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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난 중에 만날 큰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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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해 자료실 스크랩 다시 보는 고린도전서 22 / 고린도전서 8:1-9 / 2015.09.30 - 박영선 목사
수호천사 추천 0 조회 40 18.05.02 17: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시 보는 고린도전서 22/ 고린도전서 8:1-9 / 2015.09.30/ http://lamp.kr/lamp-sermon/?p=10111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4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우상 제물 먹는 문제에서는 고대사회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육류가 국가신에게 바쳐지고 그후에 시장에 나왔기 때문에, 바벨로 포로때 다니엘과 세 친구가 `우리는 고기 안먹겠다` 했던 것이
채식주의자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육류가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므로 우상을 섬길 수 없다라는 의미의 선언이었습니다.

똑같이 로마시대에도 육류는 국가신에게 바쳐지고 시장에 나왔기 때문에 먹어도 되는가 마는가 하는 문제가 당연히 대두됐죠.
생각없이 사먹기도 했고 이제 예수믿고 나니까 이건 우상제물인데 먹을 수 없다는 논의가 나왔죠.
그런데 이제 좀더 깊은 신앙의 경지에 간 분들이 `우상은 원래 없는 것 아니냐, 아무것도 아닌 것에 바쳐진 것이지, 뭐 대수냐?`라는 여기서 말하는 지식의 자리에 간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하여 지식과 사랑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신앙에서는 더 나아가야되고 누려야되는 책임이며 권리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 지식을 갖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사람들이 양보하는 것으로 사랑이 드러나야 된다라고 얘기를 함으로써,
그 양보한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상대방을 위해서 이 지식에까지 못 온자들을 위해서 내가 나를 낮추어야 되는 문제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앞에 있었던 자, 쳐녀총각들 시집장가 가지 마라에서부터 드러난 요구하는 교훈들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7장,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26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32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33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34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

이런 표현의 문제는 `독신이 낫다, 결혼을 하는 것은 최선의 책이 아니고 차선 책이다` 라고 들립니다.
그러나 25절에 본바와 같이 이것은 사도바울의 사견입니다. 
여기서 사도바울의 사견이라는 것은 이것은 성령이 주신 말씀이 아니고 바울이 자기의 주장을 얘기 한거다, 그런 쪽의 얘기가 아니고,
혼자 살아 본 쪽에서의 얘기입니다.
내가 주를 위하여 독신으로 올인을 하자, 이것도 참 좋더라,, 그래서 이제 제가 붙이는 겁니다.
`나는 아내에게 묶여보니까 그것도 참 좋더라` ,, 이게 그 얘기인데요. 뭐,
`쳐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입니다.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입니다.
나는 묶여있는 자로써 내 의견을 말하면, 묶여있는 게 참 좋습니다.
이 문제를 이제와서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로 연결하여 그 깊은 뜻을 밝히는 거죠.
`네가 지식에 있어 자유를 누리는 것 좋다. 그것 굉장한 거다. 우상은 없는거다. 그렇다, 하나님이 온천하에 일한 주인이시고 마음껏 그의 통치와  그의 자녀된 권리와 명예를 누리는 그것 마음껏 해라. 그러나 한번 더 생각해서 네 자신의 자유를 양보하여 네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도 한번 생각해 봐라!`
그 앞에서의 얘기와 맥을 잇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 살아서 다른 세상적인 일에 붙잡히지 않고 오직 하나님믜 일에만 모든 것을 전력투구할 수 있는 그것 굉장한 일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묶어두시는 것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쓰십니다.
이것을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이해할 문제가 아니라, 8장에 이르면 이쪽이 더 큰것이 됩니다.
혼자 살면 쉽습니다.
혼자 책임지면 되는데, 둘이 살면, 짐이 나누어지지 않고 아내도 두배 남편도 두배의 힘이 듭니다.
혼자 살면 한배, 둘이 살면 네배,, 나의 두배에 그치지 않고 아내의 두배에 그치지 않고, 아내의 두배를 고스란히 다시 받고 잘 때마다 두배를 받고, 아내도 매일 남편에 의해서 자기것 두배의 두배를 받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그 불편함과 긴장과 밥먹다 말고 일어서는 것과,, 왈가닥 왈가닥 그릇 깨지는 소리를 서로 들어면서 묘한 어려움들을 겪어야되는 겁니다. 그게 여기서 말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이 <사랑>은 보기보다 굉장한 것이라서, 예를 들면 로마서 15장에 가면 이렇게 되어있죠.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같이 오라고 합니다. `혼자 오지마라,,` 같이 오라고 합니다.
나이가 들어보면 최고의 소원이 자식 잘 되는 겁니다.
난 살았으니까, 난 사라질 것이니까,, 이렇게 간단한 게 아니라, 이상한 하나님의 일하시는 묶음,,
우리가 누구를 닮았다그래도 불평이지만, 아들이 아버지를 닮아서 훌륭하다라고 칭찬을 받으면 그 이상의 칭찬은 없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간 칭찬은 `아버지보다 낫다` 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된 마음은 자기도 모르게 이 자리까지 옵니다.
나보다 더 나은,, 그러기 위해서 내가 손해를 보아도 좋은,, 부모와 자식 간에서만 만들어지는,, 부모만이 가지는 마음이죠!
그건 대단히 황홀한 경지입니다!
결혼생활도 결국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일을 훈련받습니다.
아내가 불편한데도 고짐을 부릴 남편이 없고, 남편의 이름에 묶이지 않을 아내도 없습니다.
아무리 아무리해도 누구의 아내라는 이름을 벗어나는 칭찬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혹 실수하는 칭찬 중에 하나가 `왜 결혼했어?` 이렇게 말하는 건 정말 바보만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결혼하지말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묶이지말고 지금 혼자 있었으면 지금 위대하게 되었을텐데,, ` 이마 이런 표현이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의 부인이면서도 훌륭해 지다니,,!` 이런 말이 전제되어야 되는 겁니다.
`누구의 아내면서 주를 전부 남편에게 맡기고 언제나 부로 있어야되면서도 그만큼,,!`  이게 위대하죠!
우리에게 <사랑>을 그렇게 요구합니다.
내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여 누구 뒤에가서 숨는 것,, 누구 옆에 가서 서는 것,, 그게 믿음이 강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혼자 있는 게 좋으냐, 결혼하는 게 더 나으냐?` 하는 문제로부터 이어나오고 있는,, 아니, 고린도교회 전체에게 주는 교훈, 
`처음부터 너희 분파가 생긴 이유를 봐라! 자기 증명을 위하여 공동체를 깼다! 자기증명을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기꺼이 너희 그 중의 하나가 되라!`
합창할 때 제일 중요한 것! 목소리가 튀면 안되는 것! 그죠?
표정도 튀면 안됩니다!
너무 나서시면 안됩니다!
많은 수가 모였는데 모두 목소리를 낮추어서, 많은 목소리인데 크지 않아야되는 것! 이게 합창에서 제일 중요하고 높은 경지 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전부 그렇게 되어야하는 겁니다!
누구의 목소리도 크지않고 모두의 소리에 녹아들어 전체의 수준을 만들어내는,,! 결집된 단단함! 그 깊이가 뒤에 밑에 밑에 숨은,,!
바치는 사람의 깊이가 깊은,, 그것이 어느 교회든 그 교회가 갖는 가장 중요한 자랑이어야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를 빌립보서 1장에 가시면 사도바울이 이런 식으로 주장을 합니다. 같은 저자니까,
고린도교회에도 편지를 보내고 빌립보에도 보낸 편지에 의한, 옥에 갖힌 바울이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이 감옥에 갖히면 빨리 죽는게 제일 편한 거예요.
그런데 그냥 안 죽고 있겠다는 뜻입니다. 고단한 삶을 살겠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너희의 유익을 위하여!
어떤 유익? 하나님의 일하심이 감추어지고 약한 것같고 지는 것같고, 절망 같은 것으로 일을 한다는 것을 내가 보여 너희로하여금 내 위에서, 
내가 맨 밑에 있을테니까, 내 위에서 조금 나아지기를 바래서 내가 더 살겠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사회와 이 시대 속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우리가 소원하는 것과 다른 현실들에 대하여 반응하는 일에 어떤 과도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되고, 이렇게 하면 될 것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
잘못을 지적하고 비난하고 정죄하여 제거하면 답이 나올 것같은데, 그렇게 안되는 것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시대에 있습니다!
잘못을 안하면 옳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안하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방법이 아니라,
옳은 것을 하는 열심과 의지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본인이 뛰어드셔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정과 정죄에는 본인이 아니면 그만이지만, 여러분이 위대하다고 믿고 소원하는 것을 할려면 여러분이 하지않고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 산이 높다 낮다가 아니라, 저 산을 올라가야 됩니다!
올라가다 떨어진 사람 수를 세지 마시고, 올라가셔야 되는 겁니다.
한국사회적인 문제이고, 역사적 하나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시민정신, 시민책임을 배워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시간이 걸립니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몫이 교회이죠!
교회야말로 옳은 일을 위하여 절제하고 감수하고 헌신하고 그리고 모든 것을 내어놓는 유일한 모임입니다!
개인의 이해타산이나 자기자랑을 위하여 존재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복을, 명예를, 영광을, 자랑을, 승리를, 가치를, 기회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고함질러서 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여야 됩니다! 하셔야 됩니다!
<사랑>은 하는 사람 것입니다!
<사랑>은 받는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그걸 하셔야죠!
지식이 아니라, 사랑!
무엇이 아닌 것이 아니라, 무엇이 긴(맞는) 것!
여러분이 하셔서, 여러분의 표정에 만드십시요! 여러번 말했죠. 여러분 표정에 만드십시요!
말에 만드십시요!
사람은 희얀해서 그 찾잔을 잡는 손끝에도 그 사람의 실력이 묻어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상하죠! 저 사람이 지나가는데, 이렇게 눈빛, 턱의 각도, 눈의 크기, 시선의 교차, 머리카락의 고집,, 이런 것들이 다 녹아들어서
희얀한 냄새가 사악~ 피부에 닿는 겁니다! (모르시는구나,, 모르면 얘기하나마나 입니다,,)
시편 90편 모세의 시를 보십시다. 모세의 기도의 위대함은 인간이 얼마나 못났는가를 쭈욱 나열하고 있습니다!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120살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 아마 118세쯤에 지은 걸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쯤 살았으면 뭘 알았을까요? 인간이 얼마나 못났는지를 아는 거죠! 자기를 포함하여 입니다! 자기를 포함하여,,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 출애굽하고 만나와 메추라기와 불기둥 구름기둥 속에서 40년 광야를 뺑뺑 돌죠.
왜요?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정복하기로 정탐꾼 보내고 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원망하고 그래서 40년간 광야생활, 방랑생활 하다가 죽어가죠! 
거기 같이 살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배우는 겁니다! 인간이 얼마나 못났는가,,!
돌이켜보니 잘한 생각은 없고, 잘못한 생각만 충만한 것이죠!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하나님을 소원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치를 모르고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이게 무슨 폭력적이고 보복과 벌에 의해서만 아니고. 하나님 없이 살면, 불순종하고 살면, 모든 날이 원망과 분노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면 생각 안하는 시간뿐일 수 밖에 없습니다!
가치있는 시간이 없죠!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돌연히 마지막이 그 앞과 연속이 되지 않게!

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16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앞에는 절망과 한탄 뿐이었고, 뒤에는 갑자기 `하나님 복을 주시옵소서` 입니다.
시편 103편에 고백된 시편의 증언같이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행한대로 갚지 마옵소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갚으시옵소서!`
여러분의 생애와 신앙생활을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여러분 자신에게 적용하기가 쉽지 않거든,
여러분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에게 먼저 적용하십시요!
 `하나님 저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저사람이 행한대로 같지 마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되고 당연히 그렇게 하면 그를 원망할 수 없습니다! 저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원망에 붙들려있지 않고 사랑에 붙들려 있어야 된다. 그게 명예다! 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거기가 우리 각 개인이 목적하고 노력해야 될 그 본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긴 시간들, 기회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진정한 결론들입니다! 그걸 하십시요!
손해 보실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면 참으로 놀라운 구절이 하나 있는데. 1절 다시 보시면,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안다고요?
안다고 그러면 모르는 거랍니다. 그러면 모른다고 그러면 정말 모르는 거죠.
뭘 모른다는 것일까요? 뭘? 
 `네가 사랑하지 않으면 무얼 안다 그래도 그건 아는 것이 아니다` 그럽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무얼 알아도 아는 것이 아니다!` 입니다.
그 문제는 갈라디아스 6장에 이렇게 중요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문구가 나오는데,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여기 나오죠,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무슨 짐?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는 짐을 지는 것! 그게 진정한 자기자랑 이랍니다!!
누구를 정죄해서 자랑하는 것은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거, 사랑할 수 없습니다사랑하십시요! 그 짐을 지십시요!
그래야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니 사랑하십시요!
웃으십시요!
사랑을 강제하려고 그러지 마십시요! 내 마음에 들라 고 그러지 마십시요!

우리가 몇 십년간 남성성가대도 용서했는데, 무슨 일인들 용서 못하겠습니까?
그래 갖고 이런 경지까지 왔는데요. 이제는 우리도 저 중에 하나가 되고 싶습니다! 그죠?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남성성가대를 했을텐데,,` 이런 고백이 나올 법도 되었습니다. 
교회의 자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이 가지는 위애함은 여러분들이 아는 어떤 법, 도덕, 유익, 자랑, 힘,, 보다 큽니다!
그것은 우리를 살찌게 하며, 빛나게 하며 반가워하게 하며 기쁘게 합니다!
살 힘이 나고 내가 가치있어 집니다!! 내가 가치있어진다고요!
그런 인생을 사시는 여러분들의 신앙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압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리고 부활하사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그 위대하고 영광된 길을 걷는 우리와 우리 인생되게 하시고, 한국사회와 교회 앞에,
우리 후손들 앞에 그 영광 보여주는 우리 책임과 자랑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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