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좌표 순교자 봉분 앞 북위 33 29′18″ 동경 126 33′34″ ■ 문 의 처 중앙 성당 (064) 753-2271 ■ 찾아가는 길 제주 시청에서 서귀포 방면으로 2㎞쯤 가면 네거리가 된다. 여기서 아라 중학교 쪽으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대화 여객이 있고 다시 우회전하여 1㎞쯤 가면 첮번째 안내 푯말이 나온다. 여기서 1㎞쯤 더 들어가야 황사평 묘에 이른다.
황사평 묘역은 신축교안시에 희생된 순교자들이 묻혀 있으며,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공동 안장지로 사용되고 있는 천주교 성지이다.
제주도에 처음으로 복음이 전래된 것은 1898년 도민의 주체적 노력의 결과였다. 그 후 1899년 파리 외방 전교회원과 한국인 각 1명의 성직자가 파견되어 사목활동을 시작함으로써 제주 천주교회는 공식적으로 설립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01년, 신축교안(辛丑敎案)이라는 뜻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 불행한 사건의 원인은 단적으로 지적할 수 없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얽혀 있었다. 왕실 내장원으로부터 파견되어 온 봉세관의 과다한 조세징수로 도민들의 원성이 심해 갔으며, 봉세관의 마름으로 이용된 일부 신도들이 주민들의 오해를 받을 행동을 했다는 점도 지적할 수가 있다. 그리고 무당들의 굿으로 인한 도민들의 정신적, 경제적 피해와 축첩 등 비윤리적 풍습에 강력히 반대하는 교회에 대하여 토착 세력의 기득권 수호를 둘러싼 갈등도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원인으로 일어선 민군들은 봉세관에 대한 항의, 부당한 조세 징수와 수탈의 시정을 요구하며 제주성으로 진입하였다.
사건이 일어나자 봉세관은 도피해 버렸고, 민군들은 공격의 대상을 교회측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700여명의 교인들과 양민들이 관덕정등지에서 피살되었다.
사태가 진정되면서 시신들은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버려지듯 묻혔다. 교안의 수습에 나선 불란서 공사는 조선조정에 편지를 보내어 공동안장지에 해한 조속한 해결을 요청하였다. 1903년 제주목사 홍종우와 구마실 신부와의 접촉으로 블란서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이 원만히 이루어져, 동년(광무 7년) 4월에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게 되었다. 당시 별도봉 밑에 묻혔던 희생자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미 이장해 간 상태였고 무연고 시신들만 이곳에 이장하였는데, 26기의 분묘에 28구였다.
황사평은 약 18,000평으로, 1984년에 공원묘지로 조성하면서 울타리 석축 공사, 성상 건립, 순교자들의 묘를 평장하여 이장하는 공사 등을 진행했다. 그 후 제주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재차 단장을 하고, 1995년에 신 아우구스티노(재준), 김 토마(영만), 양 윤경 등 당시 순교자 28기를 합장하였다. 그리고 현 하롤드 대주교를 포함한 성직자들의 분묘를 이장 축복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 경남 통영에서 순교한 김기랑(펠릭스베드로)의 순교비를 이곳에 건립하였다. 우리는 이 성지를 참배하며 신앙 선조들의 굳센 믿음의 정신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 김기량 순교비 황사평 순교자 묘역 내부의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김기량(펠릭스베드로)은 이 고장 출신으로 처음 영세 입교한 분이다. 제주도에 사제가 입도하여 공식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기 43년 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는 이 땅에 신앙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열성으로 힘쓰다가 마침내 장엄한 순교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 드렸다.
함덕리 출신으로 무역업을 하던 김기량은 1857년, 서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중국 광동해역까지 표류하다가 영국배에 구조된다. 홍콩으로 간 그는 이 곳에 와 있던 페낭(Penang) 신학교 조선인 신학생의 가르침으로 영세 입교한다. 1858년에 귀국한 그는 서울에서 페롱(Feron) 권 신부와 최양업(토마스) 신부를 만나 교회 서적을 얻고 제주도에 돌아온다. 고향에 온 그는 구원의 진리를 전파하는 데 힘씀으로써 40여명을 입교케 하였다.
김기량은 이 신자들을 보살펴 줄 신부를 파견해 주도록 베르뇌(Berneux) 장 주교에게 용청하여 승인을 받는다. 그러나 1866년 병인박해로 말미암아 이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박해가 한창 진행 중일 때 그는 새로 신앙을 받아들인 이들을 영세시키기 위하여 육지부로 나가다가 통영 앞바다에서 관헌에게 체포된다. 모진 고문에 이어 가슴에 대못을 박는 처형으로 목숨이 끊어지기까지 떳떳이 하느님을 증거하면서 마침내 장렬한 순교로 하느님 품에 안겼다.
김기량은 목숨을 바쳐 주님을 증거하는 모범을 보여 준 우리 신앙의 선조이다. 그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길이 믿음의 빛을 밝히며, 이 고장에 구원의 길을 확장해 가는 등불이 될 것이다. † 외국인 선교 사제 공덕비 황사평 순교자 묘역 왼쪽에 조성된 성직자 묘역에 세워져 있다.
1899년에 공식 설립된 제주교회는 초창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외국인 선교 사제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터전이 잡혀갔다. 이역 만리 먼 땅인 제주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데 큰 몫을 담당했던 것은 파리 외방전교회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성직자들이었다. 지난 100여년 동안 제주도에는 55명의 외국인 사제들이 사목활동을 했고 기금도 활동 중이다. 그중 이미 선종한 16명의 명단이 공덕비에 새겨져 있다. † 헨리 대주교 묘소 황사평 순교자 묘역의 왼쪽에 조성된 성직자 묘역에 있다.
헨리(H.W.Henry, 玄海) 하롤드 대주교는 미국 태생으로 한국에 입국한 후 광주대교구장으로 사목하다가 제주교회가 "제주 지목구"로 설정되면서 지목구장으로 착좌하였다. 대교구장에서 지목구장으로 이동된 것은 사회적으로 보면 대단한 강등이라 하곘으나 헨리 대주교는 자원하여 이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제주 지목구장으로 사목하던 헨리 대주교는 1976년 선종하였다. † 라이언 신부 묘소 황사평 순교자 묘역의 왼쪽에 조성된 성직자 묘역에 있다.
라이언(T.D.Ryan, 나 토마스) 신부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1930년대에 제주도에 들어와 사목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서귀포 본당에서 주측 사목을 했으며 신성여중·고 이사장 대지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 김병준 신부 묘소 황사평 순교자 묘역의 왼쪽에 조성된 성직자 묘역에 있다.
김병준(요한) 신부는 1952년 목포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이어 제주에 들어와 사목활동을 하였다. 신성여고 교장으로 오래 봉직하였으며 동문천주교회 주임으로 사목하다가 2001년 선종하였다. † 임승필 신부 묘소 황사평 순교자 묘역의 왼쪽에 조성된 성직자 묘역에 있다.
임승필(요셉) 신부는 한림 태생이며 1979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어 오스트리아 및 로마 유학으로 성서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89년부터 주교회의 성서위원회에 근무하면서 성서 번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구약의 번역을 완성하고 신약을 번역을 진행하던 중 2003년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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