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격적인 육두문자 법문 **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1960년대와 70년대에 유명한 스님 한분이 있었지요 일명 "욕쟁이스님"이라 칭하였지만 한평생 탈속한 "무애도인"으로 지내셨던 화엄법사(華嚴法師) 춘성(春城 1891년 3월 30일 ~ 1977년 8월 22일)스님 이라 하네요.
춘성스님은 1891년 3월 30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통리에서 아버지 이인오(李仁五)와 어머니 밀양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성은 이씨로 속명은 창림(昌林)이고, 본관은 평창이었지요 그가 태어난 고장은 백담사 입구 주차장 근처인 용대2리 907번지라 하는군요.
그가 태어날 때 어머니 밀양 박씨는 오색구름을 탄 동자가 내려오는 태몽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하였다 하네요
9세 되던 해에 모친을 따라 설악산 신흥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다가 불상을 본 후 출가할 뜻을 밝혔는데 그러나 부모는 아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허락하지 않았고 수년을 기다렸다 출가했지요
1903년 그의 세속 나이 13세 때 다시 부모를 간곡히 설득하여 출가하게 되었다 하네요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상좌이자 대선사 만공의 법제자였으며 용성 스님 밑에서 화엄학을 공부한 春成스님은 허위의식 없이 알몸을 그대로 드러낸 禪지식인이었지요
한국 선종의 맥을 이은 선승이자 한평생을 탈속한 무애도인으로 살았던 춘성 스님(1891~1977)의 진면목은 갖가지 기행과 걸쭉한 육두문자로 행한 호탕한 설법, 철저한 무소유의 실천에서 찾을수 있어요
그의 욕은 <벽암록>을 뛰어넘는 시대의 공안(公眼)이자 카타르시스였다하는 군요...
* 양복과 보시
춘성스님에게 신자들이 당시로선 고가인 양복을 해주곤 했대요
그러면 춘성스님은 그 양복에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중절모를 쓴채 서울 시내에 나가 지인에게 맥주 한잔 얻어먹는 것을 즐겼다고 하네요
그러나 양복은 그의 몸에 이틀을 붙어있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헐벗은 걸인들이 즐비하였고 빌어먹는 거지들에게 자신의 새양복을 벗어주고 팬티차림으로 공중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한 밤에 절에 돌아오곤 했다하는군요
* 이불과 불심
그는 평생 취침에 들 때 이불을 덮지 않고 잠을 잤대요 이유는 이불이 이불(移佛) 또는 이불(離佛)이라 하여 부처와 불심에서 떠날수 있다는 것이 그가 평생 이불을 덮지 않는 이유였다 하는군요
* 수행자와 상좌들
광복 이후 춘성스님이 도봉산 망월사에서 참선 수행을 할때에 젊은 동자승 상좌들이나 수행 체험하러 오는 시민들이 담요를 덮고 자다가 춘성스님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서 이불을 빼앗기고 자다가도 벼락이 떨어졌다 하는데 " 수행을 한다는 자가 편하고 따뜻한 잠을 자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
" 야 ~ 이 씨부랄 놈아~ 그 담요 당장 이리 내놓거라! "
춘성 스님은 기어이 젊은 승려들이나 수행자들로부터 담요를 빼앗아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다지요 한편 그 자신도 평생 이불을 덮지 않음으로서 언행이 일치함을 보였다 하는군요
* 무소유 정신
춘성스님은 돈을 저축하거나 서랍에 넣어두는 법도 없었대요
돈이 생기면 필요한 사람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줘버렸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다 하네요
그는 시주에 의존하지 않고 사찰 주변에 직접 화전 밭을 일구기도 했으며 그대신 그는 한알의 쌀밥을 남기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하네요
* 내 좆을 믿어라
" 죽은 부처 믿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 믿어라 "
춘성 스님이 서울역 앞에서 전차를 타셨는데 그 당시에도 " 예수 믿으면 천국 불신지옥 "을 써서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스님이 타신 전차 칸에 우르르 몰려타더니 웬 늙은 중이 앉아 있는 곳에 다가와 이렇게 말했지요
" 죽은 부처를 믿지 말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래야 천국갑니다 " 그러자 전차 안의 모든 사람들이 두 눈이 휘둥그레 졌어요 춘성 스님이 기골이 장대하기 때문에 필시 싸움이 일어날 걸로 생각했지요
춘성 스님이 그 말을 한 사람을 가만히 올려보더니 물었어요 " 부활이 뭔데? " "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지요 " 부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셨소 그러니 죽은 부처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 위대하지 않소?
스님도 예수님을 믿으시오 " 춘성스님이 다시금 그 사람을 뻔히 쳐다보더니 물었어요 " 죽었다가 살아나는게 부활이라? " " 그렇소 ~ " " 그럼 너는 내 좆을 믿어라 "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죽었다가 도로 살아나는 것은 좃밖에 보지 못했다 내 좆은 매일 아침 부활한다 예수가 내 좆하고 같으니 너는 내 좆을 믿거라 ~ "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전철 승객들이 박장대소를 하고 웃었다 하는군요
* 주소는 엄마 X지, 본적은 아버지 X지
춘성스님이 산림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경찰이 주소를 묻자 " 우리 엄마 보X "라고 대답했대요
경찰이 본적을 묻자 " 우리 아버지 자X(현두) "라고 대답했다 하는군요
* 내가 중대장 이다
야간통금이 있던 시절 방범순찰을 하던 경찰관이 밤길을 가는 행인을 보고 누구냐고 묻자
" 중대장이다 "라고 대답했대요
순경이 플래쉬로 얼굴을 비춰보니 중대장이 아닌 어떤 스님이었지요 " 아니, 스님 아니시오? "라고 묻자 " 그래, 내가 중(僧)의 대장이다 " 라고 대답했다는군요
* 뽀뽀나 하자
춘성스님이 강화도 보문사에 있을때 육영수 여사가 찾아와 인사를 했어요
춘성스님은 대뜸 "뽀뽀나 하자"고 달려 들었어요
육여사는 당황하지않고 웃으며 잘 대응했으며 육여사가 박대통령에게 얘기하니 " 근래 보기 드문 큰스님이 나왔구먼 " 했드래요
* 생일날 법어 "지 애미 X지에서 응애하고 나온날"
어느날 춘성스님은 육영수 여사의 생일날 초대되어 간적이 있었지요
그 자리에서 불자인 박대통령과 육여사가 법문을 청하자
춘성스님은 마이크앞에 아무런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어요
30분이 넘어서 결국 참가자들의 기다림이 한계점이 이르렀을 때
춘성스님은 갑자기 법문 한 마디를 하였지요 " 오늘은 우리나라 국모이신 육영수 보살이지 애미 보X에서 응애하고 나온 날입니다 "
* 내 큰것과 네 좁은 곳 ?
매사에 마음이 아주 좁은 딸을 둔 노보살이 있었어요
하루는 이 장성한 딸을 춘성스님 처소에 보내서 소갈머리가 좀 터지는 법문을 청해 듣도록 했지요
춘성스님이 소갈딱지 없는 딸에게 말했어요
" 내 그 큰것이 네 그 좁은곳에 어찌 들어가겠느냐? " 딸은 얼굴이 벌개지면서 방문을 박차고 울면서 달아났어요
집에 돌아와서 스님의 법문 내용을 말하고 " 큰 스님은 엉터리요 "라고 어머니께 푸념을 하였어요.
그러자 보살은 " 그러면 그렇지 바늘구멍도 못 들어갈 네 소견머리에 어찌 바다같은 큰 스님의 큰 법문이 들어가겠느냐 " 하며 혀를 찼대요
딸은 그제서야 울음을 그치고 스님의 속깊은 법문을 잘못 알아차린 줄 알았다 하네요
* 부처는 똥이고 똥통속에도 있다
춘성스님이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중에 함께 탄 목사가 기독교를 믿으라면서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춘성스님이 물었어요 " 그러면 하나님은 없는데가 없다는 말이냐? " " 그렀지요! " " 그러면 하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 "
이말은 들은 목사는 춘성스님을 노려보면서 " 감히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말을 쓴다 "고 화를 내며 물었어요
" 그럼 부처님은 없는데가 없습니까? "
" 없는데가 없지! " " 그러면 부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요? " " 허허 맞어 " " 부처가 똥이고 똥이 부처인데 똥통 속에 있고 말고 말할 것이 뭐 있어? 허허 ~"
* 졸음한테 항복 받았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중에 일이었는데 스님은 정진중에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비장한 결심을 했어요 한 겨울에 법당뒤 구덩이를 파고 큰 항아리를 묻은 다음 그 항아리에 냉수를 가득 채웠지요 엄동설한 참선수행하다 졸음이 밀려오면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그 얼음물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머리만 내밀고 정진을 했어요 발가벗고 항아리 속에 앉아 참선하면서 춘성스님은 쾌재를 불렀대요 " 허허! 이제야 졸음한테 항복을 받았다! "
* 시집.장가에는 보X와 자X가 제일이듯
그토록 수행에 철저했던 분이 춘성스님이었는데 서울근교 어느 비구니사찰 중창불사를 위한 법회에서 파격적인 법문을 남겼어요 " 시집 장가가는 데는 자X와 보X가 제일이듯 중창불사 하는 데는 돈이 제일이니 " " 오늘 이 법회에 온 귀부인 년들아 ~ 돈 많이 시주하고 가거라! "
* 떨어져 봤어야 알지
하루는 제자가 스님에게 질문했어요
" 스님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발을 더 내디면 그 다음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
" 야 이놈아 ~ 내가 떨어져 봤어야 알지 ~"
* 신도 위해 사냐 ?
춘성스님이 입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후학이 스님에게 물었어요
" 열반에 드신 후에 사리가 나올까요? 안나올까요? " 스님은 " 필요없다 "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후학이 다시 물었지요 " 스님,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할 터인데요 "라고 하자
춘성스님 왈 " 시발놈의 중놈아! 내가 언제 신도위해 사냐? " 스님은 입적후에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를 세우지 말것이며 오직 수행에 힘쓰라고 당부했지요
투철한 수행과 일반인의 눈에 특이하게 보이는 기행으로 한 생을 살다 간 그를 보내는 날 밤 명진(봉은사 주지) 스님을 비롯한 후배 선승들은 다비식장에서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나그네 설움> 등을 부르며 노래자랑(?)을 벌였다고 하네요
* 어찌 따뜻한 방을 쓰랴
춘성스님은 만해 한용운스님이 기미 독립선언서에 백용성 스님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서명,
33인 중의 한분으로 왜정에게 체포되어 갇히자 지극 정성으로 스승의 옥바라지를 했어요
춘성스님은 스승이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엄동설한에도 아궁이에 불을 피우지 않은채 냉방에서 견디고 있었지요
이때 그 절에 찾아왔던 다른 스님이 돌아보니 절에는 뗄감도 많이 있지만 그런데도 불을 때지 않은채 냉방에서 자고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하고 춘성스님에게 물었어요
" 아니, 저렇게 땔감이 많이 있거늘 어찌하여 아궁이에 불을 피우지 않고 냉방에서 덜덜 떨면서 자는 게요? "
" 그야 물론 장작이야 넉넉히 있지요. 허나 스승께서 독립운동을 하다 왜놈들한테 붙잡혀 지금 서대문형무소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실 텐데 제자인 내가 감히 어찌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잘수 있겠습니까?
스승께서 나오시기 전에는 결코 아궁이에 불을 넣지 않을 것입니다
" 그렇게 대답하면서 겨우내 아궁이에 불을 넣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춘성 스님은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님이 아니었고 큰 감투를 별로 쓴 일이 없었기에 매스컴에 자주 소개되는 일도 없었어요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불교계에서 ‘ 욕쟁이 스님 ’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춘성 스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걸죽한 욕설을 무차별로 쏟아내는 스님이었대요
지나치게 화장을 하고 사치스런 옷을 걸친 채 으시대기 좋아하는 여자가 절에 오면 춘성 스님은 아무리 지체가 높은 고관대작의 부인이라고 하더라도 즉석에서 “ 씨부랄 년! ” 이라는 욕부터 쏟아냈고 값비싼 털옷을 입고 온 여자의 털옷을 벗게 한 뒤 그 자리에서 태워버린 일까지 있었지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거침없이 쏟아내는 춘성 스님의 무지막지한 욕설을 들어도 누구 한사람 감히 항의하거나 대들지 못한 점이었어요
뿐만 아니라 참 이상하게도 춘성 스님의 욕설에서는 천박한냄새가 나는게 아니라 상큼하고 속시원한 지혜가 번뜩였으니 이것은 아마도 걸죽하고 질퍽한 춘성스님의 육두문자와 욕설속에 파격적인 선지(禪旨)가 담겨있었던 탓이 아닌가 싶군요 긴글 읽으시느라 고생 했어요 ~~
김동아-꽃잎처럼지노라.w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