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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라 간단히 금강경오가해 ‘육조서’와
설잠스님 법성게를 마지막으로 끝납니다.
우리나라 토속 사투리는 최고급의 언어입니다.
조계육조선사 서(曹溪六祖禪師 序)
무릇 『금강경』은 무상(색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을 종지로 삼고,
무주(한 물건에 대한 집착이 없음)를 바탕으로 삼고,
묘유(불가사의한 존재의 작용)를 작용으로 삼는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뒤로부터 이 경의 뜻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고 성품을 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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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세상 사람들이 자성을 보지 못하기에 성품 보는 법을 세웠으니,
만약 세상 사람이 진여의 본체를 볼 수 있다면 법을 세울 필요가 없다.
이 경을 독송하는 이가 수없이 많고 칭찬하는 이도 헤아릴 수 없고
해설과 주석을 낸 이들도 무려 8백여 분이나 된다.
각자의 소견에 따라 도리를 설하나, 견해는 달라도 법은 다르지 않다.
전생에 씨앗을 심은 상근기는 한번 듣고 깨닫지만,
전생에 닦은 지혜가 없으면 아무리 독송을 많이 해도 부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뜻을 풀이하여 공부하는 이들의 의심을 끊기 바라니,
만약 이 경을 읽고 뜻을 파악하여 의심이 없다면 해설할 필요가 없다.
예로부터 여래께서 설하신 최상의 법문은
범부의 착하지 못한 마음을 제거하기 위함이니.
경이란 성인의 말씀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듣고
범부에서 성인의 깨달음에 이르러 미혹한 마음을 영원히 쉬게 한 것이다.
이 한 권의 경은 중생의 성품 속에 본래 있건만,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은 문자만을 읽고 외우기 때문이다.
만약 본마음을 깨닫는다면 이 경이 문자에 있지 않음을 비로소 알리라,
다만 자기 성품을 밝게 깨달을 수 있다면
모든 부처님이 이 경에서 나오심을 비로소 믿게 될 것이다.
지금 나는 요즘 세상 사람들이 몸 밖에서 부처를 찾고
밖을 향해 경을 구하므로 마음 안에서 발견하지 못하고 내면의 경을 갖지 않을까 두렵다.
그래서 이 해석을 지어 모든 학인이 안으로 마음의 경을 간직하게 하여,
자신이 청정한 부처의 마음을 깨달아서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경지에이르게 하는 것이다.
후세의 학인들이 이 경을 읽다가 의심이 있어서 이 해설을 보고
의심이 풀어지면 다시는 이 구결을 쓰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다 같이 돌 속에 있는 금의 성품을 보아서
지혜의 불로 녹여서 잡된 돌은 버리고 금만 남기기를 바란다.
우리 본사 석가모니께서 사위국에 계시면서
『금강경』을 설하실 때 수보리가 묻는 말에 대비한 마음으로 설법하시니,
수보리가 설법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서 법문의 이름을 지어주시길 청하며,
후세 사람들이 이 법에 의지하여 이 경을 받아 간직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 경은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니
너는 이 이름으로 받들어 지녀라’고 하셨다.”
여래께서 이 법에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뜻은 무엇인가.
금강은 세상의 보석로서 성질이 매우 날카로워 모든 물건을 부순다.
금강이 아주 단단하기는 하지만 산양의 뿔이 그것을 부서뜨리니,
금강의 단단함은 불성을 비유하고 산양의 뿔은 번뇌를 비유한다.
금강이 단단하고 세기는 하지만 산양의 뿔이 그것을 부수듯이,
불성이 견고하기는 하지만 번뇌가 그것을 어지럽히고,
번뇌가 견고하기는 하지만 반야의 지혜가 능히 깨뜨리고,
산양의 뿔이 아무리 아무리 단단해도 정련된 빈철이 파괴한다.
이 도리를 깨달은 자는 환하게 자신의 성품을 보게 되리라.
『열반경』에서는
“불성을 본 사람에게는 중생이라 부르지 않으며
불성을 보지 못한 자를 중생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여래가 설하신 금강의 비유는,
다만 세상 사람들이 성품이 견고하지 못해서
비록 입으로는 경을 외우면서도 밝은 빛이 나지 않기 때문이며
밖으로 외우고 안으로 행하여야만 밝은 빛이 고루 퍼질 것이다.
안으로 견고함이 없으면 정과 혜가 곧 없어지거니와,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행한다면 정과 혜가 고르게 되니
그것을 구경(원만성취)이라 한다.
금이 산속에 있으나 산은 그것이 보배인지 알지 못하고,
보배도 역시 자기가 있는 곳이 산인 줄을 알지 못한다.
왜 그런가?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성품이 있어서 보배로 취하여 사용한다.
연금사(금을 캐서 제련하는 기술자)를 만나면
산을 뚫고 부숴 광석을 채취하여 녹이고 제련하여
마침내 순금을 얻어서 마음대로 사용하여 가난의 고생을 면한다.
사대(지수화풍)로 된 몸속의 불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몸은 세계에 비유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하는 차별은 산에 비유하고,
번뇌는 광석에 비유되고, 금은 불성에 비유하고,
지혜는 기술자에 비유하고,
산을 뚫는 돌을 부수는 작업은 용맹정진을 비유한다.
몸이라는 세계 속에 인아라는 차별의 산이 있고,
인아의 산 속에 번뇌라는 광석이 있으며,
번뇌의 광석 속에 불성이라는 보배가 있고,
불성의 보배 속에 지혜라는 기술자가 있다.
지혜라는 기술자를 써서 차별인 인아의 산을 뚫고,
번뇌라는 광석을 발견해서 깨달음의 불로 제련하여
자신의 금강불성이 환하게 밝고 깨끗함을 보게 된다.
그래서 금강을 비유로 들어서 경의 이름을 지으신 것이다.
쓸데없이 알기만 하고 수행하지 않으면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으나,
뜻을 알고 수행하면 이름과 실체가 함께 갖추어진다.
수행하지 않으면 범부요, 닦으면 성인의 지혜와 같아진다.
그래서 ‘금강’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다.
반야는 무엇인가?
반야는 인도 말인데 중국말로는 지혜(智慧)이다.
지(智)란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고
혜(慧)란 방편이 있음을 말하니,
혜(慧)는 지(智)의 바탕이고 지(智)는 혜(慧)의 작용이다.
만약 바탕에 혜(慧)가 있으면, 지(智)를 쓰는 데 어리석지 않지만,
바탕에 혜(慧)가 없으면 어리석음을 써서 지(智)가 없게 된다.
다만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므로 마침내 지혜로서 어리석음을 제거한다.
무엇을 바라밀이라 하는가?
중국말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니,
저 언덕에 이른다 함은 생멸의 윤회를 벗어난다는 뜻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품이 견고하지 못하기에
일체법에 생멸하는 모습이 있으므로
육도를 윤회하며 진여의 땅에 이르지 못하므로
이런 것들을 두고 이 언덕이라 한다.
‘저 언덕에 이른다.’라는 것은 반드시 큰 지혜를 갖추어
일체법에서 완전히 생멸을 떠나는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마음이 미혹하면 이 언덕이고 마음을 깨달으면 저 언덕이며,
마음이 삿되면 이 언덕이고 마음이 바르면 저 언덕이다.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행하면 곧 자기 법신에 바라밀이 있는 것이요,
입으로 말하면서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곧 바라밀이 없는 것이다.
경이라 무엇인가?
경이란 길이니, 즉 부처 되는 지름길을 뜻한다.
누구든 이 길을 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안으로 반야행을 닦아야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
혹, 다만 능히 외우고 말로만 하며
마음으로 의지해 닦지 않는다면 자기 마음에 경이 없을 것이요,
실지로 보고 실지로 행하면 자기 마음에 경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래께서 이 경의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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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육조선사 서] 첫 머리 부분만 설의를 보겠습니다.
함허스님 서도 ‘유일물어차’의 시작 부분만 했습니다.
시간이 촉박하고 학생은 자료가 많다고 하니까
맛만 보고 넘어가니, 그 한 맛을 확실히 스스로 인증하십시오.
무릇 『금강경』은 무상(색에 대한 집착이 없는 것)을 종지로 삼고,
무주(한 물건에 대한 집착이 없음)를 바탕으로 삼고,
묘유(불가사의한 존재의 작용)를 작용으로 삼는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뒤로부터 이 경의 뜻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고 성품을 보게 하였다.
설의
般若靈源이 廓然無諸相하고 曠然無所住하야 空而無在하며 湛而無知라
반야영원이 확연무제상하고 광연무소주하야 공이무재하며 담이무지라
今此一經이 以此로 爲宗爲體하야 無知而無不知하야 無在而無不在하며
금차일경이 이차로 위종위체하야 무지이무부지하야 무재이무부재하며
無住而無所不住하고 無相而不礙諸相이니 此所以妙有로 爲用也니라 諸佛所證이
무주이무소부주하고 무상이불애제상이니 차소이묘유로 위용야니라 제불소증이
蓋證此也시며 諸祖所傳이 蓋傳此也시며 其所以開示人者도 亦以此也니라
개증차야시며 제조소전이 개전차야시며 기소이개시인자도 역이차야니라
반야의 신령스런 근원이 확 트여서 모든 相이 없고,
넓고 커서 머무름이 없으며,
비어서[空] 있지 않으며 맑아서 앎이 없도다.
지금의 금강경이 이것으로 宗을 삼고 體를 삼아서
앎이 없지만[無知] 알지 못함도 없고[無不知],
있지 않지만[無在] 있지 않음도 없으며[無不在],
住함이 없으되 住하지 않음도 없으며,
相이 없으되 모든 相에 걸리지 않으니,
이것이 妙有로써 用을 삼는 까닭이니라,
모든 부처님이 증득하신 것이 다 이것을 증득한 것이며,
모든 조사님이 전하신 것도 모두 이것을 전한 것이니,
그로써 사람들에게 열어 보이신 것도 역시 이것으로써 함이니라.
☛ 무상(無相)<alaksana/animitta>:
모든 사물에는 고정적(모습)․실체적(모양) 특질이 없다는 의미.
무상은 공(空)의 사상을 근본으로 한다. 모든 사물은 공이며 자성(自性)이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며, 무상이기 때문에 청정(淸淨)하게 된다.
또 무상은 차별․대립의 모습[相]을 초월한 무차별의 상태를 말하기도 하는데,
그 수행을 무상관(無相觀), 무상삼매(無相三昧)라고 한다.
또 불교 수행의 최고경지인 삼해탈문(三解脫門: 空․無相․無類)의 무상은
일체의 집착을 떠난 경지를 말한다.
따라서 무상은 열반(涅槃)의 이명(異名)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무주(無住) : 住는 머무는 곳이란 뜻으로 집착하는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주란 고정적인 상태를 부정하는 말로 일체제법은 무자성임으로 무주이며
또 보살은 지혜에 의해서 생사에 住하지 않고 자비에 의해서 열반에 住하지 않는다
(무주처열반 無住處涅槃)고 한다.
☛ 묘유(妙有) : 비유(非有)의 有를 묘유라 한다.
즉 비공(非空)의 공을 진공이라고 말한 것에 상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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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스크리트어> 발음 + 뜻(義) = 한자(동이족의 문자)
☛ 한자고금음집(漢字古今音集)- 발음의 변화를 적은 책.
☛ 우리가 쓰는 말이 표준말이고 범어(싼쓰크리트어)다.
옛날의 조선은 동서 2만리, 남북 5만리 이다(부도지에 기록)
파내유국(波奈留國)- 판찰라스(부도지, 삼성기에 기록)
조선은 지구의 반에 해당한다.(하광악(何光岳)의 동이원류사 기록)
싱가폴, 캄보디아, 상해, 산둥반도, 양자강, 태평양군도, 인도지나반도, 미국,
남북미주. 미국의 인디안문명이 동양문명이다(염황원류사)
☀ 아짓트 A ji ta(아지따): 완전한 요새의 성을 아짓트라 한다.
ji(지)= 지배支配한다. A ji(아 지)= 정복할 수 없다.
☀ 아사달(阿斯達) Asaddhar – 정복하지 못한다. 신비한 공간.
난공불락(難攻不落). 수도를 아사달에 세운다.
아사달 (阿斯達)- 단군 조선 개국 때의 도읍지
지금의 평양 부근의 백악산(白岳山) 또 황해도 구월산이라 함.
서울(한양성), 안시성 등이 모두 아사달이다.
☀ 아즈텍 Ajtak – 잉카 마야문명의 아즈택.
한국 = 조선朝鮮 = 태양이 비치는 곳.
조선- 우리나라의 상고시대부터 써오던 나라 이름.
조(朝) - 광명suna(수나).
카일라사 Khar lase. 티벳의 수도 라사.
☛ 라사 = 조선 = 태양이 비치는 나라.
☀ 아즐란 Atjlan – 정복할 수 없는 땅, 신비한 궁전 = 아사달.
A ji land. 정복할 수 없는 땅
A ji(아 지)- 정복할 수 없다. land 랜드- 땅
아침 a chim 침- 침침하다, 눈이 침침하다.
아침- 어둠이 가시지 않았다. 해가 밝아 오는 것.
☀ 카나다 Kha na dha = 태양이 비치는 곳 = 조선.
Kha – 태양, 선. na(나): 나타났다. dha(다): ~에 닿다(위치)
☛ 불이 산으로 간다 => 불교의 오묘한 이치이다.
성철스님의 삼천배 친견 – 쉬운 일이고
선재동자의 53선지식 친견- 광대한 지역을 다니는 어려움이다.
☀ 아즘마 a jim ma – 요리하는 여자, 쿠커.
짐(jim)- 먹는다. 이트.
아저씨, 아지씨, 아제– a ji ji(아 지 지)
☀ 시 Si- 썩은 것, 더러운 것,
시체(屍體), 시(屎) 똥, 시하다- 오줌누다.
시시하다= 똥같다. 오줌을 누다
☀ 몰러찌. ~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믈러찌’라 한다.
몰러찌 Mlech, 한자의 몰지각(沒知覺)= 믈러찌.
☀ 知 智 慧 (디 디 ㅎ휴ㅖ,)
=> 동국정운 표기- 건대 도서관 1권 뿐.
산스크리트와 한글과 한문의 일치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역사상
신숙주 1사람이고, 600년 후 강상원 박사 외에 없다.
우리말이 싼스크리트와 정확히 일치한다. 일치= 조화(調和)롭다.
☉ 동국정운(東國正韻)의 정(正)자를
맹자서에서, 如射者 發而不中(여사자 발이부중)
- 활 쏘는 사람이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지 않으면
- 다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다시 쏴도 적중하지 않을 때
불원이승자(不怨已勝者),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다시 활을 쏘고서 바라보는 것이 정(正)이다.
순임금의 예羿: 궁술의 명인. 예(Niye)- 추장.
☉ 조상숭배를 반드시 해야한다. 하늘(天)= 조상이다,
총명예지,- 조상의 총명예지를 받듬= 조상숭배.
기독교의 천주,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천주(天主)이다.
다윗, 솔로몬, 아론(모세 형), 모세를 받드는 이스라엘 유대교이다.
옥스포드 사전에 ‘호킹’ 박사가 우주 탄생의 원리를 밝혔다.
미국과 유럽의 ‘우리 예수 그리스도’ ‘할렐루야’ 하는
엉터리 철학의 하느님 사상은 이미 박살났다.
우리는 우리 조상 세종대왕, 이순신, 강감찬 등 우리 조상을 받들어야 한다.
☛ 외국사람(대사)은 한국을 망하게 만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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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莊嚴法界實寶殿 장엄법계실보전
법계의 실다운 보배궁전을 장엄한다.
☀ 본래로 법계의 실다운 보배궁전인데 달리
또 장엄할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다라니의 다함이 없는 보배로 다시 실다운 보배궁전을
장엄하는 것은 화엄의 안목으로 본 세계는 본래로 중중(重重)하고,
무진(無盡)하기에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자 함이다.
인타라그물은 그림자와 형상이 서로 섞여 거듭거듭 다함이 없으니,
장엄하는 것을 인(因)하지 않고 닦아 증득함을 인하지 않되
본래 구족하며 본래 원만히 이룬 까닭에 “실답다.”라 하고,
또한 “이 실자(實字)는 건드릴 수 없는 것이니
건드리면 화(禍)가 생긴다.”고 하는 것이다.
☀ 인타라망은 또는 제망이라고도 하는데 제석천의
궁전을 장엄하게 덮고 있는 보배 그물이다.
낱낱의 그물코마다 보배구슬을 달았고, 그 보배구슬의 한 개 한 개
마다 각각 다른 낱낱의 보배구슬의 영상을 나타내고, 그 한
보배구슬의 안에 나타나는 일체 보배구슬의 영상마다 또 다른 일체
보배구슬의 영상이 나타나서 중중무진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람을 위시하여 우리가 사는 세계와 저 드넓은 우주까지 모두가
그와 같은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비유다.
그것으로도 훌륭한데 달리 또 장엄하고 닦아서 증득할 일이 있겠는가.
29. 窮坐實際中道床 궁좌실제중도상
궁극에는 실제의 중도상에 앉았으니
☀ 앞에서 “행자가 본제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었다.
실제는 무엇이며 본제는 무엇이며 중도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시 이래로 한 번도 본제와 실제와 중도를 떠난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앉았고, 중간에도 그 자리에 앉았고,
궁극에도 그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에 앉은 이가 누구겠는가.
다만 본래 그 사람일 뿐이다.
본래 그 사람을 또 무어라고 이름을 지어 부를 것인가.
참고로 사전적인 해석들을 소개하면 본제란
근본 구경의 맨 끝이며 진여나 열반의 다른 이름이다.
실제는 진여법성을 말한다.
이는 온갖 법의 끝이 되는 곳이므로 실제라 하며,
또는 진여의 실리를 증득하여 그 궁극에 이르므로 이렇게 이름 한다.
중도는 복잡한 해석이 있지만 천태종은 실상(實相)을 뜻하고,
화엄종은 법계(法界)를 중도라 한다.
깊숙이 법성의 바다에 들어가 더 이상 다다를 데가
아주 없기에 궁(窮)이라고 하고,
요긴한 나룻터를 차단하여
범부와 성인에 통하지 않게 하였기 때문에 “앉았다.”라 하고,
진(眞)도 없고 망(妄)도 없어서 유위(有爲)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실(實)”이라 하고,
일체의 범부와 성인이 몸담을 데가 없기에 “제(際)”라고 한다.
☀ 궁, 좌, 실, 제(窮坐實際)를 한 자 한 자 해석하였다.
선(禪)의 안목으로 보면 어떤 글자도 어떤 낱말도 모두가
원융무애하고 융통자재해서 풀리지 않는 뜻이 없다.
그리고 “어떤 것[一物]”이라고 불러서 건드릴 수 없음을
“중(中)”이라 하고,
삼승(三乘)과 오성(五性)이 끊임없이 밟아 감을 “도(道)”라 하고
궁극에 평상(平常)하여 안배(安排)를 쓰지 않음을
“상(床)”이라고 한 것이다.
☀ 또 중, 도, 상(中道床)을 한 자 한 자 해석하였다.
삼승이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에 대한 3가지 교법(敎法)이다.
승(乘)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함으로 부처님의 교법도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데 비유하였다.
성문승은 사제(四諦)의 법문이니,
부처님이 말씀하는 소리를 듣고 이를 관하여 해탈을 얻는다.
연각승은 12인연의 법문이니, 스승에게 가지 않고 스스로 잎이 피고
꽃이 지는 따위의 이치를 관하여 깨닫는 것이다.
보살승은 6바라밀의 법문이니, 보살은 이 법문을 실천하여 스스로
해탈하고, 남을 해탈케 하여 부처를 이루는 가르침이다.
오성(五性)은 오성각별(各別)로 유식종에서 중생의 성품이 선천적으로
보살정성(定性), 연각정성(定性), 성문정성(定性), 삼승부정성(不定性),
무성유정(無性有情)의 5종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그러하나 이러한 화장세계는 물듦을 여의어서 청정하거늘
어찌 이와 같은 헤아림이 있으리오.
만약 이와 같은 헤아림이 있을진댄 어찌 금일에 이르렀겠으며,
만약 헤아림이 없을진댄 십보법계(十普法界)는
어떤 곳을 향하여 출생하는가.
☀ 화엄경에서는 사람이 사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를
화장장엄세계라 한다.
모든 사람이 정직하고 선량하여 6바라밀을 닦고 사섭법과
사무량심을 실천하고 인의예지를 생활화하기 때문에 어디를 가나
아름다운 꽃으로 장엄한 것과 같은 세상이라는 뜻이다.
마음은 텅 비어 아무런 계산이나 사량 분별이 없다.
그래서 오늘과 같은 완전무결한 삶을 누리는 것이다.
왼손으로 한번 치고는 이르되
“불사(佛事) 문중에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라고 하고,
오른손으로 한번 치고는 이르되
“한 법도 보지 않음이 곧 여래다.”라고 하노니, 도대체 알겠는가.
“삼천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물거품이요,
일체의 성현들은 번개가 번쩍함과 같도다.”
☀ 치문에 “진리의 땅에는 먼지 하나 받아드리지 않지만,
불사에는 그 어떤 한 가지 법도 버리지 않는다.”라 했다.
그래서 이치는 현상을 따라서 무한한 변화를 일으키고
현상은 이치를 얻어서 융통자재하게 된다.
무엇이든 조화가 중요하다.
편협과 치우침은 아름다운 삶이 되지 못한다.
또 증도가에 “한 법도 보지 않음이 곧 여래니,
비로소 이름을 관자재보살이라”고 하는 것이다.
설잠스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다가
문득 다시 증도가를 인용하여
“삼천대천세계는 바다 가운데 물거품이요,
일체의 성현들은 번개가 번쩍함과 같도다.”라고 하였다.
중생 세계니 기세계니 성인들의 세계니 하는 것들이 모두가
공허한 언어에 불과한 것이요, 그 무엇도 실체는 없다는 뜻이리라.
30. 舊來不動名爲佛 구래부동명위불
예로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채 그 이름을 부처라 한다.
☀ 궁극적 입장에서 보면 본래부터 누구나 실제(實際)의
중도상(中道床)에 앉은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 누군들 본래부터 일체의 수행도 깨달음도 필요로
하지 않은 채 부처가 아니겠는가.
시간적으로 1분 1초도 떠나있지 아니했으며,
공간적으로 1미리도 떠나있지 아니한 사실이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그때에 여래께서 장애가 없는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법계의 일체중생들을 두루 살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이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를 다 갖추고
있건만 어리석고 미혹하여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가.
’내가 마땅히 성스러운 도로써 그들로 하여금 망상과 집착을 영원히 떠나고
자기의 몸 가운데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부처님으로 더불어
다름이 없음을 보게 하리라.’”라고 하였다.
존재의 실상과 사람의 실상을 분명하게 깨달은 성인들은 모두 이같이 말씀하였다.
어찌 성인이 두 가지 말을 하겠는가.
천태교는 육즉(六卽)으로써 원교를 판석하되 부처님이 이른바
“일체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함은
부처님이 있든 없든 성품과 형상이 상주(常住)하여
낮음으로부터 깊음에 이르기까지 지위와 지위가 둘이 아님을
“부처님”이라 이름 하였다.
☀ 육즉(六卽)이란 천태종에서 원교의 수행상의 계위를
6단으로 나눈 것이다.
이 6단은 사람의 수행상에서 미오(迷悟)의 차별이 있음을 표시한
것일 뿐이요, 수행의 대상인 실상(實相)의 이치에서는 미오가 둘이
아닌 것이므로 6즉이라 한 것이다.
1, 이즉(理卽)이란 불성진여를 갖추고서도 알지 못하여
아무런 수행도 하지 않고, 생사에 윤회하는 지위이다.
2, 명자즉(名字卽)은 일체가 모두 부처인 것을 교시(敎示)하였지만
내 몸이 곧 부처라는 것을 이름으로만 아는 지위이다.
3, 관행즉(觀行卽)은 처음 관지(觀智)로 10승관법을 닦으면서
겸행육도(兼行六度)와 정행육도(正行六度) 등의 수행으로서
조성(助成)하여 원묘(圓妙)한 이치와 상응하는 지이다.
5품위(品位)에 해당한다.
4, 상사즉(相似卽)은 수행의 공을 쌓아서 진지(眞智)와
비슷한 지혜를 내는 지위이다. 원교 10신의 지위에 해당한다.
5, 분진즉(分眞卽)은 또는 분증즉(分證卽)이라고도 하는데 1분씩
무명을 파하고 1분씩 본유(本有)의 불성을 증현(證顯)하는 지위이다.
원교의 10주(住) 10행(行) 10회향(廻向) 10지(地) 등각(等覺)의
41위에 해당한다.
6, 구경즉(究竟卽)은 본유의 불성 전부가 나타나 끊을 혹(惑)도 없고
증득할 지혜도 없는 구경원만한 지위이다.
묘각위(妙覺位)에 해당하는데 곧 불과(佛果)이다.
“예로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채 그 이름을 부처라.” 하거늘
왜 이와 같은 설명을 덧붙이는가.
본도의 총수론(總髓論)은, 마치 어떤 사람이 침상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 30여 역을 돌아다니다가 깨고 나서
비로소 움직이지 아니한 채 침상에 있었음을 아는 것과 같이
처음의 법성(法性)으로부터 30구(句)를 거쳐 다시 법성(法性)에
이르기까지 단지 하나로서 움직이지 아니하였음을
비유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채 그 이름을 부처라
한다.”라고 한 것이니라.
☀ 설잠스님이 본도(本圖)의 총수론이라고 한 것은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을 일컫는 말이다.
편자는 미상이고 고려시대에 편찬되었다. 줄여서 총수록이라 한다.
의상(義湘, 625-702)스님의 화엄일승법계도에 대한 신라 시대의
주기(註記)들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그 내용의 일부를 이끌어 왔는데 왜 “예로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채 그 이름을 부처라 한다.”라고 했는가를 설명하였다.
본각이 곧 시각이고 시각이 본각에서 벗어나지 아니하였다.
진심과 망심은 서로 사귀어 사무쳐 있다.
그래서 범부의 마음에서 부처의 마음을 본다.
범부의 마음을 떠나서 어디서 부처의 마음을 찾겠는가.
또 사람들이 본래 갖춘 근본 지혜에서 부처님의 지혜를 구한다.
미혹하고 어리석은 보통 사람들을 떠나 어디서 부처님을 찾겠는가?
그래서 법계도는 구불구불 여러 바퀴를 돌고 돌아도 끝내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그려졌다.
법계도가 이렇게 그려진 이 이치만 제대로 알면 화엄경의 근본을
아는 것이며, 법계도를 아는 것이며, 법성게를 아는 것이 된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하지 않던가.
그래서 “어떤 사람이 침상에서 잠이 들어 꿈속에 30여 년을
돌아다니다가 깨고 나서 비로소 움직이지 아니한 채 침상에
있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본래부터 차별이 없는 참사람이지 어찌 다른 사람인가.
자신을 두고 다른 무엇을 찾는 일은 자신의 머리를 두고 다시
머리를 찾는 일이다.
그러나 원(圓)이니 돈(頓)이니 설하여 이름으로써 부처님을
나타냄은 잘못을 범하였음이 뚜렷하다.
“예로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채 그 이름을 부처라 한다.”라고
한 것만 못하다.
누구든 교망(敎網)과 갈등(葛藤)을 여의고 조사의 현묘하고 깊은
관문을 부술 사람은 없는가?
청컨대 한마디 일러보라.
만약 없다면 내가 스스로 말해버리겠다.
잠자코 있다가 이르되
“산과 구름과 바다와 달의 정취(情趣)를 남김없이 설하였거늘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부질없이 시무룩하고 있구나.”라고 하겠다.
법계도(法界圖) 서문과 주해를 마치다.
☀ 부처님을 설하고 진리를 설하고 참사람을 설하는데 원교로서
나타내고 돈교로서 나타내었지만 비슷할지는 몰라도 그 또한 가짜다.
선문(禪文)에는 “잠자코 있는” 양구(良久)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게 묵묵히 있음으로 모든 뜻과 깊은 의미를 다 표현한 것이다.
동작이나 말을 하는 것은 제2구나 제3구에 떨어지는 것이 된다.
유마거사가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침묵으로 드러냈으며
설잠스님도 마지막에는 침묵으로 법계도의 깊은 뜻을 다
표현하였는데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산과 구름과 바다와 달의 정취(情趣)를 남김없이 설하였거늘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고 부질없이 시무룩하고 있구나.”라고
섭섭한 감정을 나타내었다.
부질없이 시무룩하고 있든 기쁘게 웃고 있든 언제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다.
= = = < 9월 18일 여기까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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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댓글을 다는 분은
구경에는 보리를 성취하여지이다.
ㅎㅎㅎㅎㅎ
덕분입니다()
다른분은 시간 활애가 어럽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