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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묵을 채로 썰고, 김치를 얹고 멸치 육수를 부어 김과 깨를 송송 뿌려낸 도토리묵밥. 여름철 더위에 지쳐 입맛 없을 때 별식으로도 즐기지만, 계절에 상관없이 많이 먹는 음식이다. 예전엔 가을이 지나야 도토리로 묵을 만들 수 있고, 김장 김치가 있어야 제 맛이 나기 때문에 가을과 겨울에 많이 즐겼다.
옛 것에 대한 향수와 다이어트 식품이라는 인식으로 묵이 인기를 얻고 있다. 예전에는 도토리묵이 구황식(救荒食)이었다. 「옹희잡지」에 따르면 흉년에 산 속 유민들이 도토리를 가루 내어 맑게 걸러내고 이것을 쑤어서 청포처럼 묵을 만드는 데 자색을 띠고 맛도 담담하지만 능히 배고픔을 달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묵에는 청포·메밀·도토리묵이 있다. 녹두로 만드는 청포묵은 탕평채에 쓰이는 묵으로 고급에 속했다. 가장 흔한 것이 도토리묵. 도토리는 비상 식량으로 저장해두기에 좋았고, 묵으로 쑤어 먹는 게 보통이었다.
묵은 향이 강하고 떫은 맛이 진짜라는 속설이 있다.
도토리에 들어있는 탄닌 성분 때문이다. 탄닌은 적당하게 섭취하면 몸 속 중금속을 배출시키고 설사를 멈추게 하지만, 과도하면 변비를 유발한다. 묵 만들 때 탄닌 성분을 제거하려면 물 속에 도토리를 오랜 시간 담가 두고 물을 갈아주면 된다. 이 과정을 반복할수록 떫은 맛이 약해지며 순수한 전분만이 남는다. 하지만 집에서 만들면 이런 번거로운 과정 때문에 거친 가루만 제거하게 되는데, 과거에 먹었던 강한 맛 때문에 '떫은 맛'이 나는 묵이 진짜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도토리묵 100g을 기준으로 열량은 40kcal에 불과하다. 탄수화물(2%), 단백질(2%), 칼슘(1%) 등이 함유돼 있으며, 지방은 0.1% 정도로 거의 없다. 열량이 적은 대신 포만감을 주기 때문에 먹고 돌아서면 쉬이 배고파지지 않는 다이어트 음식 중 하나. 그래서 도토리 가루에 밀가루를 섞어 국수, 빵, 과자 등을 만들면 좋은 다이어트식이 된다.
도토리에 함유돼 있는 아콘산(acomicacid)은 몸 속 중금속이나 여러 유해 물질을 흡수, 배출시키는 작용이 탁월하다. 도토리는 피로 회복과 숙취에 좋고, 입맛도 돋워준다.
묵은 10% 탄수화물과 90% 물로 이뤄져 수분 함량이 높다. 메밀은 루틴이라는 모세혈관의 투과성을 억제해 약해지는 것을 방지,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해준다. 그렇다 하더라도 도토리묵과 감은 궁합이 안 맞는 음식이다. 감이나 곶감에 떫은 맛을 못 느끼게 하는 불용성 탄닌이 있어서다.
이보순 우석대 외식산업조리학과 교수는 "탄닌이 많은 식품을 곁들여 먹으면 변비가 심해지며, 적혈구를 만드는 철분이 탄닌과 결합해서 빈혈이 나타나기 쉽다"고 설명했다.
묵은 먹을 만큼만 집에서 만들거나 구입하는 게 가장 좋다. 쓰고 남은 것은 랩에 싸서 냉장보관 해 끓는 물에 1~2분 정도 데치면 탄력이나 투명한 빛깔이 살아난다. 이 교수는 "떫은 맛을 없애려면 물에 담가두거나 조리할 때 식초를 넣으면 떫은 맛이 줄어든다"고도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