이라는 시는 가파른 일상에서 한 계단식을 올라가는 수법을 택해서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시지요. 앞글이 뒷글을 연결해 설명해주고, 다음 글이 앞글보다 한 계단만큼만 올라가기 때문에 저절로 읽어가면서 이해가 되고 감동도 그만큼씩만 상승하게 되지요. 이정록 시인의 시가 우리들의 일상에서 만나는, 그것도 쉽게 만나는 일들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접근이 쉽고, 이끌어가는 방법 또한 세상을 많이 산 사람의 덕담 같기도 하고, 일침 같기도 해서 푸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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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정록님은 제가 좋아하는 시인 중의 한 분이십니다. 시도 평도 잔잔하니 닮았습니다. 신광철 시인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