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상해 목장 -윤혜선 집사
시국은 안희정, 안태근, 조재현, 김기덕, 장자연 씨 등의 성추행, 성폭행 사건들로 어수선하다. 깔끔하게 정돈된 것보다 어수선한 게 좋은 때는 바로 이런 때인 것 같다. 약자들이 목소리를 냈기 때문에 어수선하게 되어버린 때. 가려진 진실들이 힘을 얻어 어수선하게 되어버린 때. 서지현 검사가 jtbc 뉴스룸에 나오고, 김지은 씨가 jtbc 뉴스룸에 나오고, 거장의 민낯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때. 어쩌면 이런 때여서 한 소녀의 탈출기가 더욱 새까맣게 내게 와 닿은 건지도 모르겠다. 역사는 주로 없는 이, 약한 이, 없고 약해서 선량한 이들에게 가혹했고, 그 가혹함 안의 여성들에게는 가혹하고도 잔인했다. 나는 남성들의 이야기보다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주로 매료되었었다. 아니, 여성이 아니면 소년의 이야기들에 나를 잡아 끄는 힘이 있었다. 약하고 가난하고 어린 주인공들이 크고 강해 보이는, 견고한 세상에 휘둘리면서도 끝까지 놓지 않는 한 가지를 지녔을 때, 그것이 아름다운 가치일 때, 나는 혼을 뺏기듯 그 이야기에 빠져들곤 했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퓰리쳐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한 흑인 노예 소녀의 목화농장 탈출기를 그린다. 아... 그런데,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책날개의 사진 속 그는 흑인 남성이다. 긴 레게 머리를 하고 있으며 미소가 귀엽고 핸섬하다. 내친김에 책날개를 조금 더 옮기자면, 그는 1969년 맨해튼에서 나고 자랐으며,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다. 직관주의자(1999)로 데뷔한 이후, 두 번째 작품 존 헨리의 나날들(2001)로 퓰리쳐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이후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 존 원(2011)등 세 편의 소설과 두 편의 에세이를 집필하며, 똑같은 주제와 똑같은 스타일을 보인 적 없는 작가로 명성을 쌓았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2016)는 노예 탈출 비밀조직 ‘지하철도’를 실제 지하철도로 상상하여 노예 소녀의 탈출기를 그린다. 작가는 당대의 살풍경을 소녀와 노예 사냥꾼과의 추격전 안에 녹여냄으로써 리얼리즘과 픽션의 천재적 융합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2017년 마침내 퓰리쳐상을 수상했다. 또 이 작품은 작가에게 전미도서상(2016), 앤드루 카네기 메달(2017), 아서클라크상(2017)을 안겨주었으며 뉴욕타임즈 퍼블리셔스위클리 등 주요 매체 24개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가장 파급력 높은 소설로 화제를 낳았다.
작가는 아주 명석하고 노련하다.(우리도 익히 알거니와 명석하기만 하고 노련하지 못하거나, 노련하기만 하고 명석하지 못하다면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그는 ‘코라’라는 주인공 소녀뿐만 아니라 소녀의 할머니, 할머니의 아버지, 소녀의 친구, 소녀를 돕는 백인들, 그녀를 잡으려는 백인들 하나하나의 이야기를 씨실과 날실로 직조해 탄탄하고 찬란한 아라베스크를 만들어 낸다. 아... 세상에. 그가 마침내 완성한 그림이라니. 그는 시저의 이야기를 쓸 때는 시저가 되고, 샘의 이야기를 쓸 때는 샘이 되고, 리지웨이의 이야기를 쓸 때는 리지웨이가 되고, 애설의 이야기를 쓸 때는 애설이 된다. 그는 물이다.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하는 물. 생명을 불어넣는 물. 투명하고 반짝이는 물... 물의 온갖 아름다운 장점을 지닌 그가 작가가 되었으니, 그가 흑인 노예 소녀의 탈출기를 쓰고야 말았으니, 이 작품은 과연 명작이다. 특히 좋았던 점은 물과 같은 그의 태생적 공명 능력이기도 하지만, 그가 시저와 메이블의 이야기를 뒤쪽에 배치한 것이다. 뒤에 배치함으로써 나중에야 알게 된 시저가 탈출 동반자를 고른 이유와, 메이블의 탈출 내막은 나를 이 작품 안으로 더욱 섬세하게 깊게 들어가게 만들어 주었다. 다만, 지하철도라는 상징적 탈출 수단을 소설 속에서는 진짜 철로도 만든 것이 내겐 약간의 이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목화밭에서 허리가 휘고 아홉 가닥의 채찍으로 맞고, 굶고, 불에 타고, 목이 잘리고, 강간당하고 유린당하는 그들, 아기를 빼앗기는 그들의 눈빛이 생생히 보여 리얼리티가 폭발하는데, 환상이 갑자기 끼어든 격이랄까. 돕기만 해도 잡혀 죽임을 당하는 마당에 그 큰 땅덩이를 잇는 지하철로를, 운행시간을 어찌 만들었단 말인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망가질 듯 망가지지 않는 미친 듯 달리는 고철 덩어리는, 이 이야기에서 매혹의 심장을 펄펄 살아 뛰게 하는 핏줄이다.
오늘 나는 김샘 씨의 유죄 확정 기사를 읽었고, 68년 만에 아들을 만난 이산가족 할머니의 영상을 보았고, 결국엔 울었다. 성폭력과 여성 혐오의 배경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종군위안부의 배경에, 분단의 배경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위력과 폭력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배경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거대한 목화밭이 아닐까? 우리의 검붉은 피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목화밭이 아닐까. 그러면 우리는 끝없이 피를 바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우리의 발목에 매인 쇠사슬을 끊을 수는 없는 것일까. 당연히 노예로 길들여져 살다 죽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상식적이고 정의로운 세상을 꿈꿀 수 없는 것일까. 우리는 아름답고 이상적인 세상을 꿈꿀 수 없는 것일까?
책을 한 번 더 읽고 리뷰를 쓰고 싶었으나, 내 마음을 자꾸 다치게 되어 한 번 더 읽지 않고 그냥 쓴다. 노트북을 이왕 켰으니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남자, 렌더의 강연 한 단락 인용하며 이 글을 마친다.
“한 가지 착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노예제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입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팔려가고, 아버지가 매를 맞고, 여동생이 우두머리나 주인에게 능욕당하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쇠사슬 없이 멍에 없이 오늘 여기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하셨습니까? 여러분이 아는 모든 것이 자유는 속임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여기에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달립니다. 저 밝은 보름달 빛을 따라 안식처를 향해서. (중략) 그리고 미국 역시, 그 무엇보다도 대단한 착각입니다. 백인종은 믿습니다. -진심을 다해 믿지요- 이 땅을 취하는 게 그들의 권리라고 말입니다. 인디언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형제들을 노예로 삼고, 이 세상에 일말의 정의라도 있다면 이 나라는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살인과 절도, 잔혹함을 토대로 만들어진 나라니까요. 그러나 여기에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