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으로부터의 자유
정부가 ‘국격’까지 들먹이며 거창하게 자랑하고 홍보하던 핵안보정상회의가 별 영양가 없는 '말의 성찬'으로 막을 내렸다. 개인이든 여럿이든 좋은 말은 언제 어디서든 ‘푸짐하게’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선택은 귀하고 그에 따른 실천은 더 어렵다. 넘쳐나는 핵무기와 핵물질이 못내 불안하여 50개국이 넘는 정상들이 한데 모여 머리를 맞대봤지만 뾰족한 수조차 내지 못하고 하나마나한 말잔치만 하다 갔다. 성과는 미미했고 비용만 ‘거창하게’ 들었다. (이틀 동안에 적어도 1천억 원이 넘는, ‘국민의 피 같은 세금’이 경비로 들어갔을 것이다).
스스로 만든 것과 싸워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핵을 만든 것도 사람이고 핵으로부터 고통당하는 것도 사람이다. 사람은 애초에 핵을 다룰 지혜도 없으면서 핵무기를 만들었고 핵을 통제할 기술도 없으면서 핵발전을 시도했다. 그것이 전지구적 재앙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핵을 쥐고 있는 강대국조차 그래서 핵이 두려운 것이다. 핵이 두려워 ‘안보회의’까지 한다. 물론 핵 테러를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그들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그들 나라가 쥐고 있는 그 많은 핵무기들이다. 그리고 세계에 400기가 넘게 지어져 있는 핵발전소다. 핵발전소는 테러의 표적이 되거나 사고가 나면 핵폭탄이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핵발전소는 바닷물을 데우는 거대한 기계다. 데워진 물은 초당 수만 톤씩 대양으로 유입된다. 그것은 해류와 대기의 흐름을 변화시켜 기상이변을 일으키게 하고 해수면의 이산화탄소 흡수율을 낮추어 지구온난화를 가속화시킨다. 아무리 봐도 핵이야말로 인류 최대의 적인 것 같다.
그런데도 ‘핵을 버리자’는 말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핵산업’이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기 때문이다. 고농축 우라늄을 저농축으로 바꾸어 ‘평화적으로 이용하자’는 그들의 말은 곧 그들의 이익의 원천, 즉 핵발전을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뿐 아니다. 군사적 우위와 체제 방어를 위해 핵무기를 가지려는 나라들의 끈질긴 도전도 국제사회의 골칫덩이다.
핵은 애초에 의심과 불안에서 생겨났다. 히틀러가 과학자들을 불러 모아 핵무기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에서부터 미국의 ‘맨허튼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이 나치 독일보다 먼저 핵무기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러니까 핵이 처음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은 의심과 불안에서 나온 전쟁 억제용, 혹은 방어용이었다. 그것을 만든 과학자들도 그런 줄 알았다 한다. 그러나 미국은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공격용으로, 인간 살상용으로 일본 땅에 투하했다.
여전히 어떤 전쟁광은 말한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핵무기는 필요하다고. 또 어떤 전쟁광은 말한다. 미래의 평화를 위해서는 ‘예방전쟁’을 해야 한다고. 어떤 독재자는 말한다. 체제유지를 위해서 핵을 꼭 가져야겠다고. 어떤 ‘경제광’은 말한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을 보면서도 핵산업을 확대하고 핵발전소를 더 지어야 한다고. 전쟁광과 독재자의 말은 어떤 두려움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라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로지 ‘이익과 손해’라는 잣대로밖에 볼 줄 모르는 ‘경제광’의 말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조차 유전자에 내장되어 있지 않은, 생명이 얼어붙은 냉혈한처럼 느껴져 더 섬뜩하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이 있다.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먹구름이 영혼을 가리면 우리 안의 관용과 우정과 사랑의 빛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그래서 불안은 의심과 경쟁을 낳고 두려움은 공격과 파괴를 불러온다. 그런 황폐한 터전위에서 탐욕과 이기심이라는 독초가 자란다.
오늘날 먹어도 먹어도 만족을 모르는 저 자본권력들의 멈출 줄 모르는 아귀같은 탐욕과 횡포는 다름 아닌 불안과 두려움에 갉아먹히고 경쟁과 이기심에 물들어버린 인간집단의 병든 영혼들이 자초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만든 핵이 이제는 사람을 볼모로 잡고 시시각각 파멸 쪽으로 내달리고 있는 이 위태로운 현실 또한 인류사회의 영적 빈곤이 불러들인 재앙인지도 모른다.
의심과 불안, 경쟁과 이기심은 비단 국가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세상 도처에 만연해 있다. 그것이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인이 아닐까 싶을 만큼 그 부정적인 기운들이 우리네 일상에 깊이 침윤되어 있음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 언젠가 지인과 대화를 나누다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나라가 더 이상 핵발전소를 짓지 않는다고 해도 소용없어. 중국에서 지금 원전을 많이 짓고 있는데, 혹시 만에 하나 중국에서 사고라도 나면 그 방사능은 고스란히 우리나라까지 오게 되어 있잖아. 그러니 우리만 핵발전소 안 짓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란 말야.”
그의 말인즉슨, 그러니까 우리나라도 핵발전을 계속해야 한다, 핵발전소 안하다가 우리만 그런 피해를 덮어쓴다는 것은 너무 손해다, 라는 말이었다. 그와 비슷한 말을 또 들었다. 두어 달 전 영덕에 갔다가 어떤 이와 우연히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는 20년째 영덕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 했다. ‘신규핵발전소가 영덕에 온다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나의 물음에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웃인 울진에 이미 원전이 있는데, 만약 거기에서 사고 나면 영덕도 고스란히 피해를 봅니다. 그러니 영덕에 새로 지어도 별로 달라질 게 없습니다. 울진에 있으나 영덕에 있으나 사고 나면 우린 다 죽습니다. 안 짓고 당하기보다는 여기에다 짓고 그 많은 지원금 타 먹는 게 훨씬 이익 아닌가요? 이곳에 핵발전소 짓는 걸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보입니다. 왜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려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랬다. 현실은 그랬다. ‘나부터 안 하겠다’가 아니라 ‘너도 하는데 나도 하자’였다. ‘너도 하는데 내가 안하면 나만 손해’라는 것이었다. 다들 ‘이익’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경제 우상'에 소속된 노예 같았다. 정작 기가 막힌 것은 그들의 말이 아니라 그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용되고 있는 지금 이곳 ‘우리 사회’라는 곳이었다. 정작 무서운 것은 핵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이성마저 마비시켜버린 그 두터운 '이기심'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라는 공동체, 생명공동체이며 정신공동체이며 운명공동체인 ‘우리’가 이미 대부분 그것들로 뒤덮혀 있다는 것이었다.
핵으로부터의 자유? 핵공포로부터의 해방? 그것은 너무나 요원해 보인다. 국가의 경계까지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저 무소불위의 '경제광'들 때문만이 아니다. 자유시장, 자유경쟁이라는 '기름진 토양'에서 탐욕과 이기심이라는 독초를 먹고 지금도 저 핵이라는 괴물은 세상 곳곳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으니 말이다.
첫댓글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알렸어도
그들은 먹고 마시며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인리히 법칙이 생각나는 군요. 하나의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29건의 작은 사고가 발생하고, 300건으 징후가 일어난다는 이론입니다. 지금 우리사회의 수많은 병폐들이 언젠가는 큰 사고(재앙)으로 이어질 날이 올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