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성 조윤호 요셉(趙~, 1848-1866년)이 1866년 12월 23일 치명한 곳이다. 18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조윤호는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나 돈독한 신앙 생활을 어려서부터 익혔다. 1864년 부친을 따라 전주 근처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한 후 이 루치아와 결혼한 그는 1866년 12월 5일 부친 조화서 베드로(趙~, 1815-1866년), 정원지 베드로(鄭~, 1846-1866년), 이명서 베드로(李~, 1821-1866년) 등과 함께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부친인 조화서는 일찍이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전교 활동을 도왔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로 부친 조 안드레아(성 조윤호의 조부)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주해 한 막달레나와 결혼, 아들 윤호를 두었고 이 때 최양업 신부의 복사로 최 신부의 전교와 성무 활동을 보필했고 그 후 전주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주했다.
마침내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체포된 이들 부자는 혹독한 고문과 배교의 강요 속에서도 서로 격려하며 오직 진리만을 말하기로 다짐했다. 옥에서 아버지는 아들 윤호에게 "네 마음이 변할까 염려된다. 관장 앞에서 진리대로 말하여라." 하고 격려했고, 이에 아들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라며 죽음의 두려움보다는 배교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을 서로 독려했던 것이다.
특히 아버지 조화서는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체하며 자신을 회유하려는 관장의 유혹에 여러 번 넘어갈 뻔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마침내 조화서는 모든 유혹과 형벌을 이겨내고 12월 13일, 전주 전동 성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정이에서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리고 아들 조윤호 역시 부자를 한날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던 당시의 관례에 의해 부친이 참수된 지 열흘이 지난 12월 23일 인근의 서천교 밑에서 순교했다.
조선 시대에는 처형에 있어서도 몇 가지의 원칙이 있었다. 참수를 하는 죄인에게는 하루 전에 쌀밥과 고기반찬을 주며 이승에서의 마지막 잔치상을 차려주기도 하고 참수 후 사흘 간은 누구도 그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법도 있었다. 또 다른 당시의 관례는 같은 날 부자를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정해져 있어 아무리 대역죄인도 부자의 관계에 있다면 몇 일간에 여유를 두고 처형을 하였다. 성 조윤호 요셉도 그런 경우이다.
조윤호 성인이 받아야 할 처형방법은 참으로 참혹한 것이었다. 다름아닌 서천교 밑에서 빌어먹던 거지들에게 조윤호 요셉의 목을 감은 끈을 서로 조르게 한 것이다. 결국 거지들에게 죽임을 당한 그는 후에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시복 시성되는 영광을 얻었다. 당시 거지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거렁뱅이 짓을 하곤 했는데 이들의 시체가 하도 참혹해서 거지가 끌고 가면 누구든지 겁에 질려 밥을 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굳건한 믿음으로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 부자는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전주교구는 2006년 5월 서천교 인근 순교터에 조윤호 성인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를 설치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0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