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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현덕 유선을 부탁하고...
촉의 패잔병을 쫓던 육손은 공명의 팔진도를 발견한다.
어둠 속에서 기묘한 조화가 일어 길을 잃은 육손은 황승언의 도움으로 석진을 빠져 나온다.
한편 유비는 백제성에서 예순셋의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공명은 태자 유선을 제위에 오르게 한다.
한편 육손은 승세를 몰아 촉군을 휩쓸고 있는데 뜻밖에도 조운이 군사를 이끌고 오자 영을 내렸다.
"전군은 급히 물러나라!1"
육손은 더 싸울 생각을 버리고 군사들을 물렸다.
그때 조운은 오군에게 덮쳐들며 닥치는 대로 적을 쳐 물리치다가 물러나라는 육손의 영을 듣지 못한 주연과 맞닥뜨렸다.
주연이 말머리를 돌릴 사이도 없이 조운은 한칼에 그를 찍어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조운은 오병을 쳐죽이며 흩어 버린 다음 선주를 구해 백제성을 달려갔다.
선주가 문득 조운에게 탄식하며 말했다.
"짐은 비록 위태로움에서 풀려났으나 뒤에 있는 여러 장수와 군사들은 어찌한다는 말인가?"
그러자 조운이 선주를 위로했다.
"지금은 적이 뒤쫓고 있으니 더 머뭇거릴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우선 백제성으로 가셔서 쉬도록 하십시오.
신이 다시 군사를 이끌고 와서 그들을 구하겠습니다."
선주가 백제성으로 들어가는데 그를 뒤따르는 장졸은 1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싸움에 졌다 하나 참으로 참담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뒷날 사람들이 촉의 대군을 여지없이 꺾어 버린 육손을 시로 지로 찬탄했다.
홰들고 불질러 잇댄 영채 무찌르니
현덕은 갈 곳 없어 백제성으로 달아났네.
그 위명 하루 아침에 촉과 위를 놀라게 하니
오왕이 어찌 한낱 서생 공경하지 않으리.
한편 선주의 뒤를 쫓는 오군을 맞아 싸우던 부동은 오군들에 의해 에워싸이고 말았다.
오군들의 한가운데에 갇힌 꼴이 된 부동을 보고 정봉이 소리쳤다.
"서촉의 군사는 수없이 죽고 항복한 자도 엄청나다.
너의 주인 유비도 이미 사로잡힌 지 오래이다.
너는 이제 힘도 다했고 형세도 고단하거늘 어찌하여 항복하지 않느냐?"
그러나 부동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정봉을 소리쳐 꾸짖었다.
"나는 한의 장수다.
어찌 동오의 개들에게 항복할 수 있겠느냐?"
그 외침과 함께 창을 높이 들고 말을 박차며 오군들에게 달려들었다.
부동은 닥치는 대로 오군을 찌르고 베었으나 끝내 오군의 창칼에 찔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 이제 나도 끝이로구나!1"
부동은 탄식하며 입으로 피를 토하며 오군들 속에 쓰러졌다.
이때 촉의 좨주 정기도 수군을 이끌어 치러 가려는데 어느 개 오군이 뒤에서 밀려들었다.
오군이 밀려들자 촉군들은 그 위세에 겁을 집어먹고 놀라 달아났다.
정기의 부장이 달아나다 문득 정기를 보고 소리쳤다.
"적병이 옵니다.
좨주께서도 달아나십시오."
그러자 정기가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나는 주상을 섬긴 이후 싸움에 나가 한 번도 달아난 적이 없다."
그렇게 외치며 버티고 서 있는데 동오의 군사가 내달아와 정기를 겹겹이 에워쌌다.
오군의 포위를 뚫을 길이 없음을 안 정기는 마침내 자신의 칼로 자기의
목을 치니 위태로움을 맞아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은 채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
그때 오반과 장남은 이릉성을 에웠나 채 공격하고 있었다.
홀연 풍습이 달려와 촉병이 오병에게 크게 패했으며 선주가 쫓기고 있음을 알렸다.
오반과 장남은 깜짝 놀라 이릉성을 버려 둔 채 선주를 구하러 달려갔다.
이릉성 안에 갇혀 있던 손환은 그제야 촉병의 포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장남과 풍습은 선주를 구하러 달려가다 얼마 못 가 오병과 맞닥뜨렸다.
거기다가 이릉성을 빠져 나온 손환이 달려와 장남과 풍습은 오의 대군을 헤쳐 나갈 길이 없자
죽기 살기로 싸우다 마침내 오병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오반만은 가까스로 적의 창칼을 벗어나 달아났으나 얼마 가지 않아 오병이 뒤를 쫓아왔다.
오반이 다시 위태로운 지경을 맞아 진땀을 흘리고 있을 때
마침 군사를 이끌고 나온 조운의 구함을 받아 함께 백제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멀리 남만으로부터 원군을 이끌어 왔던 만왕 사마가도 오병과 싸우다
군사들을 모두 꺾인 채 홀로 달아나다 주태와 맞닥뜨렸다.
사마가는 주태를 맞아 20여 합을 싸우다 마침내 죽음을 맞았다.
촉의 장수들이 오병과 끝까지 싸우다 흔연히 죽음을 맞는 중에 더러는 오병에게 항복하는 장수들도 있었다.
두로와 유녕은 오병을 당할 수 없음을 알고 군사를 거느린 채 영문을 열고 투항했다.
두 장수가 항복하니 서촉의 영채에 쌓였던 군량과 마초는 고스란히 등오로 넘어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서촉의 장수와 군사들이 오병 앞에 무릎을 꿇으니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때 이전에 선주의 아내였던 손 부인은 동오에서
선주가 싸움에 져서 죽었다는 잘못된 소문을 듣고 울며 강물에 뛰어들어 지아비의 뒤를 좇았다 한다.
훗날 사람들이 그 강변에다 몸을 던져 정절을 지킨 손 부인의 넋을 모신 효희사란 사당을 지었다고 한다.
한편 촉군을 물리쳐 큰 공을 세운 육손은 군사를 이끌어
촉의 패잔병을 뒤쫓다가 기관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 문득 말을 세웠다.
육손이 앞을 보니 맞은편 산자락을 끼고 강물이 은은히 흐르는데
한 줄기 살기가 하늘을 메울 듯 감돌고 있었다.
육손은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앞쪽에 틀림없이 매복이 있소.
결코 가볍게 군사를 이끌어서는 아니 될 것이오."
육손은 장수들에게 그렇게 말한 뒤 군사를 10여 리나 물려 넓은 들판에다 진영을 세웠다.
매복군의 기습에 대비하여 육손은 군사를 보내 살펴보게 했다.
살피러 갔던 군사가 돌아와 알렸다.
"적군은 한 명도 보이지 아니 하였습니다."
육손은 미덥지가 않아 말에서 내려 높은 곳으로 올라가 살펴보았다.
육손이 보니 여전히 괴이한 고요함과 은은한 살기를 머금은 구름이 산중턱에 감돌고 있었다.
"어찌 복병이 없을 리가 있는가?
다시 한 번 더 살펴보라."
육손이 다시 군사를 뽑아 살펴보게 했다.
살피러 갔던 군사가 돌아와 말했다.
"군사나 말은커녕 적병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도 육손은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육손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산쪽을 바라보니 살기가 전보다 더했다.
이번에는 믿을 만한 군사를 뽑아 자세히 살피도록 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살피고 온 군사가 와서 알렸다.
"인마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강변에 돌무더기가 어지럽게 팔구십 더미,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육손은 더욱 의심스러웠다.
군사들을 보내어 이곳 백성들 몇 사람을 불러 오게 하니 군사들이 곧 고을 토박이 몇 사람을 데리고 왔다.
육손이 그들에게 물었다.
"누가 돌무더기를 강변에 저렇게 쌓아 두었는가?
거기다 어찌하여 돌무더기
위에 살기가 서려 있는가?"
토박이 중에 한 사람이 대답했다.
"이곳은 어복포란 곳으로, 전에 제갈량이 서천으로 돌아갈 때 군사들을 풀어서 세워 놓은 진입니다.
돌을 주워다 강변에 쌓아 만든 것인데 항상 괴이스런
기운이 구름처럼 저 돌무더기 안에서 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공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육손은 그 말을 듣고 홀로 중얼거리며 말 위에 올랐다.
수십 기병을 거느린 육손은 그 석진을 살피러 언덕 위로 갔다.
석진을 굽어보니 사면팔방으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돌문이 나 있었다.
육손이 그 석진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저것은 제갈량이 사람을 홀리려고 꾸며 놓은 요사스런 장난일 뿐이다.
저런 것이 어디에 소용이 되겠는가?"
그러고는 공연한 의심을 품었다는 듯이 육손은 기병 몇을 거느리고 언덕 아래로 달려가 석진 안으로 뛰어들었다.
석진 안에 들어선 육손이 좌우를 살피고 있는데 따라 들어온 부장이 말했다.
"해도 저물었으니 도독께서는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육손도 주위가 어두워지자 내심 불안하게 여겨 말머리를 돌리려 할 때였다.
홀연 회오리바람이 크게 일어나며 모래가 흩날리고 돌멩이가 구르는 가운데 하늘과 땅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육손이 정신을 가다듬어 보니 눈앞에
어른거리는 돌무더기가 칼을 세운 듯 날카롭게 번뜩이고 있었다.
거기다가 거센 바람에 출렁이는 물결 소리는 마치 창칼을 부딪고 북 소리가 울리며
수많은 말들이 내닫는 소리처럼 소란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모래와 흙으로 된 모래톱이 바람에 쓸려와 태산이 앞을 가로막는 듯했다.
육손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내가 제갈량의 계략에 빠졌구나!"
육손이 급히 석진 속에서 빠져 나가려 했으나 어디로 달아나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육손이 정신이 어지러워 어찌할 줄 모르고 있는데 홀연 한 노인이
말 앞에 나타나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장군은 이 석진에서 벗어나고 싶소?"
"노인께서 길을 아신다면 가르쳐 주십시오."
육손이 사색이 된 채 노인에게 빌 듯이 청했다.
"내 뒤를 따르시오."
노인이 그렇게 말하더니 지팡이를 끌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육손이 뒤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 새 돌무더기 진 밖이었다.
노인은 육손이 있었던 원래의 산 언덕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제야 육손이 노인에게 물었다.
"어르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나는 제갈공명의 장인 되는 황승언이란 사람이외다.
전에 내 사위가 서천으로 들어갈 때 돌로 만든 저 진을 세웠는데 그 이름을 팔진도라 하오.
여덟 문이
시시각각 돌아가며 변화를 부리는 것으로 그 문은 곧 휴. 생. 상. 두. 경. 사. 경. 개이오.
이 여덟 문을 번갈아 가며 들어가게 되니 그 변화가 끝이 없소.
적병이 한 번 빠져 들면 헤어날 길이 없으니, 그 위력은 날랜 군사 10만과 견줄 만하오.
사위가 떠나면서 '뒷날 동오의 한 장수가 이 진 안에서 헤매게 될 것이니
그때는 밖으로 나가는 길을 일러 주지 마십시오'하고 당부했소.
그런데 오늘 이 늙은이가 산 위에서 보니 장군이 바로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이 진을 알지 못하고 들어갔으니 틀림없이 빠져 나오지 못하리라 짐작했었소,
그러나
이 늙은이는 평생을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오.
차마 장군을 버려 둘 수가 없어 내 나서서 '살아나는 문'으로 나오도록 이끈 것이외다."
육손은 공명의 장인인 그 노인에게 절하며 고마움을 표한 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이 진법의 묘한 이치를 모두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그 늙은이가 고개를 가로 흔들며 말했다.
"변화가 워낙 무궁해서 늙은이 몸으로는 배울 수가 없었소이다."
육손은 그 노인의 말을 듣자 더욱 고마운 생각이 들어 말에서 내려 거듭 감사의 뜻을 전한 뒤에 진영으로 돌아갔다.
뒷날 당나라 시인 두공부가 말년에 기주를 지나다 이 팔진도를 보고 시를 지었다.
삼분하는 공 천하를 덮고
그 이름 팔진도로 떨쳤네.
강은 흘러도 돌은 그대로이니
동오를 못 삼킨 한 오늘에 이르네.
석진은 장마철에는 고스란히 물 속에 잠겼으나 물이 빠지면
항상 원래의 모습 그대로 돌아오는데 수백 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었다.
육손은 본진으로 돌아온 뒤에도 팔진도에서의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탄식했다.
"공명은 참으로 와룡이로다.
도저히 따르지를 못하겠구나."
육손은 더 이상 서촉으로 밀고 갈 마음이 없어 곧 군사를 물리도록 영을 내렸다.
육손이 군사를 물리려 하자 좌우에 있던 여러 장수들이 한결같이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유비가 싸움에 크게 져서 이제 겨우 성 하나를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긴 기세로 밀고 들어가면 그를 쉽게 쳐없앨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쳐부수지 않
으시고 이까짓 돌로 만든 진 때문에 물러나려 하십니까?"
그러자 육손이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석진 때문에 물러나는 것이 아니오, 나는 위주 조비가 그 아비 조조에
못지않게 간사하고 속임수가 많음을 알고 있소이다.
내가 촉병의 뒤를 쫓는 것을 조비가 알면 그는 틀림없이 우리 동오의 빈틈을 타 쳐내려 올 것이오.
우리가 서천으로 깊이 들어간다면 무슨 수로 갑자기 군사를 돌려 그들을 막을 수 있겠소?"
그 말에는 여러 장수들도 할 말을 잃고 입을 다물었다.
육손은 마침내 한 장수에게 영을 내려 촉군이 뒤쫓을 경우를 대비하게 한 다음 대군을 돌려 동오로 돌아갔다.
육손이 군사를 되돌린 지 사흘이 채 못 되어 세 곳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전해졌다.
"위의 장수 조인이 군사를 이끌어 유수로 나오고 있습니다. "
"조휴가 동구로 군사를 휘몰아오고 있습니다."
"조진이 남군으로 군사를 이끌어 오는데 그 기세가 자못 급합니다."
세 곳에서 온 전갈은 다시 이어졌다.
"세 길로 오는 인마가 수십 만이며 밤을 도와 우리의 경계로 밀려 오는데 그들의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
"과연 내가 헤아린 대로다. 내가 이미 그럴 줄 알고 군사를 내어 그들을 막게 했으니 염려하지 않아도 되리라."
육손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태연히 웃으며 말했다.
한편 그 무렵, 효정과 이릉 싸움에서 육손에게 크게 패한 선주는 백제성으로 쫓겨가자 오호대장의 한 사
람인 조운이 성을 지키며 선주를 호위했다.
때는 장무 2년 6월이었다.
이때 공명에게 갔던 마량이 선주에게로 돌아와 자기 편이 싸움에 크게 패한 걸 보고 몹시 슬퍼했다.
마량은 이미 때가 늦었으나 선주에게 공명의 말을 전하며 써 준 글도 바쳤다.
선주가 공명의 글을 보고 탄식해 마지않았다.
"짐이 진작 승상의 말을 들었더라면 오늘과 같이 크게 패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무슨 낯으로 돌아가 성도의 여러 신하들을 대한단 말인가?"
그렇게 탄식한 선주는 성도로 돌아가기를 마다하고 백제성에 그대로 머물렀다.
선주가 머물게 되자 역관을 고쳐 영안궁이라 이름짓고 다시 뒷일을 도모했다.
선주가 백제성에 머무르며 군사를 수습하고 있을 동안 쫓겨온 군사들이 싸움의 뒷소식을 알렸다.
장남. 풍습. 부동. 정기. 사마가 등의 장수가 모두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선주가 몹시 슬퍼하며 눈물짓고 있는데 가까이 모시는 신하가 다시 알렸다.
"황권이 강 북쪽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위에 항복했다 합니다.
폐하꼐서는 그 가솔들에게 벌을 내리십시오."
그러나 선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황권이 강 북쪽에 있다가 위에 항복한 까닭은 오군에게 길이 끊겨 오도가도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황권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짐이 그를 버렸다.
그런데 어찌 그 가솔들에게 벌을 줄 수 있겠는가?
전과 같이 양식을 대어 주도록 하라."
선주는 오히려 그 가솔들을 보호해 주도록 분부를 내렸다.
그때 위에 항복한 황권은 위의 장수들이 이끌어 조비를 뵙고 있었다.
조비가 황권의 속마음을 엿보려는 듯이 물었다.
"경이 짐에게 항복한 것은 옛 진평과 한신을 우러렀기 때문인가?"
진평과 한신이 원래는 항우의 신하였다가 뒤에 유방을 도와 항우를 쳤던 일에 비유한 조비의 물음이었다.
황권이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신은 촉제의 은혜를 매우 두텁게 입어 강 북쪽의 모든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육손에게 돌아갈 길이 끊겨 촉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에는 항복할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폐하께 투항하게 된 것입니다.
싸움에 진 장수가 목숨을 건진 것만 해도 다행인데 어찌 감히 옛 사람을 우러름 따랐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황권이 서슴없이 말하자 조비는 그의 꾸밈없는 대답에 크게 만족해하며 진남장군의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황권은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자 황권의 마음을 돌려 놓으려는 듯 곁에 있던 신하 하나가 슬쩍 거짓을 섞어 조비에게 말했다.
"촉에서 온 세작이 전하기를 촉주가 황권의 가솔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황권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히 그 말을 받았다.
"신과 촉주는 서로 마음 속으로 굳게 믿고 있습니다.
촉주는 신이 위에 투항한 것이 결코 본마음이 아닌 것을 아실 터이니
결코 신의 가솔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황권의 굽힘 없는 기개를 본 조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뒷날 사람들은 위에 항복한 황권의 지조 없음을 시로 지어 나무랐다.
오에 항복할 수 없다고 어찌 조비에게 투항했다?
충의로운 이가 어찌 두 조정을 섬기는가?
한스럽다, 황권은 한 번 죽음을 아꼈구나.
주자의 글 쓰는 법 너를 용서 않으리.
오와 촉이 서로 싸우자 위주 조비는 마침내 때가 왔다는 듯 가후를 불러 물었다.
"짐이 이제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데 먼저 촉을 치는 것이 좋겠소, 동오를 치는 것이 좋겠소?"
가후가 한동안 생각에 잠기다가 입을 열었다.
"유비는 영웅의 재질을 지녔으며, 제갈량을 중용하여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습니다.
또한 동오의 손권은 허실을 잘 알아 대처하는데다 육손은 우리를 대비해 험하고 요긴한 곳마다 군사를 머무르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과 호수가 가로놓여 있어 급히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신이 보건대 우리 장수들 중에는 손권과 유비에게 맞설 만한 장수가 없으며
설사 폐하께서 하늘 같은 위엄을 앞세워 몸소 나아가시더라도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굳게 지키며 두 나라에 변고가 있기를 기다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조비는 가후의 말이 마땅치 않아 따지듯이 물었다.
"짐이 이미 세 갈래 길로 대군을 보내 동오를 치게 하였소.
오와 촉이 서로 맞서도 있는 지금인데 이기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오?"
조비가 뜻을 꺾지 않으려는 듯 가후에게 반문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상서 유엽이 나서며 말했다.
"요즈음 동오의 육손이 새로 촉군 70만을 깨뜨린 후라 아래위가 한 마음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다가 동오는 강과 호수가 가로놓여 있어 갑작스럽게 도모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육손이 꾀가 많으니 반드시 우리에 대한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유엽까지 나서 말리자 조비가 더욱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경은 전에는 짐에게 동오를 치라고 하였소,
그런데 이제 와서는 또 치지 말라고 말리니 대체 그 까닭이 무엇이오?"
"그건 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동오가 촉병에게 여러 차례 패하여 기세가 크게 꺾여 있었습니다.
그 틈을 타 들이치면 충분히 이길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동오가 촉을 쳐부순 뒤라 그 기세가 1백 배나 치솟아 있으니 쳐들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조비는 뜻을 굽히지 않으려는 듯 잘라 말했다.
"짐은 이미 뜻을 정했으니 경들은 딴소리 하지 말라."
조비는 그 말과 함께 몸소 어림군을 이끌어 세 갈래 길로 보낸 군사들의 뒤를 바쳐 주기 위해 떠나려 했다.
그때 초마가 달려와 알렸다.
"동오는 벌써 우리를 위한 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범은 군사를 이끌어 조휴를 막으러 떠났으며 제갈근은 남군에서 조진을,
주환은 유수에서 조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유엽이 다시 조비를 말렸다.
"적이 이미 우리를 맞을 채비를 갖추었으니 폐하께서 가셔도 이로움이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조비는 끝내 유엽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를 치려는 뜻을 바꾸지 않고 대군을 이끌어 나아갔다.
그때 조인을 맞으러 나간 주환은 나이가
겨우 스물일곱이었으나 담력이 굳세고 지략이 많았다.
손권은 주환의 나이가 비록 어렸으나, 그를 미덥게 여겨 유수를 지키게 했다.
그런데 위장 조인이 대군을 이끌고 와 선계 땅으로 밀고 들어오자
주환은 군사를 그곳으로 보내어 막게 한 후 자신은 겨우 기병 5천만을 거느리고 유수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홀연 군사가 달려와 알렸다.
"조인은 부장 상조에게 제갈건. 왕쌍과 함께 5만의 정병을 주어 유수를 치라고 영을 내리고
상조가 그 영을 받들어 이리로 몰려오고 있다 합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위의 대군이 몰려온다는 말에 모두들 두려움에 찬 얼굴들이었다.
주환이 문득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싸움에서 이기고 짐은 장수에게 달려 있지 군사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다.
병법에 이르기를 '안에서 지키는 군사는 밖에서 쳐들어오는 군사의 수가 배가 된다 해도 능히 이길 수 있다' 했느니라.
지금 조인이 1천 리 먼길에서 군사를 이끌고 와 말과 사람이 함께 지쳐 있을 터인즉,
우리는 높은 성에 머무르며 남으로는 큰 강을 의지하고,
뒤로는 험한 산을 의지하여 편안히 기운을 길러 지친 적을 맞고 있다.
내가 1백 번을 싸운다 하더라도 1백 번을 다 이길 수 있으니
비록 조비가 오더라도 두려워할 바가 아닌데 하물며 조인 따위가 어쩌겠느냐?"
주환이 그렇게 말해 군사들을 격려한 뒤에 다시 영을 내렸다.
"모든 군사들은 기를 눕혀 두고 절대로 북을 울리지 않도록 하라.
성안을 마치 아무도 지키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라."
군사들이 주환의 영에 따라 기와 창칼을 눕혀 놓고 모두 성 안에 매복해 있었다.
그때 위의 장수 상조가 군사를 이끌어 유수에 이르렀다.
상조가 성을 보니 성 위에는 말 한 마리, 군사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아 마치 텅 빈 성 같았다.
상조는 군사를 급히 내몰아 성으로 짓쳐들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땅과 하늘을 뒤흔들 듯한 초 소리가 나며 일제히 성 위에서 깃발과 창칼이 일어서더니,
주환이 칼을 휘두르며 나는 듯이 달려나와 상조를 향해 덤벼들었다.
뜻밖의 사태에 상조가 깜짝 놀라며 주환을 맞아 싸웠으나 갑작스런 일이라 단 3합도 맞싸우지
못한 채 주환의 칼에 맞아 말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주환이 적장 상조를 한칼에 베어버리자 오군들은 기세가 등등하여 일제히 함성을 울리며 위군을 몰아쳤다.
대장을 잃은 위군들은 기가 꺾인데다 거센 오군들의 기세를 당해 내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니
죽고 상하는 자가 헤아릴 수 없었다.
한바탕 싸움에서 크게 위군을 깨뜨린 주환은 적군이 달아날 때 내팽개친 기와 말과 무기를 거두어들였다.
그제야 조인이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그때는 선계에 있던 군사들까지 달려나와 힘을 합해 들이치니 마침내 당하지 못하고 달아났다.
수많은 군사만 꺾인 채 돌아가 위주에게 싸움에 진 경위를 말했다.
조비는 조인의 말을 듣자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군의 대비가 뜻밖에 굳센 것을 알고 걱정스런 얼굴로
여러 장수들과 그 일을 의논하는데 더욱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조진과 하후상이 남군을 둘러쌌습니다.
그러나 안에 숨어 있던 육손의 복병과 밖에 숨어 있던 제갈근의 복병이
안팎으로 들이치는 발마에 크게 패했다고 합니다."
조비가 다시 크게 놀라고 있는데 탐마가 헐떡이며 달려와 알렸다.
"조휴가 동오의 장수 여범에게 패했습니다."
이렇게 되니 조비가 세 갈래 길로 보낸 군사들이 모두 패하고 만 셈이었다.
"짐이 가후와 유엽의 말을 듣지 않았다가 이처럼 패하고 말았구나."
조비가 한숨지으며 탄식했다.
거기다가 진중에 예상치 못한 변고까지 생겼다.
때가 한창 더운 여름철이라 병이 크게 번져 군사들 중 열에 예닐곱은 쓰러져 죽었다.
조비는 더는 버틸 수 없음을 알고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낙양으로 되돌렸다.
이렇게 되니 화친을 맺었던 위와 오는 서로간에 원한을 갖게 되어 사이만 나빠진 셈이 되고 말았다.
한편 백제성에 있던 선주는 병을 얻어 영안궁에 몸져누워 있었다.
두 아우의 연이은 죽음에다 오와 싸워 크게 패하여 상심하던 선주는 나이가 든 탓인지
약을 써도 낫지 않고 병세가 하루가 다르게 위중해졌다.
때는 장무 3년 여름인 4월이었다.
선주는 병이 온몸에 퍼졌음을 느끼고 스스로 낫지 않을 병임을 알았다.
몸져누워 있으니 더욱 먼저 죽은 관우와 장비 생각이 간절해 흐느껴우니 몸만 더 크게 상했다.
마침내 두 눈마저 어른거리며 잘 보이지 않게 되자,
그를 모시고 있던 사람들마저 싫어져 꾸짖으며 물리쳤다.
어느 날 밤, 선주가 홀로 침상에 누워 있을 때였다.
홀연 음습한 바람이 일더니 등불이 꺼질 듯 깜박였다.
선주가 이상한 인기척에 그 쪽을 보니 등불 아래로 파란 기운이 안개처럼 서리며 문득 두 사람이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선주는 자신이 내쫓은 곁의 신하들이 다시 들어온 줄 알고 짜증석인 목소리로 그들을 꾸짖었다.
"짐이 마음이 편치 않아 너희들은 물러가 있으라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어찌하여 또 왔느냐?"
그러나 꾸짖음을 듣고도 두 사람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제야 의아스럽게 여긴 선주가 일어나 자세히 그들을 살피니 왼편은 관운장이요,
오른편은 장비가 아닌가.
선주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두 아우가 살아 있었구나!"
그러자 관우가 감나히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입니다.
옥황 상제께서는 저희들이 평생 신의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높이 여기시어 신령으로 삼으셨습니다.
이제 형님을 모시고 다시 한 자리에 모일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합니다."
선주가 우선 반가움을 못 이겨 두 아우를 붙든 채 목을 놓아 울다가
문득 놀라 깨보니 두 아우는 보이지 않았다.
선주는 아무래도 그 일을 심상치 않게 여겨 곧 사람을 불러 시각을 물어 보니 때는 밤 삼경이었다.
선주가 길게 탄식했다.
"짐이 이제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날도 멀지 않았구나."
다음 날, 날이 밝자 선주는 사람을 뽑아 성도로 보냈다.
승상 제갈량과 상서령 이엄 등을 부르기 위해서였다.
공명이 이 급보를 받자 곧 채비를 갖추어
이엄과 선주의 둘째 아들 노왕 유영, 셋째 아들 양왕 유리와 함께 영안궁으로 향했다.
성도는 태자 유선을 남아 있게 하여 지키게 했다.
공명이 밤을 도와 영안궁에 이르러 보니 선주의 병세는 위독한 지경으로 황망히 침상 아래로 엎드렸다.
"승상은 가까이 다가와서 앉으시오."
선주가 그렇게 말하며 가까이 다가온 공명의 등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짐이 승상을 얻어 다행히도 제업을 이루었소.
그러나
짐의 지혜가 얕고 모자란 탓에 승상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패하고 말았으니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후회와 한스러움으로 병을 얻어 이제 죽음이 눈앞에 이르른 듯하오.
그러나 태자는 어리고 약하니 어쩔 수 없이 대사를 승상께 당부하지 않을 수 없소이다."
선주가 말을 마치자 얼굴 가득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공명도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용체를 돌보시어 온 천하 사람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마시옵소서."
공명의 말에 선주는 대답 대신 문득 눈을 들어 좌우를 둘러보았다.
그 자리에는 마량의 아우 마속이 있었다.
선주가 마속을 보더니 모두 물러가게 하고 공명만을 남게 하더니 물었다.
"승상께서는 마속의 재질을 어떻게 보시오?"
선주의 뜻밖의 물음에 공명이 생각하고 있는 대로 대답했다.
"그 사람 또한 당세의 영재입니다."
그러자 선주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짐이 그 사람을 보건대 그 말이 실제 행동보다 지나친 듯하오.
큰 일을 맡겨서는 안 될 사람이니 승상께서는 깊이 살펴 쓰도록 하시오."
공명에게 그렇게 당부한 선주는 다시 여러 신하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선주는 여러 신하들 앞에서 붓을 들어 천천히 유조를 써서 공명에게 주며 탄식하듯 말했다.
"짐이 글읽기를 즐겨하지 않았으나 그 뜻은 대략 알고 있소.
성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하다'고 하였소.
짐은 경들과 함께 조적을 쳐없애고 한실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불행히도 중도에서 헤어지게 되었소.
승상께서는 번거롭겠지만 이 유조를 태자 선에게 전해 주시고, 모든 일을 잘 가르쳐 주시오."
공명이 당에 엎드려 울면서 말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용채를 돌보시옵소서.
신들은 개나 말의 수고로움을 다하여 폐하께서 신들을 알아 주신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공명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선주는 내시에게 명해 공명을 부축해 일으키게 했다.
선주는 한 손으로는 눈물을 씻으며 다른 손으로는 공명의 손을 잡고 숨을 가다듬더니 말했다.
"짐은 이제 죽어 가는 몸이오.
짐이 가슴 속에 묻어 둔 말 한 마디만 더 하려 하오.
이 말만 더 당부해 두면 마음에 걸릴 것이 없겠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쪼록 거리낌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공명이 얼굴을 들어 선주를 바라보았다.
선주가 눈물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승상의 재질은 조비의 열 배나 되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마침내 큰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오.
그때 내 아들이 도울 만한 인물이 되거든 도와 주시오.
그러나
만약 그럴 만한 재주가 없어 그 재목이 되지 못하거든 승상께서 성도의 주인이 되어 주시오."
'내 자식이 돌보아 줄 만한 인물이면 도와 주되, 가망이 없으면 공명 스스로가 제위에 오르도록 하라'는 말이었다.
자기 자식을 폐하고서라도 나라를 위하여 신하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믿음과 유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공명은 그 말을 듣자 온몸에 땀이 흐르고 손발이 떨렸다.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엎드려 울면서 말했다.
"신이 어찌 신하로서 힘을 다해 태자를 섬기지 않겠습니까?
이 목숨 다할 때까지 충의로써 태자를 받들겠습니다."
공명이 그렇게 말하며 땅에다 머리를 짓찧었다.
공명이 머리를 들자 그의 이마에는 피가 흘러내렸다.
선주는 공명을 더욱 가까이 앉게 하고 노왕 유영과 양왕 유리를 앞으로 불러 앉혔다.
"너희들은 모두 나의 말을 가슴에 새겨 듣도록 하라.
너희 형제 셋은 내가 죽거든 승상을 아버지 섬기듯 하여라.
섬김에 조금이라도 게으름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선주는 그렇게 당부한 후 두 왕에게 명하여 아버지를 받드는 예로 절을 올리게 했다.
두 왕이 공명에게 절을 올리자 공명이 무거운 얼굴로 아뢰었다.
"신이 간과 뇌를 땅에 뿌리며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찌 폐하께서 신을 알아
주신 은혜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어 선주는 여러 신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짐이 이미 외로운 아들을 승상께 맡겼고, 태자에게는 승상을 아버지로 섬기라 일렀다.
경들도 모두 조금의 소홀함이 없이 승상을 섬기도록하여 짐의 당부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선주는 또 조운을 불러 당부했다.
"짐과 경은 더불어 모든 어려움을 헤쳐 나오며 오늘에 이르렀으나 뜻밖에도 이제 헤어지게 되었다.
경은 짐과의 오랜 정분을 생각해서라도 항상 내 자식들을 돌보아 주도록 하라.
경은 짐의 말을 저버려서는 아니 된다."
"신이 어찌 개나 말의 수고로움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조운이 엎드려 울며 아뢰었다.
선주는 이윽고 여러 신하들을 둘러보며 마지막 작별을 했다.
"짐이 일일이 그대들을 불러 당부할 수가 없구나.
바라건대 스스로를 아끼며 모두 힘을 합해 사직을 도우라."
선주는 그 말을 마치자 홀연히 숨을 거두었다.
선주의 나이 예순셋, 촉의 장무 3년 스무나흘이었다.
뒷날 두공부가 시를 지어 선주를 기렸다.
촉주 오를 치러 삼협으로 갔다가
그해 영안궁에서 세상을 떠났네.
천자의 푸른 일산 텅 빈 산 속에서 생각만 하니
허무하다 옛 궁터, 벌판에 절만 섰구나.
오래된 사당 잣나무 소나무에는 백로만 깃들고
설날 복날에는 촌늙은이만 찾는구나.
제갈량의 사당도 이웃해 있어
그 임금 그 신하 함께 제사 받네.
선주 유비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문무의 관원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으로 침식을 잊었다.
공명은 모든 관원들을 거느려 선주의 영구를 모시고 성도로 돌아갔다.
태자 유선이 성 밖까지 나와 영구를 맞아들여 정전에 모셨다.
유선이 슬피 울며 장례를 마친 다음 유조를 받들어 읽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짐이 처음 얻은 병은 하리뿐이었으나 점차 여러 가지 병이 더해져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짐이 들으니 사람이 쉰까지 살면 요수라 할 수 없다 했거늘
이제 나이 예순이 넘었으니 죽는다 한들 무슨 여한이 있으랴.
다만 너희 형제들이 염려스러울 뿐이다.
부디 너희 형제들은 항상 힘써 노력하라.
악한 일은 아무리 작다 하여도 해서는 아니 되며, 착한 일은 비록 작다고 하더라도 마다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오직 어질고 덕이 있어야만 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으리라.
너희들의 아비는 덕이 없는 사람이라 본받을 바 되지 못하니 모든 일을
승상께 의논하고, 그분 섬기기를 아버지처럼 하라.
그 섬김을 게을리해서는 아니 될 것이니 특히 가슴에 새겨 두도록 하라.
너희 형제들은 무엇이든 승상께 물어서 행하기를 거듭 당부하노라.
태자가 유조를 다 읽고 나자 공명이 나서며 말했다.
"나라에는 하루라도 임금이 없어서는 아니 되오.
청컨대 태자께서는 제위에 나가시어 한의 대통을 이으셔야 할 것입니다."
공명이 그렇게 말하고 곧 태자 유선을 세워 제위에 오르게 했다.
이때 태자 유선의 나이 열일곱이었다.
촉한의 후주가 된 유선은 연호를 건흥으로 고치고,
제갈량으로 하여금 무향후 익주목을 겸하게 했다.
이어 선주를 혜릉에 장사지내고 소열 황제라는 시호를 바쳤다.
또 황후 오씨는 황태후로 올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감 부인에게도 소열 황후라는 시호를 바쳤으며
미 부인에게도 황후의 칭호를 더하게 했다.
이어 거느리게 될 모든 신하들의 벼슬을 높이고 상을 내렸으며 대사령을 내려 많은 죄수들을 옥에서 내보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