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초대석(박완호 시인)
삶의 허무함을 이겨내는, 의미를 향한 마음가짐
『나무의 발성법』 출간한 박완호 시인
-본인 소개 부탁합니다.
저는 1991년 『동서문학』을 통해 등단하여, 지난 35년간 『나무의 발성법』,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물의 낯에 지문을 새기다』 등 아홉 권의 신작 시집을 내며 꾸준히 시를 써오고 있는 박완호 시인입니다. 김춘수시문학상(2011)을 포함하여 몇몇 문학상을 받은 바 있고요. 1992년부터 경기도 성남시의 풍생고등학교에서 국어과 교사로 34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쳐 왔으며, 올해를 마지막으로 오랜 교직 생활을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시집 『나무의 발성법』을 소개하면?
제가 펴낸 아홉 권의 시집은 조금씩 차이를 보이기는 해도, 전체적으로는 제가 오래 추구해 온 주제 의식이라고 할 만한 ‘개인·가족사적 아픔과 상처를 형상화한 시,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를 담은 시, 시인으로서의 자아 성찰 및 시 쓰기의 의미를 다룬 시,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바람직한 삶에 대한 고민을 다룬 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무의 발성법』은 거기에 인간 존재가 겪는 삶의 허무감과 어떻게든 의미 있는 순간에 서 있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더해졌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시집을 내게 된 동기와 에피소드
저는 등단한 지 8년이 지나서야 첫 시집 『내 안의 흔들림』(1999)을 출간했고, 두 번째 시집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2003)를 낸 이후로는 활발한 작품 활동을 바탕으로 3, 4년 간격으로 신작 시집을 묶어 왔습니다. 지난 4월에 나온 『나무의 발성법』은 2022년 여덟 번째 시집 『문득 세상 전부가 되는 누군가처럼』을 출간한 후 3년 만에 선보인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오랜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며 엮은 시집이라는 작은 의미를 더해 보았습니다.
-이번 시집을 읽으실 분들께 팁이 있다면?
한 편의 시에는 시인이 지나온 삶의 궤적과 그 속에서 느끼는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의 떨림, 어제와 오늘내일을 아우르는 꿈과 상상 등이 유기적으로 뒤섞여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것들은 시를 읽는 독자가 겪어온 삶에 깃든 크고 작은 자국들과 마주쳐 반짝이는 울림으로 태어나겠지요. 저는 그것을 ‘나’의 흔들림과 수많은 ‘너’의 흔들림이 만나서 빚어내는 화음이라 부르는데요. 제 시에 담긴 상처와 그리움이 만들어 내는 흔들림이 저의 시를 읽는 분들의 흔들림과 만나 뜻깊은 울림을 선사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평소 시에 대한 생각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할 때부터 저는 시 쓰기를 통해 모성이 지워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를 만나는 꿈을 꾸었고, 시인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시의 언어를 바탕으로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이면에 깃든 의미와 부조리를 깨닫는 한편, 저 너머의 세상을 꿈꾸며 그곳을 향해 나아가려는 마음가짐이 점점 커지고 깊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가 쓰고자 하는 시의 의미이자 시인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애착이 가는 시 한 편 소개
시의 완성도나 독자들의 관심과는 별개로 저는 개인사적 상처에서 비롯되는 아픔과 그리움을 형상화한 작품에 조금 더 마음이 기우는 것 같습니다. 이번 시집에도 그런 작품이 여러 편 실려 있는데요. 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시 한 편을 골라 소개한다면, 지금의 저보다 스무 살 가까이 적은 마흔셋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담아 쓴 시 가운데 하나인, 『나무의 발성법』 중 「훗날의 꿈」(56쪽)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훗날의 꿈
지나간 훗날을 더는 꿈꾸지 않으리
한 손가락 굽은 여자의
하나뿐인 아들로 태어나지 않으리
그녀의 순한 눈망을을 닮거나
숱 많은 머리카락을 물려받지 않으리
오월 햇살같이 다사로운,
엄마라는 발음의
나보다 어려지는 한 사람을 품지 않으리
슬픔의,
아무 데서나 엇갈리는 걸음을 재촉하거나
꿈꾸지 못하는 밤을 책처럼 쌓아두지 않으리
문밖 살구나무 아래를 서성이는
자국 없는 발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리
제대로 늙어보지도 못한 아버지
깜깜한 물소리 끼고 산등성이로 향하는
마지막 걸음을 그대로 두지 않으리
서러운 꿈의 궤적을 비껴가는
어떤 내일도 돌이키지 않으리
-앞으로의 계획
등단한 지 어느덧 3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아홉 권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시집을 엮으며 나름대로는 시 쓰기에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로지 시를 쓰고 책을 읽어가며 살아온 시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올해로 34년째 이어온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나면, 그동안 가보지 못한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걸어봐야겠다는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생각을 십여 년 정도에 걸쳐 몸으로 실천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글을 읽고 시를 쓰는 일만 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려면 당연히 연금 생활자의 가난한 삶을 감수해야만 하겠지만요.
-뷰티라이프 독자들께 한 말씀
〈뷰티라이프〉의 창간 기념을 축하하는 덕담을 싣는 등 그동안 여러 차례 이곳의 독자들과 즐거운 만남을 가진 적 있습니다. 이번에 이렇듯 뜻깊은 자리를 만들어 주신 덕분에 〈뷰티라이프〉 독자분들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좋은 지면을 배려해 주신 편집자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세계와 사물에 깃든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언어로 담아내는 일이기도 한 ‘시’를 쓰는 사람으로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분들의 멋진 마당인 ‘뷰티라이프’의 발전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이번 만남을 계기로 이곳의 독자들이 저의 시에 관심을 가지고 행복한 마음으로 읽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뷰티라이프> 2025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