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구간 (해남 땅끝-진도) 둘째 날(5월 10일 일요일, 맑음)
4시에 잠이 깼다. 다시 잠이 들 것 같지 않아 주섬주섬 떠날 채비를 했다. 땅끝으로 가는 6시 버스를 타자. 어제 사다놓은 컵라면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6시 30분, 송지면 산정리에 도착해서 걷기 시작했다. 바람이 조금 불지만 아침부터 날씨가 무척 덮다. 오늘 코스는 해안선의 농로를 따라가는 구간이 많아서 자칫하면 길을 놓칠수 있으니 주의해야한다. 그럭저럭 현산면 백포리의 두모선착장까지는 잘 왔다. 이 곳의 문패들이 재미있다. 정복실, 박만연 하는 식으로 부인을 먼저 쓰고 남편을 나중에 썼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는 여자는 왼쪽, 남자는 오른 쪽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분명 여성을 우대하는 마을임에 틀림없다. 기다요코, 송웅철이라는 다문화 가정의 문패도 있다. 과연 세상은 많이 달라졌구나.
관광지도에 소개된 두모의 신석기 시대 패총은 어디에 있나? 낙지잡이를 나간다는 부부에게 물어보니 선착장 뒷편을 가리킨다. 저쪽으로 계속 돌아가면 77번 국도와 만나느냐고 물었더니 건성으로 그렇단다. 잘 되었다. 신석기 패총도 보고 해변을 걸을 수도 있겠구나. 신석기 패총은 기대와 달리 마치 버려진 무덤처럼 잡풀로 뒤덮인 모개껍질 무더기였다. 안내판 마저 없었더라면 놓치고 지나칠뻔 했다. 아무러나 목적은 달성했으니 해변을 걸어서 돌아나가자. 그러나 나의 기대는 무참하게 깨지고 말았다. 어부 영감이 건성으로 대답했을 때 믿지 않았어야 했는데... 길은 없었다. 그래서 굴껍질이 달라붙어 날카로운 갯바위 위를 걸어서 반 시간 이상을 헤매야 했다. 다행히 물이 들어오지 않아서 괜찮았지 물이라도 들어왔더라면 꼼짝없이 물에 빠지거나 되돌아 나오느라고 더 고생을 했을 게다. 아이고, 망할 놈의 영감쟁이 같으니라고.
안호리에서 다시 길을 잃어 잠시 주춤거렸지만 곧 제 자리로 돌아와 공재 윤두서 고택에 들렸다. 코스에서 5백미터난 벗어나 있었지만 멀리서 보기에도 엄청난 규모라서 한 번 들어가 보기로 했다. 중요민속자료 232호라는 입구의 안내간판만 있을 뿐 정작 고택에는 설명문이나 안내문도 하나 없고 관리상태가 엉망이다. 제대로 관리도 하지 않은데다 수리한 것도 좋은 작품에 개칠하듯 거칠고 보기 흉해서 안타깝다. 윤두서 고택은 한옥의 규모도 크고 건물도 무척 품위 있어 보인다. 만약 보길도의 윤선도 유적처럼 잘만 꾸며놓으면 좋은 관광꺼리가 될 텐데... 새로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기왕에 있는 것을 잘 보전하고 가꾸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요즈음 정치인들은 돈만 많이 들여서 제 치적만 앞세울 요량으로 무작정 새로 크게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동네 입구 정자나무 그늘에서 쉬고있는 김 노인(82)과 얘기를 해보니 후손들은 모두 떠나버리고 이제는 늙은이 몇 사람만 남아서 살고 있단다. 너무 헐었다고 했더니 후손들도 귀찮아서 관리를 하지 않는데 누가 그런데 관심이나 두겠느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저런 집이라면 잘 수리해서 살고 싶다고 했더니 지금도 평당 만원 정도의 헐값에 살 수 있을 거란다. 설마 그럴라구. 그런데 공재 윤두서는 누구일까? 혹시 윤선도 처럼 귀양와서 호의호식하며 거들먹거린 양반 정치꾼이 아닐까? 김 노인도 윤두서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단다. <자료를 찾아보니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으로 선비로서보다 화가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이 고택은 해남 윤 씨의 종가이다. 역시 예상대로다.>
12시가 채 되지 않아 화산면을 옆으로 통과했다. 점심을 고천암 방조제 근처에서 먹으려고 했지만 1시, 가좌리를 지날 무렵 도저히 시장끼를 견딜 수가 없다. 아쉬운대로 버스 정거장에서 컵라면을 먹고나니 버릇처럼 또 졸리다. 에라. 한 숨 자고가자. 한 반 시간 쯤 잤을까? 인기척에 잠이 깨었다. 웬 늙은이가 날 물끄러미 바라보며 어디 가는가고 묻는다. 고천암 방조제에 간다고 했더니 '게서 뭐 볼 게 있다구...' 한심한 표정이다. 아무러나 한 숨 자고나니 개운하다. 의외로 하나를 돌고나니 고천암 방조제가 보인다. 영감 말처럼 볼 거라곤 없다. 방조제가 다 그렇지 뭐 별다른 게 있나? 허지만 고첨암 방조제는 정말 아무 것도 없다. 식당은 커녕 구멍가게 하나 없다. 그만큼 관광객이 없다는 의미다. 철새도래지로 유명하다더니 다 빈 말인가? 버스 정거장에서 컵라면으로 요기하기를 잘 했다. 고천암 방조제를 지나 반 시간이나 더 걸어 2시 30분이 되었을 때 비로소 식당이 하나 나타났다. 아이고, 잘 되었다. 늦었지만 먹고 가야지. 그런데 방조제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이름은 '고천암 식당'이다. 순두부 백반을 시켰더니 반찬만 12가지가 나온다. 그럼 그냥 백반은 반찬이 몇 가지나 나올까? 그러고도 값은 고작 5천 원이다.
오늘 걷는 길은 휴일인데도 교통량이 아주 적다. 국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한산해서 도통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모든 길이 이 정도로 한산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길가의 마늘밭에서 사람들이 막대리를 들고 무언가를 때린다. 무얼 잡나? 알고보니 마늘 쫑을 짜르고 있단다. 마늘쫑을 짤라주어야 영양이 마늘뿌리로 가서 마늘이 커진단다. 그렇다면 마늘쫑을 뽑아서 내다 팔지 왜 버리느냐고 했더니 마늘쫑을 뽑다간 마늘까지 뽑혀서 오히려 손해란다. 아, 그럴구나. 나는 오히려 반대로 마늘쫑을 그대로 두어야 마늘이 실해지는 줄 알았는데... 마침 슈퍼가 보인다. 사이다라도 한 잔 마시자. 이제 벌써 가게가 반가워지는 계절이 되었구나. 11시간 이상을 걸었더니 이제는 다리가 뻐근하다. 다리는 아파도 시간이 충분하니 세월아, 네월아 하며 천천히 걷는다. 기분이 짭짤하다. 드디어 5시 30분, 황산에 도착했다.
'오늘도 날파리가 괴롭혀?' 최병은이다. 이 친구는 일요일도 없구나.
'오늘은 숲 속을 걷지 않으니 날파리는 없어.'
'오늘 일정은 끝났어?'
'응. 진도교 입구에서 가까운 황산이야.'
'천천히 글 올려 줘.' 내 글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니 정말 뿌듯하다.
※ 미모온천장/황산면 사무소 앞/061-533-6300.
오늘 걸은 길 : 산정(송지면)-두모선착장(현산면 백포리)-고천암 방조제-황산면. 33.2km
첫댓글 하루80리 이상을 걷다니 힘들었겠구나. 참 대단해. 20회에서 상이라도...
주면 사양하고 만 받을 줄 알지? 어림없어. 공짜는 항상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