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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일(첫째주)
안성 서운산 산행
♣ 인천 힐링 산악회 ♣
산행지 : 안성 서운산 (547m)
위 치 : 경기 안성
산행일 : 2015년 11월 1일(첫째일요일)
산행회비 : 30,000원정
★ 출 발 :
간석오거리역9번출 : 06시10분
가좌홈풀앞 : 06시30분
가정공원앞 : 06시40분
연희우체국앞 : 06시50분
계산역3번출 : 07시
★ 정시 출발 시간엄수 ★
※ 11월 부터는 동절기 산행 기간으로 출발 시간을 30분
조정합니다. 가좌 홈풀기점 06시30분 출발
산우님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
단풍나무가 너무 아름다운 서운산
그림이 있는 카페 - 안성 서운산 여우가 말했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 저수지 풍경 (안성시 문화 관광싸이트에서 빌려온 사진)
천안에서 천안 인터체인지를 지나 안성 방향으로 약 20여분 정도를 자동차로 가다 보면 성거를
거쳐 입장면 소재지에 다다른다. 입장면을 지나게 되면서부터는 경기도 안성땅이 시작되는데,
입장면에서 충청북도 진천 백곡저수지 방향으로 약 7~8분 정도 자동차로 가다보면 도로 옆으로
청룡 저수지가 시원스럽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청룡 저수지 뚝방길을 따라 조금 가다보면
시내버스 종점인 안성시 서운면 청룡리 느티나무 정자가 나타난다
안성시 서운면 청룡사 시내 버스종점 느티나무 정자
이 곳이 바로 백 오십여년전 부터 안성 남사당패의 근거지가 있었던 서운산 청룡사가 자리 잡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우리나라 최초이면서 최후의 여자 사당패의 대빡격인 바우덕이가 머물고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우덕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백오십여년전인 1,800년대 중반, 다섯살 되던 해에 머슴이였던
아버지가 병으로 드러눕게 되자 어린딸을 더 이상 키울수 없어 남사당에게 맡기게 되었다는데,
그때 당시의 남사당이 겨울철에 머물고 있었던 곳이 바로 이 곳에 있는 청룡사였다고 한다
다섯살에 남사당을 따라 청룡사에 들어왔던 바우덕이는, 이 곳 청룡사에 머물면서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소리와 기예를 배우고 익혔다고 하는데, 그 솜씨가 남다르게 특출나서 열 다섯의
나이로 사당패의 대빡격인 꼭두쇠로 뽑혔다고 한다
그리고 그 미모도 아주 뛰어나서 남자들 사이에서는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데, 스무살이
되던해에 지병인 폐병으로 말미암아 남사당패에서 물러나지 않으년 안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때 이 부근의 불당골에 자리잡고 외로운 투병생활을 하던중, 스물 셋의 나이로 한 많았던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때 끝까지 그를 지켜 보았던 사람은 남사당에서 단 한 사람, 김경화라고 하는 사람이였다고
하는데, 아무도 돌보는 사람 없이 이 곳에 버려진 바우덕이를 동냥질을 하면서, 운명할때까지
병 수발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곳 느티나무 정자에서 직진으로 100여m 정도 들어가면 서운산 청룡사란 절이 나오고,
느티나무 정자에서 오른쪽으로 200여m 정도를 실개천 비포장 도로를 따라 들어가다 보면,
"여우가 말했다" 라는 노란색 지붕의 전원카페가 나타난다. 그리고 "여우가 말했다" 라는
노란색 지붕의 카페 그 맞은편쪽으로는 남사당의 여자 꼭두쇠였던 바우덕이의 사당이 보인다 안성 서운산 청룡사 부근의 "여우가 말했다" 라는 카페 앞 마당
이 곳은 서운산에서 마둔 저수지쪽으로 넘어가는 등산로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전원카페인데,
전에는 어느 여류화가가 운영했었던 카페이다. 지금 현재는 서울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하던
어느 부부가 인수받아 운영을 하고 있는데, 바우덕이의 사당은 이 곳 "여우가 말했다"라는 카페
에서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그림이 있는 카페, 안성 서운산 청룡사 부근의 "여우가 말했다"
내가 이 곳을 처음 방문 했을때가 2003년도 봄 무렵인가 했었는데, "여우가 말했다" 라는 곳을
작업장겸 카페로 사용하고 있던 어느 여류화가 선생이 최초의 주인이였었다. 그 여류화가 선생
이 더 이상 카페를 운영을 할 수 없다고 하자, 그때 이 곳을 자주 애용하던 단골 손님 부부에게
인계 시켰다는 것이다
지금 현재 이 곳을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는 부부는 친구를 만나러 우연히 이 곳에 들렸다가, 그
당시 이 곳의 주인이자 여류화가 였던 화가선생과 친분을 쌓았다고 하는데, 지금 현재 이 곳을
운영하고 있는 부부도 서울에서 미술학원을 운영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서로 같은일을 하는
사람들끼리는 친해지기도 훨씬 쉬웠었을 것이다
이 곳은 서운면 청룡리에서 석남사나 안성시 금광면 마둔 저수지로 넘어가는 등산로가 위치하고
있어서 등산객들도 자주 들락 거릴법한 곳이다
이 곳의 주 메뉴는 나물밥과 산채비빔밥 그리고 피자, 커피, 맥주, 위스키 등등이다
그림이 있는 카페, 안성 서운산 청룡사 부근의 "여우는 말했다"
안성 서운면 청룡사 버스종점 느티나무 정자에서 청룡사 부도탑을 지나고 실개천 비포장길을
따라 약 200여m 정도만 들어가면, 개천 바로옆으로 노란 지붕의 나즈막한 집 한채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어린왕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여우는 말했다"라는 전원 카페이다
바깥 벽을 한바퀴 벵 돌아가며 여기저기 군데군데, 작은별과 함께 어린 왕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것으로 보아, 이 카페를 처음 시작했던 당시의 여류화가는 생떽쥐뻬리의 어린왕자란 동화책
을 아주 좋아 했었던것 같았다. 그러고는 카페 이름을 "여우는 말했다"로 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개천 건너편으로는 지금으로터 150여년전, 안성 남사당의 여자 꼭두쇠였던 바우덕이
사당이 마주 보이는데, 남사당들이 일제시대까지 이 곳 청룡사에 몸을 의탁하여 살았던 흔적
이기도 하다
그림이 있는 전원카페, "여우는 말했다" 앞 마당 풍경인데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누가 봐도
어린왕자란 그림이란것을, 쉽게 알아 볼수 있도록 전면 벽에 큼지막하게 그려놓았다
그러기에 이곳은 "여우가 말했다"란 카페라는것을 단박에 알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카페 입구 가장자리 에서부터 전면 옆 뜰까지 꽃밭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카페
뒷쪽에는 밤 나무숲이 우거져 있었으며, 바람에 떨어진 밤텡이들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카페 입구에는 덩쿨이 담벽을 타고 지붕으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으며, 출입문 위쪽으로는
"여우가 말했다"란 글씨가 어느 초등학교 1~2학년쯤 되는 아이가 아무렇게나 낙서를 한듯이
쓰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쪽으로는 삐쩍마른 여우 한 마리가 어슬렁 거리는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이 곳은 "여우가 말했다" 카페의 옆 부분인데 꽃밭이 길게 조성되어 있었으며, 저 넓은 창 바로
옆쪽으로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어서, 바깥풍경과 청룡사 입구의 풍경을 쉽사리 조망할수가
있다
"여우가 말했다" 앞 마당에서 내려다 본 풍경인데, 저 개천 오른쪽 언덕으로는 안성 남사당의
여자 꼭두쇠였던 바우덕이 사당이 위치해 있고, 저 개천을 따라 쭈욱 내려가면 길 바로 옆으로
청룡사 부도탑이 보인다
그리고 그 부도탑 옆으로 보이는 넓은 마당은 청룡사 시내 버스종점이면서 이 마을 사람들의
쉼터인 거대한 느티나무 정자가 있는 곳이다. 그 곳에는 마을 할매들이 산에서 캐온 각종 산나물
과 집에서 직접 농사지은, 옥수수, 호박, 깻잎, 고구마같은 농작물들을 내다놓고 팔기도 한다
"여우가 말했다" 카페 아랫층 테이블에서 내다본 바깥 풍경인데, 창틀 위에는 작은 화분들이
앙징맞게 놓여져 있었으며, 창 밖으로는 말끔하게 정리된 꽃밭이 있었다. 그리고 저 창의 끝쪽
으로 보이는 곳은 청룡사 들어가는 입구의 느티나무 정자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은 "여우가 말했다" 카페 아래층 모습인데 이 곳 주인 되시는 분이 금방 다녀간 손님들의
식탁을 말끔하게 청소를 하고 있는 중이다
서울에서 미술학원만 오랫동안 하셨다던 분들이 이제는 손님도 제법 받을줄 알고 주문한 음식
들을 어색함없이 잘 가져 오기도 했었지만, 장사 하는 사람으로서는 조금 서투른감이 있는것
같았다
그래도 이 곳을 찾는 사람들은 서운산의 밋밋하고, 느릿하고, 후덕한 맛에 찾는것인데, 능숙하고
매끄러운 장사 보다는, 어딘가 어눌하고 후덕한 맛이 있는 장사가 좀더 정감이 가게 되는 것이다
카페 한 복판으로는 황토로 발라 만들은 벽난로가 세워져 있었으며 실내 천장에는 구불 구불
제멋대로 생긴 서까래들을 그대로 사용하여 마치 옛 고향집에 온것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리고 서까래에 매달린 백열등을 연결 시키는 전기줄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마치
박정희 대통령 당시의 어느 오지마을 국민학교 교실에 들어온듯한 묘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창문의 틀과 들어오는 입구의 대들보들도 규모는 작지만, 마치 청룡사 대웅전의 지그재그로
휘어진 대들보를 연상시키듯 조금씩 휘어져 있었는데, 이 집을 지을 당시 자연미를 최대한으로
살려서 지은듯한, 목수의 자신있는 솜씨가 엿 보이는듯 했다
이 곳은 카페의 주방이 있는 곳인데, 주방 입구도 흙으로 삐딱하게 발라 놓은것이, 웬지 조금은
함부로 행동해도 괜찮겠지...하는 자유로운 마음이 들었고, 또한 마음씨 후덕한 옆집 아저씨네
집에 놀러 온듯한 아주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여우는 말했다" 카페의 이층 테이블이 있는곳인데, 70~80년대의 어느 고향집 다락방에 올라온
듯한 아주 포근한 느낌이 들었으며, 이 곳 주인들이 그렸음직한 작품도 몇개 걸려 있었다
그리고 또 예산 수덕사 수덕여관에 한참을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었던 이응로 화백의 작품인듯한
것도 있었던것 같은데, 그 그림이 이응로 화백의 그림인지는 나도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
카페의 고향집 다락방같은 위층 테이블에는 어떤 손님이 앉아서 호젓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테이블과 벽에 걸어놓은 그림들은 오래된 골통품 같았으며, 또한 구부정한 나무로 아무렇게나
만들어 놓은듯한 창틀의 모습들이, 마치 타임머쉬인을 타고 20~3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듯
한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이층의 카페 구석에 있는 글인데, 이 작품은 전 주인이였던 여류화가의 작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있던 주인이 카페의 바깥벽에 어린왕자와 빼짝 마른 여우를 그려넣고,
카페 이름을 "여우가 말했다"로 붙여 놓았는데, 아마 이 작품이 그때 당시의 작품이지 않을듯 싶다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 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 하지 못할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것인가 알게되겠지 ! 이 말은 여우가 어린 왕자를 기다리면서 한 말인듯 싶은데, 이 글은 여기뿐 아니라 이 카페의
화장실 벽에도 붙어 있는 글이다
사실은 나도 이 곳의 여우처럼 그런적이 있었기에 이 글을 떠올리며 이곳 "여우가 말했다" 라는
카페를 가끔 상상하던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그대가 내일 온다면 나는 오늘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것 같기도 하였고, 안절 부절 못 할수도 있을것 같았다
위층의 다락방같은 카페 테이블에는 어떤 손님이 앉아서 음료를 마시며 고즈넉한 오후시간을
호젓하게 보내고 있었다
서운산 고즈넉한 절집 청룡사
미루나무 소로길을 돌아서면 어느 여류화가 선생이 하던 "여우가 말했다" 라고 하는 카페가 작은 숲속에 자리잡고 있었지 날이 잔뜩 찌푸려 있던 그날 저녁 서운산 "여우는 말했다" 까페의 창밖으로 감당 하지 못할 서늘한 저녁의 고독이 묻어 있었고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은 흐르고 있었던것 같아 젖어 있는 눈 웃음 흐뜨러진 눈 빛 사이로 얼음에 채워진 꿈 들이 혀 끝을 감도는 위스키 처럼 서서히 녹아들고 있을 무렵 어디서 날아 왔는지 똥 파리 한 마리 검은색이였던가
초록색이였던가
검은색이여도 좋고 초록색이여도 좋고
아무래도 좋을 저 유리창밖 개똥 세상을 향해
웨 에에에엥 ~ 기습적으로 유리창을 공격하고 있었어 아무리 맹공격을 퍼 부어도 난공불락의 요새 "여우가 말했다" 카페 유리창은 까딱이 없었지 그때 힘이 다 빠져버린 똥파리는 체념을 한듯 유리창밖 개똥을 향해 손발을 비비며 빌고 있었던가 주여 ! 오늘도 일용할 양식이 있는 저곳까지 저를 무사히 인도 하소서 그때 초록색 똥파리의 모습은 어느 권위 있는 목사님보다 더 성스러워 보였었던것 같았어 그러나 똥파리가 하는 기도소리는 유리창에 부디쳐 다시 되돌아 오고 말았고 바로 그 옆에 밖으로 나갈수 있는 탈출구가 있음에도 쉬지않고 애?은 유리창만 머리로 쥐어 박고 있었지 그때 그대가 똥파리를 보고 한 말이 생각났어 " 비상구가 없다 " 그런데 이제와서 생각을 해 보니 그것이 똥파리에게 한 말이 아니라 그대 자신에게 했었던 말이였던것 같애 천으로 짜여진 짙은 베이지색 소파에 앉아
위스키를 마시며 무심히 창밖을 보고 있을때
유익종의 "이연" 이란 음악이 흐르고 있었던가
창밖에는 지난밤 바람에 살해 당한 꽃잎들이 사상자 처럼 나뒹굴고 있었고
또 바람에 상심한 어떤 꽃은 고개를 떨군체 힘겨웁게 버티고 있었지
멀리 소로길 미루나무 사이에도 가랑비가 내리고 옆 냇가에는 자욱히 물 넘어가는 소리 이 녹슬어 가는 시간 호젓한 저녁 ! 그때 서운산 청룡사
고즈넉한 절집 부근의 카페에는
유익종의 "이연" 이란 음악이 흐르고 있었던가
- 안성 서운산 어느 카페에서의 회상 -
"여우가 말했다" 의 위층 다락방같은 카페 풍경인데 가운데 삐딱한 나무로 짜여진 난간 아래로
내려가면 카페의 아래층이다
위층 다락방같은 카페 창문으로 내다본 바깥 풍경인데, 삐뚤 빼뚤한 창틀앞에 놓여진 작은
꽃병과 빛 바랜듯한 작은 액자들의 모습이, 마치 타임머쉬인을 타고 옛 시골 국민학교의 어느
교실로 돌아 온듯한 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여우가 말했다" 카페의 다락방 같은 위층 풍경인데 창 밖으로는 밤나무와 도토리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고, 고장난 듯한 빛 바랜 쾌종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여우는 말했다" 카페의 위층에서 내려다본 바깥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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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서운산의 가을 .......
가을냄새 풀풀풍겨나는 서운산...
그곳은 어느새 아름다운 가을을 잔뜩 머금고 있었다
문득문득 가슴이 울렁거려지는 가을~~
삶의 의욕을 풍성하게 자극시켜주고
오늘도 행복을 선사해주었다
파란하늘 위에선 빨강물이 뚝뚝 떨어질것만 같아
한참을 올려다 보며 지나치기가 쉽지 않앗고
흩어진 단풍이 정말 아름답고 깨끗했다
가을바람은 산중턱에서 서성이는 내 주위를 기웃거리고
가을 햇살에 투영되어 반짝반짝 빛나는 영롱한 단풍잎과
산속은 오색물감을 스펙트럼처럼 뿌려 놓은 듯하다
단풍과 산색깔이 이쁜 서운산 자락에서 망중한을 즐기고 왔다
2014년10월23일
이곳에서 간단히 행장을 꾸리고는 오늘의 산길을 시작해 봅니다.
도로를 따라 약100여 미터 윗편 느티나무 고목 몇구루 아래에 도로 한가운데에 큰 비석이 보입니다.
청룡사 사적비입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124호구요.
碑文의 내용은 마모가 되었는지 잘 아니보이니까 안내문을 보시면 됩니다.
모두 읽지 마시고 붉은색 줄친 것만 읽으면 됩니다.
청룡사를 가기전에 청룡사와 연관이 있는 남사당패의 우두머리 바우덕이 사당이 있다는 곳을 먼저 찾아보고 오렵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작은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 가면 불당골이 시작됩니다.
우측으로 지나치자 마자 좌측 경사진 둔덕에 둥그스런 모습의 부도가 진열되어있는 곳을 보게 됩니다.
일반 사찰의 부도와는 조금 다르게 부도들의 모습이 옹기가 모여있는 듯한 인상을 나는 받았네요.
이것은 향토유적 제27호라 적혀있습니다
올라가다 보면 좌측 북동쪽 경사둔덕에 사당의 모습이 시야에 잡히게 됩니다.
약300미터정도 오르면 바우덕이 사당에 도착하게 됩니다.
남사당패는 무엇인가 하면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예인집단이라고 합니다.
옛날에 안성군과 평택군 등에서 성행하던 남사당(男寺黨)패의 하나가 청룡사에 근처에 있는
청룡리 불당골에 근거지를 두고 봄부터 가을까지 농사철에는 마을을 떠나 남사당놀이를 연기하며 살다가
겨울이면 이곳 청룡리 불당골에 들어와서 살면서 청룡사에 일거리를 도와주며
먹거리와 잠자리도 얹는 그런 관계였었다고 합니다.
후기에 남사당패가 1920년대부터 남자만이 아닌 여자들도 패거리에 속하게 되었는데 가무(歌舞)와 줄타기 등에
명수였던 남사당패의 유일한 여자 단원 바우덕이가 있었다 하지요.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노역자들의 위안 행사 때 안성의 이 남사당패를 불러 놀이판을 벌였는데 이때 대원군에
발탁되어 이름이 알려지게 되고 결국은 꼭두쇠자리에 여자인 바우덕이가 앉히게 되는 큰 변혁을 이뤘다 합니다.
그래서 청룡사와 남사당패의 바우덕이는 아주 관련이 깊은 인연입니다.
청룡사 넘어오기 전 마을 산평리 쪽에 바우덕이 묘가 있다는 안내판을 조금 전 버스에서 보고 지나왔습니다.
나는 오늘 이곳에서 석남사 방향으로 넘어갈 것이기에 거리가 좀 길어서 바우덕이묘를 살펴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좀 아쉽기도 합니다.
위 해설은 바우덕이 사당에 안내문을 읽어보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간이 급해서 읽어보기가 쉽지않아서 그렇지...
바위덕이 사당 안으로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가 보았습니다.
사당과 오른편에 바위덕이 조각상이 서있습니다.
이제 바우덕이 사당에서 다시 청룡사 사적지 있는 곳으로 원위치를 하여 청룡사쪽으로 거닐어 올라갑니다.
케른이 몇 개 보이구요. 주차장이 개울 좌측으로 자리하고 개울 건너 우측으로 청룡사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청룡사에 들어 서기 전에 일주문격인 사천왕문 앞에서 청룡사의 안내문도 읽어보고요.
전에 준비했었던 자료들도 모두 연관시켜 봅니다.
청량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운산은 안성군의 남쪽20리 지점에 있다고 하고 서쪽 봉우리에 단(壇)이 있고 단 밑에 우물 셋이 있다.
가뭄을 만나서 우물에 빌면 영험이 있다"라고 전합니다.
"청룡사 사적기(숙종46년(1720) 동현거사 나준(羅浚) 지음)"에는 청룡사는 명본대사(明本大師)가 창건하고
1341~1367년에 나옹선사가 크게 중창했다 하며, 이때 나옹선사가 서기(瑞氣) 어린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靑龍)을 보았다 해서 본래 대장암(大藏庵)이었던 절이름을 청룡사, 산 이름을 서운산이라 고쳐 불렀다
라고 전해 옵니다.
(이상 참조문 : 다시쓰는 택리지5, 신정환저에서 발췌)
우선 청룡사의 배치된 안내도를 잘 읽어보았습니다.
어느 사찰엘 가든지 대략적인 윤곽을 파악하는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대웅전 앞과 뒤편 이 외에는 출입이 통제되어 있네요.
좌측으로 청룡당(종무소)를 넘어가지 못하게 되었구요. 우측으로 지붕당쪽으로도 진입이 아니 됩니다.
결국 청룡사는 대웅전과 마주하고 있는 사천왕문과 그 뜰 앞을 살피면 더 보고 싶어도 갈곳이 없었습니다.
사천왕문을 개울 건너편 주차장 쪽에서 바라보고 사천왕문 사이로 대웅전이란 글자가 보이게 한번 찍어 봅니다.
사천왕문에는 서운산청룡사란 현판만 걸려있고 정작 통과하면서 보면 내부에 사천왕상이 없습니다.
대웅전 처마에 그려놓았다고 하는군요.
정갈한 뜰 앞의 정경이 펼쳐집니다.
화려할 듯한 건물 양식인 팔작지붕의 다포계 형식의 건축물이지만 색바랜 흔적에서 느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아주 그윽하고 고풍스런 산사의 느낌이 절로 와 닿습니다.
우선 대웅전은 보물 제824호구요. 규모는 정면3칸 측면4칸의 팔작지붕 형태입니다.
고려말에 중창을 하여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귀중한 자료라지만 조선시대에 다시 축조된 것으로 추측을 한다고 합니다.
우보처 보현보살 본존 석가모니불 좌보처 문수보살
불단을 중심으로 우측에 모셔진 관세음보살상
대웅전 독성탱화 나반존자(那畔尊者)
대웅전 안에 있는 청룡사 동종 (靑龍寺 銅鐘) 보물 제11-4호
안내문을 옮겨봅니다.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
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
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인 용뉴와 소리의 울림을 도와준다는 대나무 모양의 음통에 역동
적인 모습의 용이 새겨져 있다. 또한 종의 어깨와 아래 입구 부분에는 연꽃과 덩굴을 새긴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어깨 띠 아래에는 사각형 모양의 대가 있고 그 사이 사이에는
보살상을 세웠다.
또한, 검은빛이 감도는 큰 종으로서 원래는 1674년에 종루의 종으로 만든 것이다.
현재도 매일 행해지는 예불의식 때마다 종을 치고 있으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종의 모양을 보면 소리를 좌우하는 음통(音筒)이 맨 위에 있고 그 옆에는 용 모양의 종을
거는 고리(용뉴)가 있다. 그 아래에 배가 불록한 포탄 모양의 종이 있다.
종신의 표면을 보면 위쪽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과 파지옥진언(破地獄
眞言)"을 1줄씩 새기고 그 아래 사다리꼴로된 4개의 유곽(乳廓)이 있고 그 사이에는 연꽃
가지를 든 4구의 보살입상과 4개의 위패(位牌)가 한 쌍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같은 구성법은 17세기 전반기에 정통 승장계(僧匠系)장인들이 주로 썼던 방식이다.
이 종은 숙종 대에 활동했던 승장 사인(思印)이 30대 중반에 지준(智俊)ㆍ태행(太行)ㆍ
도겸(道兼)ㆍ담연(淡衍)ㆍ청윤(淸允)과 함께 만든 통일신라 때부터 보이는 전통 계열의
종이다.
현재 남아 있는 조선 후기 종들 가운데서도 우수한 작품으로 17세기 범종의 연구와 승장
들의 사회 및 사원경제구조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뜰 앞에 명본국사가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보입니다. 이것도 문화재자료 59호로 지정되었구요.
고려시대 석탑의 귀중한 연구자료로 가치가 있다고 하는군요
삼층석탑 중앙 좌우로 괘불을 걸어 놓는 돌지주가 서있습니다.
저곳에 이곳에 보물로 지정된 영산회괘불탱(보물1257호)과 청룡사감로탱 (靑龍寺甘露幀)보물1302호을 걸어
예불을 볼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우선 대웅전 내부를 살펴보고 싶은데 양옆으로 문이 열려있습니다.
내부는 촬영금지라고 쓴 안내글자도 있었구요.
훤희 들여다 보이는데 좀 어두운 편이라서 사진이 자꾸 흔들리는군요.
내부의 불상과 밖에서 보면 법당 우측에 있는 안성 청룡사 동종 (安城靑龍寺銅鍾 :보물11-4호)이 보입니다.
그 옆에는 괘불도 한폭이 보이구요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을 말하는데 대웅전 안 좌측에 큰 것이 있는데 이것이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청룡사영산회괘불탱(보물1257호)인가 봅니다.
이제 대웅전 내부는 어느 정도 살펴보았습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찾은 것이 청룡사의 바로 대웅전의 기둥이였습니다.
안내문에서도 읽어 보았듯이 기둥은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을 그대로 세운 것이 미학적인 감각이
배어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앞뒤좌우로 돌아가며 살펴보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측 측면에서 보이는 S라인 휘청임이 어딘가 모르게 정감이 갑니다.
"곧으면 부러진다. 여유롭게 휘영청~," 직설적인 표현이 아닌 잠시 돌아가는 표현으로 구비쳐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되돌아보는 그런 여유로움이 담겨있지 않나요?
이런 양식을 한 것을 나는 작년 가야산지역 금북정맥길을 걸어 하산하다 개심사에서 만나 살펴 본 일이 있습니다.
상왕산 개심사의 범종각 기둥과 개심사 종무소 건물에 가면 이렇게 휘어진 나무로 멋드러진 건축물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아주 신기해 했었는데 이곳 청룡사에는 사찰의 중심부인 대웅전을 아예 이런 형식으로 취한 특별한 곳이였습니다.
아마도 대웅전을 이렇게 구부정한 기둥을 세운 곳은 이곳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둥만 이렇게 자유로움을 만끽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이번엔 고개를 위로 올려 단청 위편의 처마를 받치는 서까래 목재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재료들도 꾸불한 재료들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는군요. 옆으로 가로지르는 평방과 창방도 구불거리고...
가지런한 옆 건축물 지봉당의 단청의 처마밑 서까래와 평방과 창방 등을 대비해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조선시대 증축할 당시에 산림 수목이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사용을 했겠는지 알 수 는 없겠지만서도
그런 추측보다는 분명 서민생활의 중심이였었던 안성고을과 특히 이 지역의 남사당패의 본거지 등등이
자리했었던 이유로 살펴 볼 때 무게있고 정형적인 사찰보다는 지역 주민과 함께 하는 미학적인 요소가
함께 하는 그런 서민풍의 사찰로 만들려는 노력이 있었지 않았었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내 개인적인 사견 이였습니다.
특별히 살펴 볼 것은 대웅전 뜰앞 사천왕문 들어서면 우측에 있는 고목입니다.
층층나무입니다. 참 오래된 시간의 흐름을 간직했을 것 같습니다.
산행을 하면서 층층나무들을 여러 개체를 보았었지만 이렇게 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층층나무는 내가 못 알아 봤었는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본적이 없습니다.
층층나무가 외로워 보였었는가 옆에는 일본목련이 친구하며 건장하게 자라고 있는 모습도 보입니다.
지금 쯤 층층나무도 노랗게 잎이 물들 때가 되었는데 이곳은 아직도 초록잎이 무성합니다.
이제 청룡사의 탐방을 끝내고 청룡사 담벼락을 따라 산길을 거닐어 오릅니다.
담벼락에 가지런히 쌓아 다진 큰 기초석들을 어디에서 옮겨서 절을 지었는지 참 의문도 많이 듭니다.
이곳 지역 서운산에서 그리도 많은 돌더미들을 옮겨왔는지...
서운산을 북향으로 바라다보면서 넓직한 등로는 이어집니다.
이 길은 좌성사까지 승용차가 진입할 수 있는 도로인데 얼마 오르다 보면 일반 승용차는 진입을 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지금 오르는 곳은 서운산 남향지역 이제 단풍이 서서히 물들어가는 그런 상태군요.
골짜기의 숲이 참 아늑해 보입니다.
이른봄에 오면 남향지역이라 새봄을 맞는 들꽃들이 참 많이 식생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침 햇살 살포시 내리 쬐는 들판 풀 섶에 꽃향유가 예쁘게 피어 반기는군요.
포근하고 아늑한 서운산 능선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 닿는 대로 거닐어 오르다 보면
첫 번째 갈림길 이정표식 앞에 도착을 합니다. 청룡사에서 약700미터 거리로 10여분 거닐어 올라왔습니다
이곳에서 우측은 약수터나 운적암으로 해서 정상으로 빠르게 오를 수 있는 등로구요,
좌측은 좌성사라고 하는 사찰을 경유해서 서운산을 빙 둘러 오를 수 있는 승용차가 다닐 수 있는 등로입니다.
이곳에서 나는 좌측 좌성사 방향으로 거닐어 갑니다.
도로 우측으로 잣나무 수림이 무성한 지역도 지나치구요.
산죽이 무성한 숲도 간혹 보이는군요.
승용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라고 해서 일반적인 도로 같은 적막한 등로는 아니구요.
좌우로 수림이 무성하고 한 여름에 거닐어도 우거진 녹음사이로 햇볕을 가릴 수 있는 아늑한 숲길입니다.
가을이 깊어 가는 계절이라 단풍은 아직 이지마는 갈색 내음을 느끼기에는 충분합니다,
간간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는 낙엽을 보고 걸음을 멈추어서 멍한 느낌에 빠져들기도 하는 그런 숲길입니다.
닳고 닳은 콩크리트 바닥길이였다가는 푹신한 흙 길이 되기도 하는 그런 등로였습니다.
이제 두 번째 갈림길과 이정표식이 보이네요.
이곳에서 우측으로 운적암이 500m 거리에 있구요. 샘터가 있는데 물이 졸졸 흘러나옵니다.
물맛도 좋군요.
좌측으로 좌성사 방향의 길입니다.
이곳에서 운적암을 살펴보지 못하고 좌성사 방향으로 틀어 올라가면서 많이 아쉽더군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인데 그냥 지나쳐서...
두 번째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꺽어 약200미터 정도 오르면 또 갈림길이 나옵니다.
이곳에는 엊그제 청계산에서 보았었던 마스코트 모형이 반기는군요.
아마도 경기도 지역은 이 모형으로 새롭게 설치를 하였나 봅니다.
전자키판을 부착한 태양열 집진설비 같은데..
이곳에서 우측길은 바로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였군요.
좌측 좌성사 방향으로 꺽어 진행을 합니다
이제 등로 방향이 서쪽으로 완전히 꺽여서 진행이 됩니다.
오늘 산길이 땀 한방울 아니 흘리고 올라가는 아주 편한 길입니다.
산능성을 하나 넘어가는 작은 고개를 지납니다.
고개마루를 넘으면 양지바른 곳에는 이파리가 껄껄한 쇠서나물이 노랗게 피었구요.
이미 너풀대는 결실을 하얗게 맺은 것도 보이는군요. 이고들빼기도 피어 있었는데
서리를 맞았나 힘이 없어 보이구요.
좌성사에 도착을 했습니다. 09시50분입니다. 도로 아니 등로 끝자락에 평범한 요사채가 있구요.
경사진 암석 위 편에 대웅전이 있네요.
좌성사를 설명한 안내가 없어서 나중에 알아보니 오래되지 않은 약100여 년 정도 밖에 아니 된 암자인데 팔작지붕형입니다.
산국이 노랗게 가을색을 수놓으며 강한 향을 발하는 좌성사의 정경이 색 바랜 모습과 잘 어울립니다.
특이한 것은 좌성사 대웅전의 창호군요. 빗살창문의 창호가 색다르게 느껴지구요.
대웅전이 있는 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번에 그 윗 층으로 삼성각이 보이는데 대웅전보다 더 색 바랜 남루한 고건축물 처럼 보입니다.
뒤편을 돌아가서 단풍이 곱게 물든 모습과 어울린 삼성각을 담아 보구요.
좌성사의 대웅전에 올라 뒤돌아 서니 남향으로 흐르는 금북정맥 길의 조망도 상당히 좋습니다.
이쪽지역의 산길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으나 멀리 군 시설 보이는 곳이 성거산 일겁니다.
남서향으로 평원지역에 보이는 저수지는 천안 입장저수지인 것 같구요.
좁은 지역 좌성사를 살피고는 이번엔 삼성각 뒤편 좌측길로 오릅니다.
여기에서 이정목이 하나 나오는데 우측으로는 정상1.5km 라고 적혔구요. 좌측은 설명이 없습니다.
좌측으로 진행해 봅니다. 산 위 편 지대이지만 축축한 습지지역입니다.
나무에 빨간색 영롱한 빛을 띠고 있는 열매가 보여서 이리 저리 살펴보니까 괴불나무 열매군요.
나는 보리수인줄 알았지요.
서운정이란 팔각정자가 울창한 숲 속에 있었네요.
그 앞에는 서운산성이란 안내판이 있구요.
안내판에는 임진왜란때 홍계남 장군이 축조하고 활약한 내용이 적혀있구요.
향토유적제43호인 북산리석조여래입상이 서있습니다.
이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더 숲길을 진행하면 중간에 토굴 같은 것을 지나칩니다.
아마도 임란때 여러용도로 쓰여졌을 것 같군요. 능선에 도착을 했는데 잡풀이 무성한 헬기장이 나옵니다.
양지바른 곳이니 한바퀴 돌아보니 용담과 산부추가 반겨줍니다.
이제 능선의 끝자락에 도착을 했으니 진행방향을 동향으로 바뀌어 능선을 타고 진행을 합니다.
지금까지는 좌성사를 찾아서 서향으로 길게 돌아왔거든요.
탕흉대를 오르는 능선에는 노송이 참 많이 서식하고 있는 지역이였습니다.
이 노송지역에서 청룡사를 건축할 때 소나무를 공급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탕흉대라는 곳에 올랐습니다. 10시30분입니다.
바위둔덕인데 뭐라 글씨가 적혔는데 마모된 것 같구요. 안내판에서 읽어보니 탕흉대라고 적혀있군요.
한문 글자도 아주 어려운 것으로 쓰는군요.
이곳에서는 북향으로 안성시내 쪽의 조망이 시원스레 펼쳐집니다.
산객들도 안성의 인리 라고 하는 서운중학교 쪽에서 아주 많이들 올라오시고 계시군요.
이제 산길이 북적북적이기 시작합니다
산책로 같은 푹신푹신한 산길을 거닙니다.
서운산이 나지막하면서도 조망도 좋구요. 산길도 남녀노소 힘들이지 않고 거닐 수 있는 곳이였어요.
중간 중간 움직이면서 청룡사쪽으로 빠지는 길목들이 많아서 이정표식들이 많이 보이지마는
중요한 지점을 제외하고는 기록에서 제외합니다.
은적암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에 도착을 합니다.
시각은 10시58분이구요. 위편 봉우리 위에 정자가 있습니다. 조망이 좋습니다
정자에서 내려와 가까운 거리에 넓직한 헬기장이 있습니다.
이곳에 많은 산객들이 휴식겸 중식들을 챙겨 드시고 계십니다. 왁작지껄한 분위기..
이곳에서 남향으로 뻗은 금북정맥의 줄기들이 잘 조망됩니다
서운산 정상은 조금 위편에 있습니다.
봉우리와 암봉이 있는 지역인데 오늘 산객들이 인증샷을 하느라 만원입니다.
정상입석엔 산이름은 아니 적혔구요.
정상입석뒷편으로 돌아가면 암봉이 있는데 그곳에 올라서면 북서향으로 칠현산 쪽 금북정맥 라인이 선명합니다.
비좁은 정상입석 주위에서 내려와 근처에 있는 산불예보설비가 있는 봉우리에 오르니 이곳에
서운산 삼각점이 있군요. 진천21, 1984재설입니다.
서운산 정상에서 북으로 등로를 진행하여 능선을 타고 석남사를 찾아도 되구요.
중간에 계곡에 마애석불을 보려면 우측 동향으로 진행하다가 계곡으로 내려가는 등로를 이용하는 편이 좋습니다.
나는 마애석불을 보려 우측 동향 배티고개로 가는 능선길을 따르다가 정상에서 400미터 지점 이정표를 지나구요.
500미터 지점에 있는 이정표식에서 계곡으로 떨어지는 등로를 선택했습니다.
북적대던 산객들은 이 방향으로 거의 진행치를 않아서 호젓한 산길이 됩니다.
등로를 북향으로 틀어 내리면 한 100여미터는 아주 급한 경사지대를 내려가게 됩니다
로프 줄과 등로 계단이 비교적 잘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급한 경사를 내려오면 너덜지대를 통과하구요. 긴 쉼터의자가 있는 곳에 도착을 합니다.
이곳에서 잠시 간식겸 중식을 하고 가기로 합니다. 이곳에서 의자에 카메라 올려놓고 셀카도 한 장 찰칵...
해발고도가 약300미터쯤 된 것 같은데 이쪽은 북향을 한 경사면이라 그런가 청룡사계곡과는 달리
곱게 단장된 단풍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석남사에서 400미터지점에서 갈라진 등로와 마주치는 등로에 합치하면서 등로는 하산길을 계속 이어지구요.
고개를 이리 저리 돌려가면서 오색의 물결 속에 잠시 흠뻑 젖어 봅니다
12시13분에 마애석불이 우측 경사지역으로 있다는 이정표식을 만나게 됩니다.
대략 50미터쯤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단풍이 곱게 물든 바위벽에 새겨진 모습이 아주 은은한 미소를 띄는 형태입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109호군요.
통일신라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전기의 작품이란 설명입니다
숲에 서어나무의 펼침이 자유분방한 곳이 나타납니다.
이리 저리 휘어지고 뒤틀리고 어울려 섞여 함께 노니는 모습이 아주 유쾌한 유희를 펼치는 듯 합니다.
어디선가 국향이 진하게 날려옵니다. 풀 섶에 노오란 산국의 펼침이 있었군요.
이 산국을 개량해서 국화를 만들었다고 하지요~
산국 한 웅큼을 손으로 부벼대고 내음을 맡아봅니다. 아 진합니다.
어린 학동의 시절이 떠올려 집니다.
<산국>
뜨거웠던 막바지 여름
그 여름을 한껏 부여잡기 위해
소년은 들판을 달렸었다
까맣게 끄을린 얼굴
그리고 목덜미 주름잡힌 곳
젖어 내린 땀에 까만게 절인 때꾹물 자국
한 손엔 움켜 쥔
노란 산국송이
하얀 이 드러내어 해맑게 웃으며
소녀에게 건네주는 끝자락 여름
노오란 산국이
들판에 넘실댈 때면
지천명 이 순간에도 난 달리고 싶다
풋풋한 갈잎 풀 섶에서 피어나는 짙은 鄕愁에 젖어들며...
어느덧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인 석남사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시각은 12시26분이군요. 이곳 주차장에도 만차네요.
석남사는 수원 조계종 용주사의 말사라고 하는군요. 통일신라 문무왕20년(680년) 고승 석선(奭善)이 세웠고
고려때 혜거국사가 중창했었으나 임란때 소실되어 후에 화덕(華德)이 중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대웅전과 영산전, 요사채와 마애불등의 탑의 유적이 있습니다
감나무 고목 뒤편으로 일주문격인 석남사 금광루를 먼저 만나게 됩니다.
맞배지붕의 건축물이구요. 들어가서 뒤돌아 금광루라고 힘차게 써흘린 현판을 보게 됩니다.
금광루에 들어서니 노란 국화가 계단을 따라 층층 전시되어 있구요.
위 편 우측에 영산전과 석탑이 양옆에 보입니다. 멀리 위 편으로 대웅전이 자리하는군요
위편에 보물 제823호인 영산전을 살펴 봅니다.
팔작지붕의 형태를 알아보기 위해 아랫편에 서 지붕만을 담아 보구요.
내카메라는 광각이 아니라 가까이에서는 전경이 들어가지 않아서요....
윗편에서 전경도 담아 봅니다.
안내문을 읽어보면 기둥은 민흘림기둥(기둥뿌리가 굵고 위로올라가면서 굵기가 좁아드는 그런형태)을 세웠고
내부는 닫집(법당불좌위에 붙인 집의 모형)을 매달아 장엄하게 꾸몄다라고 적혔는데 기둥에서는 잘 느끼질 못하겠구요.
법당 내부에는 닫집이 있는 것을 확인하여 사진에 담아 봤습니다
영산전 앞에는 좌우로 석남사 석탑이 있습니다. 이것도 향토유적 제19호구요.
고려시대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고 탑의 높이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 위 편 대웅전으로 올라가 봅니다.
이 대웅전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108호로 되어있구요.
맞배지붕 정면3칸 측면3칸의 웅장한 건물입니다.
이곳도 내부에 2층 구조로 되어있는 닫집이 있습니다.
이제 석남사 사찰에서 내려옵니다.
떠나기전에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와 절의 한 켠에 비켜서 있는 아담한 규모의 절집을 다시 한번 카메라에 담습니다.
해우소지요~
석남사에서 325번 지방도로가 있는 상중리 버스종점까지는 좁은 콘크리트 길입니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기웃기웃 거리면서 거닐어 갑니다.
지나치는 차량이 있으면 한 켠으로 붙어서서 잠시 멈추구요.
가을 속으로 빠져드는 식생들의 모습이 여기저기에서 눈에 잡힙니다.
복자기가 빨갛게 불타 오르고 있습니다. 아주 뜨겁게...
신나무도 물들어 가고 있었구요.
이제 325번 지방도로가 보입니다. 시각은 13시10분입니다. 입구에 석남사가 1.2km거리에 있다는 큰 입석이 서있구요.
이곳에서 산행일정을 마감합니다.
이곳에서 좌측 안성 쪽 도로를 따라 약5분 정도 거닐어 가면 금광휴게소란 매점이 좌측에 있고
커다란 느티나무고목아래 공터가 있습니다.
이곳이 석남사까지 안성에서 들어오는 버스의 종점입니다.
오늘 안성에 있는 서운산을 청룡사와 석남사 탐방을 겸하여 거닐어 보았습니다.
산은 나지막한 노년의 산이였었지만 역시 금북정맥의 초입에 있는 산답게 기품이 있었습니다.
이 정맥길 이후로 천안의 광덕산, 서산 덕산의 덕숭산, 가야산 모두 모산격인 이곳 서운산 줄기가 뻗어 내린 것이거든요.
더불어 문화재급의 보물들을 소장한 청룡사와 석남사란 고풍스럽고 아담한 절을 품고 있어서 지루하지 않은
산길을 거닐 수 있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바우덕이 사당은 보았는데 정작 바우덕이 묘는 좀 거리가 있어서 못보고 가는점이 남습니다.
이른 봄에 어떤 종류의 들꽃들이 살아가는지 편한 산책길 삼아 가보지 못한 은적암도 살펴보고 거닐어 볼까 합니다.
오늘 여기서 안성 서운산에서의 산행기록을 접습니다.
감사합니다
-청랑 / aspiresky-
<서운산 가는길에 단풍이 곱게 들었더구만!!>
서운산(해발 547m)이라고 불리는 이 산은 산세가 부드럽고 그다지 높지 않아
가족동반 산행지로 적당하다.
<등산코스가 단풍 귀경 코스다.>
서운산은 그림 같은 호수(저수지)에 조용한 산사와 문화재도 많이 있어 풍성한 기행을 즐길 수 있다.
산길은 그다 지 가파르지 않으며 정상에서는 드넓은 안성 들판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서운산 일원에는 석남사, 청룡사, 좌성사라는 사찰이 있다.
산간저수지로는 남쪽 청룡저수지와 북쪽의 마둔저수지가 대표적인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운산의 전경도 좋다.
서운산성은 좌성사 바로 위쪽에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이 고장에서 의병을 일으킨 홍계남 장군이 이 산성에 주둔하여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원래 토성(土城)이라 산성의 형태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서운산 북쪽의 석남사는 조그마한 사찰이지만 절 입구에서
대웅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08호)까지 오르는 돌계단의 경관이 볼 만 하다.
<뒷편에 쪼매 높은산이 선운산 이다.>
석남사 왼편 산길을 500m 쯤 올라가다 보면
5m 높이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09호)이 있는데,
흡사 무엇인가로 인해 괴로워하는 인간의 말없는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정상을 향해 올라가다 보니 단풍에 넋이빠져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서운산 정상이다...>
“오매, 선운산 선운사 붉은 단풍 끝내 줘 불 드랑께롱”
< 단풍과 물 >
06. 꿈을 깨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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