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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못의 진실
- 베데스다 못가 행각에 있는 많은 병자들의 곡해 -
요한복음 5장 1-9절 / 1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과 자신이 하시는 일을 계시하시는 목적을 두고 계신 것입니다만, 여기서는 ‘베데스다 못’에 한정하여 설명합니다. 예루살렘 성은 이곳의 중심인 성전을 두고 있으며, 동서남북 사방에 모두 8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에 1개의 문, 서쪽에 4개의 문, 남쪽에 2개의 문, 북쪽에 1개의 문이 각각 있습니다. 이 중에서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문인 양문(양의 문, The Sheep Gate)은 북쪽의 문으로서 예루살렘 북쪽 성곽의 함메아 망대 근처에 있는 문인데, 수산문, 또는 황금문이라고도 불리며, 베냐민문과 동일한 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문은 ‘자비의 문’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성전에서 제물로 바쳐질 짐승을 이 문으로 몰아 들여보내 취했는데 이 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못에서 양들을 씻겼으며, 번제단에 희생된 제물의 재는 아무데나 함부로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이 문을 통해 감란산 위의 지정된 곳인 ‘재 버리는 곳’에 버려졌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는 구원의 자비를 베푸시는 때문에 불린 이름입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북문이 성전 제사에 쓰일 희생제물의 양을 통과시키는 문으로 쓰인 것에서 ‘양문’으로 불리는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근처에 양을 매매하는 가축 시장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 불리는 못이 있었으며, 이 못 주변에는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이곳은 병실의 역할을 하고 있어서 수많은 병자들, 맹인들, 다리 저는 자들,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들의 병든 몸이 낫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자신들의 병이 낫기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베데스다 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데, 주님의 천사가 가끔 이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인다고 알고 있으며, 그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이는 베데스다 못의 물 자체가 병을 치료하는 효험이 있다고 믿어서가 아닙니다. 이 물에 들어가는 병자의 병이 낫도록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어떤 특별한 기회에 행하신다고 알고 이를 믿는 신앙으로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이는 점차 미신화 되어 물이 동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를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때 물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 효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미신적 신앙을 마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양 가져나가는 것은 왜일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 교회가 6곳, 기도원이 9곳, 의원이 3곳, 이보다 큰 병원이 3곳이 ‘베데스다’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올리지 않은 곳도 있을 것을 감안하면 아마도더 많은 곳이 더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베데스다란 이름을 쓰면서 행각에 있던 많은 병자들이 베데스다 못을 바라보며 천사를 통해서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행사될 수 있기를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베데스다란 이름이 쓰인 곳을 보고 찾는 사람들도 이곳을 통해서 혹시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을 겪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를 갖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한 심정을 가지고서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또한 사람들은 그곳을 찾습니다. 그리고 혹자는 과연 효험을 봤다고 자랑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곳을 가보라고 추천하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베데스다 못에 몸을 담가 피부병이든 또 다른 질병에 있었든 효과를 본 사람은 자신이 이곳에서 나았다고 소문을 내게 되고 - 아마도 이 못은 병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 간헐천이었던 것 같다(R. E. Brown) : 간헐적인 작용을 하는 기혼(Gihon) 샘 - 이는 곧 정설이 됩니다. 게다가 그 효력은 천사가 물을 동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이 본다고 소문이 퍼졌습니다. 그러한 베데스다 못은 어느 때부터인가 병자의 마지막 희망이 되는 곳으로 굳어졌습니다. 그곳에 행각 다섯이 있는데, 그 안에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등 온갖 상태의 많은 병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여 그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오는 사람을 고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서 물이 출렁이며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은 천사가 내려와 병자 중에서 한 사람을 고쳐준다는 표시를 보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기회를 잡고 놓치지 않기 위해서 병자들 간에는 그 때만 바라보며 자신이 그 기회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대박을 가져다주는 치료로또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베데스다 못의 이름을 교회 또는 기도원, 그리고 상호 명칭으로 쓰는 곳이 적지 않습니다. 이는 그 이름의 뜻이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을 뜻하면서, 38년 된 중풍병자를 비롯하여서 많은 병자가 기대했던 기적이 행해진 곳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들의 생각이요 자기 신념으로 그렇게 바라보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 입증을 말해보겠습니다.
첫째, 베데스다 못의 존재하는 용도는 성전에서 제사 제물로 쓰일 짐승을 씻어 정결함에 있게 할 것에서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속죄하실 사역을 행하심에서 필요한 용도로 있는 것인데, 이를 병자들이 병 낫는 곳으로 삼는 잘못됨에 있었습니다.
둘째, 당시 사람들이 믿은 것은 천사들이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간 사람은 병이 낫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천사들이 물이 동할 때 낫는 사람은 몇 사람인가요? 달랑 한 사람입니다. 천사가 물을 동할 때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달려들어 못에 뛰어드는 사람은요? 행각에 있던 병자 모두가 일시에 몰려들어 뛰어듭니다. 그런데 겨우 한 사람만 낫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천사가 물을 동한 것은 ‘못 전체’인데 그 못에 뛰어든 사람 전부가 효험을 봐야 맞는 것 아니겠나요? 천사가 동한 못의 물 중 어느 물은 그 물을 닿는 사람에게는 효험이 있고 어느 물은 그 물에 몸을 담가도 효험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단지 가장 먼저 뛰어든 사람만 낫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데스다 못의 물을 천사를 통해 병자를 낫게 하는데 쓰신다고 하면 그 못의 물 전체를 통해서 그 못의 물의 혜택을 받고자 하는 사람 전부에게 미쳐야 하지, 단지 한 사람에게만 제한을 두는 효력을 나타나게 하시겠습니까? 베데스다란 이름의 뜻이 자비의 못, 은혜의 못인데, 한 사람 외에는 다른 모든 병자에게는 좌절을 맛보게 하여 큰 실망과 낙담에 처하게 하는 못이 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셋째,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신앙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주셔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입게 하신 것이지, 베데스다 못이 아닙니다. 베데스다 못은 그야말로 ‘못(연못)’입니다. 그 못에 ‘베데스다’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사람들의 갈망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 못을 통해서 병 낫기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이는 명산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 각 산에 돌 하나하나 얹어 돌탑을 쌓으며 또는 여러 형태의 돌이나 바위 등에 신비한 능력을 지녔다고 여겨 소원을 빌어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형태가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강단 휘장에 십자가를 걸어 놓고 방언이라고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며 안수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과연 병을 고침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간증이 말해집니다. 여기에 신자들이 그대로 넘어가 그 일이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한 베데스다 못가에 이제나 저제나 물이 동하기만을 바라보며 모여들어 그 때를 기다리는 병자들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은 이적(표적)을 행하시는 것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 알리시는 자기 계시에 있으십니다. 예수님이 지니신 하나님의 권능을 입음으로 그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며 바라본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시란 것을 알리게 함으로 세상에 예수님을 증거하도록 섭리하셨으니, 하나님은 베데스다 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대하며 기다라는 많은 병자들 중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베데스다 못’의 물이 38년 된 병자도 낫게 하는 효험이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베데스다의 못의 물은 아무런 효험이 없습니다. 더욱이 천사가 물을 동하는 때에 그 물에 뛰어든 사람만이 낫는다고 믿는 그 물이 무슨 효험이 있는 것인지요. 그동안에 천사에 의해서 물이 동해진 일이 있어오지를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베데스다 못의 물을 동하게 하여 병자를 치료하는 기적을 행하시는 일을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천사가 물을 동한 일도 없었고, 혹 기상의 상태나 다른 어떤 상황으로 인해서 베데스다 못의 물이 출렁이며 움직이는 일이 있었을 때 그것을 보고 천사를 통해 낫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해 주시는 것으로 알고 달려들어 뛰어든 사람 중에 그 누구도 나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천사가 물을 동하게 하는 것인 줄로 알고 단지 낫기만을 바라고, 나을 것을 기대하며 그 때를 기다리는 병자들이 행각에 가득하였습니다.
넷째, 베데스다의 못 주변의 행각에 있던 많은 병자들이 자신들의 병에서 나음을 받은 사람은 베데스다의 못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먼저 그 행각의 하나에는 38년 된 병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베데스다 못에 들어갈 수 없는 오늘날로 말하면 장애인 1급상태의 와상 환자입니다. 그러니 그보다 앞서 다른 사람들이 먼저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기 때문에, 이 병자는 아무리 천사가 와서 물을 동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 혜택을 입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결코 자신의 병에서 나아 회복될 가망성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 사람이 고침을 받은 것은 베데스다의 못에서가 아니라,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에 의해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신 것은 자신에게 있는 능력으로 낫게 하여 정상의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그 또한 살아보게 해 주시고자 해서가 아니라, 그가 나음으로써 자신을 낫게 하신 분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 오셨으며, 그가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으신 후, 병자가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라고 대답하시자, 바로 그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하셨고,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렇게 온전히 되어 걷게 되자 그는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분은 예수님이신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렇게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이적 행함은 예수님을 증거하여 사람들 앞에 예수님을 나타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베데스도 못가의 행각에 누워있던 38년 된 병자가 입은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베데스다 못을 통해서 영험한 효험을 보려고 합니다. 교회는 이것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려고 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려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악마가 하는 짓입니다.
다섯째,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에서 ‘낫게 됨이러라’는 말이 갖는 의도입니다. 한글성경의 번역본 대부분은 ‘무슨 병이든지 다 나았다’(현대인의성경, 우리말성경), ‘무슨 질병에 걸렸더라도 건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가톨릭성경),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기 때문이다’(새번역성경, 번역성경), ‘무슨 병에 걸렸든지 다 나았던 것이다’(공동번역), ‘무슨 병에 걸렸든지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이더라’(킹제임스흠정역)라고 각각 번역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낫게 됨이러라’ 라고 하고 있는 이 말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나았다”는 것에서 하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낫게 됨이러라’는 말투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고 하더라”,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더라 "란 뜻입니다. 그런 것에서 현대어성경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다 낫는다는 날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전해져 오기 때문이었다”라고 번역했으며, 이 번역이 가장 나은 번역입니다. 해리스(J. R. Harris)는 팔레스타인의 동쪽 지방 전체에 걸친 여러 지역에서 새해에 천사가 어떤 지역의 물을 동하기로 예정되어 있으며, 이때 제일 먼저 그 물속에 들어간 자는 병에서 놓임을 받게 된다고 하는 전래된 이야기를 근거로 베데스다 못가의 행각에 있는 병자들이 그 이야기를 그 지방에서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로 이해하였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베데스다 못가에서도 그 기적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에서 행각의 병자들은 그 날이 오기만을 바라며 그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베데스다 못가의 행각에 있던 병자들이 곡해하고 있던 베데스다 못의 진실을 알아야겠습니다. 베데스다 못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과 그 인생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입음에 있는 것은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영접함에서이지, 베데스다 못의 물이 아닙니다. 그것처럼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하나님의 복음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접함에 있으며 그분을 따름에 있는 믿음에 의해서 입니다. 그런데 ‘베데스다 못’, 또는 또 다른 ‘베데스다 못’을 의존하여 기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것이 38년 된 병자를 비롯하여서 베데스다의 못을 천사가 동할 때만을 고대하는 행각의 많은 병자들처럼 병에서 낫기를 바라는 것일 수도 있고, 재물을 탐하는 자에게는 재물일 수도 있고, 권력을 탐하는 자에게는 권력일 수도 있습니다. 명예를 탐하는 자에게는 명예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탐하는 것에서 모인 사람들은 과연 탐하는 그것으로 그들 자신들이 복됨에 있을까요? 그들은 그들이 얻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자 함에 있지 않았습니다. 단지 베데스다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탐욕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행복할 줄 알고 있을 뿐입니다. 헌데 그렇게 해서 과연 행복한지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3년 반의 동행에 있었지만, 그가 마음에 탐하고 있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라고 하였으며, 그는 은전 30닢에 예수 잡는 자들의 길잡이가 되어 예수님을 악한 무리들에게 팔아넘긴 후(마 27:3; 행 1:16) 자책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마 27:5). 그런가 하면, 연보를 하나 자신의 재산에 미련을 떨치지 못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을 속인 죄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었습니다(행 5:1-11).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진리의 길에서 떠나 생명의 부활은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거짓 가르침을 퍼뜨려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을 약하게 만드는 미혹하는 일을 했습니다(딤전 1:20; 딤후 2:17-18).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났으며(딤후 4:10),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과부의 적은 돈까지도 탐하여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였습니다(막 12:40; 눅 16:14; 20:47). 이렇게 이런저런 명목의 베데스다가 산재해 있습니다.
우리가 전해 듣는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인 주 예수 그리스도인데, 이것 외의 것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며 복 받고자 하나 실은 탐욕에 이끌려 기대는 베데스다를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되고, 기억해서도 안 되며, 생각만 해도 안 됩니다. 베데스다는 영원히 우리 머리에서 지워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심령 안에 모신, 거룩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라고 하신대로 지금 여기 와 계십니다.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로 부르심에 있어 함께 연합해 있는 교회에서 말입니다. 우리들 마음이 그리스도께 있어 뜨거움에 있는 가슴 속에 와 계십니다. 그런데 어찌 베데스다 쪽으로 가겠습니까? 어찌 베데스다를 가까이 하겠습니까? 어찌 베데스다를 머리 속에 두고 그것을 의식하고 또한 추구하겠습니까? 오직 세상을 사랑하여 우리 속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며, 평안을 누림에 있는 성도이어야겠습니다. (*)
*2024년 3월 17일 주일예배.
*본 설교문은 복음의 동역자인 목사님과 ‘베데스다 못’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가진 교제를 통해 서로 주고받으며 도움 받은 이해를 정리하여 섬기는 교회에서 설교하기로 한 데 따라 작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본 설교문은 그분의 도움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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