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히말라야 트레일(이하 GHT)은 거대한 히말라야산맥 전체를 따라가는 트레킹 루트다. 2002년 모든 히말라야 지역이 개방되면서 영국 산악인 라빈 부스테드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4,200km에 달하는 히말라야 트레일을 구상했다. 그는 트레킹 가능한 지역을 지도에서 연결하고 현지답사를 통해 트레킹 루트를 짰다. 그중에서 가장 핵심인 네팔 히말라야 하이루트 구간 1,700km를 2011년 150일 만에 완주했다.
더불어 네팔 트레킹협회와 네팔 관광청이 인기 코스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탈피하고자, 새로운 곳을 개발해 트레킹 지역을 확대하는 방안으로 GHT를 개발했다. 여기에 세계적인 트레킹 여행사들이 협약을 맺어 트레킹 코스 개발에 참여하고 상업적 트레킹팀을 구성하는 ‘GHT Alliance연합’를 만들어 현재 23개 회사가 참여하고 있다.
GHT는 네팔 히말라야 곳곳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코스다. 동쪽부터 나열하면 캉첸중가 지역, 마칼루 지역, 쿰부 지역, 롤왈링 지역, 랑탕 지역, 가네시히말 지역, 마나슬루 지역, 안나푸르나 지역, 무스탕 지역, 돌포 지역, 무구 지역, 훔라 지역으로 나뉜다. 카트만두를 중심으로 동부지역과 서부지역으로 나누어 두 번에 걸쳐 완주하거나 중부지역까지 3개 구간으로 나누어 걷는다.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7개 구간으로 나누어 완주하는 것이다.
동쪽의 캉첸중가 지역을 비롯한 일부 구간과 서쪽 전체 구간은 군사보호 지역이라 트레킹 퍼밋(허가)을 발급받아야 하는데, 2인 이상만 신청할 수 있다. 네팔 이민국 관할이라 현지 대행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원칙적으로 네팔인을 고용하지 않은 단독 트레킹은 허용되지 않는다.
GHT은 평균 고도 3,000~4,000m인데 마칼루 셰르파니콜 루트 같은 곳은 6,000m 이상까지 고도를 높여야 하며 등반기술을 요구한다. 여기에 강한 체력과 고소적응 능력, 날씨와 운이 따라 줘야 한다. GHT은 로지(숙소)가 없는 곳이 많아 4,000m 이상 고산에선 영하 10℃ 이하에서 텐트 생활을 수십 일씩 해야 하며, 낙석 위험도 잦다. 고도가 낮은 곳은 ‘거머리 지옥’, ‘파리 지옥’, ‘쥐벼룩 지옥’이라 할 정도로 열악한 곳이 많다. 때문에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
네팔 대지진 때 40km 걸어 탈출
“산에 다니면서 제 삶이 확장되었어요. 지리산이 제일 좋은 줄 알았는데 백두대간을 알게 되었고, 우리나라 산이 제일 좋은 줄 알았는데 세계에 좋은 산이 너무 많았어요. 특히 네팔에 가니 산이 아니라 신神이더라고요.”
여진이 계속 이어졌고, 두려워 남겠다는 동행했던 한국 여성 4명을 설득해 함께 돌아왔다. 목숨을 건 탈출이었으나 히말라야는 그녀를 매료시켰다.
시작부터 꼬였다. 현지에 “한국 여자가 혼자 GHT을 한다고 돈을 엄청 들고 왔다”고 소문이 나는 바람에 가이드와 포터를 꾸리는 일이 고행이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순수했던 심성의 네팔 사람은 옛날 얘기라 돈을 더 받기 위한 거짓말이 난무했다.
마침 히말라야는 각국에서 온 원정대의 봄 등반 시즌이라 남은 가이드도 몇 명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경험 많은 가이드를 구해, 그의 주도로 포터들을 고용해 길을 나섰다.
트레킹은 순조로웠지만 문제가 다시 불거진 건 술 때문이었다. 가이드를 비롯한 몇 명이 밤마다 술을 마시더니, 정도가 심해져 새벽 3~4시까지 마시는 통에 아침에 못 일어나는 지경이 된 것이다. 밤 12시 이후로는 술을 마시지 못하게 했으나, 이번엔 포터 한 명이 침낭을 팔아 술을 마셔 문제가 생겼다. 또 포터와 가이드 사이에 분쟁이 생겨 포터 3명이 하산하는 등 바람 잘 날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걷는 게 제일 쉬웠고 현지 스태프와 돈 관리하는 게 스트레스였다”고 기억한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6,100m 고개인 이스트콜(셰르파니콜)에 닿았으나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등반과 하강이 필요한 위험 구간에서 눈보라가 너무 심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결국 고개 정상을 눈앞에 두고 후퇴, 우회해야 했다. 이 와중에 새로 고용한 포터 한 명이 맨발에 운동화만 신고 타시랍차(5,755m)를 오르다 발가락에 동상이 걸렸다.
78일 만에 네팔 동부 트레킹을 마친 고영분씨는 카트만두에서 며칠간 재정비한 다음 서부 트레킹에 나섰다. 하지만 위험 구간을 통과할 때 최대 10명까지 달했던 현지 스태프가 3명으로 줄었다. 중간 정산 과정에서 황당할 정도로 가격을 부풀려 청구하는 바람에 가이드와 사이가 틀어진 것이었다.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그녀지만, 매일 지출을 기록하고 일기를 쓰며 트레킹에 관련된 것은 정확하게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그날 트레킹을 마치면 빨래와 장비를 정리하고, 텐트 안을 닦고, 남은 금액과 지도를 확인하고, 음악을 듣고, 일기 쓰는 일을 반복했다. 이 과정 또한 큰 즐거움이었다.
새로운 가이드를 구해야 했지만, 마침 동충하초를 채취하는 시기라 사람 구하기가 어려웠다. 동충하초만 캐면 포터보다 훨씬 수입이 좋은 것은 물론 1년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을 정도였다. 남은 돈도 빠듯해 가이드 한 명에 포터 두 명으로 팀을 꾸려 현지 음식을 먹으며 다녔다. 동부를 갈 때에 비해 초라한 팀이었지만, 그녀는 네팔 서부에서 훨씬 행복했다.
“동부는 8,000m 산이라 웅장해요. 서부는 5,000~6,000m대라 웅장함은 덜하지만 신비한 느낌이 있어요. 무스탕에 반해 네팔에 왔는데 돌포에 가니까 무스탕은 아무 것도 아닐 정도로 아름다웠어요.”
네팔 현지 음식에 적응했고, 고소에 고생한 적도 없었고, 체력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위기의 순간들은 있었다. 눈보라와 악천후에 며칠씩 마을에 고립되기도 했고, 6,000m대인 이스트콜에서는 사람이 날려갈 정도로 살인적인 눈보라를 만나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손발의 감각을 잃어 동상에 걸릴 뻔한 적도 있었다.
오랫동안 씻지 못하고 화장실이 없거나 지저분한 것도 괜찮았지만, 쥐벼룩 때문에 가려운 건 참기 어려웠다. 여기에 말썽부리는 현지 고용인들까지 스트레스를 주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은 적은 없었다. 고영분씨는 이런 역경 속에서도 “풍경이 황홀해 계속 가게 되었다”고 한다. 더불어 “네팔 GHT을 한국 최초로 완주하고픈 마음도 컸다”고 한다.
월급 80% 저축하고 등산에만 돈 써
눈총 받으면서 회식도 빠져가며 공부에 몰두, 27세에 서울의 모 대학에 입학해 전 학년 성적 장학금을 받고 우수한 성적으로 조기 졸업했다. 결석과 지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고 점심때는 사무실에서 김밥을 먹으며 공부했다. 주말에는 새벽 5시에 학교 도서관을 찾아 문을 닫을 때까지 공부만 했다. 몰두하면 끝장을 보는 특유의 성격이 그대로 발휘된 것이었다.
GHT 완주에는 총 5,000만 원의 비용이 들었다.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고영분씨가 20세 때부터 모은 돈이었다. 화장품이나 패션·명품 등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그는 오로지 저축하고 등산하는 데만 돈을 썼다. 그 결과 급여의 70~80%를 저축해 27세에 집을 장만했다.
그녀의 목표는 ‘40세 이후 여행만 하겠다’는 것이었으나 그 기회는 조금 이른 37세에 다가왔다. 회사에서 명예퇴직을 신청 받기 위해 퇴직금을 추가로 주는 등의 혜택을 공지한 것이다. 고씨는 2년 휴직 후 퇴직을 선택했다. 사람들은 “회사가 전쟁터라면 밖은 지옥”이라며 말렸으나 꿋꿋하게 퇴사를 감행했다. 이후 국내 여행을 비롯해 일본, 알프스, 네팔, 티베트, 남미,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등 다양한 곳을 둘러보았다.
이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은 “여행보다는 산행이 잘 맞다”는 것이다.
산과의 만남은 20세부터였다. PC통신 유니텔산악회 가입을 시작으로 무섭게 등산에 빠져들었다. 매주 산행 참여는 기본이고, 평일 번개 모임도 빠지지 않았다. 산행도 늘 빠르게 선두로 치고 나갔다.
20대 중반부터는 지리산에 빠져 금요일만 되면 배낭 메고 회사에 출근해 퇴근과 동시에 지리산으로 향했다. 지금처럼 통제가 심하지 않던 시절이라 지리산 구석구석을 큼직한 야영배낭을 메고 누볐다.
산악회에서 기초 등산부터 암벽등반과 지형도를 통한 독도와 야영까지 노하우를 익힌 그녀는, 백두대간 종주에 도전했다. 한 미국 여성의 4,284km 트레킹기를 담은 책 <와일드>를 읽고 대간 종주에 나섰다. 길게 갈 땐 10박11일, 짧을 땐 2박3일씩 야영 산행을 하며 5개월 만에 대간을 완주했다.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산에 가는 것도 좋지만, 산에서 혼자 아무 말 안 하고 김치찌개 끓여서 소주 마시면 정말 좋아요. 적당한 고독감도 좋고, 마늘종 무침에 막걸리 한잔 하면서 바다 보는 것도 기막히죠.”
그녀는 산행기를 꼼꼼하게 적어 인터넷에 공유했다. 사진은 물론 지도에 산행 경로를 체크해 표시했고, 실감나게 글을 썼다. 때문에 등산마니아들 사이에선 ‘거칠부’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신라 장군이었던 ‘거칠부’ 이름이 마음에 들었던 그녀는 인터넷 아이디나 별명을 항상 ‘거칠부’로 지어, 가까운 지인들은 “칠부야”라고 불렀다.
부모님은 등산에만 몰두하는 그녀를 말렸지만 맏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이젠 응원해 준다. GHT을 떠날 때도 무얼 하러 가는지 설명하는 것 없이, “네팔 다녀올게요”란 인사가 전부였다. 부모님도 “잘 다녀와라”는 말에 많은 뜻을 담아 보냈다.
“부모님의 바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제 삶을 개척해서 잘 살고 있잖아요. 저는 그게 효도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학교와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살았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살았어요. 인생을 80으로 봤을 때 전반은 끝났으니 이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보려고요. 지금이 저의 최고 전성기라고 생각해요.”
GHT을 마친 고씨는 올해 하반기에 유럽 피레네산맥 900km 일시종주와 일본 북알프스 한 달 산행을 갈 예정이었으나, ‘GHT 여행기’를 출간하게 되면서 책을 쓰는 데 집중하고 있다. 목표를 정하면 최선을 다하는 그녀의 특성상 트레킹은 다음으로 미뤄두었다.
5,000만 원이나 들여 호화 트레킹을 다녀왔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녀는 “17년간 직장 생활했던 현실적인 사람이라 호화스런 여행은 하지 않았다”며 “지금 놀고먹는 것은 내 또래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돈을 아꼈기 때문”이라 떳떳하게 말한다.
그녀는 “50세까지 장거리 트레킹을 계속 하고 싶다”고 한다. 그레이트 히말라야 트레일 1,700km 완주는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이제 막 새장 밖으로 나온 고영분씨의 비상이 얼마나 아름다운 날갯짓을 보여 줄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