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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 휘날리는 태극기
金 斗 洙
삼월 하는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삼월하늘 가만히 우러러 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 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 하다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 봅니다.
우리가 매년 3월1일을 기해서 잊지 않고 각 직장마다 기념식을 거행하고 나라사랑에 대한 정신을 새롭게 하는 것은 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순국하신 선열들에 대한 깊은 감사함을 잊지 않기 위함이라고 할 것이다.
매년 3.1절이 다가오면 학교에서는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선생님들의 선창에 따라서 유관순 노래를 배웠다.
지금은 교실마다 풍금이나 피아노가 갖추어져 있었지만 5.60년대의 학교 교실은 가난한 살림살이를 반영하듯 6학급 학교에 겨우 풍금이 한 대가 비치된 학교는 그래도 여건이 좋은 편의 학교였다. 풍금이 없던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성악을 통해서 노래를 가르치기도 하였지만 음악에 소질이 없는 선생님의 반 아이들은 옆 교실의 선생님을 빌어서 배우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3월 1일이 되면 전교생이 등교해서 국기 게양대에 태극기를 계양하고 애국가를 제창한 다음에는 기념식을 하고 나중에는 유관순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국경일이 공휴일로 지정이 되면서 부터 아이들이나 어른이고 간에 이날을 왜 놀게 되는지 조차 모르고 지나는 경향이 있게 된 것이니 과연 이렇게 무미하게 이날을 보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아도 이날이당초의 공휴일로 지정된 취지와는 다르게 애국애족에 대한 충성심을 희석시키는 결과가 되어 차제에 이날을 올바른 역사를 배우는 날로 정하고 기념식을 거행하기를 제안해 보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3.1운동의 태동은 1919년 3월 1일 이지만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그에 앞서 1845년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시해된 이후 1905년 11월 17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과 대한제국사이에 을사늑약( 乙巳勒約)을 강제로 체결하게 되고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쓰라린 조약으로 말미암아 우리나라는 완전히 일본에게 국권을 내주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이 조약을 선두에서 지휘한 친일파의 우두머리가 대한제국의 학부대신 이완용을 비롯한 이근택 일제 총독부 중추원 고문 박제순 이지용 등이었다.
나라가 위중할 때에 나라의 대신들의 역할이란 위란의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을 서야 함은 물론 굳건한 애국심으로 무장이 되어 있었다면 결코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까지는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이들 오적(五賊)들은 일본의 작위(爵位)까지 받으면서 역적(逆賊)의 앞장을 섰던 것이니 이런 최악의 역적들이 어찌 생성되었단 말인가.
하루아침에 나라를 잃게 되었다는 소문이 번지자 민영환(閔泳煥)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이 자결을 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는 일제를 규탄하는 항일운동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적 총질로 동포들은 총에 맞고 체포되어 갖은 고초를 겪거나 외국으로 망명을 한 분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끊임없는 애국투쟁이 일어나던 중에 1919년 고종황제께서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자 인산일인 동년 3월3일에 앞서 3월1일 한반도 전 지역에서는 다시 독립운동의 횃불을 밝히게 된 것이다.
기미년 3.1 만세운동을 주동한 분은 민족대표 최남선, 손병희 이승훈. 한용운 등 33인으로 전국 각지에서 이에 동조한 백성들이 분연히 일어나긴 하였으나 그 열기는 3개 월 만에 궤멸상태에 이르게 되었으니 일제의 무력을 당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기하여 천안의 아우네 장터에서는 1919년 4월1일 (음력3월1일) 유관순이 주동이 되어 만세운동을 펼치게 되었으니 유관순은 당시 서울의 이화학당을 다니던 중에 일찌감치 고향으로 내려가 오빠와 동리 유지들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 위해 밤새도록 직접 만든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눠주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던 것이다.
이런 소식에 놀란 일본 헌병들은 무자비하게 총을 쏘아 유관순열사의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사망하고 30여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유관순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일본 헌병에게 체포를 당한 것이다. 그러자 유관순은 주동자는 자기 자신이라면서 다른 사람들은 석방하라고 요구를 하였던 것이다.
체포된 유관순은 공주법원으로 송치되었다가 재판장에게 항의를 한 것이 원인이 되어 당초 3년의 언도를 받았다가 7년으로 형기가 늘어난 다음에 서대문 감옥으로 이관이 되었지만 그는 조석으로 독립만세를 불러 일본의 사기를 꺾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약한 몸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무수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한 장독으로 1920년 9월 28일 독립운동을 펼친 지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만고에 길이 빛날 애국의 별은 애석하게도 속절없이 지고 말았으니 이 어찌 민족의 슬픔이 아니겠는가.
그는 순국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 내 숨통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을 견딜 수가 있습니다. 나라에 받친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그의 나이 겨우 열여섯 살! 그 시기라면 한창 사춘기로 접어들 때이고 보통 사람이라면 새싹이 움트는 것을 보거나 꽃이 핀 것을 보아도 꽃처럼 향기를 지닌 처녀로서의 미래를 설계해 봄직도 하련마는 그는 이화학당을 다니면서 오로지 나라를 빼앗긴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독립운동이 곧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앞장을 섰던 것이니 어쩌면 그렇게도 당돌한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으랴!
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순국하신 유관순 열사를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 모두는 숙연하게 그분의 뜻을 받들어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는데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을 본다면 과연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바쳐 되찾은 나라를 얼마만큼이나 사랑하고 있으며 또 얼마만큼이나 그 분들의 뜻을 받들려고 하는 것인가.
나 자신 부끄럽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너무도 이기적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3.1절과 같은 국경일을 맞게 되면 과연 우리 국민들이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드는 것이니 그 중에도 최근에 불거진 국방 비리의 내용을 보면 고위 장성 출신들이 본분을 망각하고 전투 장비를 구입하는 과정에서 각종비리로 연루되어 별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한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가정을 돌볼 사이도 없이 해외로 떠돌다가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일제에 붙들려서 감옥에서 옥사를 한 분이 한 두 분이 아니지 않은가.
때로는 인간이기에 부모가 그립고 자식들이 보고 싶었지만 나라가 무엇인지 그분들은 잠시 가족을 생각을 하다가도 험지로 쫓겨 가야 하는 고초를 겪다가 가족에게 한마디 말도 전하지 못하고 순국하신 분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를 생각하면 감히 나라의 녹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결코 부정을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공직자를 비롯하여 민의를 대변하는 국회의원들마저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의원들이 도중하차를 할 정도로 부패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만연되어 있는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사회의 단면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한 면을 보게 되면 애국선열들의 후손들에 대해서 정부는 그 분들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함에도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항간에 들리는 소문으로 나라에서는 너무도 그분들을 소홀히 대하는 바람에 오히려 독립운동을 한 조상들을 원망한다는 것이니 무언가 공직자들이 제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그 후손들은 정부의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가난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간혹 애국선열들의 후손들이 뒤늦게 이의를 제기하면 그분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어야 함에도 당시의 증명서를 요구한다니 어느 후손이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지 않은 이상 그 자료를 구한다는 말인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타국 전선에 나가서 싸우다가 산화한 장병을 찾기 위해서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끝까지 흔적이라도 발굴하여 웰링톤 국군묘지로 모신다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도 독립운동을 하신 후손들을 끝까지 찾아서 예우를 하고 그들이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지원해야 한다.
오늘날 이만큼 나라가 융성하고 국민들이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애국선열들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희생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가 광복으로 나라를 일본으로부터 되찾지 못하였다면 지금도 그들의 노예로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을 수가 없다.
광복 직후에 민간에서 유행한 말이 “ 소련에 속지 말고. 미국을 믿지 말고. 일본은 다시 일어난다. 고 하였다.
이 말 중에 “ 일본은 다시 일어난다.” 는 말은 의문으로 들리긴 하였지만 대단히 교훈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1592년(선조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해 7년간이나(정유재란 포함) 우리 백성들은 왜인들에게 혹독한 시련을 당한 바가 있었다. 당파싸움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된 것이 원인으로 다시는 그들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말아야 함에도 우리의 역사는 되풀이 되어 임진왜란으로 부터 400여년이 지난 1910년에 또다시 일본의 식민 지배를 36년 동안이나 받았으니 다시 생각을 해보아도 이렇게 멍청한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 일본은 지금 자국의 안보를 위해서 헌법을 뜯어고치면서까지 국론을 통일하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꿈을 가질 만큼 국민들이 똘똘 뭉쳐 있는데 반해 우리의 현실은 조선조 말년 이상으로 나라야 어찌 되든지 당파싸움으로 날이 새고 있는 것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말과 같이 우리는 언제까지나 국론분열로 이 나라를 이대로 끌고 가야 한다는 말인가,
지금 북한은 핵실험을 통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음에도 국회에서는 선거구 획정도 늦장을 부리는가 하면 19대 회기가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테러방지법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이를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니 참으로 민주주의라는 허울만 좋은 무제한의 자유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선열들은 태극기를 가슴에 안고 독립운동을 웨치고 목숨을 버렸으나 후손들은 국경일이 되어도 그토록 애국지사들이 빼앗기지 않으려던 그 태극기 하나 제대로 대문에 걸어놓지를 않는 것이니 언제까지 “ 나라 지키는 사람 따로 있고 애국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말인가.
3,1절을 기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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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뜻이 담긴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